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형필이 우리 문화재의 해외 유출 막은 것은 하늘의 뜻
전형필(1906~1962)이 젊은 나이에 해마다 10만 석을 수확하는 조선 최대 지주의 한 사람이 되고, 그래서 우리 문화재의 해외 유출을 막을 수 있었던 것은 하늘이 그나마 우리 민족에 내려준 선물이다. 전형필의 이런 활동이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전형필의 증조부 전계훈의 부(富) 덕분이었다. 증조부는 배우개장(지금의 동대문시장)의 상권을 거의 장악하고 전국 곳곳에도 수만 석 농지를 보유하고 있던 당대 최고 부자군에 속했다.
전계훈에겐 창엽과 창열 두 아들이 있었다. 그런데 차남 창열에게 후사가 없어 장남 창엽의 아들 영기와 명기 중 둘째 명기가 창열의 양자로 들어갔다. 그런데 공교롭게 전명기도 후사가 없어 전영기의 두 아들 형설과 형필 중 형필이 작은아버지 전명기의 양자로 입적했다. 운명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1915년 조부 전창엽의 죽음을 시작으로, 1919년 양부 전명기, 같은 해 생가의 계승자인 전형설이 죽더니 1929년 전형설의 생부 전영기마저 눈을 감아 전형필은 졸지에 생가와 양가 합쳐 유일한 적손이 되었다.
전형필은 서울 종로4가에서 태어나 1926년 휘문고보를 졸업했다. 고교 시절에는 야구선수로 활약하면서도 미술 교사이던 한국 최초의 서양화가 고희동에게서 미술에 대한 소양과 안목을 키웠다. 10만 석의 대지주가 된 운명의 1929년, 전형필은 와세다대 법과를 졸업하고 귀국했다. 이후 3․1 운동의 33인 민족 지도자 가운데 한 명이자 고미술 전문가인 오세창과 교유하며 1930년부터 본격적으로 문화재를 수집했다.
당시의 한국은 문화재나 골동품에 대한 개념이 없어 일본인 골동품상들이 돈 몇 푼을 주면 집에 있는 백자나 항아리 등을 헐값에 파는 일이 다반사였다. 전형필의 문화재 수집은 그런 시기에 시작되었다. 다행히 전형필은 각종 문화재를 사들일 수 있는 주요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먼저 민족미술에 눈뜨게 해준 스승 고희동, 학문적 고증이 치밀하고 예술적 감식이 탁월해 이 방면에서는 당대 제1인자로 꼽히던 오세창이 있었다.
정직하고 틀림없는 한국인 거간 이순황과 일본인 골동품상 신보 기조의 도움도 컸다. 이순황은 전형필이 1932년 사들인 서울 관철동의 한남서림을 중개지로 삼아 문화재를 사들였다. 신보 기조는 일본인이면서도 전형필의 인품과 열성에 감복, 최상품 문화재가 전형필 손에 들어갈 수 있도록 매사에 최선을 다했다. 전형필은 신보 기조에게는 조선과 일본의 각 경매장에서 최고품을 경매로 구입하도록 하고 이순황에게는 구가(舊家)에서 시장으로 흘러나오는 일급 문화재들을 사들이도록 했다. 이런 전형필의 문화재 수집열은 취미나 투자가 아닌 민족의 정체성을 지키고자 한 또 하나의 애국 활동이었다.
민족미술에 눈뜨게 해준 고희동과 학문적 고증이 치밀한 오세창의 도움 커
1936년 11월 22일 우리나라 최초의 미술품 경매장인 서울 경성미술구락부 경매장에서 이뤄진 경매는 지금도 유명한 일화로 남아 있다. 그날 경매에는 ‘청화백자철사진사국화문병’(국보 294호)이 나왔는데 가격이 5,000~6,000원 정도로 예상되었다. 그런데 일본의 세계적 고미술 상인과 경합을 벌이는 과정에서 가격이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그래도 전형필은 일본인이 손을 들 때까지 가격을 높여 마침내 예상가의 3배 가까운 가격에 낙찰받았다. 서울의 큰 기와집 한 채가 1,000원 정도 할 때였다.
