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이야기

한글맞춤법 통일안 발표

표준어 원칙의 기본 뼈대는 중류사회에서 쓰는 서울말

주시경이 작고(1914)한 뒤에도 주시경의 후학들은 ‘조선언문회’를 중심으로 한글 연구와 보급을 계속했다. 주시경이 살아 있을 때만큼 활발하지는 않았으나 국내는 물론 해외에서도 각자의 역할에 충실했다.

국내에서는 1921년 12월 ‘조선어연구회’를 발족시켜 한글날인 ‘가갸날’을 제정(1926.11)하고 동인지 형식의 ‘한글'(1927.2)을 발행하는 등 왕성한 활동을 펼쳤다. 해외에서는 김두봉이 1919년 망명한 상해에서 자신의 문법서를 고쳐 쓰고, 최현배가 일본에서 교육학을 전공하면서 가로 풀어쓰기 등의 어문 표준화에 심혈을 기울였다. 이윤재는 중국의 문자 개혁 운동에 관한 정보를 중국에서 국내로 소개했다.

국내외 활동은 마침내 조선어사전 편찬으로 뜻이 모아져 1929년 10월 31일 ‘조선어사전편찬회’가 발족되었다. 이윤재, 최현배, 안재홍, 이광수, 이희승, 정인보, 조만식, 주요한 등 각계 인사 108명이 사전편찬회 발기인으로 이름을 올리고 독일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이극로가 회장 격인 간사장을 맡았다. 조선어사전편찬회와 조선어연구회는 참여 인사가 상당 부분 중복되긴 했지만 별개의 조직이었기 때문에 초기에는 각각의 역할을 분담했다. 어휘 수집 및 주해와 편집 등은 사전편찬회가 맡고 맞춤법 통일과 표준어 사정은 연구회가 담당했다.

표준어 원칙의 기본 뼈대는 ‘대체로 현재 중류사회에서 쓰는 서울말로 한다’로 결정되었다. 1912년 4월 조선총독부가 발표한 ‘보통학교용 언문 철자법’에서 경성말(서울말)을 표준어의 기준으로 삼고 있었고, 당시 신문들도 대체로 서울말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문제는 ‘중류사회’라는 규정이었다. 당시 중류 계층 이상에서 사용하는 말 대부분은 한문화한 반면 노동자․농민 계층의 말에는 고유어가 많이 남아 있는 현실에서 ‘중류사회’의 말을 표준어로 삼는다는 것은 한문 중심의 문화를 탈피하고 고유어 중심의 새로운 문화를 세우고자 했던 조선어학회의 당초 취지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그래도 딱히 대안이 없어 ‘중류사회’를 표준어의 주요 기준으로 삼았다.

문제는 또 있었다. 표준어의 기준을 ‘중류사회의 서울말’로 정하다보니 다수 방언을 표준어에서 탈락시킨 것이다. 이 때문에 전국적으로 산재한 수많은 방언을 서울 지역 혹은 중류 계층의 말로 대체해버린 것은 결과적으로 표준화 과정의 폭력성을 드러낸 것이라는 지적이 훗날 제기되었다.

 

맞춤법 통일에 최대 난관은 철자법

맞춤법을 통일하는 데 최대 난관은 철자법이었다. 그때까지는 발음 위주의 철자법이 대세였다. 구한말부터 쓰여온 성경 철자법도, 1912년 조선총독부가 공식 발표한 ‘보통학교용 언문 철자법’도 소리 나는대로 적는 표음주의를 채택하고 있었다. 당시 ‘보통학교용 언문 철자법’은 아래아(․)를 폐지하고 ㄱ,ㄴ,ㄹ,ㅁ,ㅂ,ㅅ,ㅇ,ㄺ,ㄻ,ㄼ 등 10개의 받침만 인정했다. 그래도 아래아(․)는 한동안 계속 사용되었다.

조선총독부는 1921년 철자법을 개정해 ‘보통학교용 언문 철자법 대요’를 발표했으나 이 철자법 역시 표음주의 철자법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이는 주시경과 조선어연구회가 줄곧 주장해온 형태주의 철자법과는 거리가 멀었다.

표음주의 표기는 ‘일그니’, ‘놉고’처럼 소리 나는 대로 쓰기 때문에 편리하다는 것을 장점으로 내세웠다. 반면 형태주의 표기는 ‘읽고(일꼬)’ ‘읽는(잉는)’ ‘읽어(일거)’의 ‘읽-’과 ‘읽으니’의 ‘읽-’이 동일한 형태이고 ‘사랑이’의 ‘이’가 ‘이를 닦다’의 ‘이’임을 분명히 해 의미 파악이 쉽다는 것을 장점으로 내세웠다.

