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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인과 부부 ⑮] 영친왕과 두 여인… 한국인 약혼자 민갑완은 기구한 운명으로 빠져들었고 일본인 배우자 이방자는 ‘역사의 소용돌이’에 몸을 맡겼다

↑고종 황제 일가. 왼쪽부터 영친왕, 순종, 고종, 순종비, 덕혜옹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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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지지

 

구한말 ‘역사의 수레바퀴’에 깔려 의도하지 않은 삶을 살아야 했던 두 여인과 한 남자가 있다. 남자는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 이은(1897~1970)이고 두 여인은 영친왕의 한국인 약혼녀 민갑완(1897~1968) 규수와 영친왕의 황태자비가 된 일본인 이방자(1901~1989) 여사다.

 

■영친왕 가계

영친왕의 이름은 이은이다. 1897년 10월 20일(음력 9월 25일) 고종과 순헌황귀비 엄비 사이에서 태어나 10살에 영친왕으로 봉해졌다. 고종에게는 9남 4녀의 자녀가 있었는데 이 가운데 성인이 될 때까지 살아남은 자녀는 3남 1녀였다. 아들은 순종(1874~1926), 의친왕 이강(1877~1955), 영친왕 이은(1897~1979) 3명이고 딸은 덕혜옹주(1912~1989)가 유일했다. 순종은 정실인 명성황후, 의친왕은 귀인장씨, 영친왕은 후궁 순빈엄씨, 덕혜옹주는 귀인양씨에게서 태어났다. 순종과 의친왕은 영친왕보다 각각 23살, 20살이 많고 여동생 덕혜옹주는 15년 아래다.

고종은 1882년과 1893년 순종과 의친왕을 각각 혼인시키고 1907년 3월 10살인 영친왕의 배필을 간택했다. 그런데 고종이 1907년 6월 일어난 ‘헤이그 밀사 사건’을 빌미 삼은 일제의 강제로 그해 7월 19일 아들 순종에게 왕위를 양위하는 바람에 아들 영친왕의 혼인은 차일피일 미루어졌다.  이런 가운데 영친왕은 자손이 없는 순종의 뒤를 이을 황태제로 8월 7일 책봉되었다. 황자 서열로는 영친왕 이은보다 20살이나 나이가 많은 의친왕 이강이 순종의 다음 서열인데도 영친왕이 황태제로 책봉된 것은 명성황후와 의친왕의 생모 장상궁이 죽고 없는 상황에서 이은의 생모인 순헌황귀비(엄비)가 최고 서열이었기 때문이다. 순종과 의친왕의 나이가 3살밖에 차이 나지 않는것도 작용했다.

■민갑완 간택

1907년 영친왕의 배필로 간택된 여성은 영친왕과 생년월일(1897년 10월 20일)이 같은 서울 출생의 민갑완이었다. 그녀의 할아버지 민석호는 이완용의 외사촌 형이었고 아버지 민영돈은 명성황후의 먼 조카뻘이었다. 민갑완의 배다른 두 언니 중, 둘째 언니는 순종의 계비인 순정효황후 윤비의 큰아버지이자 친일파인 윤덕영의 맏며느리였다. 민갑완이 태자비로 간택된 데에는 이러한 집안 배경이 작용했다. 민갑완에게는 두 남동생이 있었는데 민천식과 민억식은 각각 민갑완보다 9살, 12살 아래였다. 특히 민천식은 누나 민갑완을 평생동안 극진과 희생으로 모시는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아래에서 소개하는 민갑완의 삶은 민갑완의 회고록 ‘백년한(百年恨)’에 근거한 것이다.

민갑완이 초간택을 위해 대궐로 들어간 것은 10살 때이던 1907년 2월이었다. 민갑완은 왕가에서 진행하는 구술시험을 치렀다. 가문의 내력, 어른들의 생신일과 연세, 제삿날까지 물었을 때 민갑완은 흐트러짐없이 대답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초간택을 통과했는데  민갑완은 간택일을 회고록에서 1907년 3월 14일로 기억했으나 조선왕조 고종실록은 1907년 3월 12일자에 ‘영친왕 부인의 초간택이 이뤄졌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날 확정된 간택 대상자 7인의 명단에도 민갑완 이름은 없다. 이후 어떤 과정을 거쳐 민갑완이 황태자비로 최종 간택되었는지는 실록에 나와있지 않으나 어쨌든 민갑완이 최종 간택되어 민갑완 집안은 혼례일이 정해져 내려올 날만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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