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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진-나훈아 숙명의 라이벌 대결

가요역사상 그때처럼 꽃 활짝 피우고 황금시대 구가했던 시기는 일찍이 없어 남진(1945~ )의 당초 꿈은 영화배우였다. 그러나 목포고를 졸업하고 한양대 연극영화과에 입학한 그에게 먼저 찾아온 기회는 가수였다. 대학 1학년 때 작곡가 한동훈의 문하로 들어가 2년 동안의 연습을 거쳐 1965년 ‘서울 플레이보이’로 데뷔했다. 하지만 데뷔 1집은 처참하게 실패했다. 남진은 다시 작곡가 김영광과 손을 잡고 도시적인 미남형의 외모를 무기로 1967년 ‘울려고 내가 왔나’, ‘사랑하고...

전태일 “내 죽음 헛되이 말라”며 분신 자살

16살 때 평화시장에서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보고 말아 가난했던 그 시절, 이 땅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랬듯 전태일(1948~1970)도 어려서부터 극빈의 삶을 살았다. 대구에서 태어나 6·25전쟁 때 아버지 손을 잡고 부산으로 피난을 갔으나 먹고 살 일이 막막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전태일의 가족이 낯선 서울역에 내린 것은 전태일의 나이 6살 때인 1954년이었다. 서울 생활은 고달팠다. 경제적으로 무능한 아버지는 폭음과 주정을 일삼았고 어머니는 병이 들었다. 전태일은 결국...

새마을운동 시작

새마을운동 시작

농촌 잘살기 캠페인을 넘어 국민 의식개혁 운동이자 사회운동 1969년 8월 4일 경상남도의 수해복구 현장을 시찰하기 위해 부산으로 가던 박정희 대통령이 갑자기 경부선 철도변에 위치한 경북 청도군 청도읍 신도1리 마을 어귀에서 특별열차를 멈추게 했다. 마을의 울창한 산림과 말끔하게 개량된 지붕, 잘 닦인 마을 안길 등이 박 대통령의 눈길을 사로잡았기 때문이다. 비결을 묻자 마을 주민들은 “살기 좋은 마을을 만들어보자고 마을 총회에서 결의한 후 서로 자진해서 협동한 결과였다”고...

김현옥 서울시장 부임

무슨 일이건 결심만 서면 저돌적으로 밀어붙이는 돌격대장 1960년대 들어 서울의 인구가 급증했다. 1960년 244만 명이던 인구가 불과 6년 만인 1966년 379만 명으로 늘어났으니 서울은 가히 초만원이었다. 인구가 이처럼 급격하게 불어나는데도 공간은 6․25 전쟁 전후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도로는 좁은 데다 그것마저 느려터진 전차가 점거해버리고 보행자들의 무단횡단으로 자동차는 제 속도를 내지 못했다. 한마디로 무질서의 시대였다. 이처럼 서울시 전체가 열악한 도로 사정과...

베트남전 ‘케산 전투’와 ‘테트 공세’

 ‘케산 전투’와 ‘테트 공세’, 베트남전 흐름 바꾼 분수령 1968년의 ‘케산 전투’와 ‘테트 공세’는 베트남전의 흐름을 바꾼 분수령이었다. 케산 전투는 1968년 1월 21일 새벽, ‘호찌민 루트’를 따라 내려온 2만 명 규모의 북베트남 정규군이 미 해병대 3500명과 남베트남 특수부대 2100명이 지키고 있는 케산을 향해 장거리포를 쏘아대면서 시작되었다. 케산은 남북 베트남의 비무장지대 부근 남쪽에 위치한 곳으로, 1962년 미 공수부대 1개 중대가 북베트남 병력과...

무구정광다라니경 불국사 석가탑에서 발견

사리함 속에서 1200여 년 동안 깊은 잠을 자다가 발견돼 천년을 버텨온 불국사 석가탑에게 1966년은 수난의 해였다. 도굴범들이 9월 3일과 4일 두 차례나 헤집어 금이 간 데다 탑을 보수하면서 생긴 상처가 너무나 컸기 때문이다. 9월 6일 아침 불국사 뜰을 쓸던 스님이 탑신이 기울어져 있고 탑에 금이 간 사실을 발견했으나 시찰 측은 그것이 도굴에 의한 것이라는 사실을 미처 알지 못하고 막연히 풍화작용에 의한 자연 마멸이나 지진에 의한 충격 정도로만 생각했다. 며칠 후 도굴...

일본 적군파 ‘아사마 산장’ 인질극

1968년 1월의 베트남전 반전운동과 미 항모 엔터프라이즈 기항저지 투쟁, 1969년 1월의 도쿄대 야스당 강당 공방전 등으로 맹위를 떨치던 일본 학생운동이 소수화․과격화로 내몰리면서 다시 쇠퇴의 기미를 보이고 있을 때 일본의 학생운동권이 주목한 것은, “혁명은 조직된 폭력 즉 훈련된 군에 의해서만 달성된다”는 교토대생 시오미 다카야의 무장투쟁 노선이었다. 무장투쟁 노선을 지지하는 관서파와 이에 반대하는 관동파가 대립한 끝에 관서파가 결국 당 중앙위에서 제명당했다. 관서파는...

