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og
The Blog Module
The blog modules makes it easy to create a blog post feed in two different layouts.
이인성은 1930년대 조선의 자부심이자 식민지 화단의 별… 그런데도 1950년 38살 요절 후 사람들 기억 속에서 오랫동안 잊혀져
↑ 1935년 선전에서 최고상인 창덕궁상을 수상한 ‘경주의 산곡에서’ (캔버스에 유채, 136×195㎝) ☞전문(全文)은 이곳으로 옮겼습니다. 클릭! “근대 화단의 귀재”, “한국의 고갱” 등 찬사 쏟아져 20세기 전반기 한국의 서양화를 거론할 때 이인성(1912~1950)을 비껴갈 수는 없다. 그는 10대 때 성취한 조선미술전람회(선전)의 입선과 특선으로는 성이 차지 않았다. 20대 초반, 일본 화단에서도 이름을 날리고 23살에 선전...
독립운동가 서일 자결
서일 선생은 낯선 이름이다. 그러나 그는 일제 암흑기 10여년간 만주벌판에서 무장 독립운동단체를 진두지휘했던 독립운동가였다. 대종교에 귀의한 종교인이었으며 만주의 조선인들을 가르쳤던 교육자였다. 서일은 1911년, 조국이 망국의 경술국치를 겪자 두만강을 건너 동만주 왕청현에 정착한 후 오로지 일제를 물리칠 ‘힘’을 기르는데 모든 힘을 쏟았다. 정신력과 군사력을 힘의 원천으로 믿어온 그는 대종교를 통해서는 강한 정신력을 가르치고, 중광단 → 대한정의단 → 대한군정부 →...
조선일보·동아일보 창간 후 첫 정간
총독부는 1920년 조선일보·동아일보에 신문 발간을 허락하고서도 곳곳에 촘촘한 그물망을 쳐놓아 행여라도 논조가 수틀리면 사사건건 탄압을 가했다. 특히 일본 황실의 존엄을 손상하거나 사회주의 사상을 전파할 우려가 있는 기사에 대해서는 예민한 반응을 보였다. 탄압에는 다양한 수단이 동원됐다. 신문발행 전에는 간담·주의·경고 등으로 주눅들게 하고 신문발행 후에는 삭제·압수·정간·폐간 등으로 옭아맸다. 과정은 이랬다. 신문인쇄 즉시 총독부 경무국 도서과로 신문이 납본되면 도서과는...
나도향 사망
나도향의 본명은 나경손이다. ‘경사스런 손자’라는 뜻의 이름이 싫어 박종화에게 부탁해 호와 필명을 각각 도향과 빈으로 지었지만 가족들은 ‘벼의 향기’라는 뜻의 ‘도향’ 이름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향기란 잠시 있다가 곧 사라지는 것이라는 게 가족들의 생각이었다. 그때문은 아니겠지만 도향은 우리나라 작가 중 가장 젊은 나이인 24세에 요절했다. 1922년 1월, ‘백조(白鳥)’ 동인에 참여해 본격적으로 문학을 시작할 때까지 도향의 삶은 반항과 방랑이었다. 경성의전과 도쿄제대...
러시아군, 독일군에 대패한 타넨베르크 전투 개전
1차대전이 발발하자 러시아의 차르(황제)는 아직 준비도 갖추지 않은 상태에서 독일의 심장부 공격을 명령한다. 렌넨캄프의 제1군과 삼소노프의 제2군이 선봉에 섰다. 둘은 역전의 노장이었지만 1904년 틀어진 이래 그때까지 증오심과 복수심으로 가득한 라이벌이었다. 렌넨캄프가 먼저 영광을 차지하기 위해 독일로 진격했다. 전투 경험이 없는 농민들로 급조된 군대에다 행군로도 엉망이었지만 워낙에 대병력이라 독일의 굼비넨 마을을 점령할 수 있었다. 독일군이 후퇴하자 렌넨캄프는 추격을...
6·25 참전한 윌리엄 딘 미군 소장 인민군에 잡혀
6·25 개전 초기, 우리 군은 소련제 T34 탱크에 속수무책이었다. 급기야 육군본부는 오산·평택을 거쳐 대전으로 후퇴했고, 일본에서 급파된 미 제24사단도 대전에 포진했다. 그러나 인민군이 금강 전선에까지 다다르자 육군본부는 다시 대구로 이동하고 24사단도 대전철수를 결정한다. 충북 영동이 목적지였다. 사단장 윌리엄 딘 소장도 소수의 호위병과 함께 길을 떠났다. 그러나 남하도중 만난 옥천·금산 분기점은 그에게는 운명의 갈림길이었다. 옥천이 아닌 금산으로 길을 잘못 든...
연합군, 독일군이 점령했던 파리 해방
노르망디 상륙작전의 성공으로 전세가 역전되면서 파리 해방도 시간문제였다. 1944년 8월 19일 공산당 계열의 프랑스 해방국내군(FFI)이 파리에서 무장봉기를 일으키자 파리주둔 독일사령관 폰 촐티츠가 드골파 레지스탕스 지도자에게 휴전을 제의한다. 양측은 휴전에 합의했으나 FFI가 이를 거부하는 바람에 전투가 재개됐다. 이 과정에서 FFI군 1000여 명이 전사하고 민간인도 580명이나 목숨을 잃었다. 8월 22일 베를린에서 파리 사령부에 한 통의 전문이 타전되었다. “파리를...
