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물 자연발생설’ 논쟁에 결정적으로 종지부 찍어
루이 파스퇴르(1822~1895)는 프랑스 동부의 쥐라주 돌에서 태어나 파리고등사범학교에서 물리와 화학을 전공하고 1849년 스트라스부르대 화학과 교수로 임명되었다. 1854년 릴대로 자리를 옮긴 뒤에는 화학자에서 미생물학자로 변신했다. 당시 릴 지방에는 포도주 양조공장이 많았다. 너무 빨리 시어지는 포도주로 마음고생이 심하던 양조업자들은 파스퇴르에게 원인 분석을 의뢰했다. 파스퇴르는 알코올 발효를 일으키는 통과, 발효를 일으키지 않는 통을 현미경으로 각각 조사해 발효를 일으키는 주체가 효모임을 밝혀냈다. 효모와 함께 사는 세균이 와인 맛을 변하게 한다는 사실도 알아냈다. 그리고 1863년 섭씨 55~60도로 1시간 정도 가열하면 포도주는 변질되지 않고 박테리아의 독성만 파괴한다는 사실을 발표했다. 지금도 사용되고 있는 ‘파스퇴라이제이션’ 즉 ‘저온살균법’이다.
파스퇴르는 ‘생물 자연발생설’과도 치열한 싸움을 전개했다. 요즘이야 논할 가치도 없지만 당시만해도 ‘생물은 자연적으로 생겨난다’는 자연발생설을 둘러싸고 갑론을박했다. 같은 지루한 논쟁에 결정적으로 종지부를 찍은 인물이 파스퇴르다. 그는 1862년 생물 자연발생설의 오류를 입증하기 위해 목 부분이 S자로 된 플라스크에 설탕물과 효모의 혼합액을 넣어 두고 S자로 구부러진 목 부분에는 물을 채웠다. 공기는 플라스크 안으로 자유롭게 드나들겠지만 공기 중의 미생물 등은 기다란 S자관의 중간에서 붙잡힐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실험 결과 수개월이 지나도 플라스크 안에서는 미생물이 발견되지 않았다. 하지만 S자관을 없애자 미생물이 자랐다. 이로써 생물의 자연발생설은 사실상 부정되었고 ‘생물은 생물로부터만 발생한다’는 생물속생설이 정식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파스퇴르는 1879년 닭콜레라의 독성을 약화한 배양균을 닭에 주사하면 면역이 생긴다는 것도 밝혀내 백신 접종을 통한 전염병 예방의 길을 터놓았다. 사실 이런 결과는 한 세기 전쯤 제너의 우두 접종에서 확인되었지만 약독화한 균체가 그 균이 일으키는 질병에 대한 면역력을 심어준다는 근본적인 원리를 확립한 것은 파스퇴르가 처음이었다.
탄저균의 예방접종 백신과 광견병 백신 개발
파스퇴르는 코흐가 1876년 발견하고도 미처 개발하지 못한 탄저균의 예방접종 백신 개발을 다음 연구 목표로 삼았다. 1881년 5월 5일 파스퇴르는 보통 양 24마리와 백신을 접종한 24마리의 양에게 공개적으로 탄저균 배양액을 주입했다. 6월 2일 보통 양은 모두 죽은 반면 백신을 접종한 양은 모두 건강하게 살아남은 것을 확인했다. 탄저병 예방접종의 가치가 공개적으로 확인된 것이다.
1884년 파스퇴르는 광견병 바이러스로 토끼를 감염시킨 뒤 그 토끼의 척수를 채취해 광견병 백신을 만들었다. 1885년 7월 미친 개에게 물린 9살 소년이 어머니와 함께 파스퇴르를 찾아왔다. 소년은 다른 의사로부터 “손쓸 도리가 전혀 없다”는 진단을 받은 상태였다. 파스퇴르는 7월 6일 소년에게 광견병 백신을 주사했고, 소년은 귀중한 생명을 건졌다. 치명적이었던 질병 하나가 마침내 인류에게 정복되는 순간이었다. 인체에 처음 적용된 광견병 항독소의 성공은 파스퇴르의 명성을 다시 한 번 높여 주었다. 프랑스 정부는 파스퇴르의 공로를 인정해 1886년 파스퇴르연구소를 설립했다. 이 연구소는 파스퇴르 사후 노벨상 수상자를 10명이나 배출할 정도로 세균학 연구소의 메카가 되었다.
오늘날 프랑스에서 파스퇴르에 대한 존경심은 숭배에 가깝다. 프랑스인들은 파스퇴르를 나폴레옹보다 더 위대한 사람으로 꼽는다. 유럽 전체를 누빈 나폴레옹도 영웅이지만, 수천만 명의 생명을 앗아가는 전염병의 위협으로부터 인류를 해방시킨 파스퇴르가 더 진정한 영웅이라는 것이다. 파스퇴르는 애국자로서의 명성도 높았다. 1870년 프랑스와 프로이센(독일) 간에 전쟁이 벌어졌을 때 파스퇴르는 전쟁 전 프로이센의 본 대학에서 취득한 의학박사 학위를 돌려주겠다고 발표했다. 그때 남긴 유명한 말은 이랬다. “과학에는 국경이 없다. 그러나 과학자에게는 조국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