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인과 부부 ⑯] 김향안(변동림)과 두 남자… 시인 이상에게는 짧고 뜨거웠던 생의 반려자였고, 화가 김환기에게는 뮤즈이면서 매니저였다
2022년 3월 13일 · zznz
↑ 왼쪽부터 김환기·김향안(1944년)과 이상(1920년대 후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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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지지
시인 이상(1910~1937)과 화가 김환기(1913~1974)는 우리나라 근현대 문학사와 미술사에 한 획을 그은 문화예술인이다. 두 사람을 직접 이어주는 끈은 없으나 각기 다른 시기에 두 사람을 보듬고 끌어안아준 여성이 있으니 김향안(1916~2004)이다. 그는 20살 때는 변동림 이름으로 4개월 동안 천재시인 이상과 뜨거운 청춘을 함께 하고 28살에는 김향안 이름으로 장차 한국 현대미술의 지평을 전 세계로 넓혀나갈 김환기의 뮤즈가 될 운명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변동림 개인사
변동림(1916~2004)은 서울 종로구 송현동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변국선은 구한말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의학을 공부한 엘리트였다. 한일합병 전에는 중추원 참의직을 거쳐 수원 농림학교 교수로 근무했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소실로 들어가 변동욱과 변동림 남매를 낳았다. 변동림 위로는 아버지의 전처 소생인 이복 언니 변동숙이 있었다. 변동숙은 시인 이상의 친구이자 꼽추 화가로 유명한 구본웅의 아버지에게 후처로 갔기 때문에 구본웅의 계모였다.
변동림은 경성여고보(현 경기여고)를 졸업한 뒤 오빠의 도움을 받아 도쿄로 유학을 떠날 생각이었다. 그런데 오빠가 병에 걸려 경제 사정이 여의치 않게 되자 도쿄 유학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할수 없이 프랑스 어학원을 몇 달 다니다 이화여전에 입학, 영문학을 전공했다. 변동림이 이화여전 다닐 때 오빠는 친구가 경영하는 다방 ‘낙랑파라’에서 일을 했다. 낙랑파라는 1930년대 장곡천점(소공동)에서 가장 유명했던 다방으로 박태원 김기림 김소운 구본웅 등 당대 예술가들의 사랑방이었다. 시인 이상도 단골이었다. 변동림에게도 낙랑파라 다방은 신세계여서 커피를 마시러 수시로 드나들었다.
변동림이 20살이던 1936년 어느날 오빠가 “이상이 너 때문에 앓는다”며 만나보라고 권유했다. 당시 이상은 미술계와 문학계에 이름이 제법 알려진 인물이었다. 연작시 ‘오감도’도 2년 전 조선중앙일보에 연재해 파문을 일으킨 유명인이었다. 변동림도 신예 수필가로 문단에 입문한 상태였다. 변동림을 만났을 때 이상은 26살이었다.
■불꽃같았던 이상의 27년 삶
이상은 미술과 문학을 넘나들었던 천재시인
이상(1910~1937)의 본명은 김해경이다. 서울 통인동에서 태어났을 때 집안이 가난해 젖을 떼자마자 자식이 없는 백부의 양자로 들어갔다. 그의 예술적 재능 가운데 먼저 드러난 것은 문학이 아닌 그림이었다. 미술에 대한 소질은 1924년 편입한 보성고보에서 발화했다. 그곳에는 ‘한국 최초의 서양화가’ 고희동이 미술 교사로 재직 중이었다. 이상은 교내 미술전람회에서 유화 ‘풍경’으로 우수상을 받았다.
1926년 보성고보를 졸업하고 경성고등공업학교 건축과에 입학해서는 건축과 교지 ‘난파선’을 만들며 문학으로 관심 영역을 넓혀 미술과 문학을 넘나들었다. 예술적 재능은 조선총독부 건축과 기사로 들어간 1929년부터 다양한 형태로 발현되었다. 1929년 12월 ‘이상’ 필명으로 조선건축회지인 ‘조선과 건축’ 표지 도안 현상모집에서 1등과 3등으로 당선되었고, 1931년 조선미술전람회에 서양화 ‘자화상’으로 입선했다. 1934년에는 조선중앙일보에 연재된 박태원의 중편소설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8.1~9.19) 삽화를 그렸다.
이상의 문학이 처음 활자화된 것은 조선총독부에서 발행하던 ‘조선’지 1930년 2월부터 12월까지 9회에 걸쳐 연재된 장편소설 ‘12월 12일’이었다. 그 후 ‘조선과 건축’ 1931년 7월호에 일어로 쓴 시 ‘이상한 가역반응’ 등이 활자화되면서 시와 소설을 넘나드는 작가가 되었다.
무질서한 독서와 밤샘으로 인한 폐결핵이 괴롭혀
재능을 꽃피우던 그 무렵 이상을 괴롭힌 것은 무질서한 독서와 밤샘으로 인한 폐결핵이었다. 1931년 폐결핵 진단을 받은 후 병세가 더욱 악화하자 1933년 3월 총독부 기사직을 그만두고 황해도 배천온천으로 요양을 떠났다. 그곳 술집에서 만난 기생이 ‘금홍’이다. 이상은 1933년 청진동에 ‘제비’라는 다방을 차리고 금홍을 마담으로 앉혔다. 살림집은 다방 뒷골방에 차렸다. 1936년 9월 ‘조광’지에 발표한 소설 ‘날개’는 이때의 모습을 그린 것이다. 이상은 1934년 7월 24일부터 조선중앙일보에 연작시 ‘오감도’를 연재했다. 예상대로 독자들로부터 “미친 수작”, “정신병자의 잡문” 등의 혹평과 비난이 빗발쳐 ‘오감도’는 8월 8일 15회로 중단되었다. 대신 이상이 얻은 것은 명성이었다.
그러나 일상생활에서는 외도에 눈이 멀어버린 금홍에게 “쓸만한 물건이 하나도 없는 병신”, “돈도 벌어올 줄 모른다”라는 천대를 받은 끝에 2년 만에 금홍과 헤어졌다. 제비 다방도 경영난에 시달리다 1935년 9월 두 해 만에 문을 닫았다. 이후 이상은 인사동에 카페 ‘쓰루(鶴)’, 광교 근처에 다방 ‘69’, 명동에 ‘무기(麥)’ 다방 등을 잇달아 개업했으나 모두 실패했다. 그런 와중에 만난 인물이 변동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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