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바ㄹ’ 덕에 자동차 생산국으로 명함 내밀어
6․25전쟁 후, 거리를 달리는 차들은 주로 미군이 불하한 지프나 트럭을 개조한 것들이었다. 한국의 자동차 산업은 아예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1955년 8월 서울에서 국제차량공업사를 운영하던 최무성 3형제가 엔진(4기통)과 변속기는 미군 차량에서 떼어 내고, 차체는 드럼통을 펴서 만든 2도어 지프형 승용차를 생산하면서 조악하긴 하나 우리도 비로소 자동차 생산국으로 명함을 내밀 수 있게 되었다.
‘첫 출발’의 의미로 명명된 ‘시-바ㄹ(始發) 승용차’는 그러나 수공업으로 제작되었기 때문에 우리나라 자동차 산업의 태동으로 보는 데는 무리가 있다. 다만 순수 국내 인력이 직접 조립한 자동차였다는 점에서, 그리고 8년 동안 3,000여 대가 도로를 질주했다는 점에서는 의미가 있다.
생산 초기에는 가격이 비싼 데다 모양이 촌스럽고 차를 주문해도 몇 개월이나 걸려 시발차를 찾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그러나 1955년 10~12월 경복궁에서 열린 산업박람회 때 최우수 상품으로 선정되고부터는 판매가 호조를 띠었다. “시발 시발 우리의 시발”이라는 후렴이 붙은 국내 최초의 자동차 CM송도 시발의 인기를 끌어올리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그러던 중 급증하는 휘발유 소비를 억제하기 위해 1957년 5월 8일부터 차량의 수를 동결하겠다는 이른바 ‘차량유류 절약안’을 정부가 발표하면서 된서리를 맞았다. ‘절약안’에 따라 차량 1대를 등록하거나 수입할 때는 반드시 노후 차량 1대를 폐차해야 하고, 폐차 시 받은 ‘황색 딱지’가 있어야 새 차를 구입할 수 있었다. 생산량이 제한되었으니 시발차의 쇠퇴는 불을 보듯 뻔했다. 외화가 부족한 나라에서 휘발유를 절약하기 위한 고육지책이긴 했으나 자동차산업 측면에서는 암흑기였다.
1962년 5월 21일 국가재건최고회의를 통과한 ‘자동차공업보호법’도 시발의 몰락을 가속화했다. 자동차공업보호법은 이름 그대로 한국의 자동차공업을 보호한다는 취지로 제정된 것이었으나 사실은 특정기업에 특혜를 주기 위한 악법이었다.
법에 따라, 상공부가 인가한 자동차 회사는 1967년 말까지 자동차의 제조 및 조립에 필요한 시설재와 부품에 대해 면세 혜택을 받았다. 자동차를 구입한 사람들도 자동차세와 취득세를 감면받았고 난립해 있는 자동차 조립공장은 수가 제한되었다. 당시 자동차 조립공장은 약 150개나 되었는데 대부분 5~6명의 보디공들이 천막을 쳐놓고 손으로 두들겨 만드는 영세한 공장들이었다. 정부는 이들 업체 중 7개 업체만 선정해 자동차의 조립․생산을 허가해주었다.
자동차공업보호법도 ‘시발’의 몰락 가속화시켜
그런데 상공부의 허가 절차도 받지 않고 자동차를 조립․생산한 회사가 있었다. 1962년 1월에 설립된 새나라자동차였다. 재일동포 실업가로 5·16 쿠데타에 자금을 댄 남상옥,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의 형 김종락, 김종필의 육사 8기 동기인 석정선 등 당대의 실세들이 발기인으로 참여해 출발부터 구린내가 강하게 풍겼다.