미 해병대, 일본의 이오지마섬 상륙

일본 도쿄 남쪽 약 1200㎞ 지점에 위치한 오가사와라(小笠原) 열도의 화산섬 이오지마(硫黃島). 태평양전쟁이 종전으로 치닫던 1945년 2월 19일, 미 함대의 맹렬한 함포사격과 함께 미 해병대가 이 섬에 상륙했다. 4일 간의 공방전이 지나고 태평양전쟁 중에서도 최악의 날로 기록된 2월23일, 산의 모습을 바꿀 정도의 맹폭으로 마침내 산 정상 스리바치산이 미군에 함락되었다. 이 전투로 일본군은 거의 90%에 가까운 1만 9900여 명이 옥쇄하고, 미군은 6800여 명이...

원자폭탄의 아버지 오펜하이머 사망

“각하 제 손에 피가 흐르는 것 같습니다” 39세(1943년) 나이로 미국 로스알라모스 연구소장에 올라 원자폭탄 개발을 주도했던 ‘원자폭탄의 아버지’ 로버트 오펜하이머가 전쟁 후 트루먼 대통령을 만난 자리에서 양심의 가책을 이렇게 호소했다. 인류최초로 대량 살상무기를 개발하고 그로인해 인류가 죽어가는 것을 지켜보아야 했던 오펜하이머. 참회하려 했지만 때가 너무 늦어서였을까. 원자력의 국제관리를 주장하며 원폭 제조금지와 사찰을...

한국최초의 상설 영화관 ‘경성고등연예관’ 개관

우리나라에서 영화가 처음 상영된 시점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1897년 일본인 거류민을 상대로 한 본정좌(本町座), ‘중국인의 가건물 한 개를 3일간 빌려 영화를 상영했다’는 1897년 10월 19일자 런던타임즈 기사, 1899년 미국인 여행가 버튼 홈스 일행이 고종 황제에게 영화를 보여주었다는 기행문 등을 예로들며 전문가마다 ‘최초’를 달리 소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1903년 6월 23일자 황성신문에 ‘한성전기회사 기계창에서 활동사진을...

남진-나훈아 숙명의 라이벌 대결

가요역사상 그때처럼 꽃 활짝 피우고 황금시대 구가했던 시기는 일찍이 없어 남진(1945~ )의 당초 꿈은 영화배우였다. 그러나 목포고를 졸업하고 한양대 연극영화과에 입학한 그에게 먼저 찾아온 기회는 가수였다. 대학 1학년 때 작곡가 한동훈의 문하로 들어가 2년 동안의 연습을 거쳐 1965년 ‘서울 플레이보이’로 데뷔했다. 하지만 데뷔 1집은 처참하게 실패했다. 남진은 다시 작곡가 김영광과 손을 잡고 도시적인 미남형의 외모를 무기로 1967년 ‘울려고 내가 왔나’, ‘사랑하고...

전태일 “내 죽음 헛되이 말라”며 분신 자살

16살 때 평화시장에서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보고 말아 가난했던 그 시절, 이 땅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랬듯 전태일(1948~1970)도 어려서부터 극빈의 삶을 살았다. 대구에서 태어나 6·25전쟁 때 아버지 손을 잡고 부산으로 피난을 갔으나 먹고 살 일이 막막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전태일의 가족이 낯선 서울역에 내린 것은 전태일의 나이 6살 때인 1954년이었다. 서울 생활은 고달팠다. 경제적으로 무능한 아버지는 폭음과 주정을 일삼았고 어머니는 병이 들었다. 전태일은 결국...

새마을운동 시작

새마을운동 시작

농촌 잘살기 캠페인을 넘어 국민 의식개혁 운동이자 사회운동 1969년 8월 4일 경상남도의 수해복구 현장을 시찰하기 위해 부산으로 가던 박정희 대통령이 갑자기 경부선 철도변에 위치한 경북 청도군 청도읍 신도1리 마을 어귀에서 특별열차를 멈추게 했다. 마을의 울창한 산림과 말끔하게 개량된 지붕, 잘 닦인 마을 안길 등이 박 대통령의 눈길을 사로잡았기 때문이다. 비결을 묻자 마을 주민들은 “살기 좋은 마을을 만들어보자고 마을 총회에서 결의한 후 서로 자진해서 협동한 결과였다”고...

김현옥 서울시장 부임

무슨 일이건 결심만 서면 저돌적으로 밀어붙이는 돌격대장 1960년대 들어 서울의 인구가 급증했다. 1960년 244만 명이던 인구가 불과 6년 만인 1966년 379만 명으로 늘어났으니 서울은 가히 초만원이었다. 인구가 이처럼 급격하게 불어나는데도 공간은 6․25 전쟁 전후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도로는 좁은 데다 그것마저 느려터진 전차가 점거해버리고 보행자들의 무단횡단으로 자동차는 제 속도를 내지 못했다. 한마디로 무질서의 시대였다. 이처럼 서울시 전체가 열악한 도로 사정과...

베트남전 ‘케산 전투’와 ‘테트 공세’

 ‘케산 전투’와 ‘테트 공세’, 베트남전 흐름 바꾼 분수령 1968년의 ‘케산 전투’와 ‘테트 공세’는 베트남전의 흐름을 바꾼 분수령이었다. 케산 전투는 1968년 1월 21일 새벽, ‘호찌민 루트’를 따라 내려온 2만 명 규모의 북베트남 정규군이 미 해병대 3500명과 남베트남 특수부대 2100명이 지키고 있는 케산을 향해 장거리포를 쏘아대면서 시작되었다. 케산은 남북 베트남의 비무장지대 부근 남쪽에 위치한 곳으로, 1962년 미 공수부대 1개 중대가 북베트남 병력과...

