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이야기

1861년 : 서태후의 47년 절대 권력 시작

‘권력욕의 화신’ ‘개혁 군주’ 평가 엇갈려

서태후(1835~1908)는 중국 안휘성에서 만주족 지방 관리의 딸로 태어났다. 16살이던 1851년 함풍제의 즉위 후 궁녀로 선발되어 자금성에 입궁했다. 서태후가 결정적으로 청조 황실을 좌지우지하는 ‘킹 메이커’가 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한 것은 함풍제의 정실인 동태후도 생산하지 못한 아들을 1856년 낳았기 때문이다.

서태후는 이후 황제의 곁을 지키는 과정에서 조금씩 정치를 알게 되었다. 처음에는 단순히 공문을 읽는 등의 사소한 업무만을 도왔으나 점차 정치적 능력을 인정받아 정사의 많은 부분에 참여했다. 게다가 함풍제가 병약해 업무를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자 자신의 뛰어난 붓글씨 솜씨로 함풍제가 구술하는 교지를 대필하고 옥새 인장을 받는 특권을 누렸다. 함풍제는 아예 서태후에게 국정에 대한 견해를 발표할 수 있도록 윤허하는 조치까지 취했다.

그러던 중 1860년 영·불 연합군이 북경으로 접근해와 함풍제를 따라 만주족의 본거지인 열하(하북성 북부에 있는 승덕)의 이궁으로 피신했다. 그 사이 영·불 연합군은 북경에 입성, 1860년 9월 ‘북경조약’을 체결한 후 철수했다. 함풍제는 1861년 8월 피난처에서 사망했다. 죽기 전 자신이 죽은 뒤 황궁 여인들이 정권을 장악하지 못하도록 어린 황제를 보필하는 책임을 8명의 대신들에게 맡겼다. 그러나 서태후는 함풍제의 배다른 동생 공친왕과 함께 신유정변을 일으켜 8명의 대신을 주살하고 실권을 장악했다.

서태후의 47년 절대 권력은 자신의 5살 난 아들 재순(1856~1874)이 1861년 10월 동치제로 즉위하면서 시작되었다. 서태후는 동태후와 함께 수렴청정을 했다. 동태후는 성격이 온순하고 고매했지만 그렇다고 유약하거나 무능하지는 않았다. 야심이 없었을 뿐 지혜와 능력을 갖춘 여성이었다. 서태후는 동태후가 정치적 능력이 없고 서태후의 이익에도 위협을 주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동태후와 함께 20여 년에 걸친 평화로운 통치기를 보냈다. 당시 동태후의 거처가 자금성 내 동쪽 궁이고 서태후의 거처가 서쪽 궁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동태후와 서태후로 구분했다.

서태후는 공친왕과도 연대해 자강운동에 힘을 쏟았다. 제도와 인사를 개혁해 한족들에게도 기회를 주고 1864년 태평천국의 난을 종식시키는 등 성과가 적지 않았다. 이후 청에는 ‘동치 중흥’ 시대가 전개되었다. 야사에 따르면 서태후는 동치제가 생모인 자신보다 양모인 동태후를 더 따르자 아들을 미워했다. 동치제가 병에 걸렸는데도 고통 속에서 죽도록 내버려두었다. 결국 동치제는 스무살을 넘기지 못하고 19세인 1874년 죽었다.

 

단독 집권에 성공하자 사치와 향락으로 세월 보내 

서태후는 아들의 죽음으로 권력의 끈이 끊길 위기에 놓이자 동치제 황후의 뱃속에서 황태자가 자라고 있는데도 1875년 함풍제의 또 다른 이복동생인 순친왕과 자신의 여동생 사이에서 태어난 네 살배기 아들을 광서제(1871~1908)로 앉혀 수렴청정을 이어감으로써 다시 권력을 손에 쥐었다. 동치제의 아이를 가진 황후는 혹독한 핍박을 받고 자살했다. 동·서 양 태후의 수렴청정 시대는 1881년 동태후가 세상을 떠나면서 막을 내리고 서태후 홀로 독주하는 시대가 전개되었다.

서태후는 단독 집권에 성공하자 사치와 향락으로 세월을 보냈다. 음식은 한 끼에 128가지나 되었으며 1894년의 환갑잔치에는 상상할 수 없는 거금을 쏟아부었다. 옷은 3,000여 상자나 되었고 특히 보석에 대한 애착이 대단했다. 생전에 모은 보석의 가치는 당시 청나라가 지고 있던 빚을 다 갚고도 남을 정도였다.