1937년 초, 일본에서 활동 중인 존 개츠비라는 영국 변호사가 일본에서 수십 년 동안 수집한 최고급 고려청자들을 일괄 처분한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당대 최고의 수장가 중 한 사람이던 개츠비는 일제가 팽창 야욕으로 장차 영국이나 미국과 일전을 벌이다 패망할 것으로 예견하고는 자신의 수장품을 현금화해 영국으로 떠날 생각이었다.
전형필은 사람을 시켜 개츠비의 진의를 파악한 뒤 충남 공주에 있는 5,000석지기 전답을 판 돈을 갖고 1937년 2월 일본으로 건너가 개츠비의 수장품 전부를 사들였다. 인수 금액은 당시 웬만한 기와집 50채는 살 수 있는 거금이었다. 개츠비로부터 사들인 고려자기 중 상당수는 나중에 국보나 보물로 지정되었다.
일본에 밀반출되어 오사카에서 경매에 부쳐진 고려시대 3층석탑을 되찾아올 때도 당시 일본의 한 재벌과 끝까지 경합을 벌여 기필코 3층석탑을 사들인 일화도 유명하다. 1940년 8월 경북 안동에서 발견된 훈민정음 해례본(국보 70호)을 1만 원에 구입할 때는 거간꾼에게 수고비로 1,000원이나 줄 정도로 공을 들였다. 이렇게 사들인 문화재들은 1934년 부래상이라는 프랑스 석유상에게서 구입한, 오세창이 ‘북단장’이라고 이름을 지은 서울 성북동의 1만 평짜리 산장에 수장되었다.
1938년 윤7월에는 북단장 안에 서양식 2층 양옥의 사립 박물관을 지어 ‘보화각’이라고 명명했다. 보화각은 서울 종로의 옛 화신백화점을 설계한 한국인 최초의 건축가 박길용의 작품으로, 이탈리아제 대리석으로 계단을 만들고 2층에 원형 공간을 꾸미는 등 당시로서는 세련되고 모던한 분위기의 최고급 건물로 유명했다.
문화재 수집은 민족의 정체성을 지키고자 한 또 하나의 애국 활동
북단장의 뜰과 보화각 건물 안에 차곡차곡 쌓여가던, 일제 때도 온전하던 문화재가 일대 수난을 당한 것은 1950년의 6․25 때였다. 서울에 진주한 인민군이 유물을 징발하다가 전세가 불리해지자 북으로 철수하면서 주요 문화재를 가져가기 위해 큰 나무통 속에 마구 포개고 못질을 가하는 만행을 저지른 것이다.
다행히 포장이 채 끝나기도 전에 이뤄진 9․28 서울 수복으로 문화재는 온전할 수 있었다. 그러나 1․4 후퇴 때 또다시 문제가 생겼다. 이번에는 미국 헌병의 호송을 받아 무사히 부산으로 옮겨갔으나 그 난리 북새통에 겨우 포장해 갖고 간 문화재만 온전할 뿐 보화각에 그대로 남겨둔 문화재들은 참화를 면하지 못했다. 이 때문에 전쟁이 끝난 후 전형필은 시장에 나와 있는 자신의 문화재들을 다시 사들여야 했다.
전형필은 1940년 6월 보성고보를 인수했다. 3·1 운동 때 기미독립선언서를 찍어낸 인쇄소가 있고 독립운동의 산실인 보성고가 경영난으로 폐교 위기에 놓이자 민족학교로 키우기 위한 결단이었다. 해방 후 전형필은 문화재보존위원으로 경향 각지로 고적 조사를 다니며 1960년 고미술동인회를 발족시키고 고고미술 잡지를 발간하다가 1962년 1월 26일 56세를 일기로 눈을 감았다. 그가 떠난 후 보화각은 1966년 4월 설립된 한국민족미술연구소의 부설 ‘간송미술관’으로 개칭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