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신무용의 선구자이자 근대 춤의 거장
조택원(1907~1976)은 1920~30년대에 서양의 모던 댄스와 우리의 전통 춤을 접목해 한국의 신무용을 정립한 ‘신무용의 선구자’이자 ‘근대 춤의 거장’이다. 45년 무용 인생의 거의 절반을 일본, 프랑스, 미국 등 해외에서 활동했으며 국내·외에서 공연한 횟수만 1,500여 회에 달하고 안무는 수백 편이나 된다.
조택원은 함경도 함흥의 명문가에서 3대독자로 태어났다. 대한제국 시절 군인으로 복무한 아버지가 독립운동을 하겠다며 중국으로 떠나 어린 시절은 함흥군수를 지낸 할아버지 밑에서 성장했다. 서양 춤을 처음 접한 것은 11살이던 1918년이었다. 러시아혁명을 피해 국경을 넘어온 백계 러시아인들이 밤마다 모여 춤을 추던 ‘코파크 댄스’가 그의 눈에 그렇게 멋져 보일 수 없었다.
휘문고보에 입학한 1920년 러시아에 유학 중인 조선 학생 무용단의 고국 방문 공연을 보고 예술단의 일원에게 코파크 댄스를 배우면서 가슴속에 무용에 대한 동질감이 싹텄다. 휘문고보에 재학 중이던 1924년 1월에는 서울 YMCA 강당 무대에 올려진 토월회의 무용가극 ‘사랑과 죽음’에서 직접 코파크 댄스를 추어 인기를 끌었다. 훤칠한 키에 운동신경도 뛰어나 휘문고보 재학 때는 정구 선수로 일본에 다녀오기도 했다. 정구 선수는 1925년 입학한 보성전문 법과생일 때도 계속 이어졌다.
그러던 중 1927년 10월 일본 근대 무용의 선구자 이시이 바쿠 무용단이 두 번째 내한 공연을 펼쳤다. 조택원은 공연에 매료되어 보성전문을 중퇴하고 상업은행의 행원 겸 정구 선수로 활동하다가 1928년 4월 일본으로 건너가 이시이의 문하생으로 들어갔다. 조택원은 도일 1년 만에 도쿄에 후원회가 결성될 정도로 무용에 재능이 있었다. 도일 4년 만인 1932년 3월 귀국해 중앙보육학교에서 신무용을 가르치고 1932년 9월 서울 충무로에 ‘조택원 무용연구소’를 개설했다.
조택원은 1934년 1월 27일 경성공회당에서 꾸민 제1회 무용 발표회에서 창작무용 ‘승무의 인상’ 등 12개의 레퍼토리를 발표해 주목을 끌었다. 장차 조택원의 대표작이자 상징작이 될 ‘승무의 인상’은 1943년 시인 정지용에 의해 ‘가사호접’으로 개칭되었다. 1935년 2월 제2회 공연에서는 또 다른 창작무용 ‘만종’과 ‘포엠’ 등 15개의 레퍼토리를 선보였다. 특히 ‘만종’은 조택원이 어려서 좋아한 밀레의 그림 ‘만종’을 무용 서사시로 창작한 것으로 생애를 통틀어 가장 많이 무대에 올려졌다. 1936년 7월에는 양주남 감독, 문예봉 주연의 영화 ‘미몽’에 그의 무용단과 함께 조연으로 출연했다. ‘미몽은’ 현재 국내 영화 중 가장 오래된 필름으로 기록되어 있고 문화재청의 등록문화재로 등재되어 있다.
국내·외에서 공연한 횟수만 1,500여 회에 달하고 안무는 수백 편이나 돼
국내에서 신무용가로 자리를 굳힌 조택원은 좀 더 시야를 넓히기 위해 1937년 11월 프랑스로 건너가 서양무용을 익히고 1938년 11월 귀국했다. 1941년 일본무용협회 현대무용부 이사에 피선되고 1942년 4월 경성 부민관에서 내선일체를 주제로 한 창작무용 ‘부여 회상곡’ 등을 발표했다. 만주와 중국에서도 황군 위문 공연에 나서 해방 후 친일 무용가라는 비난을 받았다.
해방 후인 1947년 10월 문화 교류차 자신의 무용단을 이끌고 미국으로 순회공연을 떠나 ‘조택원과 일행’이라는 무용단 이름으로 할리우드, 로스앤젤레스, 시카고, 뉴욕 등 미 전역을 순회하며 수백 회의 공연을 열었다. 1949년 미국 뉴욕 자연사박물관에서는 ‘신로심불로’를 초연해 화제를 모았다.
1949년 3월 사석에서 이승만 대통령의 독재를 비난했다는 사실이 국내에 알려져 1960년 4․19로 이 대통령이 물러날 때까지 11년간 국내에 들어오지 못하고 미국, 일본, 프랑스 등지에서 활동했다. 1953년에는 파리에서 유네스코 주최 공연을 펼쳤고 1957년에는 그의 안무․편곡으로 만들어진 ‘양귀비’가 프랑스 발레단에 의해 영국 에든버러 페스티벌에서 공연되었다.
조택원은 이승만이 물러난 1960년 5월 13년 만에 귀국, 한국무용협회 이사장으로 활동하며 한국무용의 발전에 이바지했다. 1964년 한국무용 발전에 끼친 공로로 제1회 한국무용상과 1974년 국내 제1호 금관문화훈장을 받았다. 한동안 ‘무용’은 일본인들이 만든 용어이니 ‘무상(舞想)’으로 고칠 것을 주장했으나 관철하지는 못했다.
풍운아답게 여성과의 스캔들도 잦고 여성 편력도 화려했다. 두 번의 결혼과 이혼, 한 번의 동거 후 1960년 한국으로 돌아와 그의 제자와 세 번째 결혼을 했다. 제자가 많지는 않았으나 국수호(가사호접), 조흥동(신로심불로), 정재만(학), 양성옥(고독) 등 한국 최고의 춤꾼들이 그의 춤 계보를 잇고 있다. ‘가사호접’(김준영 작곡) 악보는 한국무용 사상 최초의 무용음악 악보로 기록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