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이야기

한국 최초 사회주의 정당 ‘한인사회당’ 창당과 이동휘

한인사회당은 한국 최초이자 아시아 최초 사회주의 정당

1918년 3월 아무르강(흑룡강) 강변에 위치한 러시아 하바롭스크에서 조선혁명가대회가 열렸다. 대회에는 이동녕·양기탁·안공근 등 민족주의자들, 이동휘·유동열 등 민족주의적 사회주의자들, 김알렉산드라·오하묵 등 한인 2세 볼셰비키 등이 망라된 독립운동가들이 대거 참석했다.

참석자들은 몇 개월 전 러시아혁명을 통해 정권을 장악한 러시아 볼셰비즘을 받아들일지를 두고 갑론을박했다. 이동휘가 나서 볼셰비키 세력과 연대해 민족해방운동을 전개하자고 제의했으나 양기탁·이동녕 등 구신민회 간부들의 반대로 결론은 내지 못했다. 그러자 이동휘·김립·김알렉산드라·유동열 등 사회주의자들은 별도 모임을 열고 한인 사회주의 정당을 창당하기로 합의했다. 그 결과물이 1918년 5월 13일 결성한 한인사회당이다. 한국 최초이자 아시아 최초로 결성된 사회주의 정당의 중앙위원장으로는 이동휘(1873~1935)가 선임되었다.

이동휘는 함남 단천군에서 태어나 18세 때 단천군수의 시중을 드는 통인으로 발탁되었다. 그러나 단천군수가 주색을 탐하고 폭정을 일삼는 것을 참지 못해 군수의 생일 잔칫날에 화로를 군수의 머리에 뒤엎고 도주했다. 이동휘는 서울에서 군관학교를 졸업한 뒤 궁전 진위대장을 거쳐 강화도 진위대장으로 부임했다. 1907년 고종이 강제로 퇴위했을 때 강화도 군민들이 봉기하자 일제는 이동휘를 배후 조종자로 체포해 4개월간 감옥에 가뒀다. 이동휘는 1907년 12월 석방 후 서북학회와 신민회를 통해 구국 운동을 벌였으며 1911년 3월 안명근·양기탁 사건에 연루되어 인천 앞바다의 섬에서 1년간 유배 생활을 했다.

유배에서 풀려난 후에는 1913년 2월 만주의 북간도로 망명하고 그해 10월 러시아 연해주로 이주했다. 그곳에서 그는 이상설과 함께 연해주와 북간도 지역에서 활동하는 독립운동가들을 규합, 1914년 초 한국 최초의 망명정부인 ‘대한광복군정부’를 세웠다. 이동휘는 이상설에 이어 2대 정도령으로 활동하며 광복전쟁 계획을 지휘했다. 대한광복군정부는 그러나 1914년 8월 1차대전 발발 후 러시아가 전쟁 동맹국인 일본의 요청을 받아들여 모든 항일 민족운동 단체를 탄압하자 치명적인 타격을 받고 해체되었다. 한인 지도자들은 모두 추방되었다.

 

이동휘는 볼셰비키 정권과 연대한 것이지 정통 사회주의자 아냐

이동휘는 러시아의 10월 혁명 후인 1918년 5월 한국 최초의 사회주의 정당인 한인사회당 창당에 적극 동참한 것도 그 일환이었다. 한인사회당은 이동휘·김립 등 민족적 사회주의자들과 러시아혁명 이전에 이주한 한인들의 자녀인 김알렉산드라·오하묵 같은 귀화 2세들의 연합 전선체였다. 이 가운데 한인사회당의 산파역은 김알렉산드라(여성)였다. 그녀는 최초의 한인 볼셰비키 당원으로 하바롭스크 소비에트 외무위원이자 볼셰비키당 책임비서였다. 반면 이동휘는 볼셰비키 정권이 피압박 민족의 해방운동에 지지와 성원을 보냈기 때문에 볼셰비키 정권과 연대한 것이지 정통 사회주의자는 아니었다.

한인사회당은 산하에 조직부, 선전부, 군사부 등 집행부를 두고 교과서와 기관지를 발간했다. 또한 군사학교와 한인적위대를 조직하고 일본군을 상대로 반제반전 선전을 펼쳤다.