이런 상황에서 조선어연구회는 조선총독부의 표음주의 철자법을 그대로 따를 수도, 그렇다고 총독부의 방침을 무시해가며 자신들의 형태주의 철자법을 고집할 수도 없었다. 결국 조선어연구회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자신들이 연구해온 철자법을 조선총독부의 공식 철자법으로 인정하게 하는 것이었다. 조선어연구회 측이 형태주의 철자법을 관철하려면 이미 ‘연철(이어 쓰기)은 모두 소리 나는 대로 적는다’는 원칙을 공표하고 있는 조선총독부를 설득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마침 조선총독부도 철자법을 개정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총독부는 1928년 9월부터 1929년 1월까지 1차 조사위원회를 열어 개정 철자법 원안을 작성했다. 조선어연구회는 1929년 5월부터 7월까지 활동한 2차 조사위원회에 조직적으로 참여해 자신들의 뜻을 관철하려는 노력을 기울였다. 이러한 노력 덕에 1930년 2월 조선총독부 학무국이 개정·발표한 ‘개정 언문 철자법’에는 주시경 학파의 의견이 상당 부분 반영되었다.

‘언문 철자법’은 첫째, 된소리는 ‘ㅺ, ㅼ, ㅽ, ㅾ’ 등을 버리고, ‘ㄲ, ㄸ, ㅃ, ㅆ, ㅉ’과 같은 각자병서(各自竝書)를 쓰도록 했다. 둘째, 종래의 받침 10개에 ‘ㄷ, ㅌ, ㅈ, ㅊ, ㅍ, ㄲ, ㄳ, ㄵ, ㄾ, ㄿ, ㅄ’의 11개를 합해 21개를 쓰도록 했다. 다만 ‘ㅋ, ㅎ, ㄶ, ㅀ’ 등이 받침에서 제외된 것은 주시경 학파의 뜻과는 배치되는 결정이었다.

 

방언을 표준어에서 탈락시킨 것은 문제

이후 조선어연구회는 조선총독부의 철자법과 별개로 1930년 12월 13일 총회의 결의로 ‘한글맞춤법 통일안’을 제정하기로 하고 이희승 등 12명에게 원안 작성을 의뢰했다. 1931년 1월 조선어학회로 명칭을 바꾼 조선어연구회가 맞춤법의 원안을 완성한 것은 1932년 12월이었다. 이를 토대로 한 최종안은 1933년 1월 초까지 제1독회, 7월 말부터 8월 초까지 제2독회를 마친 후 완성되었다.

3년간 125차례나 회의를 거듭한 끝에 최종적으로 완성된 ‘한글마춤법 통일안’(발표 당시는 ‘맞춤법’이 아니라 ‘마춤법’)이 세상에 공표된 것은 1933년 10월 29일이었다. 주권이 상실된 일제 치하에서 그것도 민간단체의 힘으로 민족 어문 표준화의 기틀을 세웠다는 우리 문화사의 찬연한 한 페이지를 장식한 쾌거였다. 한글맞춤법은 총론에서 1.표준말을 그 소리대로 적되, 어법에 맞도록 함을 원칙으로 삼는다. 2.표준말은 대체로 현재 중류사회에서 쓰는 서울말로 한다. 3.문장의 각 단어는 띄어 쓰되 토는 그 웃말(앞말)에 붙여 쓴다로 정의했다.

한글맞춤법을 통일하는 과정에서 옛 철자법을 지지하는 국내 지식인들의 반발도 만만치 않았다. 특히 박승빈을 중심으로 한 정음파의 반발은 집요하고 거셌다. 박승빈은 법률 문장의 국어화에 기여할 목적으로 대한제국 시절부터 우리말 연구에 전념해온 조선 법조계의 원로였다. 그는 민족 계몽과 학술 연구를 목적으로 1918년 1월 창립된 ‘계명구락부’의 창립 멤버로 활동했다.

문일평, 박승빈, 오세창, 윤치호, 이능화, 최남선 등의 주도로 출범한 계명구락부에는 변호사, 사업가, 의사 등 식민지의 상류층 인사들이 회원으로 가입해 활동했다. 이들 구성원은 대체로 일제의 조선 지배를 현실로 받아들이면서 경제적 불평등 등 민족 차별적 정책에 대해서만 불만을 품고 있던 부르주아 그룹이었다.

 

논쟁의 핵심은 형태주의 표기법과 표음주의 표기법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

계명구락부는 1921년 창간한 기관지 ‘계명’을 통해 민족 어문의 표준화 문제를 논의했다. 1921년 2월 5일에는 1,000명 가까운 청중이 모인 자리에서 박승빈을 연사로 내세워 강연회를 열었다. 박승빈은 사회 변천에 순응하려면 몇 가지의 언어 관습을 고쳐야 한다고 강연했다. 아동 상호 간에 경어(하오)를 쓰게 할 것, 한자의 훈독을 허락할 것, 언문 사용의 법칙을 정리할 것 등이 요지였다. 언문 사용의 법칙으로는, 새 말을 만들지 말고 고유어를 중시하고 경성어에 국한하지 말고 지방어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 등을 내세웠다.