일본에서 출항한 ‘우키시마마루호’ 폭발로 귀환 징용자 몰사
1945년 8월 22일, 4730t급의 일본 해군 특별수송선 ‘우키시마마루(浮島丸)호’가 아오모리현 오미나토항을 출항했다. 배에는 일본에 의해 강제로 태워진 7500여 명(일본측 발표 3700여 명)의 한국인 징용자들이 타고 있었다. 귀국선 1호였던 셈이다. 우키시마마루호는 부산으로 가지 않고 연안항로를 따라 남하했다. 이틀 후 귀국선이 도착한 곳은 예상치도 않은 마이즈루만이었다. 8월 24일 오후5시경이었다. 잠시 후 원인모를 대폭발음이 일어났고 우키시마마루호가 침몰하기...
마이크로소프트 ‘윈도95’ 발매
MS-DOS 하나로 세계 PC의 OS(운영체제) 시장을 평정한 마이크로소프트(MS)사는 누구보다 우월한 위치에 있었다. 그러던 중 1983년 1월 경쟁사 애플컴퓨터가 최초의 그래픽 기반 인터페이스 환경을 갖고 있는 ‘리사(Lisa)’를 시장에 내놓았다. 하지만 안정성이 떨어지는 하드웨어와 1만 달러나 되는 높은 가격 때문에 시장으로부터는 호응을 얻지 못했다. MS사도 그해 11월 DOS 기능을 확장한 윈도 환경을 발표했으나 역시 시장의 주목을 끄는 데는 실패했다. 애플은...
경주 천마총에서 천마도 발굴
천마총 입구 원래는 경주의 황남동 98호 고분 ‘황남대총’을 발굴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높이가 25m이고 하부 길이가 120m나 되는, 경주에서 가장 규모가 큰 고분을 발굴하기에는 발굴단의 경험이 아직 부족했다. 예비지식도 얻고 경험도 축적할 겸 그 옆 155호 고분을 시험용으로 삼았다. 1973년 4월 6일 봉토제거작업을 시작한 발굴단은 흥분을 감출 수 없었다. 고분이 아직 어느 누구의 손에도 도굴의 화를 입지 않은 그야말로 처녀분이었기 때문이다. 7월11일...
이인성은 1930년대 조선의 자부심이자 식민지 화단의 별… 그런데도 1950년 38살 요절 후 사람들 기억 속에서 오랫동안 잊혀져
↑ 1935년 선전에서 최고상인 창덕궁상을 수상한 ‘경주의 산곡에서’ (캔버스에 유채, 136×195㎝) ☞전문(全文)은 이곳으로 옮겼습니다. 클릭! “근대 화단의 귀재”, “한국의 고갱” 등 찬사 쏟아져 20세기 전반기 한국의 서양화를 거론할 때 이인성(1912~1950)을 비껴갈 수는 없다. 그는 10대 때 성취한 조선미술전람회(선전)의 입선과 특선으로는 성이 차지 않았다. 20대 초반, 일본 화단에서도 이름을 날리고 23살에 선전...
독립운동가 서일 자결
서일 선생은 낯선 이름이다. 그러나 그는 일제 암흑기 10여년간 만주벌판에서 무장 독립운동단체를 진두지휘했던 독립운동가였다. 대종교에 귀의한 종교인이었으며 만주의 조선인들을 가르쳤던 교육자였다. 서일은 1911년, 조국이 망국의 경술국치를 겪자 두만강을 건너 동만주 왕청현에 정착한 후 오로지 일제를 물리칠 ‘힘’을 기르는데 모든 힘을 쏟았다. 정신력과 군사력을 힘의 원천으로 믿어온 그는 대종교를 통해서는 강한 정신력을 가르치고, 중광단 → 대한정의단 → 대한군정부 →...
조선일보·동아일보 창간 후 첫 정간
총독부는 1920년 조선일보·동아일보에 신문 발간을 허락하고서도 곳곳에 촘촘한 그물망을 쳐놓아 행여라도 논조가 수틀리면 사사건건 탄압을 가했다. 특히 일본 황실의 존엄을 손상하거나 사회주의 사상을 전파할 우려가 있는 기사에 대해서는 예민한 반응을 보였다. 탄압에는 다양한 수단이 동원됐다. 신문발행 전에는 간담·주의·경고 등으로 주눅들게 하고 신문발행 후에는 삭제·압수·정간·폐간 등으로 옭아맸다. 과정은 이랬다. 신문인쇄 즉시 총독부 경무국 도서과로 신문이 납본되면 도서과는...
나도향 사망
나도향의 본명은 나경손이다. ‘경사스런 손자’라는 뜻의 이름이 싫어 박종화에게 부탁해 호와 필명을 각각 도향과 빈으로 지었지만 가족들은 ‘벼의 향기’라는 뜻의 ‘도향’ 이름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향기란 잠시 있다가 곧 사라지는 것이라는 게 가족들의 생각이었다. 그때문은 아니겠지만 도향은 우리나라 작가 중 가장 젊은 나이인 24세에 요절했다. 1922년 1월, ‘백조(白鳥)’ 동인에 참여해 본격적으로 문학을 시작할 때까지 도향의 삶은 반항과 방랑이었다. 경성의전과 도쿄제대...
러시아군, 독일군에 대패한 타넨베르크 전투 개전
1차대전이 발발하자 러시아의 차르(황제)는 아직 준비도 갖추지 않은 상태에서 독일의 심장부 공격을 명령한다. 렌넨캄프의 제1군과 삼소노프의 제2군이 선봉에 섰다. 둘은 역전의 노장이었지만 1904년 틀어진 이래 그때까지 증오심과 복수심으로 가득한 라이벌이었다. 렌넨캄프가 먼저 영광을 차지하기 위해 독일로 진격했다. 전투 경험이 없는 농민들로 급조된 군대에다 행군로도 엉망이었지만 워낙에 대병력이라 독일의 굼비넨 마을을 점령할 수 있었다. 독일군이 후퇴하자 렌넨캄프는 추격을...
