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4시간’ 숙명으로 알고 살아
1981년 말까지 매일밤 자정만 되면 통행금지를 알리는 사이렌이 전국에서 동시에 울렸다. 그러면 거리는 이튿날 새벽 4시까지 쥐죽은 듯 조용해졌다. 사이렌이 울리기 전, 시내 곳곳은 마지막 시내버스와 택시를 타려는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뤘다. 그런데도 사이렌이 울릴 즈음 사람들은 놀랍게도 집 안에 들어가 있었다. 짧은 시간에 그 많은 사람이 거리에서 감쪽같이 사라진다는 게 신기할 정도였다.
사이렌 소리와 함께 큰길에 바리케이드가 세워지면 미처 집에 도착하지 못한 취객들은 뒷골목으로 숨어다녀야 했다. 경찰과 방범대원은 심야의 적막을 깨는 호루라기를 불며 그들의 뒤를 쫓아다녔다. 재수없게 붙잡히면 경찰서 유치장에 갇혔다가 새벽 4시가 되어야 풀려났다. 술집에서 자정을 만나면 통행금지가 풀릴 때까지 술을 마셔야 했다. 통행금지가 일시적으로 해제되는 크리스마스와 그해의 마지막 날은 밤새껏 먹고 마시고 즐기는 해방의 날이 되었다.
야간 통금은 조선시대에도 있었다. 당시 한성에서는 밤 10시에 28번 울리는 ‘인경 소리’에 맞춰 4대문과 4소문을 닫고 새벽 4시에 울리는 33번의 ‘파루 소리’에 문을 열었다. 1895년 인경・파루 제도가 폐지되면서 우리 곁을 떠났던 야간 통금제도가 되살아난 것은 해방 후 미군이 이 땅에 발을 들여놓으면서였다. 1945년 9월 7일 ‘해방된 한국인의 인권과 권리를 보호하고 질서 유지를 위해’ 공포된 맥아더의 군정포고 제1호에 의거해 이튿날인 9월 8일 미군정 사령관 하지 중장이 야간 통행금지를 선포한 것이 시작이었다.
미군정이 처음 야간 통행금지를 지정한 곳은 서울과 인천 두 지역뿐이었다. 시간은 밤 8시부터 아침 5시까지였다. 하지만 통금시간은 시국 상황에 따라 자주 변경되었고 통금 지역은 수시로 폭동이 일어난 지역으로 확대되었다.
크리스마스와 제야는 밤새껏 먹고 마시고 즐기는 해방의 날
서울과 인천에만 적용되던 야간 통금이 전국으로 확대된 것은 6․25 전쟁 발발 후인 1950년 7월 8일이었다. 전쟁으로 법을 제정할 겨를이 없어 사법적 근거 없이 강제되던 야간 통금이 비로소 법제화된 것은 전쟁이 끝난 후였다. 법적인 근거는 1954년 4월 1일 제정되고 4월 21일 시행된 ‘경범죄 처벌법’ 제1조 43항이었다. ‘전시, 천재, 지변 또는 기타 사회에 위험이 발생할 우려가 있는 때 내무부 장관이 정하는 야간 통행제한에 위반한 자를 구류 또는 과료로 처벌한다’(43항)는 조항이었다.
그런데 ‘경범죄 처벌법’ 제4조에는 ‘본법의 적용에 있어서는 국민의 권리를 부당하게 침해하지 아니하도록 유의하여야 하며 본래의 목적을 일탈하여 다른 목적을 위하여 본 법을 남용하여서는 아니된다’고 규정되어 있어 해석에 따라 1조 43항과 충돌할 소지가 있었다. 더구나 헌법에는 ‘신체의 자유’가 보장되어 있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매일 밤 4시간 동안 가정에 갇혀 지내는 것을 숙명으로 알고 살았다.
야간 통행금지는 전 세계 국가 중 우리나라에만 존재해온 20세기 우리 정치의 폭정사였다. 그런데도 국민은 기꺼이 인내했다. 분명 초헌법적이고 강압적인 조치였으나 6․25 전쟁을 경험하고 휴전선을 지척에 둔 준전시상태 국가라는 현실을 감안해 통금의 불편도 따지지 않은 채 암묵적으로 양해해준 것이다.
물론 야간 통금 해제를 주장하는 목소리가 없지는 않았다. 이들은 전시나 천재 등 비상시에 예외적으로 시행되어야 할 통금이 평상시에 일상적으로 실시되고 있다며 통금 해제를 주장했다. 더불어 국민기본권 제한의 불가결정의 차원을 넘어 행복추구권, 행동자유권을 박탈하는 헌법 위배사항이라고 주장했다.
반면 일부 학자들은 야간 통금이 합법이라고 주장했다. 야간에 통행할 권리가 설사 있다고 하더라도 국가안전보장이나 질서 유지, 공공복리를 위한 법률상의 제한이기 때문에 합헌이라는 것이다. 이런 찬반 논란에도 야간 통금은 조직적인 반대 없이 유지되었다.
37년 동안 길들여진 ‘통제’와 작별
야간 통금은 1960년대 들어 부분적으로 해제되었다. 제주도는 1964년 1월 18일, 울릉도는 1964년 2월 20일, 해안이 없는 충북은 1965년 3월 1일, 경주․온양․유성 등 관광지와 모든 도서 지방(경기도·충남지역 도서 제외)은 1966년 5월 5일에 해제되었다. 반대로 야간 통금이 강화된 때도 있었다. 5・16 군사쿠데타(1961년), 10월 유신(1972년), 부마사태(1979년), 10・26 사태(1979년), 광주민주화운동(1980년) 때는 일시적으로 통금시간이 밤 12시에서 10시로 앞당겨졌다.
‘잃어버린 4시간’이 마침내 국민의 품으로 돌아온 것은 1982년 1월 5일 자정이었다. 오랜 세월 길들여진 통금으로부터 벗어나는 과정은 의외로 간단했다. 88서울올림픽 유치를 계기로 수십만 명의 관광객이 몰려들 것에 대비해 국회가 1981년 12월 15일 ‘야간통행금지 해제에 관한 건의안’을 만장일치로 통과시키고 1982년 1월 5일 전두환 대통령이 참석한 국무회의에서 그날 밤 12시부로 통금을 해제하기로 의결한 것이다. 그것은 37년 동안 일상 속에서 길들여진 ‘통제’와 작별하는 순간이었고, 또 다른 ‘절제’가 요구되는 시작이기도 했다.
비정상적으로 정권을 장악한 5공화국의 선심성 정책이라는 비판이 없지는 않았지만 이유가 무엇이든 오랫동안 염원해오고 새로운 개방문화가 열렸다는 점에서 야간 통행금지는 발전이었고 진보였다.
다만 전국 52개군의 292개 읍면 지역 등 전방의 접적(接敵) 지역과 해안지역만은 안보치안상의 특수여건을 고려해 바로 해제하지는 않았다. 그러다가 1982년 3월 설악산국립공원 등 35개 읍면의 야간 통행금지를 추가로 해제하고 올림픽이 열린 1988년 1월 1일부터는 전방의 민통선 이북과 백령도․연평도 등 접적 지역에 있는 13개 도서를 제외한 전 지역의 야간 통금을 해제함으로써 사실상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