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르게이 에이젠슈타인
‘전함 포템킨호’에서 일어난 선상 반란이 영화 소재
1905년 당시, 러시아 최고의 전함은 흑해함대 소속의 ‘포템킨호’였다. 115m의 길이에 승선 인원은 최대 730명이나 되었다. 이 전함에서 선상 반란이 일어난 것은 1905년 6월 27일(러시아력 6월 14일)이었다. 1905년 1월에 일어난 ‘피의 일요일 사건’의 여파가 아직 채 가시지 않고 있을 때, 구더기가 득실거리는 부실한 식사에 항의하는 과정에서 수병 1명이 장교가 쏜 총에 맞아 죽은 것이 발단이었다.
수병들은 반란을 일으켰다. 함장과 장교들 중 일부는 사살하고 일부는 포박해 전함을 장악했다. 죽은 동료의 장례를 치르기 위해 흑해의 오데사항으로 다가가자 시민들이 입항을 환영하며 부두로 몰려나왔다. 그때 차르(황제) 체제의 코사크 기병대가 무차별적으로 총기를 난사해 오데사를 피로 물들게 했다. 차르 군대는 다른 흑해함대를 동원해 포템킨호의 반란을 진압하려 했으나 진압 함대에서도 수병들이 선상 반란을 일으켜 진압에 실패했다.
포템킨호는 육상으로부터 지원이 끊기고 수병들의 의지가 급격히 떨어져 7월 8일 루마니아의 콘스탄차 군항으로 향했다. 수병 중 상당수는 루마니아 정부의 도움을 받아 루마니아 땅에 정착하거나 캐나다·미국·브라질 등으로 이주했다. 러시아로 돌아간 수병들은 사형되거나 강제노동에 처해졌다. 포템킨호 봉기는 봉기 자체보다 세르게이 에이젠슈타인(1898~1948)이 감독한 영화 ‘전함 포템킨’으로 더 많이 알려졌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영화 중 하나로 꼽히는 이 흑백 무성영화는 영화가 무기가 될 수 있고 뛰어난 선동 수단이라는 것을 확인시켜 주었다.
에이젠슈타인은 러시아의 통치를 받는 라트비아 리가의 독일계 유대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1915년 토목학교에 입학하고 1917년 군대에 징집되어 기술자로 복무하던 그의 마음을 빼앗은 것은 장차 그의 스승이 될 프세볼로트 메이예르홀트가 연출한 연극 ‘가면무도회’(1917)였다. 에이젠슈타인은 곧 메이예르홀트의 국립고등 연극실험실에 들어가 연극의 기초를 닦고 러시아 전위예술가 집단의 영향을 폭넓게 받아들이면서 내공을 쌓았다.
1920년 10월 프롤레타리아 문화혁명 극단에 입단한 뒤에는 자신이 연출한 ‘현인’, ‘가스 마스크’ 등의 연극에 자신이 개발한 ‘어트랙션 몽타주’ 이론을 도입해 주목을 받았다. 프랑스어로 ‘조립’, ‘맞춤’이란 뜻의 ‘몽타주’는 빠른 컷과 서로 다른 샷(장면)을 엇물려 편집해 이미지들을 충돌케 함으로써 완전히 새로운 제3의 의미를 만드는 기법이다. 즉 영화는 촬영된다기보다 조립되고 짜 맞추는 것이라는 발상이 몽타주 기법의 핵심이다.
“모든 영화학도가 모사하면서 배워야 할 영화예술의 전형”(데이비드 셀즈닉)
에이젠슈타인은 영화 데뷔작 ‘파업’(1924.4 개봉)에서도 몽타주 기법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파업’의 성공으로 일약 스타덤에 오르자 소비에트 정부가 1925년 러시아혁명 20주년을 기념하는 영화 ‘1905년’ 제작을 의뢰했다. 그래서 완성된 ‘전함 포템킨’은 1925년 12월 21일 모스크바 볼쇼이극장에서 개봉되었다.
에이젠슈타인은 ‘전함 포템킨’에서도 몽타주 기법을 적극 활용해 관객을 영화에 몰입하게 했다. 다가오는 진압군과 도망가는 군중, 군대의 직선적 행진과 군중의 무질서한 움직임, 치켜든 칼과 깨진 안경, 피 흘리는 여인의 얼굴 등을 이어 붙이는 몽타주 편집을 이용해 정치적 메시지를 극대화했다. 특히 공포에 질린 시민들의 얼굴과 차르 군대의 장화가 클로즈업되면서 겹쳐지는 유명한 오데사 계단 학살 장면은 몽타주 기법의 교과서적 장면으로 영화사에 기록되어 있다. 코사크 기병대가 휘두른 칼을 맞고 쓰러진 엄마의 손을 떠난 유모차가 아기의 울부짖음 속에 계단을 구르는 장면은 브라이언 드팔마 감독의 영화 ‘언터쳐블’(1987)을 비롯해 숱한 영화와 광고에서 재현되었다.
영화는 1926년 베를린 공개를 시작으로 세계 각지에서 상영되어 온갖 찬사를 받았다. 나치 독일의 선전상 요제프 괴벨스는 독일 영화인들에게 “우리의 ‘포템킨’을 만들라”고 독촉하고 찰리 채플린은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영화”라고 극찬했다. 미국의 영화제작자 데이비드 셀즈닉은 “모든 영화학도가 배워야 할 영화예술의 전형”이라고 칭송했다.
