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수성의 혁명”이라는 격찬과 함께 “문학사의 한 장을 열었다”는 호평 들어
김승옥(1941~ )에 대한 문단의 평은 실로 현란하다. “한국 문학사에 한 획을 그은 소설가”라는 수식어는 차라리 진부할 정도다. “독일 문학사를 ‘괴테 이전’과 ‘괴테 이후’로 나누는 시각이 허용된다면 한국 문학은 감히 ‘김승옥 이전’과 ‘김승옥 이후’로 나눠도 될 만큼 그의 출현은 향후 문학에 중대한 지각변동을 가져온 일종의 문화사적 사건”, 혹은 “1960년대의 문학은 실로 그를 출발점으로 하여 시작되었다” 등의 찬사를 들은 작가가 과연 우리 문학사에서 얼마나 될까?
심지어 김승옥의 한 선배는 “너 하나의 탄생을 위해 전후 문학은 10여 년을 기다려야 했다”는 극찬을 아끼지 않았고, 소설가 최하림은 “햇빛이 번쩍이는 것 같은 김승옥의 글을 읽고 처음으로 나는 글을 못 쓰는 사람이라고 느꼈다”고 고백했으며, 평론가 정과리는 “대학 시절 김승옥의 소설을 읽고 받은 감동이 나의 문학적 원체험을 이룬다”고 평했다.
김승옥은 일본 오사카에서 태어나 해방 직전 부모를 따라 귀국, 부친의 고향인 전남 순천에 정착했다. 그곳에서 그는 아버지와 여동생을 잃었고 그 충격으로 생에 대해 짙은 허무감을 느꼈다. 순천고를 졸업하고 1960년 서울대 불문학과에 입학할 때만 해도 김승옥은 소설가가 될 생각이 없었다. 그렇다고 장래에 무엇을 하겠다는 목표의식이 뚜렷했던 것도 아니다.
1학년 때 김승옥이 학비벌이의 일환으로 선택한 것은 엉뚱하게도 만화가였다. 1960년 9월 1일부터 신생지 ‘서울경제신문’에 ‘파고다 영감’이라는 제목의 네 칸짜리 시사만화를 그렸다. 1961년 2월 14일까지 모두 134회에 걸쳐 본명 대신 순천 고향집 번지수에서 따온 ‘김이구’라는 필명으로 만화를 그렸다.
고향 골방에 처박혀 본격적으로 소설 써
문단 데뷔는 그야말로 신문에 독자 투고하는 마음으로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응모한 단편소설 ‘생명연습’이 1962년 1월 당선작으로 발표되면서 이뤄졌다. ‘생명연습’은 참신한 감성적 언어로 많은 독자와 비평가들로부터 유례없는 찬사를 받았다. 1962년의 대학 3학년은 동인지 ‘산문시대’와 함께 지나갔다. ‘산문시대’는 같은 과 동기생인 김현, 김치수 등과 함께 1962년 6월 창간호를 내고 1964년 9월 5호를 마지막으로 사라졌다.
4학년이던 1963년, 김승옥은 결혼까지 약속한 여자에게 차이고 이 배신을 계기로 그 동안 내면에서 숨을 죽이고 있던 고독, 불안, 초조감 등 휴화산들이 일거에 폭발했다. 학점 미달로 졸업을 하지 못하게 되자 고향 순천으로 내려가 골방에 처박혔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소설을 썼다. 그래서 나온 작품들이 1964년 연이어 발표된 ‘야행’, ‘역사’, ‘차나 한잔’, ‘무진기행’ 등이다.
특히 1964년 10월호 ‘사상계’에 발표된 ‘무진기행’은 “감수성의 혁명”이라는 격찬과 함께 “문학사의 한 장을 열었다”는 폭죽 같은 호평을 들었다. 작가 신경숙에게 ‘무진기행’은 노트에 한자 한자 옮길 만큼 눈부시고 아름다운 한편의 시였다.