그러던 중 1918년 8월 미국·일본·영국·프랑스 등 러시아혁명을 방해하는 열강이 속속 러시아 극동 지역으로 군대를 파병하면서 시베리아와 러시아 극동 지역의 볼셰비키 정권이 수세에 몰렸다. 이 과정에서 이동휘 등은 러시아 내전에 가담하는 것을 반대했으나 김알렉산드라 등 100여 명의 한인적위대는 우수리 전투에 참가해 백군(러시아혁명 반대 세력)과 맞서 싸웠다. 이는 국권 상실 후 재러 한인이 전개한 최초의 무장투쟁이었다.

하지만 결국에는 1918년 11월 하바롭스크가 백군과 열강의 지배 하에 들어가면서 한인사회당 세력은 하바롭스크를 떠나 아무르주(흑룡주)로 이동해야 했다. 김알렉산드라 등 일부 볼셰비키는 백군에 맞서 싸우다 체포·처형되었다. 살아남은 이동휘는 1919년 11월 3일 상해에서 통합 임시정부의 국무총리로 취임한 뒤 한인사회당 본부를 상해로 옮기고 하바롭스크에는 지부를 두었다.

 

한인사회당 지부와 고려공산당 중앙총회 2개 세력 병존

그 무렵 러시아 적군이 시베리아의 중심지이자 바이칼호의 서쪽에 위치한 이르쿠츠크를 점령(1920.1)했다. 그러자 적군 부대에 소속된 수십 명의 한국인이 1920년 1월 22일 오하묵·김철훈 등을 중심으로 이르쿠츠크에서 이르쿠츠크 공산당 한인 지부를 조직했다. 다른 지역의 한인 공산주의자들도 이르쿠츠크로 모여들어 규모가 커지자 이들은 1920년 9월 자신들을 ‘고려공산당 중앙총회’라고 칭했다. 이로써 러시아에는 상해를 본부로 둔 한인사회당 지부와 고려공산당 중앙총회 이렇게 2개의 세력이 병존했다.

한편 상해 임정의 국무총리로 활동하던 이동휘는 이승만의 독재적인 운영과 무장투쟁 포기 노선을 비판하면서 대통령 권한 축소를 요구했다. 하지만 의정원에서 부결되자 국무총리직을 사임하고 1921년 1월 24일 임시정부에서 탈퇴했다. 이로써 1919년 11월 이동휘의 국무총리 취임 후 좌우 연합의 민족통일전선적 성격을 띠었던 상해 임정은 이승만·이동녕·이시영 등 우파 일색으로 바뀌었다.

한인사회당 지부와 고려공산당 중앙총회 두 세력 간에 힘의 우열이 생긴 것은 1921년 1월 코민테른(국제공산주의 조직) 본부가 이르쿠츠크에 동양비서부를 설치하고 초대 부장에 보리스 슈미아츠키를 임명하면서였다. 강경파 볼셰비키였던 슈미아츠키는 이동휘를 민족주의자, 상해의 한인사회당을 민족주의적 성향의 정당으로 분류하고 이르쿠츠크 공산당 한인부만 진정한 볼셰비키라며 신뢰하고 지원했다.

슈미아츠키는 시베리아 안의 모든 고려인 빨치산 부대들이 자기 통제 하에 있는 소비에트 사령부(소련 적위군 제5군단)에 예속되어야 한다며 1921년 4월 임시고려혁명군정의회를 조직했다. 의장에는 갈란다라시윌린, 부사령관에는 오하묵을 임명했다.

이르쿠츠크 공산당의 한인 공산주의자들은 자신들에게 유리해진 국면을 이용해 1921년 5월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을 창당했다. 이동휘도 수일 뒤 상해에서 같은 이름의 고려공산당 창당대회를 열고 위원장이 되었다. 이처럼 한국 공산주의 운동의 시작은 두 파가 모두 해외에서 결성되었다는 특징이 있다.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 자유시참변(흑하사변) 후 틈 더욱 벌어져

두 파는 이름만 같을 뿐 정책 노선과 성격에서는 차이가 컸다. 상해파 고려공산당의 궁극적인 목적도 사회주의 혁명이긴 했지만 1차 목적은 민족해방운동이었다. 상해파는 민족주의자에서 사회주의자로 변신한 사람들이 중심을 이뤄 지지층이 두터웠다. 반면 이르쿠츠크파는 러시아혁명과 볼셰비키 운동에 적극 가담한 세력이 주도했다. 상해파에 비해 당원과 지지층이 열세였고 코민테른에 예속적이었다. 민족적 자주성도 거의 없었다. 양파 간에는 이처럼 많은 차이가 있어 분열과 대립의 소지가 컸다.

