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역 창고에서 ‘사전 원고’ 발견되어 사전 편찬 시동 걸어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1942년 10월부터 수감 중이던 이극로, 최현배, 이희승, 정인승이 해방과 함께 풀려나 조선어학회의 재건 문제를 논의했다. 무엇보다 당장 급한 일은 감옥에 있을 때 사라진 ‘사전 원고’의 행방을 찾는 일이었다. 사전 원고란 조선어연구회와 조선어사전편찬회가 우리말 사전을 펴내기 위해 1929년부터 작업해온 2만 6,500여 장 분량의 원고로, 사전 발간을 앞두고 터진 1942년 10월의 조선어학회 사건 때 일본 경찰에 압수되어 행방을 알 수 없었다. 따라서 원고를 찾지 못하면 13년 동안 기울여온 모든 노력도 물거품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정말 다행하게도 1945년 9월 8일 서울역의 조선통운 창고에서 사전 원고가 발견됨으로써 사전 편찬을 위한 작업에 다시 시동을 걸 수 있었다. 그러나 원고를 찾았다고 바로 출판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3년 전 거의 완성 단계에 이른 원고였지만 그동안 세상이 바뀐 만큼 맞춤법도 개정하고 수록 어휘와 뜻풀이도 전면적으로 손질해야 했다. 사실상 새 사전을 만드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사전 편찬의 종합 책임은 1929년 조선어사전편찬회를 결성할 때 주도적인 역할을 한 이극로에게 맡겨졌다.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2년의 실형을 살고 나온 정태진, 역시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옥사한 이윤재의 사위 김병제는 실무를 맡아 분주하게 움직였다.
첫 난관은 종이 부족이었다. 당시는 종이 배급제를 실시할 때여서 상업성이 거의 없는 조선어사전을 출판하겠다는 출판사가 나타나지 않는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매사에 물불을 가리지 않는다’고 해 별명이 ‘물불’이던 이극로가 답답한 심사를 달래기 위해 찾아간 곳은 을유문화사 정진숙 사장이었다. 이극로가 원고 뭉치로 정진숙의 책상을 두드리며 “일본놈들한테 찾아가서 사정해야 옳단 말이냐?”라며 울분을 터뜨리자 정진숙은 1권만이라도 낼 요량으로 출판에 응했다. 이렇게 해서 1947년 10월 9일 ‘조선어학회 지은 조선말 큰사전’ 제1권(ㄱ~깊)이 출판되었다.
하지만 당장 급한 것은 학생과 일반인을 위한 소사전이었다. 김병제는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옥사한 장인 이윤재가 미처 완성하지 못한 사전 원고를 재정리해 1948년 4월 ‘표준 조선말 사전’을 발간했다. 이 사전은 ‘큰사전’이 완성되기 전까지 실질적인 규범 역할을 했다. 1957년 10월 전 6권의 큰사전이 완간될 때까지 우리나라의 표준적인 언어생활이 어느 정도 가능했던 것도 순전히 이 사전 덕분이었다.
그럭저럭 ‘조선말 큰사전’ 1권이 출판되기는 했지만 2권, 3권을 출판하기에는 여전히 종이가 부족했다. 다행히 1948년 12월, 록펠러 재단이 6권의 사전을 2만 권씩 출판할 수 있는 4만 5,000달러 상당의 종이와 잉크를 배편으로 보낸 덕에 2권(1949.5.5)과 3권(1950.6.1)을 연이어 출판할 수 있었다. 조선어학회가 1949년 9월 한글학회로 이름을 바꾸었기 때문에 3권부터는 ‘조선어학회 지은 조선말 큰사전’에서 ‘한글학회 지은 큰사전’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광복 12년만에 진정한 ‘문화의 광복’ 이뤄내
6․25 후 중단된 4권 발간을 서둘렀으나 이번에는 정부의 방해가 출판을 가로막았다. 1953년 이승만 대통령이 당시의 철자법을 폐지하는 것을 골자로 한 한글간소화 담화를 발표했기 때문이다. 이는 ‘큰사전’에 적용된 형태 중심의 ‘한글맞춤법 통일안’(1933년 제정)을 버리고 소리 나는 대로 적는 표음주의 표기법을 채택하라는 것인데 이것은 큰사전 1~3권의 맞춤법 원칙과 배치될 뿐만 아니라 1930년대 조선어학회가 치열한 논쟁 끝에 확정한 한글 맞춤법의 전면적 손질을 의미했다.
한글단체는 물론 교육계와 문화계까지 나서 거세게 반발했으나 이승만은 1954년 3월 “3개월 이내에 현행 한글 맞춤법을 버리고 구한말 성경 맞춤법으로 돌아가라”는 특별담화를 발표했다. 7월에도 정부가 ‘한글 간소화 방안’을 발표하며 뜻을 굽히지 않아 사전 편찬은 사실상 중단되었다.
발음 위주가 아닌 형태 중심의 한글맞춤법으로는 한글을 정확하게 쓰기가 불편하고 어렵다는 점에서 이승만 대통령의 주장에도 일리가 없지는 않았으나 전체적으로는 많은 문제를 안고 있었다. 따라서 한글학회를 비롯 문화·교육계 전반이 ‘한글간소화’ 발표에 조직적으로 저항했다. 이 대통령은 1955년 9월에야 자신의 뜻을 굽혔다.