6·25 참전한 윌리엄 딘 미군 소장 인민군에 잡혀
6·25 개전 초기, 우리 군은 소련제 T34 탱크에 속수무책이었다. 급기야 육군본부는 오산·평택을 거쳐 대전으로 후퇴했고, 일본에서 급파된 미 제24사단도 대전에 포진했다. 그러나 인민군이 금강 전선에까지 다다르자 육군본부는 다시 대구로 이동하고 24사단도 대전철수를 결정한다. 충북 영동이 목적지였다. 사단장 윌리엄 딘 소장도 소수의 호위병과 함께 길을 떠났다. 그러나 남하도중 만난 옥천·금산 분기점은 그에게는 운명의 갈림길이었다. 옥천이 아닌 금산으로 길을 잘못 든...
연합군, 독일군이 점령했던 파리 해방
노르망디 상륙작전의 성공으로 전세가 역전되면서 파리 해방도 시간문제였다. 1944년 8월 19일 공산당 계열의 프랑스 해방국내군(FFI)이 파리에서 무장봉기를 일으키자 파리주둔 독일사령관 폰 촐티츠가 드골파 레지스탕스 지도자에게 휴전을 제의한다. 양측은 휴전에 합의했으나 FFI가 이를 거부하는 바람에 전투가 재개됐다. 이 과정에서 FFI군 1000여 명이 전사하고 민간인도 580명이나 목숨을 잃었다. 8월 22일 베를린에서 파리 사령부에 한 통의 전문이 타전되었다. “파리를...
일본에서 출항한 ‘우키시마마루호’ 폭발로 귀환 징용자 몰사
1945년 8월 22일, 4730t급의 일본 해군 특별수송선 ‘우키시마마루(浮島丸)호’가 아오모리현 오미나토항을 출항했다. 배에는 일본에 의해 강제로 태워진 7500여 명(일본측 발표 3700여 명)의 한국인 징용자들이 타고 있었다. 귀국선 1호였던 셈이다. 우키시마마루호는 부산으로 가지 않고 연안항로를 따라 남하했다. 이틀 후 귀국선이 도착한 곳은 예상치도 않은 마이즈루만이었다. 8월 24일 오후5시경이었다. 잠시 후 원인모를 대폭발음이 일어났고 우키시마마루호가 침몰하기...
마이크로소프트 ‘윈도95’ 발매
MS-DOS 하나로 세계 PC의 OS(운영체제) 시장을 평정한 마이크로소프트(MS)사는 누구보다 우월한 위치에 있었다. 그러던 중 1983년 1월 경쟁사 애플컴퓨터가 최초의 그래픽 기반 인터페이스 환경을 갖고 있는 ‘리사(Lisa)’를 시장에 내놓았다. 하지만 안정성이 떨어지는 하드웨어와 1만 달러나 되는 높은 가격 때문에 시장으로부터는 호응을 얻지 못했다. MS사도 그해 11월 DOS 기능을 확장한 윈도 환경을 발표했으나 역시 시장의 주목을 끄는 데는 실패했다. 애플은...
경주 천마총에서 천마도 발굴
천마총 입구 원래는 경주의 황남동 98호 고분 ‘황남대총’을 발굴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높이가 25m이고 하부 길이가 120m나 되는, 경주에서 가장 규모가 큰 고분을 발굴하기에는 발굴단의 경험이 아직 부족했다. 예비지식도 얻고 경험도 축적할 겸 그 옆 155호 고분을 시험용으로 삼았다. 1973년 4월 6일 봉토제거작업을 시작한 발굴단은 흥분을 감출 수 없었다. 고분이 아직 어느 누구의 손에도 도굴의 화를 입지 않은 그야말로 처녀분이었기 때문이다. 7월11일...
이인성은 1930년대 조선의 자부심이자 식민지 화단의 별… 그런데도 1950년 38살 요절 후 사람들 기억 속에서 오랫동안 잊혀져
↑ 1935년 선전에서 최고상인 창덕궁상을 수상한 ‘경주의 산곡에서’ (캔버스에 유채, 136×195㎝) ☞전문(全文)은 이곳으로 옮겼습니다. 클릭! “근대 화단의 귀재”, “한국의 고갱” 등 찬사 쏟아져 20세기 전반기 한국의 서양화를 거론할 때 이인성(1912~1950)을 비껴갈 수는 없다. 그는 10대 때 성취한 조선미술전람회(선전)의 입선과 특선으로는 성이 차지 않았다. 20대 초반, 일본 화단에서도 이름을 날리고 23살에 선전...
독립운동가 서일 자결
서일 선생은 낯선 이름이다. 그러나 그는 일제 암흑기 10여년간 만주벌판에서 무장 독립운동단체를 진두지휘했던 독립운동가였다. 대종교에 귀의한 종교인이었으며 만주의 조선인들을 가르쳤던 교육자였다. 서일은 1911년, 조국이 망국의 경술국치를 겪자 두만강을 건너 동만주 왕청현에 정착한 후 오로지 일제를 물리칠 ‘힘’을 기르는데 모든 힘을 쏟았다. 정신력과 군사력을 힘의 원천으로 믿어온 그는 대종교를 통해서는 강한 정신력을 가르치고, 중광단 → 대한정의단 → 대한군정부 →...
