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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청나라 말기의 절대권력자 서태후 사망
중국 청나라 말기 절대권력을 행사한 ‘서태후’는 이름이 아니다. 1861년 함풍제가 병사하고 후궁에서 태후에 오른 서태후가 서쪽에, 정실이 동쪽에 기거해 편의상 사람들이 그렇게 불렀을 뿐이다. 17세에 궁녀로 입궁한 그녀가 귀인과 빈을 거쳐 태후 자리에까지 오를 수 있었던 것은 황제 생전에 총애를 받아서가 아니었다. 함풍제의 뒤를 이을 유일한 아들이 그의 핏줄이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과감한 결단력에 간교한 계책까지 갖춘 야심가였고 남성을 능가하는 활달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한국언론사상 초유의 언론 통·폐합
1980년 11월 14일, 한국언론사상 유례가 없는 언론통폐합 조치가 이뤄졌다. 한국신문협회와 한국방송협회가 임시총회를 열어 상업방송 체제를 공공방송으로 전환하고 지방주재기자를 철수하며 유일한 대형민간통신사를 신설한다는 내용 등을 담은 결의문을 채택한 것이다. 그러나 포장만 ‘자율’이었을 뿐 통폐합 언론사 사주들을 보안사로 끌고가 도장을 찍게 한 사실상의 ‘강제’였다. 11월 12일 오후 6시쯤 전두환 대통령이 결재한 ‘언론창달 보고서’에 따라 보안사가 언론사 사주들을 소환,...
최익현 일본 대마도로 끌려가 73세로 순국
대원군의 위세가 하늘을 찌를 듯 하던 1873년 11월 3일(양력 12월 22일). 이미 9일 전인 10월 25일(음력) “각종 세금 때문에 백성들이 도탄에 빠지고 있다”며 당대 실권자인 대원군을 간접 비난하는 상소를 올렸던 최익현(1833~1907)이 또 다시 상소를 올려 대원군을 궁지로 몰아넣었다. 만동묘와 서원 복구를 청하면서 “많은 폐해가 있으나 전하가 정사를 맡지 않을 때 일어난 일이니 지금부터 임금의 권한을 발휘하라”는 작심 상소였는데 이는 고종에게...
전태일 평화시장 앞에서 분신자살
그 시절 청계천 평화시장의 노동현실은 비참했다. 하루 15시간이 넘는 중노동에 일요근무·철야작업은 예사였고, 만성 위장병과 신경통ㆍ피부병 등도 다반사였다. 대부분이 20대 초반이었고 시다(보조원)는 12∼15세의 어린 소녀들이었다. “사흘밤이나 잠이 안오는 주사를 맞고 일을 해 눈도 보이지 않고 손도 마음대로 펴지지 않는다”며 울음을 터뜨리는 어린 시다 앞에서 재단사 전태일은 절망감을 느껴야했다. 그 역시 극빈의 삶을 살았다. 아버지는 폭음과 술주정을 일삼았고 어머니는 병이...
美 연방대법원, 공공버스에서 인종차별 위헌 판결
1955년 12월 1일 미 앨라배마주 몽고메리시에 사는 중년의 흑인여성 로사 파크스 부인이 버스에 올라타 백인석 뒷자리에 앉았다. 그러나 곧 백인 전용석이 다 차버리자 운전기사가 그녀에게 자리를 비워줄 것을 요구했다. 그날따라 몹시 피곤했던 그녀는 일어서지 않았다. 인종차별 반대의 불꽃이 점화되는 순간이었다. 기사는 경찰을 불렀고 그녀는 ‘운전기사가 승객 자리를 지시할 수 있다’는 시(市) 조례를 위반한 혐의로 유치장에 수감됐다. 1년 전 “분리된 시설은 본질적으로...
김종필·오히라 메모 작성 후 교환
↑ 김종필(왼쪽)과 오히라 5·16 후 박정희 국가재건최고의 의장은 한일회담을 서둘렀다. 산업을 일으키려면 돈이 필요했고, 돈은 ‘청구권’ 명목으로 일본에서 받아낼 요량이었다. 회담은 1951년부터 진행됐지만 10년이 지나도록 좀처럼 진전을 보지 못하고 있었다. 혁명 후인 1961년 6월 20일 제6차 회담을 재개했으나 양국 간의 이견이 좁혀지지 않자 박정희는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을 특사로 파견, 조기타결을 지시했다. 1962년 10월 20일, 일본을 방문한...
