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저하게 부처님 법대로 살자”며 봉암사로 모여
1945년 해방이 되었으나 여전히 우리 불교계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일본식 잔재와 대처승이었다. 30~40대의 소장 스님들은 해방된 나라에서 잘못된 불교를 바로잡기 위해 지혜를 모았다. 해방 전부터 함께 수행해온 성철과 청담이 불교의 기풍을 새롭게 할 장소로 선택한 곳은 경북 문경의 봉암사였다. 봉암사는 백두대간의 단전에 해당하는 해발 998m의 희양산 남쪽 기슭에 자리 잡고 있어 수행 도량에는 걸맞은 ‘사격(寺格)’을 갖추고 있었다. 게다가 당시 대부분의 절이 대처승 차지였던 것과 달리 봉암사는 워낙 오지여서 대처승이 없었다.
성철, 청담, 자운, 우봉 등 4명의 20~40대 스님이 봉암사로 모여든 것은 1947년 10월이었다. 이른바 ‘봉암사 결사’의 출발이었다. ‘결사(結社)’는 ‘뜻을 같이하는 스님들이 모인 수행 모임’으로 고려 후기에 있었던 ‘정혜결사’가 가장 유명하다. 정혜결사는 고려 불교가 지나치게 세속화되어 승려들이 도는 닦지 않고 돈과 권력을 좋아하는 흐름을 차단하기 위해 승려들이 정(定)과 혜(慧)를 같이 닦아야 한다는 취지로 1188년 보조 지눌의 주도하에 시작된 결사였다. 봉암사 결사는 삽시간에 전국의 스님들 사이에 퍼져 보안, 법웅 스님이 그해에 가세하고 향곡, 월산, 법전, 성수, 혜암, 종수, 도우 스님 등이 이듬해 합류함으로써 20여 명으로 불어났다.
봉암사에 젊은 스님들이 모여든 것은 “철저하게 부처님 법대로 살자”는 일념 때문이었다. 일제의 영향, 토착 기복 신앙 등으로 혼탁해진 불교계를 바로잡으려면 올곧게 참선 수행하는 방법밖에 없다는 게 결사 참가자들의 일치된 생각이었다. 봉암사 결사에 대중 스님들의 참여가 늘어나자 결사의 이론적 기초와 방향, 그리고 지켜야 할 원칙을 담은 ‘공주규약(共住規約)’이 제정되었다. 기존의 안이한 삶으로는 도저히 버틸 수 없는 전혀 새로운 생활이 시작된 것이다.
스님들은 밥을 해주는 공양주, 땔나무를 구해다주는 부목(負木) 처사부터 내보냈다. ‘일일부작 일일불식(一日不作 一日不食)’ 즉 ‘일하지 않으면 먹지도 않는다’는 정신에 따라 하루 2시간 이상 직접 물을 긷고 나무를 하고 밭일을 했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일제 시대를 거치면서 뒤죽박죽이 되어버린 가사, 장삼, 발우를 새로 만들어 사용했고 비단으로 만들던 가사도 삼베나 면으로 바꾸었다. 도반(함께 도를 닦는 벗) 앞에서 스스로 죄를 자백하는 ‘포살’, 괴색(검붉은 자목련색) 승복, 신도들이 스님에게 삼배를 올리는 예법 등도 이때 만들어졌다. 방 안에서는 늘 면벽좌선하고 잡담을 금했으며 법당에서는 부처님과 제자들의 상(像)만 남기고 토착신앙과 결합된 요소들은 모두 없애 버렸다. 18가지의 공주규약을 지킬 자신이 없는 스님은 받지 않았고 참가자들도 규칙을 어기면 쫓겨났다.
오늘날 조계종의 뿌리는 봉암사 결사
성철은 이 고된 결사의 중심이었다. 성철은 스님들이 오로지 참선에만 매진토록 하기 위해 공포 분위기를 조성했다. 정진 중인 스님들에게 “밥값을 내놓으라”고 호통을 치거나 빰을 후려치는가 하면 아침 세숫물로 떠놓은 양철통의 물을 다른 스님의 머리 위에 끼얹기도 했다. 한겨울에 물벼락을 맞거나 성철이 던진 놋쇠 향로를 머리에 뒤집어쓴 스님도 있었다. 성철 때문에 유명해진 3,000배도 이곳에서 시작되었다. 이는 성철 자신보다 먼저 부처님을 찾으라는 가르침이었다.
스님들의 치열한 정진 소식을 전해듣고 찾아온 신도들에게는 “스님을 만나면 꼭 세 번씩 절을 하라”며 반드시 3배를 시켰다. 이것은 한국 불교계에 엄청난 변화였다. 그전까지 스님들은 조선시대 억불정책의 결과로 천민 취급을 받았다. 사대부나 사대부 아녀자가 찾아오면 승려들은 가마를 메고 등짐을 메는 등 종노릇을 했다. 극히 일부 스님만이 ‘대사’로 불렸을 뿐이다. 이런 인식이 깊이 박혀 있는 신도들에게 엎드려 3배를 하라는 명령은 천지개벽의 변화였다. 이후 불교계엔 스님들에게 3배의 예를 취하는 것이 관행으로 굳어졌다.
봉암사 결사는 그러나 빨치산 공비들의 잦은 출몰로 인해 스님들이 차분하게 수행할 수 없게 되고 신변의 위협마저 느껴 1950년 3월 동안거 해제 직후 해체되었다. 봉암사 결사 참가자 중에서만 성철, 청담, 혜암, 법전 스님 등 4명의 종정과 청담, 월산, 자운, 성수, 지관, 법전 등 6명의 총무원장이 배출되었다는 점에서 오늘날 조계종의 뿌리는 이 봉암사 결사에 있다고 보아야 한다. 또한 봉암사 결사는 불교 정화운동과 종단 재건으로 이어졌고 내용적으로는 의식, 의례, 규칙 등이 조계종단의 관례로 정착되었다.
오늘날 봉암사는 1982년 종립 특별선원으로 지정된 후 1년에 딱 한 번, ‘부처님 오신 날’에만 산문을 열어 일반 신도들의 방문을 허용하고 있다. 그 외의 기간엔 오로지 수행 정진뿐 일반 신도의 등록도 받지 않는다. 천주교의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가 현재 세계 천주교의 준거를 만들었다면 봉암사 결사는 현대 한국불교의 기틀을 마련한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