1965년 봄 대학을 졸업한 김승옥은 잡지 ‘대화’에서 편집을 하고 신아일보에서 기자노릇을 하기도 했지만 어디서도 반 년을 넘기지 못했다. 대신 그가 쏟아낸 것은 소설이었다. 1965년 동인문학상을 안겨준 ‘서울, 1964년 겨울’을 비롯해 ‘건’, ‘들놀이’, ‘시골처녀’ 등이 1965년 발표되었다.
‘생명연습’에서 ‘무진기행’을 거쳐 ‘서울, 1964년 겨울’과 ‘야행’으로 이어지는 그의 일련의 단편소설들은 전후 문학의 음울한 분위기와 허무의식을 일시에 떨쳐버리고 내용과 형식 양면에 걸쳐 우리 문학에 새로운 바람을 몰고 왔다는 평을 들었다. 한국 문학의 미래를 짊어질 기수로도 화려한 각광을 받았다.
암울했던 유신기가 더욱 자기 유폐의 늪으로 몰아넣어
김승옥은 1966년부터 창작보다는 문학 외적인 것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1966년 그가 각색하고 유현목이 감독한 ‘무진기행’이 영화 ‘안개’로 만들어져 크게 히트하자 1967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영화 ‘감자’를 각색․감독하는 모험을 감행한 것이다. 그러나 영화는 별 재미를 보지 못했다. 그 무렵 김승옥은 장편 ‘내가 훔친 여름'(1967년)과 중편 ‘1960년대식'(1968년)을 발표하긴 했으나 어느 틈엔지 문학에의 열정이 식어가고 있었다.
1971년부터 ‘샘터’지 편집장과 주간을 하다가 4년 만에 그만둔 뒤에는 시나리오를 썼다. ‘장군의 수염’, ‘어제 내린 비’, ‘야행’, ‘영자의 전성시대’, ‘도시로 간 처녀’, ‘겨울여자’ 등이 그의 생계를 도왔던 영화들이다. 소설도 두 편을 썼다. 일요신문에 연재했던 에로소설 ‘강변부인’과, 그의 재능을 아까워하던 이어령이 거의 반강제로 글을 쓰게 한 ‘서울의 달빛 0장’이 그것이었는데 ‘서울의 달빛 0장’은 1977년 제1회 이상문학상을 안겨주었다.
이런 활동에도 불구하고 그 무렵의 김승옥에게 소설은 고통이었다. 암울했던 유신기도 그를 더욱 자기 유폐의 늪으로 몰아넣었다. 회의와 허무가 밀어닥쳤고 알코올과 공상병이 그를 중독자, 폐인으로 만들어갔다. 자살도 시도했다. 이런 그에게 새로운 삶의 의욕을 불어넣어준 것은 1980년 봄부터 쓰기 시작한 신문 연재소설이었다.
김승옥은 박정희와 김지하를 통해 1970년대를 상징화하는 소설을 구상했다. 1970년대 내내 온몸으로 저항하며 감옥을 들락거리던 동갑내기 친구인 김지하에게 그는 늘 ‘마음의 빚’을 지고 있었다. 당초 ’70년대식’이었던 제목이 ‘먼지의 방’으로 바뀌어 동아일보에서 연재를 시작한 것은 1980년 6월 2일이었다. 그러나 신군부의 검열과 삭제의 태풍을 감당할 수 없었다. 결국 6월 19일 14회를 마지막으로 팬대를 꺾어버려 연재는 중단되었다.
절필 선언 후 그는 무진의 안개 속에 잠긴 듯 말이 없었다. 술을 벗으로 삼고 있던 1981년 4월 27일 새벽, 그는 잠자리에서 하나님의 손을 느꼈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 그것은 자살을 두 차례나 기도하던 알코올 중독자요 폐인으로 낙인찍힌 김승옥의 재생이요 신앙인으로의 부활이었다. 그런데도 그의 침묵과 절필과 자기은폐는 여전히 계속 되고 있고, 후배 소설가들과 문학청년들은 그의 주옥 같은 단편소설로 갈증을 달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