조선일보·동아일보 창간 후 첫 정간
총독부는 1920년 조선일보·동아일보에 신문 발간을 허락하고서도 곳곳에 촘촘한 그물망을 쳐놓아 행여라도 논조가 수틀리면 사사건건 탄압을 가했다. 특히 일본 황실의 존엄을 손상하거나 사회주의 사상을 전파할 우려가 있는 기사에 대해서는 예민한 반응을 보였다. 탄압에는 다양한 수단이 동원됐다. 신문발행 전에는 간담·주의·경고 등으로 주눅들게 하고 신문발행 후에는 삭제·압수·정간·폐간 등으로 옭아맸다. 과정은 이랬다. 신문인쇄 즉시 총독부 경무국 도서과로 신문이 납본되면 도서과는...
나도향 사망
나도향의 본명은 나경손이다. ‘경사스런 손자’라는 뜻의 이름이 싫어 박종화에게 부탁해 호와 필명을 각각 도향과 빈으로 지었지만 가족들은 ‘벼의 향기’라는 뜻의 ‘도향’ 이름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향기란 잠시 있다가 곧 사라지는 것이라는 게 가족들의 생각이었다. 그때문은 아니겠지만 도향은 우리나라 작가 중 가장 젊은 나이인 24세에 요절했다. 1922년 1월, ‘백조(白鳥)’ 동인에 참여해 본격적으로 문학을 시작할 때까지 도향의 삶은 반항과 방랑이었다. 경성의전과 도쿄제대...
러시아군, 독일군에 대패한 타넨베르크 전투 개전
1차대전이 발발하자 러시아의 차르(황제)는 아직 준비도 갖추지 않은 상태에서 독일의 심장부 공격을 명령한다. 렌넨캄프의 제1군과 삼소노프의 제2군이 선봉에 섰다. 둘은 역전의 노장이었지만 1904년 틀어진 이래 그때까지 증오심과 복수심으로 가득한 라이벌이었다. 렌넨캄프가 먼저 영광을 차지하기 위해 독일로 진격했다. 전투 경험이 없는 농민들로 급조된 군대에다 행군로도 엉망이었지만 워낙에 대병력이라 독일의 굼비넨 마을을 점령할 수 있었다. 독일군이 후퇴하자 렌넨캄프는 추격을...
6·25 참전한 윌리엄 딘 미군 소장 인민군에 잡혀
6·25 개전 초기, 우리 군은 소련제 T34 탱크에 속수무책이었다. 급기야 육군본부는 오산·평택을 거쳐 대전으로 후퇴했고, 일본에서 급파된 미 제24사단도 대전에 포진했다. 그러나 인민군이 금강 전선에까지 다다르자 육군본부는 다시 대구로 이동하고 24사단도 대전철수를 결정한다. 충북 영동이 목적지였다. 사단장 윌리엄 딘 소장도 소수의 호위병과 함께 길을 떠났다. 그러나 남하도중 만난 옥천·금산 분기점은 그에게는 운명의 갈림길이었다. 옥천이 아닌 금산으로 길을 잘못 든...
연합군, 독일군이 점령했던 파리 해방
노르망디 상륙작전의 성공으로 전세가 역전되면서 파리 해방도 시간문제였다. 1944년 8월 19일 공산당 계열의 프랑스 해방국내군(FFI)이 파리에서 무장봉기를 일으키자 파리주둔 독일사령관 폰 촐티츠가 드골파 레지스탕스 지도자에게 휴전을 제의한다. 양측은 휴전에 합의했으나 FFI가 이를 거부하는 바람에 전투가 재개됐다. 이 과정에서 FFI군 1000여 명이 전사하고 민간인도 580명이나 목숨을 잃었다. 8월 22일 베를린에서 파리 사령부에 한 통의 전문이 타전되었다. “파리를...
일본에서 출항한 ‘우키시마마루호’ 폭발로 귀환 징용자 몰사
1945년 8월 22일, 4730t급의 일본 해군 특별수송선 ‘우키시마마루(浮島丸)호’가 아오모리현 오미나토항을 출항했다. 배에는 일본에 의해 강제로 태워진 7500여 명(일본측 발표 3700여 명)의 한국인 징용자들이 타고 있었다. 귀국선 1호였던 셈이다. 우키시마마루호는 부산으로 가지 않고 연안항로를 따라 남하했다. 이틀 후 귀국선이 도착한 곳은 예상치도 않은 마이즈루만이었다. 8월 24일 오후5시경이었다. 잠시 후 원인모를 대폭발음이 일어났고 우키시마마루호가 침몰하기...
마이크로소프트 ‘윈도95’ 발매
MS-DOS 하나로 세계 PC의 OS(운영체제) 시장을 평정한 마이크로소프트(MS)사는 누구보다 우월한 위치에 있었다. 그러던 중 1983년 1월 경쟁사 애플컴퓨터가 최초의 그래픽 기반 인터페이스 환경을 갖고 있는 ‘리사(Lisa)’를 시장에 내놓았다. 하지만 안정성이 떨어지는 하드웨어와 1만 달러나 되는 높은 가격 때문에 시장으로부터는 호응을 얻지 못했다. MS사도 그해 11월 DOS 기능을 확장한 윈도 환경을 발표했으나 역시 시장의 주목을 끄는 데는 실패했다. 애플은...
경주 천마총에서 천마도 발굴
천마총 입구 원래는 경주의 황남동 98호 고분 ‘황남대총’을 발굴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높이가 25m이고 하부 길이가 120m나 되는, 경주에서 가장 규모가 큰 고분을 발굴하기에는 발굴단의 경험이 아직 부족했다. 예비지식도 얻고 경험도 축적할 겸 그 옆 155호 고분을 시험용으로 삼았다. 1973년 4월 6일 봉토제거작업을 시작한 발굴단은 흥분을 감출 수 없었다. 고분이 아직 어느 누구의 손에도 도굴의 화를 입지 않은 그야말로 처녀분이었기 때문이다. 7월11일...