무구정광다라니경 불국사 석가탑에서 발견

사리함 속에서 1200여 년 동안 깊은 잠을 자다가 발견돼 천년을 버텨온 불국사 석가탑에게 1966년은 수난의 해였다. 도굴범들이 9월 3일과 4일 두 차례나 헤집어 금이 간 데다 탑을 보수하면서 생긴 상처가 너무나 컸기 때문이다. 9월 6일 아침 불국사 뜰을 쓸던 스님이 탑신이 기울어져 있고 탑에 금이 간 사실을 발견했으나 시찰 측은 그것이 도굴에 의한 것이라는 사실을 미처 알지 못하고 막연히 풍화작용에 의한 자연 마멸이나 지진에 의한 충격 정도로만 생각했다. 며칠 후 도굴...

일본 적군파 ‘아사마 산장’ 인질극

1968년 1월의 베트남전 반전운동과 미 항모 엔터프라이즈 기항저지 투쟁, 1969년 1월의 도쿄대 야스당 강당 공방전 등으로 맹위를 떨치던 일본 학생운동이 소수화․과격화로 내몰리면서 다시 쇠퇴의 기미를 보이고 있을 때 일본의 학생운동권이 주목한 것은, “혁명은 조직된 폭력 즉 훈련된 군에 의해서만 달성된다”는 교토대생 시오미 다카야의 무장투쟁 노선이었다. 무장투쟁 노선을 지지하는 관서파와 이에 반대하는 관동파가 대립한 끝에 관서파가 결국 당 중앙위에서 제명당했다. 관서파는...

미 해병대, 일본의 이오지마섬 상륙

일본 도쿄 남쪽 약 1200㎞ 지점에 위치한 오가사와라(小笠原) 열도의 화산섬 이오지마(硫黃島). 태평양전쟁이 종전으로 치닫던 1945년 2월 19일, 미 함대의 맹렬한 함포사격과 함께 미 해병대가 이 섬에 상륙했다. 4일 간의 공방전이 지나고 태평양전쟁 중에서도 최악의 날로 기록된 2월23일, 산의 모습을 바꿀 정도의 맹폭으로 마침내 산 정상 스리바치산이 미군에 함락되었다. 이 전투로 일본군은 거의 90%에 가까운 1만 9900여 명이 옥쇄하고, 미군은 6800여 명이...

원자폭탄의 아버지 오펜하이머 사망

“각하 제 손에 피가 흐르는 것 같습니다” 39세(1943년) 나이로 미국 로스알라모스 연구소장에 올라 원자폭탄 개발을 주도했던 ‘원자폭탄의 아버지’ 로버트 오펜하이머가 전쟁 후 트루먼 대통령을 만난 자리에서 양심의 가책을 이렇게 호소했다. 인류최초로 대량 살상무기를 개발하고 그로인해 인류가 죽어가는 것을 지켜보아야 했던 오펜하이머. 참회하려 했지만 때가 너무 늦어서였을까. 원자력의 국제관리를 주장하며 원폭 제조금지와 사찰을...

한국최초의 상설 영화관 ‘경성고등연예관’ 개관

우리나라에서 영화가 처음 상영된 시점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1897년 일본인 거류민을 상대로 한 본정좌(本町座), ‘중국인의 가건물 한 개를 3일간 빌려 영화를 상영했다’는 1897년 10월 19일자 런던타임즈 기사, 1899년 미국인 여행가 버튼 홈스 일행이 고종 황제에게 영화를 보여주었다는 기행문 등을 예로들며 전문가마다 ‘최초’를 달리 소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1903년 6월 23일자 황성신문에 ‘한성전기회사 기계창에서 활동사진을...

남진-나훈아 숙명의 라이벌 대결

가요역사상 그때처럼 꽃 활짝 피우고 황금시대 구가했던 시기는 일찍이 없어 남진(1945~ )의 당초 꿈은 영화배우였다. 그러나 목포고를 졸업하고 한양대 연극영화과에 입학한 그에게 먼저 찾아온 기회는 가수였다. 대학 1학년 때 작곡가 한동훈의 문하로 들어가 2년 동안의 연습을 거쳐 1965년 ‘서울 플레이보이’로 데뷔했다. 하지만 데뷔 1집은 처참하게 실패했다. 남진은 다시 작곡가 김영광과 손을 잡고 도시적인 미남형의 외모를 무기로 1967년 ‘울려고 내가 왔나’, ‘사랑하고...

전태일 “내 죽음 헛되이 말라”며 분신 자살

16살 때 평화시장에서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보고 말아 가난했던 그 시절, 이 땅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랬듯 전태일(1948~1970)도 어려서부터 극빈의 삶을 살았다. 대구에서 태어나 6·25전쟁 때 아버지 손을 잡고 부산으로 피난을 갔으나 먹고 살 일이 막막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전태일의 가족이 낯선 서울역에 내린 것은 전태일의 나이 6살 때인 1954년이었다. 서울 생활은 고달팠다. 경제적으로 무능한 아버지는 폭음과 주정을 일삼았고 어머니는 병이 들었다. 전태일은 결국...