이런 가운데 코민테른 동양비서부와 이르쿠츠크파의 고려혁명군정의회가 시베리아 내 민족주의 독립군 부대들과 빨치산 부대들의 군권을 장악할 목적으로 1921년 6월 28일 이동휘를 지지하는 사할린의용대 등 독립군 부대의 무장해제를 강행했다. 사할린부대 등이 저항하는 과정에서 300여 명이 죽고 250여 명이 행방불명되는 자유시참변(흑하사변)이 일어났다.

이후 틈이 더욱 벌어진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 양파는 모스크바에서 열린 코민테른 대회에 참가해 서로 자파를 승인해줄 것을 요청했다. 상해의 고려공산당은 이동휘·박진순·홍도를 파견했다. 이들은 1921년 10월 레닌그라드에 도착, 레닌 등 볼셰비키 지도자들을 면담하고 자유시참변을 비롯해 슈미아츠키와 이르쿠츠크파의 불법 활동과 전횡을 고발했다. 이것을 검토한 코민테른의 결정에 따라 이르쿠츠크 감옥에 갇혀 있던 상해파 당간부들과 자유시참변 당시 체포된 병사들이 석방되었다. 코민테른은 또한 1922년 8월 자유시참변과 혁명 사업 등에서 나타난 실책 책임을 물어 슈미아츠키를 전출시키고 2개월 뒤 동양비서부도 해체했다.

이처럼 이르쿠츠크파의 세력이 급속히 약화된 가운데 1922년 10월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를 통합하기 위한 고려공산당 연합대회가 베르흐네우딘스크에서 열렸다. 대회는 이동휘 등 다수 상해파가 통합고려공산당의 중앙위원으로 선출되는 등 사실상 상해파의 독무대로 전개되었다. 그러자 이르쿠츠크파가 중도에 대회장을 벗어나 이르쿠츠크 동쪽 600㎞에 위치한 치타로 철수했다.

 

소련, 코민테른 산하에 ‘꼬르뷰로(고려국)’ 설치해 원격 통치 시작

상해파는 이처럼 주도권을 장악하게 되자 코민테른이 상해파를 한인 유일의 공산당으로 승인해 줄 것을 기대했다. 그러나 1922년 12월 시베리아의 사정이 복잡하게 전개되면서 기대대로 되지 않았다. 1922년 12월 연해주까지 통치력이 미치는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소련)이 선포됨에 따라 소련 입장에서는 일본군을 연해주에서 몰아내기 위해 필요했던 한국의 독립군 단체가 더 이상 필요하지 않게 된 것이다. 코민테른은 이동휘가 정통 볼셰비키가 아니라는 점도 감안해 이르쿠츠크파가 거부한 당을 한인 유일의 공산당으로 인정할 수 없었다.

코민테른은 통합 고려공산당을 승인하지 않고 1922년 12월 코민테른 극동부 산하에 ‘꼬르뷰로(고려국)’를 설치해 원격 통치에 들어갔다. 이동휘 등은 통합 고려공산당을 결성하고도 다시 코민테른에 당을 빼앗기고 코민테른 극동부의 지시를 받아야 하는 4인 위원 중의 한 명으로 전락했다. 1923년 1월부터는 코민테른 꼬르뷰로가 한국 사회주의·공산주의 운동 전반을 직접 지휘하면서 자생적으로 발전해온 해외 한인 사회주의 운동도 종말을 고했다.

이동휘는 말년에 연해주 지역의 ‘모프르(국제혁명가후원회)’ 위원으로 활동했다. 모프르의 주요 목적은 혁명 운동 과정에서 희생되고 고통받는 혁명가와 그 가족들을 후원하기 위한 모금과 선전 활동이었다. 모프르 위원회는 이동휘의 열성적인 활동과 공적을 인정해 1932년 10월 하바롭스크에서 열린 모프르 열성자대회에서 이동휘에게 훈장을 수여하는 등 여러 차례 표창했다. 하지만 독감에 걸려 1935년 1월 31일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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