이인성은 1930년대 조선의 자부심이자 식민지 화단의 별… 그런데도 1950년 38살 요절 후 사람들 기억 속에서 오랫동안 잊혀져
↑ 1935년 선전에서 최고상인 창덕궁상을 수상한 ‘경주의 산곡에서’ (캔버스에 유채, 136×195㎝) ☞전문(全文)은 이곳으로 옮겼습니다. 클릭! “근대 화단의 귀재”, “한국의 고갱” 등 찬사 쏟아져 20세기 전반기 한국의 서양화를 거론할 때 이인성(1912~1950)을 비껴갈 수는 없다. 그는 10대 때 성취한 조선미술전람회(선전)의 입선과 특선으로는 성이 차지 않았다. 20대 초반, 일본 화단에서도 이름을 날리고 23살에 선전...
독립운동가 서일 자결
서일 선생은 낯선 이름이다. 그러나 그는 일제 암흑기 10여년간 만주벌판에서 무장 독립운동단체를 진두지휘했던 독립운동가였다. 대종교에 귀의한 종교인이었으며 만주의 조선인들을 가르쳤던 교육자였다. 서일은 1911년, 조국이 망국의 경술국치를 겪자 두만강을 건너 동만주 왕청현에 정착한 후 오로지 일제를 물리칠 ‘힘’을 기르는데 모든 힘을 쏟았다. 정신력과 군사력을 힘의 원천으로 믿어온 그는 대종교를 통해서는 강한 정신력을 가르치고, 중광단 → 대한정의단 → 대한군정부 →...
조선일보·동아일보 창간 후 첫 정간
총독부는 1920년 조선일보·동아일보에 신문 발간을 허락하고서도 곳곳에 촘촘한 그물망을 쳐놓아 행여라도 논조가 수틀리면 사사건건 탄압을 가했다. 특히 일본 황실의 존엄을 손상하거나 사회주의 사상을 전파할 우려가 있는 기사에 대해서는 예민한 반응을 보였다. 탄압에는 다양한 수단이 동원됐다. 신문발행 전에는 간담·주의·경고 등으로 주눅들게 하고 신문발행 후에는 삭제·압수·정간·폐간 등으로 옭아맸다. 과정은 이랬다. 신문인쇄 즉시 총독부 경무국 도서과로 신문이 납본되면 도서과는...
나도향 사망
나도향의 본명은 나경손이다. ‘경사스런 손자’라는 뜻의 이름이 싫어 박종화에게 부탁해 호와 필명을 각각 도향과 빈으로 지었지만 가족들은 ‘벼의 향기’라는 뜻의 ‘도향’ 이름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향기란 잠시 있다가 곧 사라지는 것이라는 게 가족들의 생각이었다. 그때문은 아니겠지만 도향은 우리나라 작가 중 가장 젊은 나이인 24세에 요절했다. 1922년 1월, ‘백조(白鳥)’ 동인에 참여해 본격적으로 문학을 시작할 때까지 도향의 삶은 반항과 방랑이었다. 경성의전과 도쿄제대...
러시아군, 독일군에 대패한 타넨베르크 전투 개전
1차대전이 발발하자 러시아의 차르(황제)는 아직 준비도 갖추지 않은 상태에서 독일의 심장부 공격을 명령한다. 렌넨캄프의 제1군과 삼소노프의 제2군이 선봉에 섰다. 둘은 역전의 노장이었지만 1904년 틀어진 이래 그때까지 증오심과 복수심으로 가득한 라이벌이었다. 렌넨캄프가 먼저 영광을 차지하기 위해 독일로 진격했다. 전투 경험이 없는 농민들로 급조된 군대에다 행군로도 엉망이었지만 워낙에 대병력이라 독일의 굼비넨 마을을 점령할 수 있었다. 독일군이 후퇴하자 렌넨캄프는 추격을...
6·25 참전한 윌리엄 딘 미군 소장 인민군에 잡혀
6·25 개전 초기, 우리 군은 소련제 T34 탱크에 속수무책이었다. 급기야 육군본부는 오산·평택을 거쳐 대전으로 후퇴했고, 일본에서 급파된 미 제24사단도 대전에 포진했다. 그러나 인민군이 금강 전선에까지 다다르자 육군본부는 다시 대구로 이동하고 24사단도 대전철수를 결정한다. 충북 영동이 목적지였다. 사단장 윌리엄 딘 소장도 소수의 호위병과 함께 길을 떠났다. 그러나 남하도중 만난 옥천·금산 분기점은 그에게는 운명의 갈림길이었다. 옥천이 아닌 금산으로 길을 잘못 든...
연합군, 독일군이 점령했던 파리 해방
노르망디 상륙작전의 성공으로 전세가 역전되면서 파리 해방도 시간문제였다. 1944년 8월 19일 공산당 계열의 프랑스 해방국내군(FFI)이 파리에서 무장봉기를 일으키자 파리주둔 독일사령관 폰 촐티츠가 드골파 레지스탕스 지도자에게 휴전을 제의한다. 양측은 휴전에 합의했으나 FFI가 이를 거부하는 바람에 전투가 재개됐다. 이 과정에서 FFI군 1000여 명이 전사하고 민간인도 580명이나 목숨을 잃었다. 8월 22일 베를린에서 파리 사령부에 한 통의 전문이 타전되었다. “파리를...
