↑ 1986년 당시 신문 기사 제목들
‘단군 이래 최대 호황’ 소리 들어
1985년 9월 G5(선진 5개국)가 합의한 이른바 ‘플라자 합의’의 당초 목적은 급증하는 미국의 경상수지 적자를 개선하는 데 있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도 예상치 않은 영향을 미쳐 한국은 미국 못지않은 최대 수혜국이 되었다. 플라자 합의는 달러, 국제금리, 유가를 동시에 떨어뜨리는 ‘3저 시대’를 낳았고 그 덕에 한국은 국제무역수지에서 대한민국 수립 이래 첫 흑자를 기록했다.
플라자 합의에 따라 1985년 달러당 240엔 대였던 환율은 1986년 160엔, 1987년 121엔으로 곤두박질쳤다. 미국의 프라임레이트(우량기업우대금리)는 1985년 9.5%에서 1986년 7.5%까지 인하되었다. 세계경제 침체로 인한 석유 수요 감소로 1985년 말 배럴당 28달러이던 유가는 1986년 배럴당 13.8달러로 급락했다.
원유가 하락, 국제금리 인하, 달러화 약세(엔화 강세)가 몰고 온 ‘3저 현상’은 외채 망국론에 시달리고 석유를 전량 수입해온 우리 경제에 엄청난 행운을 불러왔다. 3저 현상 덕에 우리나라는 1986년 한 해 동안 국제수지에서 총 46억 5000만 달러의 흑자를 기록했다. 세부적으로는 무역수지에서 42억 5000만 달러, 해외교포 송금증가로 인한 이전수지에서 10억 3000만 달러의 흑자를 기록했다. 반면 무역외수지에서는 6억 3000만 달러의 적자를 기록했다.
흑자의 원인과 액수를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국제유가 하락으로 인한 원유 수입 부담이 20억 5000만 달러 감소하고, 국제저금리에 의한 외채이자 부담이 4억 3000만 달러 경감되었으며, 엔화 강세에 따른 수출 호조로 30억 6000만 달러의 국제경쟁력 향상 효과를 보았다. 흑자 덕에 총외채 규모도 1985년 말 468억 달러에서 1986년 말에는 445억 달러로 줄어들었다.
국제무역수지가 아닌 단순한 국제수지 흑자는 과거에도 있었다. 1960년대의 월남 특수와 1970년대의 중동 지역 건설 호황 등으로 흑자를 기록했다. 그러나 당시의 흑자는 해외 근로자들의 송금 증가로 무역외수지가 일시적으로 흑자 상태를 보인 것일 뿐 순수 무역수지가 아니었다. 따라서 국제무역수지에서 대규모의 흑자를 기록한 1986년은 대한민국 역사의 주요 분기점으로 기록될 만한 특별한 해였다.
1986년은 대한민국 역사의 주요 분기점
국제수지 개선 내용이 비교적 충실했다는 점에서도 흑자 기조 정착에 청신호로 받아들여졌다. 수출이 크게 호조를 보인 것은 엔화 강세 덕에 우리 상품의 수출 경쟁력이 전반적으로 강화된 결과지만 자동차, VTR 등과 같은 신종 수출 유망 품목이 많이 개발된 것도 수출 증가에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3저 호황’은 수출이 늘어날수록 대일무역 역조 현상을 더욱 심화하는 기형적 수출구조를 드러내 우리 산업의 구조적인 취약점을 노출했다. 대미 무역 흑자 폭이 커진 것도 장차 역풍을 부르는 빌미가 되었다.
흑자시대는 4년 간 계속되었다. 1986년 흑자 원년에 이어 97억 8000만 달러(1987년), 142억 7000만 달러(1988년), 51억 300만 달러(1989년) 등 4년 동안 총 340억 달러의 흑자를 기록했다. 흑자 덕에 1985년 5.1%이던 GNP 성장률은 12.5%(1986), 12.2%(1987), 12.4%(1988)로 높아졌고, 1985년 2032달러이던 1인당 국민소득은 2296달러(1986), 2813달러(1987), 4127달러(1988), 4968달러(1989)로 급증, ‘단군 이래 최대 호황’ 소리를 들었다. 주식시장도 호황 국면에 진입, 주가상승률이 68.9%(1986), 95.6%(1987)로 치솟았다. 주식 거래량도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종합주가지수는 1989년 3월 31일 사상 첫 1000 포인트를 돌파했다.
그러나 산이 높으면 골이 깊은 법. 정부가 사상 처음 겪는 흑자시대를 제대로 대처하지 못해 부동산과 물가 폭등을 야기했다. 부동산은 1987~1989년 3년 동안 전국 평균 2배나 올랐고 1990년에는 전셋값 폭등으로 수많은 서민이 자살로 내몰렸다. 물가까지 폭등해 서민경제에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흑자시대는 1989년에 끝이 나고 1990년부터 다시 적자시대로 돌아섰다. 그 후 3저 호황이 누구 덕이냐를 두고 한때 논쟁이 있었다. 1988년 2월까지 정권을 담당한 전두환 정부 측은 자신의 공이라고 주장한 반면 박정희 정권 측은 호황의 결과가 박정희 시대 때 뿌린 씨를 거둬들인 것이라며 자신들의 역할을 강조했다.
그것이 누구의 공이든 흑자시대가 우리에게 선물한 정말 중요한 것은 “우리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 회복이었다. 더불어 1970년대부터 1980년대 중반까지 우리 경제를 진단하는 데 중요한 틀로 작용했던 ‘외채 망국론’도 소리 소문 없이 사라졌다. 하지만 외채는 결국 우리 경제의 발목을 잡아 몇 년 후 1997년의 IMF 체제를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