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50년 3월 농지개혁법에 따라 지주들에게 발급된 지가증권
‘무상몰수 무상분배’ ‘유상몰수 유상분배’는 선택과 의지의 문제가 아니라 체제의 문제
농지개혁은 해방 후 남북한 모두의 현안이었다. 발 빠르게 먼저 움직인 곳은 북한이었다. 농지개혁을 강제로 추진, 민주 절차를 거친 남한보다 4년이 빨랐다. 남북은 추진 방식에서도 큰 차이를 보였다. 북한이 ‘무상몰수 무상분배’를 추진한 것과 달리 남한은 ‘유상몰수 유상분배’로 접근했다. 이것은 선택과 의지의 문제가 아니라 체제의 문제였다.
1946년 3월에 농지개혁을 강제로 추진한 북한의 ‘무상몰수 무상분배’ 덕에 누대에 걸쳐 밭 한 뙈기 없던 북한의 소작농들은 무상으로 농지를 분배받았다. 소작농들은 감격했으나 그것이 기만이고 허울이라는 것을 알기까지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북한은 농지를 무상분배해놓고 곧 연간 수확량의 25~40%(실제로는 그 이상)를 현물세로 징수했다. 사실상 유상분배였던 것이다. 1954년부터는 농지를 집단농장화하거나 국유화하면서 소유권마저 빼앗아 북한의 무상분배는 사실상 경작권을 분배한 것에 불과했다. 결국 농민은 국가에 소작료(현물세)를 내는 소작인이 되고 국가는 대지주가 된 것이다. 그러나 이런 사실은 한참 지난 뒤에야 알려졌기 때문에 당시 북한의 ‘무상몰수 무상분배’ 소문은 남한 농민들에게 농지 분배에 대한 열망을 부추겼다.
해방 후 미 정부는 정치적인 이유로 남한의 농지개혁에 소극적이었다. 미국은 한반도를 신탁통치할 계획으로 소련과 미소 공동위원회를 추진하고 있었기 때문에 농지개혁도 신탁통치 하의 임시정부에 맡긴다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한반도 사정에 밝은 미 군정은 달랐다. 공산주의자들의 선동을 무력화할 획기적인 조치로 농지 문제 해결이 시급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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