일본에서 출항한 ‘우키시마마루호’ 폭발로 귀환 징용자 몰사
1945년 8월 22일, 4730t급의 일본 해군 특별수송선 ‘우키시마마루(浮島丸)호’가 아오모리현 오미나토항을 출항했다. 배에는 일본에 의해 강제로 태워진 7500여 명(일본측 발표 3700여 명)의 한국인 징용자들이 타고 있었다. 귀국선 1호였던 셈이다. 우키시마마루호는 부산으로 가지 않고 연안항로를 따라 남하했다. 이틀 후 귀국선이 도착한 곳은 예상치도 않은 마이즈루만이었다. 8월 24일 오후5시경이었다. 잠시 후 원인모를 대폭발음이 일어났고 우키시마마루호가 침몰하기...
마이크로소프트 ‘윈도95’ 발매
MS-DOS 하나로 세계 PC의 OS(운영체제) 시장을 평정한 마이크로소프트(MS)사는 누구보다 우월한 위치에 있었다. 그러던 중 1983년 1월 경쟁사 애플컴퓨터가 최초의 그래픽 기반 인터페이스 환경을 갖고 있는 ‘리사(Lisa)’를 시장에 내놓았다. 하지만 안정성이 떨어지는 하드웨어와 1만 달러나 되는 높은 가격 때문에 시장으로부터는 호응을 얻지 못했다. MS사도 그해 11월 DOS 기능을 확장한 윈도 환경을 발표했으나 역시 시장의 주목을 끄는 데는 실패했다. 애플은...
경주 천마총에서 천마도 발굴
천마총 입구 원래는 경주의 황남동 98호 고분 ‘황남대총’을 발굴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높이가 25m이고 하부 길이가 120m나 되는, 경주에서 가장 규모가 큰 고분을 발굴하기에는 발굴단의 경험이 아직 부족했다. 예비지식도 얻고 경험도 축적할 겸 그 옆 155호 고분을 시험용으로 삼았다. 1973년 4월 6일 봉토제거작업을 시작한 발굴단은 흥분을 감출 수 없었다. 고분이 아직 어느 누구의 손에도 도굴의 화를 입지 않은 그야말로 처녀분이었기 때문이다. 7월11일...
이인성은 1930년대 조선의 자부심이자 식민지 화단의 별… 그런데도 1950년 38살 요절 후 사람들 기억 속에서 오랫동안 잊혀져
↑ 1935년 선전에서 최고상인 창덕궁상을 수상한 ‘경주의 산곡에서’ (캔버스에 유채, 136×195㎝) ☞전문(全文)은 이곳으로 옮겼습니다. 클릭! “근대 화단의 귀재”, “한국의 고갱” 등 찬사 쏟아져 20세기 전반기 한국의 서양화를 거론할 때 이인성(1912~1950)을 비껴갈 수는 없다. 그는 10대 때 성취한 조선미술전람회(선전)의 입선과 특선으로는 성이 차지 않았다. 20대 초반, 일본 화단에서도 이름을 날리고 23살에 선전...
독립운동가 서일 자결
서일 선생은 낯선 이름이다. 그러나 그는 일제 암흑기 10여년간 만주벌판에서 무장 독립운동단체를 진두지휘했던 독립운동가였다. 대종교에 귀의한 종교인이었으며 만주의 조선인들을 가르쳤던 교육자였다. 서일은 1911년, 조국이 망국의 경술국치를 겪자 두만강을 건너 동만주 왕청현에 정착한 후 오로지 일제를 물리칠 ‘힘’을 기르는데 모든 힘을 쏟았다. 정신력과 군사력을 힘의 원천으로 믿어온 그는 대종교를 통해서는 강한 정신력을 가르치고, 중광단 → 대한정의단 → 대한군정부 →...
조선일보·동아일보 창간 후 첫 정간
총독부는 1920년 조선일보·동아일보에 신문 발간을 허락하고서도 곳곳에 촘촘한 그물망을 쳐놓아 행여라도 논조가 수틀리면 사사건건 탄압을 가했다. 특히 일본 황실의 존엄을 손상하거나 사회주의 사상을 전파할 우려가 있는 기사에 대해서는 예민한 반응을 보였다. 탄압에는 다양한 수단이 동원됐다. 신문발행 전에는 간담·주의·경고 등으로 주눅들게 하고 신문발행 후에는 삭제·압수·정간·폐간 등으로 옭아맸다. 과정은 이랬다. 신문인쇄 즉시 총독부 경무국 도서과로 신문이 납본되면 도서과는...
나도향 사망
나도향의 본명은 나경손이다. ‘경사스런 손자’라는 뜻의 이름이 싫어 박종화에게 부탁해 호와 필명을 각각 도향과 빈으로 지었지만 가족들은 ‘벼의 향기’라는 뜻의 ‘도향’ 이름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향기란 잠시 있다가 곧 사라지는 것이라는 게 가족들의 생각이었다. 그때문은 아니겠지만 도향은 우리나라 작가 중 가장 젊은 나이인 24세에 요절했다. 1922년 1월, ‘백조(白鳥)’ 동인에 참여해 본격적으로 문학을 시작할 때까지 도향의 삶은 반항과 방랑이었다. 경성의전과 도쿄제대...
러시아군, 독일군에 대패한 타넨베르크 전투 개전
1차대전이 발발하자 러시아의 차르(황제)는 아직 준비도 갖추지 않은 상태에서 독일의 심장부 공격을 명령한다. 렌넨캄프의 제1군과 삼소노프의 제2군이 선봉에 섰다. 둘은 역전의 노장이었지만 1904년 틀어진 이래 그때까지 증오심과 복수심으로 가득한 라이벌이었다. 렌넨캄프가 먼저 영광을 차지하기 위해 독일로 진격했다. 전투 경험이 없는 농민들로 급조된 군대에다 행군로도 엉망이었지만 워낙에 대병력이라 독일의 굼비넨 마을을 점령할 수 있었다. 독일군이 후퇴하자 렌넨캄프는 추격을...