새나라자동차는 1962년 4월 일본의 닛산과 기술제휴하고 8월에 근대적 생산라인을 갖춘 조립공장을 준공했다. 닛산의 ‘블루 버드’를 일본에서 분해해 들여와 공장에서 조립한 뒤 ‘새나라자동차’(1200cc)라는 이름으로 시장에 내놓았다. 생산이라기보다는 일본에서 ‘SKD(Semi Knock Down)’ 부품을 들여와 조립하는 수준이었다. ‘녹다운(Knock Down)’이 분해한다는 의미이므로 SKD는 반만 분해한다는 뜻이다. 공장에서 볼트나 너트만 조여서 완성차를 만들었기 때문에 엄밀히 말하면 공업이랄 것도 없었다. 그래도 근대적 생산라인을 갖춘 대규모 조립공장이라는 점에서 자동차사(史)는 중요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새나라자동차는 사실상 완제품이나 다름없는 SKD 제품을 면세로 들여와 자동차세와 취득세까지 면세 혜택을 받고 성능도 우수해 시발차보다 비싸긴 했어도 경쟁력이 있었다. 휘발유가 적게 들고 외관이 세련되고 엔진 소리가 조용한 것도 강점이었다. 특히 2~3일마다 손을 보아야 하는 시발차와 달리 6~10개월 동안 수리를 하지 않아도 되어 큰 인기를 끌었다. 시발차는 결국 문을 닫았고, 1963년 8월 무렵엔 길거리에서도 사라졌다. 상공부로부터 자동차 조립공장 허가를 받은 다른 7개 공장도 기지개를 펴기도 전에 새나라자동차의 독주에 밀려 개점휴업 상태가 되었다.
새나라자동차, 정권 실세들의 구린내 풍겨
새나라차도 운이 다했는지 곧 문을 닫아야 하는 처지에 놓였다. 1963년 중순께 우리나라 외화가 고갈되어 자동차 부품을 수입할 외화가 더 이상 없었던 것이다. 1963년 6월 부품 수입이 중단되고 1963년 7월 무기한 휴업에 들어갔다. 사실상의 폐업이었다. 여기에 증권파동, 워커힐, 빠찡꼬 사건 등과 함께 군사정부가 벌인 ‘4대 의혹’의 하나로 언론의 표적이 되면서 회생의 기회조차 얻지 못했다.
새나라자동차는 1962년 1,710대, 1963년 1,063대 등 총 2,773대가 팔려나갔다. 수입 가격이 13만 원인 새나라자동차가 국내 업자들에게 25만 원으로 넘겨지는 과정에서 얻어진 약 2억 5,000만 원의 부당이득은 공화당의 창당 자금으로 사용되었다.
이후에도 한국의 자동차산업은 국산화를 위한 노력은 하지 않고 외국 업체와의 기술제휴로 연명하는 방식을 취했다. 신진자동차는 1966년 1월 새나라차와 똑같은 방식으로 일본 도요타자동차로부터 부품을 들여와 1968년부터 승용차 ‘코로나’를 생산했다. 현대는 1968년부터 미국 포드자동차의 ‘코티나’를, 아세아자동차는 1970년부터 피아트의 ‘피아트124’를 조립․생산해 국내 승용차 시장은 3파전으로 전개되었다.
한국의 자동차산업에 새로운 전기가 마련된 것은 1973년 박정희 대통령이 발표한 중화학공업 육성정책이었다. 이를 계기로 기아산업은 최초로 일관공정 시스템을 갖춘 소하리 공장을 준공, 1974년 10월부터 ‘브리사’를 생산했다. 브리사는 일본 마쓰다의 패밀리보디를 기초로 국산엔진을 얹어 조립한 소형차로 내구성과 주파성이 좋아 시판되자마자 큰 인기를 끌었다. 1975년 국산화율이 80%로 향상되면서 한 해 동안 1만여 대가 팔리는 등 베스트 셀링카로 기록되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뿐 1976년 2월부터 생산된 국내 첫 고유모델 ‘포니’에 시장의 주도권을 빼앗기면서 전성기를 마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