서태후는 수렴청정을 계속하던 중 1889년 광서제가 결혼하자 뜻밖에 황제의 친정을 선포하고 자신은 자금성 북쪽에 초호화판으로 새로 지은 이화원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러나 이것은 외형상의 조치였을 뿐 실제로는 수렴청정이나 다름없었다. 이미 궁궐과 조정에는 서태후의 사람뿐이었고 광서제는 자주 이화원으로 가서 서태후의 지시를 받았기 때문이다. 결국 광서제는 서태후가 있는 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러던 중 1895년 청일전쟁 패배 후 들끓는 여론에 부닥쳐 서태후의 심복인 이홍장이 실각하고 서태후가 이화원에 은거하면서 광서제는 비로소 친정 체제를 시작할 수 있었다.

그 무렵 강유위, 양계초를 비롯한 많은 지식인이 시대에 맞지 않는 법과 제도를 고쳐 나라를 부강하게 하자는 취지로 ‘변법자강운동’을 시작했다. 그들은 부패한 정치를 개혁해 새로운 정치를 실현해야 한다며 ‘변법’ 상소를 광서제에게 끈질기게 올렸다. 광서제는 27살이던 1898년 6월 비상한 마음으로 승부수를 던졌다. ‘무술변법’을 추진한 것이다. 과거제 폐지, 신교육제도 도입, 화폐 통일, 철도 개설 등을 내건 무술변법의 초기 기세는 대단했다.

그러나 개혁 운동은 서태후와 보수파들에 의해 번번이 방해를 받았다. 결국 변법파는 서태후 세력을 몰아내지 않고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판단해 쿠데타를 일으켜 서태후를 유폐하고 광서제의 친정을 실현시킬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군사력이 없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선택한 인물이 ‘신군’을 통괄하고 있는 원세개였다. 그러나 원세개는 변법파가 결코 서태후의 적수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간파하고 변법파의 움직임을 서태후에게 은밀히 알렸다.

그렇지 않아도 광서제와 개혁파의 행보를 못마땅하게 생각하던 서태후는 그때를 기회로 삼았다. 서태후는 1898년 9월 광서제를 유폐하고 그를 도와 변법자강에 나섰던 지식인들을 잡아들여 모조리 처형하는 ‘무술정변’을 일으켰다. 강유위와 양계초 등 일부만 해외로 도피해 목숨을 부지했을 뿐 변법자강운동은 103일 만에 허무하게 끝나고 말았다. 광서제는 이후 10년간 유폐된 채 지냈다. 서태후는 광서제를 유폐하고도 광서제가 총애한 진비를 정치적 걸림돌로 여겨 1900년 우물에 빠뜨려 죽였다.

1900년 의화단 폭동이 일어났을 때는 의화단의 힘을 빌어 서양 세력을 쫓아낼 생각으로 6월 21일 각국에 선전포고를 하는 한편 의화단으로 하여금 북경 내 외국 공사관을 공격하게 했다. 하지만 의화단 폭동은 열강의 개입으로 실패로 끝났다. 서태후는 북경이 열강의 연합군에 함락되기 전인 7월 21일 광서제와 대신들을 데리고 북경을 빠져나가 서안으로 도피했다가 돌아왔다.

 

개혁 군주로서의 업적이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다는 반론도 있어 

광서제는 유폐 중이던 1908년 11월, 원세개가 보낸 보약을 먹고 37세로 의문의 죽음을 맞았다. 광서제의 죽음은 100년 후인 2008년 중국의 과학적인 조사에 의해 비상(비소로 만든 독약)에 의해 독살된 것으로 확인되었다. 광서제가 죽고 이튿날인 11월 15일 서태후도 갓 2살밖에 안된 광서제 동생의 아들 부의(1906~1967)를 선통제로 세우고 73세로 눈을 감았다.

흥미로운 사실은 서태후가 “차후로는 여인이 국정에 간여하는 일은 절대로 없도록 하라. 이는 우리 청조의 가법에도 어긋나는 일이니 엄격한 제한을 가하여 절대로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라”는 유언을 남겼다는 사실이다.

서태후는 사후에 권력에 대한 탐욕이 넘쳐나고 잔인한 여성으로 온갖 비난을 받았다. 그러나 최근에는 서태후에 대한 중상과 비방이 구체적 근거 없이 민간에 퍼졌다는 반론도 있다. 서태후가 수많은 정적을 살해했다지만 대부분의 정적이 여성인 서태후를 얕잡아보고 암살하려 했기 때문에 그 결과로 죽임을 당했다고 주장한다. 숫자도 수십 명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동태후와 자신의 아들 동치제를 독살했다는 주장도 전혀 근거가 없다고 일축한다.

서태후에 대한 세간의 오해가 너무 오랫동안 쌓이다 보니 태평천국운동과 의화단운동, 서구 열강 및 일본과의 전쟁 등 심각한 국가적 위기를 헤쳐 나온 강인한 통치자의 면모나 개혁 군주로서의 업적이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다고 주장한다. 19세기에, 게다가 남성 중심의 유교국가에서 여성이 47년간 통치자였다는 사실은 좋은 의미에서든 나쁜 의미에서든 서태후가 매우 탁월한 인물이었음을 방증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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