6·25 참전한 윌리엄 딘 미군 소장 인민군에 잡혀
6·25 개전 초기, 우리 군은 소련제 T34 탱크에 속수무책이었다. 급기야 육군본부는 오산·평택을 거쳐 대전으로 후퇴했고, 일본에서 급파된 미 제24사단도 대전에 포진했다. 그러나 인민군이 금강 전선에까지 다다르자 육군본부는 다시 대구로 이동하고 24사단도 대전철수를 결정한다. 충북 영동이 목적지였다. 사단장 윌리엄 딘 소장도 소수의 호위병과 함께 길을 떠났다. 그러나 남하도중 만난 옥천·금산 분기점은 그에게는 운명의 갈림길이었다. 옥천이 아닌 금산으로 길을 잘못 든...
연합군, 독일군이 점령했던 파리 해방
노르망디 상륙작전의 성공으로 전세가 역전되면서 파리 해방도 시간문제였다. 1944년 8월 19일 공산당 계열의 프랑스 해방국내군(FFI)이 파리에서 무장봉기를 일으키자 파리주둔 독일사령관 폰 촐티츠가 드골파 레지스탕스 지도자에게 휴전을 제의한다. 양측은 휴전에 합의했으나 FFI가 이를 거부하는 바람에 전투가 재개됐다. 이 과정에서 FFI군 1000여 명이 전사하고 민간인도 580명이나 목숨을 잃었다. 8월 22일 베를린에서 파리 사령부에 한 통의 전문이 타전되었다. “파리를...
일본에서 출항한 ‘우키시마마루호’ 폭발로 귀환 징용자 몰사
1945년 8월 22일, 4730t급의 일본 해군 특별수송선 ‘우키시마마루(浮島丸)호’가 아오모리현 오미나토항을 출항했다. 배에는 일본에 의해 강제로 태워진 7500여 명(일본측 발표 3700여 명)의 한국인 징용자들이 타고 있었다. 귀국선 1호였던 셈이다. 우키시마마루호는 부산으로 가지 않고 연안항로를 따라 남하했다. 이틀 후 귀국선이 도착한 곳은 예상치도 않은 마이즈루만이었다. 8월 24일 오후5시경이었다. 잠시 후 원인모를 대폭발음이 일어났고 우키시마마루호가 침몰하기...
마이크로소프트 ‘윈도95’ 발매
MS-DOS 하나로 세계 PC의 OS(운영체제) 시장을 평정한 마이크로소프트(MS)사는 누구보다 우월한 위치에 있었다. 그러던 중 1983년 1월 경쟁사 애플컴퓨터가 최초의 그래픽 기반 인터페이스 환경을 갖고 있는 ‘리사(Lisa)’를 시장에 내놓았다. 하지만 안정성이 떨어지는 하드웨어와 1만 달러나 되는 높은 가격 때문에 시장으로부터는 호응을 얻지 못했다. MS사도 그해 11월 DOS 기능을 확장한 윈도 환경을 발표했으나 역시 시장의 주목을 끄는 데는 실패했다. 애플은...
경주 천마총에서 천마도 발굴
천마총 입구 원래는 경주의 황남동 98호 고분 ‘황남대총’을 발굴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높이가 25m이고 하부 길이가 120m나 되는, 경주에서 가장 규모가 큰 고분을 발굴하기에는 발굴단의 경험이 아직 부족했다. 예비지식도 얻고 경험도 축적할 겸 그 옆 155호 고분을 시험용으로 삼았다. 1973년 4월 6일 봉토제거작업을 시작한 발굴단은 흥분을 감출 수 없었다. 고분이 아직 어느 누구의 손에도 도굴의 화를 입지 않은 그야말로 처녀분이었기 때문이다. 7월11일...
이인성은 1930년대 조선의 자부심이자 식민지 화단의 별… 그런데도 1950년 38살 요절 후 사람들 기억 속에서 오랫동안 잊혀져
↑ 1935년 선전에서 최고상인 창덕궁상을 수상한 ‘경주의 산곡에서’ (캔버스에 유채, 136×195㎝) ☞전문(全文)은 이곳으로 옮겼습니다. 클릭! “근대 화단의 귀재”, “한국의 고갱” 등 찬사 쏟아져 20세기 전반기 한국의 서양화를 거론할 때 이인성(1912~1950)을 비껴갈 수는 없다. 그는 10대 때 성취한 조선미술전람회(선전)의 입선과 특선으로는 성이 차지 않았다. 20대 초반, 일본 화단에서도 이름을 날리고 23살에 선전...
독립운동가 서일 자결
서일 선생은 낯선 이름이다. 그러나 그는 일제 암흑기 10여년간 만주벌판에서 무장 독립운동단체를 진두지휘했던 독립운동가였다. 대종교에 귀의한 종교인이었으며 만주의 조선인들을 가르쳤던 교육자였다. 서일은 1911년, 조국이 망국의 경술국치를 겪자 두만강을 건너 동만주 왕청현에 정착한 후 오로지 일제를 물리칠 ‘힘’을 기르는데 모든 힘을 쏟았다. 정신력과 군사력을 힘의 원천으로 믿어온 그는 대종교를 통해서는 강한 정신력을 가르치고, 중광단 → 대한정의단 → 대한군정부 →...