사전 출간은 록펠러 재단의 도움을 받아 계속되었다. 1957년 4권, 5권에 이어 10월 9일 마지막 6권을 출판함으로써 광복 12년 만에 진정한 ‘문화의 광복’을 이뤄낼 수 있었다. ‘큰사전’은 1942년에 출간하려다 좌절한 조선어학회의 사전 원고를 바탕으로 출판하긴 했지만 완간 후의 모습은 질적․양적으로 많은 차이가 있었다. 맞춤법의 세부 내용이 바뀌었을 뿐만 아니라 많은 어휘들이 추가되어 수록된 어휘만 16만 4,125개나 되었다.
‘큰사전’ 이후 대대적으로 어휘를 수집해 발간한 것이 이희승의 ‘국어대사전’이다. 1962년 23만여 개의 어휘를 수록한 초판, 1982년 42만여 개의 어휘가 수록된 증보판은 국어사전이면서도 백과사전이나 각종 전문사전의 역할까지 했다. 그러나 새 말의 수용이나 전문어가 확대된 측면도 있었지만 어휘 증가분 중 상당부분이 외래어나 한자어라는 점에서는 비판을 받았다.
1975년 신기철․신용철 형제가 편찬한 ‘새 우리말 큰사전’이 나오고 1992년 ‘우리말 큰사전’이 출간되었으며 1999년엔 가장 방대한 규모인 국립국어연구원의 ‘표준국어대사전’이 발간되었다. ‘표준국어대사전’은 국가기관이 만든 최초의 사전이라는 점에서 남한의 사전 출판계에 많은 변화를 가져왔으나 다른 사전의 출판을 가로막았다는 비판도 받았다.
☞북한 ‘조선말 대사전’
오랜 분단에도 불구하고 남북 간 언어의 이질성이 크지 않은 것은 왜일까? 이는 일제 하에서 한글맞춤법 통일안을 함께 연구하고 해방 후에도 ‘큰사전’ 1권을 발간하는 데 함께 힘을 모았던 주요 한글학자들이 북한의 국어사전을 편찬하는 데 핵심 역할을 담당했기 때문이다.
한글학자들의 북행길은 주로 해방공간 때 이뤄졌다. 1929년 10월 조선어사전편찬회를 발족시키고 1947년 10월 ‘큰사전’ 제1권을 출판하는 데 중추 역할을 한 이극로는 1948년 4월 김구가 남북연석회의에 참석할 때 함께 북으로 갔다가 돌아오지 않았다. 그는 북한 정부의 첫 내각 무임소장관으로 조선어문연구회 책임을 맡아 북한의 국어학 연구와 언어정책의 초석을 닦았다.
주시경과 함께 최초의 한글사전 ‘말모이’를 준비했던 김두봉은 3·1 운동 후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북한 정권 수립 후 내각 부수상을 역임하며 북한 언어정책의 뼈대를 세우고 틀을 잡았다. 조선어학회 1세대 중 대표적인 월북 인사는 이만규와 정열모였다. 이만규는 의사 출신으로 교사 생활을 하면서 조선어학회에 가입하고 조선어사전편찬회 위원으로 활동했다. 정열모는 주시경의 가르침을 받은 문법학자로 일본 와세다대에서 언어 이론을 체계적으로 습득하고 이를 기반으로 자신의 독자적인 문법체계를 수립했다. 김일성대 교수와 사회과학원 언어학연구원 등으로 활동하면서 북한 국어학의 기초를 닦았다.
이윤재의 사위 김병제는 ‘큰사전’ 1권을 발간한 후 월북해 북한 조선어문연구회의 사전 편찬사업에 참여했다. 그의 책임 하에 1960~1962년 전 6권으로 완간된 것이 ‘조선말 대사전’이다. 북한은 한글학회의 ‘큰사전’이 완간된 1957년 편찬사업을 시작해 1960년 1권, 1961년 2·3권을 발간하고 1962년에 4~6권을 한꺼번에 냈다. ‘조선말 대사전’은 약 18만 7,000 단어를 표제어로 수록하고 총 면수가 5,054쪽이나 될 정도로 방대했다. 가장 큰 특징은 실제 작품에 쓰인 용례가 출전과 함께 기록된 최초의 우리말 사전이라는 점이다.
표제어를 늘리고 내용을 보완한 ‘조선말 대사전’ 증보판은 1992년 4월에 발간되었다. 표제어는 약 33만 단어로 늘어났는데도 총면수는 3,818쪽으로 줄어들었다. 1962년 사전이 쪽당 20자 50줄 2단(2,000자)으로 조판한 것과 달리 1992년 대사전은 35자 80줄 2단(5,600자)으로 조판했기 때문이다.
1992년판 ‘조선말 대사전’의 특징은 당시로서는 생소한 ‘단어의 사용 빈도’를 올림말의 뜻풀이 끝에 표시했다는 점이다. 북한은 100만여 개의 자료를 조사해서 2번 이상 나온 단어의 빈도 수를 표제어 풀이 설명이 끝난 말미에 주기했다. 북한의 언어 데이터베이스인 ‘말뭉치(corpus)’가 소규모인데도 이런 방식으로 사전을 만들었다는 것은 남한 국어학계에 충격을 주었다. 남한에서 언어 데이터베이스를 이용한 최초의 사전은 1998년 발간된 5만 단어 규모의 ‘연세 한국어 사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