새마을운동 시작

새마을운동 시작

농촌 잘살기 캠페인을 넘어 국민 의식개혁 운동이자 사회운동 1969년 8월 4일 경상남도의 수해복구 현장을 시찰하기 위해 부산으로 가던 박정희 대통령이 갑자기 경부선 철도변에 위치한 경북 청도군 청도읍 신도1리 마을 어귀에서 특별열차를 멈추게 했다. 마을의 울창한 산림과 말끔하게 개량된 지붕, 잘 닦인 마을 안길 등이 박 대통령의 눈길을 사로잡았기 때문이다. 비결을 묻자 마을 주민들은 “살기 좋은 마을을 만들어보자고 마을 총회에서 결의한 후 서로 자진해서 협동한 결과였다”고...

김현옥 서울시장 부임

무슨 일이건 결심만 서면 저돌적으로 밀어붙이는 돌격대장 1960년대 들어 서울의 인구가 급증했다. 1960년 244만 명이던 인구가 불과 6년 만인 1966년 379만 명으로 늘어났으니 서울은 가히 초만원이었다. 인구가 이처럼 급격하게 불어나는데도 공간은 6․25 전쟁 전후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도로는 좁은 데다 그것마저 느려터진 전차가 점거해버리고 보행자들의 무단횡단으로 자동차는 제 속도를 내지 못했다. 한마디로 무질서의 시대였다. 이처럼 서울시 전체가 열악한 도로 사정과...

베트남전 ‘케산 전투’와 ‘테트 공세’

 ‘케산 전투’와 ‘테트 공세’, 베트남전 흐름 바꾼 분수령 1968년의 ‘케산 전투’와 ‘테트 공세’는 베트남전의 흐름을 바꾼 분수령이었다. 케산 전투는 1968년 1월 21일 새벽, ‘호찌민 루트’를 따라 내려온 2만 명 규모의 북베트남 정규군이 미 해병대 3500명과 남베트남 특수부대 2100명이 지키고 있는 케산을 향해 장거리포를 쏘아대면서 시작되었다. 케산은 남북 베트남의 비무장지대 부근 남쪽에 위치한 곳으로, 1962년 미 공수부대 1개 중대가 북베트남 병력과...

무구정광다라니경 불국사 석가탑에서 발견

사리함 속에서 1200여 년 동안 깊은 잠을 자다가 발견돼 천년을 버텨온 불국사 석가탑에게 1966년은 수난의 해였다. 도굴범들이 9월 3일과 4일 두 차례나 헤집어 금이 간 데다 탑을 보수하면서 생긴 상처가 너무나 컸기 때문이다. 9월 6일 아침 불국사 뜰을 쓸던 스님이 탑신이 기울어져 있고 탑에 금이 간 사실을 발견했으나 시찰 측은 그것이 도굴에 의한 것이라는 사실을 미처 알지 못하고 막연히 풍화작용에 의한 자연 마멸이나 지진에 의한 충격 정도로만 생각했다. 며칠 후 도굴...

일본 적군파 ‘아사마 산장’ 인질극

1968년 1월의 베트남전 반전운동과 미 항모 엔터프라이즈 기항저지 투쟁, 1969년 1월의 도쿄대 야스당 강당 공방전 등으로 맹위를 떨치던 일본 학생운동이 소수화․과격화로 내몰리면서 다시 쇠퇴의 기미를 보이고 있을 때 일본의 학생운동권이 주목한 것은, “혁명은 조직된 폭력 즉 훈련된 군에 의해서만 달성된다”는 교토대생 시오미 다카야의 무장투쟁 노선이었다. 무장투쟁 노선을 지지하는 관서파와 이에 반대하는 관동파가 대립한 끝에 관서파가 결국 당 중앙위에서 제명당했다. 관서파는...

미 해병대, 일본의 이오지마섬 상륙

일본 도쿄 남쪽 약 1200㎞ 지점에 위치한 오가사와라(小笠原) 열도의 화산섬 이오지마(硫黃島). 태평양전쟁이 종전으로 치닫던 1945년 2월 19일, 미 함대의 맹렬한 함포사격과 함께 미 해병대가 이 섬에 상륙했다. 4일 간의 공방전이 지나고 태평양전쟁 중에서도 최악의 날로 기록된 2월23일, 산의 모습을 바꿀 정도의 맹폭으로 마침내 산 정상 스리바치산이 미군에 함락되었다. 이 전투로 일본군은 거의 90%에 가까운 1만 9900여 명이 옥쇄하고, 미군은 6800여 명이...

원자폭탄의 아버지 오펜하이머 사망

“각하 제 손에 피가 흐르는 것 같습니다” 39세(1943년) 나이로 미국 로스알라모스 연구소장에 올라 원자폭탄 개발을 주도했던 ‘원자폭탄의 아버지’ 로버트 오펜하이머가 전쟁 후 트루먼 대통령을 만난 자리에서 양심의 가책을 이렇게 호소했다. 인류최초로 대량 살상무기를 개발하고 그로인해 인류가 죽어가는 것을 지켜보아야 했던 오펜하이머. 참회하려 했지만 때가 너무 늦어서였을까. 원자력의 국제관리를 주장하며 원폭 제조금지와 사찰을...

한국최초의 상설 영화관 ‘경성고등연예관’ 개관

우리나라에서 영화가 처음 상영된 시점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1897년 일본인 거류민을 상대로 한 본정좌(本町座), ‘중국인의 가건물 한 개를 3일간 빌려 영화를 상영했다’는 1897년 10월 19일자 런던타임즈 기사, 1899년 미국인 여행가 버튼 홈스 일행이 고종 황제에게 영화를 보여주었다는 기행문 등을 예로들며 전문가마다 ‘최초’를 달리 소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1903년 6월 23일자 황성신문에 ‘한성전기회사 기계창에서 활동사진을...