조선일보·동아일보 창간 후 첫 정간
총독부는 1920년 조선일보·동아일보에 신문 발간을 허락하고서도 곳곳에 촘촘한 그물망을 쳐놓아 행여라도 논조가 수틀리면 사사건건 탄압을 가했다. 특히 일본 황실의 존엄을 손상하거나 사회주의 사상을 전파할 우려가 있는 기사에 대해서는 예민한 반응을 보였다. 탄압에는 다양한 수단이 동원됐다. 신문발행 전에는 간담·주의·경고 등으로 주눅들게 하고 신문발행 후에는 삭제·압수·정간·폐간 등으로 옭아맸다. 과정은 이랬다. 신문인쇄 즉시 총독부 경무국 도서과로 신문이 납본되면 도서과는...
나도향 사망
나도향의 본명은 나경손이다. ‘경사스런 손자’라는 뜻의 이름이 싫어 박종화에게 부탁해 호와 필명을 각각 도향과 빈으로 지었지만 가족들은 ‘벼의 향기’라는 뜻의 ‘도향’ 이름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향기란 잠시 있다가 곧 사라지는 것이라는 게 가족들의 생각이었다. 그때문은 아니겠지만 도향은 우리나라 작가 중 가장 젊은 나이인 24세에 요절했다. 1922년 1월, ‘백조(白鳥)’ 동인에 참여해 본격적으로 문학을 시작할 때까지 도향의 삶은 반항과 방랑이었다. 경성의전과 도쿄제대...
러시아군, 독일군에 대패한 타넨베르크 전투 개전
1차대전이 발발하자 러시아의 차르(황제)는 아직 준비도 갖추지 않은 상태에서 독일의 심장부 공격을 명령한다. 렌넨캄프의 제1군과 삼소노프의 제2군이 선봉에 섰다. 둘은 역전의 노장이었지만 1904년 틀어진 이래 그때까지 증오심과 복수심으로 가득한 라이벌이었다. 렌넨캄프가 먼저 영광을 차지하기 위해 독일로 진격했다. 전투 경험이 없는 농민들로 급조된 군대에다 행군로도 엉망이었지만 워낙에 대병력이라 독일의 굼비넨 마을을 점령할 수 있었다. 독일군이 후퇴하자 렌넨캄프는 추격을...
6·25 참전한 윌리엄 딘 미군 소장 인민군에 잡혀
6·25 개전 초기, 우리 군은 소련제 T34 탱크에 속수무책이었다. 급기야 육군본부는 오산·평택을 거쳐 대전으로 후퇴했고, 일본에서 급파된 미 제24사단도 대전에 포진했다. 그러나 인민군이 금강 전선에까지 다다르자 육군본부는 다시 대구로 이동하고 24사단도 대전철수를 결정한다. 충북 영동이 목적지였다. 사단장 윌리엄 딘 소장도 소수의 호위병과 함께 길을 떠났다. 그러나 남하도중 만난 옥천·금산 분기점은 그에게는 운명의 갈림길이었다. 옥천이 아닌 금산으로 길을 잘못 든...
연합군, 독일군이 점령했던 파리 해방
노르망디 상륙작전의 성공으로 전세가 역전되면서 파리 해방도 시간문제였다. 1944년 8월 19일 공산당 계열의 프랑스 해방국내군(FFI)이 파리에서 무장봉기를 일으키자 파리주둔 독일사령관 폰 촐티츠가 드골파 레지스탕스 지도자에게 휴전을 제의한다. 양측은 휴전에 합의했으나 FFI가 이를 거부하는 바람에 전투가 재개됐다. 이 과정에서 FFI군 1000여 명이 전사하고 민간인도 580명이나 목숨을 잃었다. 8월 22일 베를린에서 파리 사령부에 한 통의 전문이 타전되었다. “파리를...
일본에서 출항한 ‘우키시마마루호’ 폭발로 귀환 징용자 몰사
1945년 8월 22일, 4730t급의 일본 해군 특별수송선 ‘우키시마마루(浮島丸)호’가 아오모리현 오미나토항을 출항했다. 배에는 일본에 의해 강제로 태워진 7500여 명(일본측 발표 3700여 명)의 한국인 징용자들이 타고 있었다. 귀국선 1호였던 셈이다. 우키시마마루호는 부산으로 가지 않고 연안항로를 따라 남하했다. 이틀 후 귀국선이 도착한 곳은 예상치도 않은 마이즈루만이었다. 8월 24일 오후5시경이었다. 잠시 후 원인모를 대폭발음이 일어났고 우키시마마루호가 침몰하기...
마이크로소프트 ‘윈도95’ 발매
MS-DOS 하나로 세계 PC의 OS(운영체제) 시장을 평정한 마이크로소프트(MS)사는 누구보다 우월한 위치에 있었다. 그러던 중 1983년 1월 경쟁사 애플컴퓨터가 최초의 그래픽 기반 인터페이스 환경을 갖고 있는 ‘리사(Lisa)’를 시장에 내놓았다. 하지만 안정성이 떨어지는 하드웨어와 1만 달러나 되는 높은 가격 때문에 시장으로부터는 호응을 얻지 못했다. MS사도 그해 11월 DOS 기능을 확장한 윈도 환경을 발표했으나 역시 시장의 주목을 끄는 데는 실패했다. 애플은...
경주 천마총에서 천마도 발굴
천마총 입구 원래는 경주의 황남동 98호 고분 ‘황남대총’을 발굴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높이가 25m이고 하부 길이가 120m나 되는, 경주에서 가장 규모가 큰 고분을 발굴하기에는 발굴단의 경험이 아직 부족했다. 예비지식도 얻고 경험도 축적할 겸 그 옆 155호 고분을 시험용으로 삼았다. 1973년 4월 6일 봉토제거작업을 시작한 발굴단은 흥분을 감출 수 없었다. 고분이 아직 어느 누구의 손에도 도굴의 화를 입지 않은 그야말로 처녀분이었기 때문이다. 7월1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