1921년 12월 발족한 ‘조선어연구회’도 겉으로는 ‘조선어의 정확한 법리를 연구함을 목적으로 한다’고 표방했지만 사실 그 동기는 박승빈 학파에 맞서 주시경 학파를 결속한다는 의도도 있었다. 계명구락부는 1927년 광문회의 사전 원고를 입수해 최남선의 책임 아래 편찬 작업을 시작했다. 집필은 최남선이 역사·지리·제도·종교·철학 등에 관한 용어, 정인보가 한자 용어, 이윤재가 고어, 변영로가 외래어 등을 맡는 것으로 분담했다.

이들은 1년 동안 10만 개의 어휘를 모아 카드 작업을 했으나 2년도 지나지 않아 편찬 사업에서 중도하차하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결국 변영로, 정인보, 최남선 등이 실무에서 물러나고 이윤재, 한징마저 1929년 출범한 조선어사전편찬회로 옮기면서 편찬 사업은 실질적으로 중단되었다.

이런 가운데 조선총독부가 주시경의 뜻이 상당 부분 반영된 ‘언문 철자법 개정안’을 1930년 2월 확정 발표하고 주시경 학파인 조선어연구회가 1930년 12월 ‘한글맞춤법 통일안’ 원안을 작성하기 시작하자 박승빈은 1931년 12월 법조인, 교육자, 국어학자로 구성된 ‘조선어학연구회’를 결성해 옛 철자법을 따를 것을 주장하며 논쟁에 불을 붙였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어문학계는 일찍이 유례가 없는 논쟁의 소용돌이 속에 휘말려들었다.

논쟁의 핵심은 형태주의 표기법을 선택할 것인가 아니면 소리 나는 대로 표기하는 표음주의 표기법을 선택할 것인가 아니면 양자를 절충할 것인가의 문제였다. 철자법 논쟁이 지식인뿐만 아니라 일반 대중의 관심을 끌 만큼 치열해지자 동아일보는 1932년 11월 조선어 철자법 토론회를 개최하고 이를 지상 중계했다. 대립과 갈등의 골은 깊었지만 결국 대세는 조선어학회 쪽이었다. 결정적인 계기는 당대 조선 문학계를 대표하는 78명의 작가가 1934년 7월 9일에 발표한 조선어학회 지지 선언이었다.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사전 편찬 못해

한글맞춤법 제정에 이어 중요한 작업은 표준어를 조사하고 결정하는 사정 작업이었다. 표준어 사정에 따라 마련된 어휘집을 놓고 1차(1935.1), 2차(1935.8), 3차(1936.7) 독회를 거쳐 사전에 수록할 어휘가 최종 확정되었다. 조선어학회와 사전편찬회는 교육계, 종교계, 언론계 명사 130명이 참석한 가운데 1936년 10월 28일 서울 인사동 천향원에서 ‘사정한 조선어 표준말 모음’을 발표했다. 사정된 어휘 수는 표준어 6,231개를 포함해 총 9,547개에 불과했지만 맞춤법과 표준어에 준거한 최초의 어휘들이었기 때문에 다른 사전의 등대 역할을 하는 데는 손색이 없었다.

사전 편찬에 필요한 또 하나의 기초 작업은 외래어 표기법을 제정하는 일이었다. 외래어 표기법 제정은 1931년 1월 각계 권위자 45명으로 구성된 ‘외래어 표기법 및 부수 문제 협의회’의 결의에 따라 조선어학회에서 책임을 맡아 진행했다.

8년 동안의 연구와 심의를 거듭한 끝에 1938년 가을에 이르러 외래어 표기법, 일본어음 표기법, 한국어음 로마자 표기법, 한국어음 만국 음성 기호 표기법에 대한 원안이 만들어졌다. 이를 각계 인사 300여 명에게 보내 비평과 수정을 받은 뒤 1940년 6월 25일 ‘외래어 표기법 통일안’을 발표함으로써 조선어사전을 편찬할 수 있는 모든 준비를 마칠 수 있었다.

마지막 작업으로 사전만 편찬하면 되었으나 1938년 4월 일제의 제3차 조선교육령 개정으로 조선어를 교육 과정에서 선택과목으로 추방하고 1940년 2월 창씨개명을 강요하면서 시기가 불투명해졌다. 더구나 일제는 1941년 3월 ‘조선 사상범 예방구금령‘을 발동하면서 조선어학회에도 탄압의 손길을 뻗쳤다. 결국 사전 편찬을 앞두고 1942년 10월에 터진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관련자들이 줄줄이 구속되었고 사전 원고는 압수되었다. 발간이 중단된 사전은 해방 후인 1947년 제1권이 나오고 1957년이 되어서야 마지막 6권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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