남진-나훈아 숙명의 라이벌 대결

가요역사상 그때처럼 꽃 활짝 피우고 황금시대 구가했던 시기는 일찍이 없어 남진(1945~ )의 당초 꿈은 영화배우였다. 그러나 목포고를 졸업하고 한양대 연극영화과에 입학한 그에게 먼저 찾아온 기회는 가수였다. 대학 1학년 때 작곡가 한동훈의 문하로 들어가 2년 동안의 연습을 거쳐 1965년 ‘서울 플레이보이’로 데뷔했다. 하지만 데뷔 1집은 처참하게 실패했다. 남진은 다시 작곡가 김영광과 손을 잡고 도시적인 미남형의 외모를 무기로 1967년 ‘울려고 내가 왔나’, ‘사랑하고...

전태일 “내 죽음 헛되이 말라”며 분신 자살

16살 때 평화시장에서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보고 말아 가난했던 그 시절, 이 땅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랬듯 전태일(1948~1970)도 어려서부터 극빈의 삶을 살았다. 대구에서 태어나 6·25전쟁 때 아버지 손을 잡고 부산으로 피난을 갔으나 먹고 살 일이 막막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전태일의 가족이 낯선 서울역에 내린 것은 전태일의 나이 6살 때인 1954년이었다. 서울 생활은 고달팠다. 경제적으로 무능한 아버지는 폭음과 주정을 일삼았고 어머니는 병이 들었다. 전태일은 결국...

새마을운동 시작

새마을운동 시작

농촌 잘살기 캠페인을 넘어 국민 의식개혁 운동이자 사회운동 1969년 8월 4일 경상남도의 수해복구 현장을 시찰하기 위해 부산으로 가던 박정희 대통령이 갑자기 경부선 철도변에 위치한 경북 청도군 청도읍 신도1리 마을 어귀에서 특별열차를 멈추게 했다. 마을의 울창한 산림과 말끔하게 개량된 지붕, 잘 닦인 마을 안길 등이 박 대통령의 눈길을 사로잡았기 때문이다. 비결을 묻자 마을 주민들은 “살기 좋은 마을을 만들어보자고 마을 총회에서 결의한 후 서로 자진해서 협동한 결과였다”고...

김현옥 서울시장 부임

무슨 일이건 결심만 서면 저돌적으로 밀어붙이는 돌격대장 1960년대 들어 서울의 인구가 급증했다. 1960년 244만 명이던 인구가 불과 6년 만인 1966년 379만 명으로 늘어났으니 서울은 가히 초만원이었다. 인구가 이처럼 급격하게 불어나는데도 공간은 6․25 전쟁 전후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도로는 좁은 데다 그것마저 느려터진 전차가 점거해버리고 보행자들의 무단횡단으로 자동차는 제 속도를 내지 못했다. 한마디로 무질서의 시대였다. 이처럼 서울시 전체가 열악한 도로 사정과...

베트남전 ‘케산 전투’와 ‘테트 공세’

 ‘케산 전투’와 ‘테트 공세’, 베트남전 흐름 바꾼 분수령 1968년의 ‘케산 전투’와 ‘테트 공세’는 베트남전의 흐름을 바꾼 분수령이었다. 케산 전투는 1968년 1월 21일 새벽, ‘호찌민 루트’를 따라 내려온 2만 명 규모의 북베트남 정규군이 미 해병대 3500명과 남베트남 특수부대 2100명이 지키고 있는 케산을 향해 장거리포를 쏘아대면서 시작되었다. 케산은 남북 베트남의 비무장지대 부근 남쪽에 위치한 곳으로, 1962년 미 공수부대 1개 중대가 북베트남 병력과...

무구정광다라니경 불국사 석가탑에서 발견

사리함 속에서 1200여 년 동안 깊은 잠을 자다가 발견돼 천년을 버텨온 불국사 석가탑에게 1966년은 수난의 해였다. 도굴범들이 9월 3일과 4일 두 차례나 헤집어 금이 간 데다 탑을 보수하면서 생긴 상처가 너무나 컸기 때문이다. 9월 6일 아침 불국사 뜰을 쓸던 스님이 탑신이 기울어져 있고 탑에 금이 간 사실을 발견했으나 시찰 측은 그것이 도굴에 의한 것이라는 사실을 미처 알지 못하고 막연히 풍화작용에 의한 자연 마멸이나 지진에 의한 충격 정도로만 생각했다. 며칠 후 도굴...

일본 적군파 ‘아사마 산장’ 인질극

1968년 1월의 베트남전 반전운동과 미 항모 엔터프라이즈 기항저지 투쟁, 1969년 1월의 도쿄대 야스당 강당 공방전 등으로 맹위를 떨치던 일본 학생운동이 소수화․과격화로 내몰리면서 다시 쇠퇴의 기미를 보이고 있을 때 일본의 학생운동권이 주목한 것은, “혁명은 조직된 폭력 즉 훈련된 군에 의해서만 달성된다”는 교토대생 시오미 다카야의 무장투쟁 노선이었다. 무장투쟁 노선을 지지하는 관서파와 이에 반대하는 관동파가 대립한 끝에 관서파가 결국 당 중앙위에서 제명당했다. 관서파는...