에이젠슈타인이 새로운 영화를 준비하고 있던 1926년, 이번에는 10월 혁명 10주년을 기념할 영화를 만들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에이젠슈타인은 수천 명의 엑스트라를 동원해 영화 ‘10월’을 완성했으나 영화는 10월 혁명 기념일인 1927년 11월 7일(러시아력) 시사회를 열지 못했다. 시사회가 예정된 그날 스탈린이 불쑥 편집실로 들어와 영화에 등장하는 트로츠키를 삭제하라고 지시를 내려 재편집해야 했기 때문이다. 결국 ‘10월’은 1928년 1월 20일 상영되었으나 ‘전함 포템킨’과 달리 호평을 받지 못했다.
에이젠슈타인의 다음 작품은 농촌의 집단농장화를 그린 ‘전선’이었다. 스탈린은 이번에도 1929년 4월 영화를 보고 강한 불만을 표시했다. 결국 영화는 재편집되었고 제목은 ‘낡은 것과 새로운 것’으로 바뀌었다. 영화도 눈길을 끌지 못했다. 그러던 중 1929년 소비에트 예술의 빙하기가 시작되었다. 특히 영화는 엄격한 통제를 받았다. 이런 시기에 서구의 선진 영화 기술을 배우고 돌아오라며 정부로부터 외국 여행을 허가받은 것은 행운이었다.
영화가 무기가 될 수 있다는 것을 확인시켜준 영화
에이젠슈타인은 유럽의 베를린·취리히·암스테르담·파리·런던을 거쳐 1930년 미국 패러마운트사와 계약을 체결한 후 할리우드로 건너갔다. 하지만 “볼셰비키의 붉은 개”라고 비난하는 미국 보수 언론의 공세로 1930년 10월 계약이 파기되고 비자가 연장되지 않아 미국을 떠나야 했다.
그때 미국의 사회주의 소설가인 업턴 싱클레어가 자금을 대겠다고 해 멕시코로 건너가 1930년 12월 영화 촬영을 시작했다. 하지만 제작비가 감당할 수 없이 늘어나자 싱클레어가 제작을 포기했다. 결국 에이젠슈타인은 영화를 완성하지 못한 채 1932년 5월 미국을 거쳐 소련으로 돌아갔다. 다만 에이젠슈타인이 촬영한 8만m의 필름은 그의 뜻과는 전혀 상관없이 싱클레어에 의해 2편의 단편영화, 5편의 교육영화로 만들어졌다.
싱클레어가 뉴욕현대미술관에 기증한 나머지 필름은 1970년대 중반 소련으로 보내졌다. 러시아 영화감독 그리고리 알렉산드로프는 이 필름을 가지고 에이젠슈타인의 의도에 따라 편집한 ‘멕시코 만세’를 1979년 11월 공개했다. 결과적으로 ‘멕시코 만세’는 아무런 제약이 가해지지 않은 에이젠슈타인의 유일한 영화가 되었다.
1934년 소련에서는 사회주의 리얼리즘이 당의 공식적인 예술 노선으로 공표되었다. 프롤레타리아 작가연맹은 에이젠슈타인을 형식주의자로 비난하고 감시했다. 이 때문에 에이젠슈타인은 우울증에 걸려 한동안 요양소에 칩거했다. 다행히 에이젠슈타인의 첫 유성영화 ‘알렉산드르 넵스키’(1938.11 개봉)를 본 스탈린이 “당신은 정말 훌륭한 볼셰비키야”라고 칭찬하면서 기사회생했다.
그 무렵 그의 동료들이 잇달아 체포되어 사형선고를 받았다. 그의 스승 메이예르홀트도 1939년 6월에 체포되어 사라졌고 스승의 부인은 집에서 살해되었다. 그는 동료·스승의 죽음을 괴로워하면서도 살아남은 자의 두려움에 빠졌다. 결국 당에 충성하는 영화를 칭찬하는 비평을 써야 했다. 그 덕에 1939년 레닌 훈장을 받고 모스필름 예술분과위원장까지 올라 권력자들의 총아가 되었다.
그가 영화 ‘이반 그로즈니(폭군 이반)’ 제안을 받은 것은 1943년이었다. 러시아 제국의 최초 황제인 이반 4세가 러시아 통일전쟁에서 승리한다는 이야기를 다룬 3부작 영화였다. 그는 1943년 4월 촬영을 시작해 1부, 2부, 3부까지 모두 촬영한 뒤 1945년 1월 1부를 개봉했다. 영화는 극찬을 받았고 에이젠슈타인은 1946년 스탈린상을 받았다.
하지만 1946년 2월 심근경색으로 쓰러져 2년간 요양하다가 1948년 2월 11일 모스크바에서 숨을 거뒀다. ‘이반 그로즈니’ 2부는 개봉에 앞서 1946년 8월 볼셰비키 정부가 역사 해석에 문제가 있다며 신랄하게 비난하는 바람에 상영 금지되고 3부 필름은 모두 불태워졌다. 2부는 스탈린이 죽고 5년 뒤인 1958년에 비로소 공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