미 해병대, 일본의 이오지마섬 상륙

일본 도쿄 남쪽 약 1200㎞ 지점에 위치한 오가사와라(小笠原) 열도의 화산섬 이오지마(硫黃島). 태평양전쟁이 종전으로 치닫던 1945년 2월 19일, 미 함대의 맹렬한 함포사격과 함께 미 해병대가 이 섬에 상륙했다. 4일 간의 공방전이 지나고 태평양전쟁 중에서도 최악의 날로 기록된 2월23일, 산의 모습을 바꿀 정도의 맹폭으로 마침내 산 정상 스리바치산이 미군에 함락되었다. 이 전투로 일본군은 거의 90%에 가까운 1만 9900여 명이 옥쇄하고, 미군은 6800여 명이...

원자폭탄의 아버지 오펜하이머 사망

“각하 제 손에 피가 흐르는 것 같습니다” 39세(1943년) 나이로 미국 로스알라모스 연구소장에 올라 원자폭탄 개발을 주도했던 ‘원자폭탄의 아버지’ 로버트 오펜하이머가 전쟁 후 트루먼 대통령을 만난 자리에서 양심의 가책을 이렇게 호소했다. 인류최초로 대량 살상무기를 개발하고 그로인해 인류가 죽어가는 것을 지켜보아야 했던 오펜하이머. 참회하려 했지만 때가 너무 늦어서였을까. 원자력의 국제관리를 주장하며 원폭 제조금지와 사찰을...

한국최초의 상설 영화관 ‘경성고등연예관’ 개관

우리나라에서 영화가 처음 상영된 시점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1897년 일본인 거류민을 상대로 한 본정좌(本町座), ‘중국인의 가건물 한 개를 3일간 빌려 영화를 상영했다’는 1897년 10월 19일자 런던타임즈 기사, 1899년 미국인 여행가 버튼 홈스 일행이 고종 황제에게 영화를 보여주었다는 기행문 등을 예로들며 전문가마다 ‘최초’를 달리 소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1903년 6월 23일자 황성신문에 ‘한성전기회사 기계창에서 활동사진을...

남진-나훈아 숙명의 라이벌 대결

가요역사상 그때처럼 꽃 활짝 피우고 황금시대 구가했던 시기는 일찍이 없어 남진(1945~ )의 당초 꿈은 영화배우였다. 그러나 목포고를 졸업하고 한양대 연극영화과에 입학한 그에게 먼저 찾아온 기회는 가수였다. 대학 1학년 때 작곡가 한동훈의 문하로 들어가 2년 동안의 연습을 거쳐 1965년 ‘서울 플레이보이’로 데뷔했다. 하지만 데뷔 1집은 처참하게 실패했다. 남진은 다시 작곡가 김영광과 손을 잡고 도시적인 미남형의 외모를 무기로 1967년 ‘울려고 내가 왔나’, ‘사랑하고...

전태일 “내 죽음 헛되이 말라”며 분신 자살

16살 때 평화시장에서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보고 말아 가난했던 그 시절, 이 땅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랬듯 전태일(1948~1970)도 어려서부터 극빈의 삶을 살았다. 대구에서 태어나 6·25전쟁 때 아버지 손을 잡고 부산으로 피난을 갔으나 먹고 살 일이 막막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전태일의 가족이 낯선 서울역에 내린 것은 전태일의 나이 6살 때인 1954년이었다. 서울 생활은 고달팠다. 경제적으로 무능한 아버지는 폭음과 주정을 일삼았고 어머니는 병이 들었다. 전태일은 결국...

새마을운동 시작

새마을운동 시작

농촌 잘살기 캠페인을 넘어 국민 의식개혁 운동이자 사회운동 1969년 8월 4일 경상남도의 수해복구 현장을 시찰하기 위해 부산으로 가던 박정희 대통령이 갑자기 경부선 철도변에 위치한 경북 청도군 청도읍 신도1리 마을 어귀에서 특별열차를 멈추게 했다. 마을의 울창한 산림과 말끔하게 개량된 지붕, 잘 닦인 마을 안길 등이 박 대통령의 눈길을 사로잡았기 때문이다. 비결을 묻자 마을 주민들은 “살기 좋은 마을을 만들어보자고 마을 총회에서 결의한 후 서로 자진해서 협동한 결과였다”고...

김현옥 서울시장 부임

무슨 일이건 결심만 서면 저돌적으로 밀어붙이는 돌격대장 1960년대 들어 서울의 인구가 급증했다. 1960년 244만 명이던 인구가 불과 6년 만인 1966년 379만 명으로 늘어났으니 서울은 가히 초만원이었다. 인구가 이처럼 급격하게 불어나는데도 공간은 6․25 전쟁 전후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도로는 좁은 데다 그것마저 느려터진 전차가 점거해버리고 보행자들의 무단횡단으로 자동차는 제 속도를 내지 못했다. 한마디로 무질서의 시대였다. 이처럼 서울시 전체가 열악한 도로 사정과...

베트남전 ‘케산 전투’와 ‘테트 공세’

 ‘케산 전투’와 ‘테트 공세’, 베트남전 흐름 바꾼 분수령 1968년의 ‘케산 전투’와 ‘테트 공세’는 베트남전의 흐름을 바꾼 분수령이었다. 케산 전투는 1968년 1월 21일 새벽, ‘호찌민 루트’를 따라 내려온 2만 명 규모의 북베트남 정규군이 미 해병대 3500명과 남베트남 특수부대 2100명이 지키고 있는 케산을 향해 장거리포를 쏘아대면서 시작되었다. 케산은 남북 베트남의 비무장지대 부근 남쪽에 위치한 곳으로, 1962년 미 공수부대 1개 중대가 북베트남 병력과...

무구정광다라니경 불국사 석가탑에서 발견

사리함 속에서 1200여 년 동안 깊은 잠을 자다가 발견돼 천년을 버텨온 불국사 석가탑에게 1966년은 수난의 해였다. 도굴범들이 9월 3일과 4일 두 차례나 헤집어 금이 간 데다 탑을 보수하면서 생긴 상처가 너무나 컸기 때문이다. 9월 6일 아침 불국사 뜰을 쓸던 스님이 탑신이 기울어져 있고 탑에 금이 간 사실을 발견했으나 시찰 측은 그것이 도굴에 의한 것이라는 사실을 미처 알지 못하고 막연히 풍화작용에 의한 자연 마멸이나 지진에 의한 충격 정도로만 생각했다. 며칠 후 도굴...

일본 적군파 ‘아사마 산장’ 인질극

1968년 1월의 베트남전 반전운동과 미 항모 엔터프라이즈 기항저지 투쟁, 1969년 1월의 도쿄대 야스당 강당 공방전 등으로 맹위를 떨치던 일본 학생운동이 소수화․과격화로 내몰리면서 다시 쇠퇴의 기미를 보이고 있을 때 일본의 학생운동권이 주목한 것은, “혁명은 조직된 폭력 즉 훈련된 군에 의해서만 달성된다”는 교토대생 시오미 다카야의 무장투쟁 노선이었다. 무장투쟁 노선을 지지하는 관서파와 이에 반대하는 관동파가 대립한 끝에 관서파가 결국 당 중앙위에서 제명당했다. 관서파는...

미 해병대, 일본의 이오지마섬 상륙

일본 도쿄 남쪽 약 1200㎞ 지점에 위치한 오가사와라(小笠原) 열도의 화산섬 이오지마(硫黃島). 태평양전쟁이 종전으로 치닫던 1945년 2월 19일, 미 함대의 맹렬한 함포사격과 함께 미 해병대가 이 섬에 상륙했다. 4일 간의 공방전이 지나고 태평양전쟁 중에서도 최악의 날로 기록된 2월23일, 산의 모습을 바꿀 정도의 맹폭으로 마침내 산 정상 스리바치산이 미군에 함락되었다. 이 전투로 일본군은 거의 90%에 가까운 1만 9900여 명이 옥쇄하고, 미군은 6800여 명이...

원자폭탄의 아버지 오펜하이머 사망

“각하 제 손에 피가 흐르는 것 같습니다” 39세(1943년) 나이로 미국 로스알라모스 연구소장에 올라 원자폭탄 개발을 주도했던 ‘원자폭탄의 아버지’ 로버트 오펜하이머가 전쟁 후 트루먼 대통령을 만난 자리에서 양심의 가책을 이렇게 호소했다. 인류최초로 대량 살상무기를 개발하고 그로인해 인류가 죽어가는 것을 지켜보아야 했던 오펜하이머. 참회하려 했지만 때가 너무 늦어서였을까. 원자력의 국제관리를 주장하며 원폭 제조금지와 사찰을...

한국최초의 상설 영화관 ‘경성고등연예관’ 개관

우리나라에서 영화가 처음 상영된 시점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1897년 일본인 거류민을 상대로 한 본정좌(本町座), ‘중국인의 가건물 한 개를 3일간 빌려 영화를 상영했다’는 1897년 10월 19일자 런던타임즈 기사, 1899년 미국인 여행가 버튼 홈스 일행이 고종 황제에게 영화를 보여주었다는 기행문 등을 예로들며 전문가마다 ‘최초’를 달리 소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1903년 6월 23일자 황성신문에 ‘한성전기회사 기계창에서 활동사진을...

남진-나훈아 숙명의 라이벌 대결

가요역사상 그때처럼 꽃 활짝 피우고 황금시대 구가했던 시기는 일찍이 없어 남진(1945~ )의 당초 꿈은 영화배우였다. 그러나 목포고를 졸업하고 한양대 연극영화과에 입학한 그에게 먼저 찾아온 기회는 가수였다. 대학 1학년 때 작곡가 한동훈의 문하로 들어가 2년 동안의 연습을 거쳐 1965년 ‘서울 플레이보이’로 데뷔했다. 하지만 데뷔 1집은 처참하게 실패했다. 남진은 다시 작곡가 김영광과 손을 잡고 도시적인 미남형의 외모를 무기로 1967년 ‘울려고 내가 왔나’, ‘사랑하고...

전태일 “내 죽음 헛되이 말라”며 분신 자살

16살 때 평화시장에서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보고 말아 가난했던 그 시절, 이 땅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랬듯 전태일(1948~1970)도 어려서부터 극빈의 삶을 살았다. 대구에서 태어나 6·25전쟁 때 아버지 손을 잡고 부산으로 피난을 갔으나 먹고 살 일이 막막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전태일의 가족이 낯선 서울역에 내린 것은 전태일의 나이 6살 때인 1954년이었다. 서울 생활은 고달팠다. 경제적으로 무능한 아버지는 폭음과 주정을 일삼았고 어머니는 병이 들었다. 전태일은 결국...

새마을운동 시작

새마을운동 시작

농촌 잘살기 캠페인을 넘어 국민 의식개혁 운동이자 사회운동 1969년 8월 4일 경상남도의 수해복구 현장을 시찰하기 위해 부산으로 가던 박정희 대통령이 갑자기 경부선 철도변에 위치한 경북 청도군 청도읍 신도1리 마을 어귀에서 특별열차를 멈추게 했다. 마을의 울창한 산림과 말끔하게 개량된 지붕, 잘 닦인 마을 안길 등이 박 대통령의 눈길을 사로잡았기 때문이다. 비결을 묻자 마을 주민들은 “살기 좋은 마을을 만들어보자고 마을 총회에서 결의한 후 서로 자진해서 협동한 결과였다”고...

김현옥 서울시장 부임

무슨 일이건 결심만 서면 저돌적으로 밀어붙이는 돌격대장 1960년대 들어 서울의 인구가 급증했다. 1960년 244만 명이던 인구가 불과 6년 만인 1966년 379만 명으로 늘어났으니 서울은 가히 초만원이었다. 인구가 이처럼 급격하게 불어나는데도 공간은 6․25 전쟁 전후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도로는 좁은 데다 그것마저 느려터진 전차가 점거해버리고 보행자들의 무단횡단으로 자동차는 제 속도를 내지 못했다. 한마디로 무질서의 시대였다. 이처럼 서울시 전체가 열악한 도로 사정과...

베트남전 ‘케산 전투’와 ‘테트 공세’

 ‘케산 전투’와 ‘테트 공세’, 베트남전 흐름 바꾼 분수령 1968년의 ‘케산 전투’와 ‘테트 공세’는 베트남전의 흐름을 바꾼 분수령이었다. 케산 전투는 1968년 1월 21일 새벽, ‘호찌민 루트’를 따라 내려온 2만 명 규모의 북베트남 정규군이 미 해병대 3500명과 남베트남 특수부대 2100명이 지키고 있는 케산을 향해 장거리포를 쏘아대면서 시작되었다. 케산은 남북 베트남의 비무장지대 부근 남쪽에 위치한 곳으로, 1962년 미 공수부대 1개 중대가 북베트남 병력과...

무구정광다라니경 불국사 석가탑에서 발견

사리함 속에서 1200여 년 동안 깊은 잠을 자다가 발견돼 천년을 버텨온 불국사 석가탑에게 1966년은 수난의 해였다. 도굴범들이 9월 3일과 4일 두 차례나 헤집어 금이 간 데다 탑을 보수하면서 생긴 상처가 너무나 컸기 때문이다. 9월 6일 아침 불국사 뜰을 쓸던 스님이 탑신이 기울어져 있고 탑에 금이 간 사실을 발견했으나 시찰 측은 그것이 도굴에 의한 것이라는 사실을 미처 알지 못하고 막연히 풍화작용에 의한 자연 마멸이나 지진에 의한 충격 정도로만 생각했다. 며칠 후 도굴...

일본 적군파 ‘아사마 산장’ 인질극

1968년 1월의 베트남전 반전운동과 미 항모 엔터프라이즈 기항저지 투쟁, 1969년 1월의 도쿄대 야스당 강당 공방전 등으로 맹위를 떨치던 일본 학생운동이 소수화․과격화로 내몰리면서 다시 쇠퇴의 기미를 보이고 있을 때 일본의 학생운동권이 주목한 것은, “혁명은 조직된 폭력 즉 훈련된 군에 의해서만 달성된다”는 교토대생 시오미 다카야의 무장투쟁 노선이었다. 무장투쟁 노선을 지지하는 관서파와 이에 반대하는 관동파가 대립한 끝에 관서파가 결국 당 중앙위에서 제명당했다. 관서파는...

미 해병대, 일본의 이오지마섬 상륙

일본 도쿄 남쪽 약 1200㎞ 지점에 위치한 오가사와라(小笠原) 열도의 화산섬 이오지마(硫黃島). 태평양전쟁이 종전으로 치닫던 1945년 2월 19일, 미 함대의 맹렬한 함포사격과 함께 미 해병대가 이 섬에 상륙했다. 4일 간의 공방전이 지나고 태평양전쟁 중에서도 최악의 날로 기록된 2월23일, 산의 모습을 바꿀 정도의 맹폭으로 마침내 산 정상 스리바치산이 미군에 함락되었다. 이 전투로 일본군은 거의 90%에 가까운 1만 9900여 명이 옥쇄하고, 미군은 6800여 명이...

원자폭탄의 아버지 오펜하이머 사망

“각하 제 손에 피가 흐르는 것 같습니다” 39세(1943년) 나이로 미국 로스알라모스 연구소장에 올라 원자폭탄 개발을 주도했던 ‘원자폭탄의 아버지’ 로버트 오펜하이머가 전쟁 후 트루먼 대통령을 만난 자리에서 양심의 가책을 이렇게 호소했다. 인류최초로 대량 살상무기를 개발하고 그로인해 인류가 죽어가는 것을 지켜보아야 했던 오펜하이머. 참회하려 했지만 때가 너무 늦어서였을까. 원자력의 국제관리를 주장하며 원폭 제조금지와 사찰을...

한국최초의 상설 영화관 ‘경성고등연예관’ 개관

우리나라에서 영화가 처음 상영된 시점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1897년 일본인 거류민을 상대로 한 본정좌(本町座), ‘중국인의 가건물 한 개를 3일간 빌려 영화를 상영했다’는 1897년 10월 19일자 런던타임즈 기사, 1899년 미국인 여행가 버튼 홈스 일행이 고종 황제에게 영화를 보여주었다는 기행문 등을 예로들며 전문가마다 ‘최초’를 달리 소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1903년 6월 23일자 황성신문에 ‘한성전기회사 기계창에서 활동사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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