일본군, 미군과의 과달카날 해전에서 태평양전쟁 개전 이래 첫 대패
태평양전쟁 개전 초부터 1942년 여름까지 일본군은 파죽지세로 태평양의 섬들을 잠식해 들어갔다. 파푸아뉴기니 동쪽에 위치한 솔로몬 제도 가운데 가장 큰 섬인 과달카날섬 역시 거의 무혈입성이었다. 1942년 8월 7일, 미군이 함대를 동원해 섬에 상륙하려하자 일본군은 미군 함대에 야습을 감행, 치명적인 타격을 주긴 했으나 결국에는 7000명이나 되는 미 해병대의 상륙을 막지 못하는 결정적인 실수를 범하고 말았다. 이후 섬을 둘러싼 수차례의 육·해전 끝에 제공권과 제해권이 미군에...
우리나라 폭발물 사고 사상 최대인 이리역 폭발사고
1977년 11월 11일 밤 9시15분, 전북 이리시(현 익산시)의 시민들은 월드컵 아시아 예선전 한국 대 이란 경기를 TV로 지켜보고 있었고, 시내 삼남극장에서는 700여 명의 방청객이 몰려든 가운데 ‘하춘화쇼’가 시작되고 있었다. 코미디언 진행자 이주일이 막 오프닝 멘트를 마친 순간, 갑자기 “꽝!”하며 천지를 진동하는 대형 폭발음과 함께 엄청난 불기둥이 이리역에서 솟아올랐다. 다량의 폭약을 싣고 인천을 떠나 광주로 향하던 한국화약 소속 화물열차가 이리역에서 대기 중...
헨리 모턴 스탠리 기자, 5년간 소식 끊긴 리빙스턴을 아프리카에서 발견
그 무렵 데이비드 리빙스턴은 5년 간이나 바깥세상과 소식이 끊겨 있었다. 16년 만에 아프리카에서 돌아온 1856년에 이미 그는 국민적 영웅이었고, 탐험기 ‘남아프리카 전도여행’이 7만 권이나 팔려나가 부와 명예를 한꺼번에 거머쥔 유명인사였다. 사자에게 물려 평생 왼팔을 들지 못하면서도 아프리카의 동서를 육로로 가로질러 대서양과 인도양을 모두 바라보고, 발견한 거대한 폭포를 ‘빅토리아 폭포’로 이름지어 여왕의 이름을 후세에 영원토록 알린 것도 리빙스턴이었다. 그런데 네 번째...
유럽 최고 명가 합스부르크가(家) 몰락
20세기 초까지 유럽 최고의 명가를 꼽으라면 단연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가(家)이다. 그러나 1차대전이 이 가문에 치명타를 날렸다. 오스트리아가 패전국이 됐으니 오스트리아를 이끌어온 합스부르크가에 불똥이 튀는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1918년 11월 11일 독일의 항복과 함께 오스트리아의 카를1세가 왕위에서 물러나고 이튿날 공화국이 수립됨으로써 합스부르크가는 오스트리아 제국과 함께 역사 저편으로 사라졌다. 더구나 1919년 4월 3일 공화국 의회가 ‘가계(家系)와 절연하고...
중국 청나라 말기의 절대권력자 서태후 사망
중국 청나라 말기 절대권력을 행사한 ‘서태후’는 이름이 아니다. 1861년 함풍제가 병사하고 후궁에서 태후에 오른 서태후가 서쪽에, 정실이 동쪽에 기거해 편의상 사람들이 그렇게 불렀을 뿐이다. 17세에 궁녀로 입궁한 그녀가 귀인과 빈을 거쳐 태후 자리에까지 오를 수 있었던 것은 황제 생전에 총애를 받아서가 아니었다. 함풍제의 뒤를 이을 유일한 아들이 그의 핏줄이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과감한 결단력에 간교한 계책까지 갖춘 야심가였고 남성을 능가하는 활달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한국언론사상 초유의 언론 통·폐합
1980년 11월 14일, 한국언론사상 유례가 없는 언론통폐합 조치가 이뤄졌다. 한국신문협회와 한국방송협회가 임시총회를 열어 상업방송 체제를 공공방송으로 전환하고 지방주재기자를 철수하며 유일한 대형민간통신사를 신설한다는 내용 등을 담은 결의문을 채택한 것이다. 그러나 포장만 ‘자율’이었을 뿐 통폐합 언론사 사주들을 보안사로 끌고가 도장을 찍게 한 사실상의 ‘강제’였다. 11월 12일 오후 6시쯤 전두환 대통령이 결재한 ‘언론창달 보고서’에 따라 보안사가 언론사 사주들을 소환,...
최익현 일본 대마도로 끌려가 73세로 순국
대원군의 위세가 하늘을 찌를 듯 하던 1873년 11월 3일(양력 12월 22일). 이미 9일 전인 10월 25일(음력) “각종 세금 때문에 백성들이 도탄에 빠지고 있다”며 당대 실권자인 대원군을 간접 비난하는 상소를 올렸던 최익현(1833~1907)이 또 다시 상소를 올려 대원군을 궁지로 몰아넣었다. 만동묘와 서원 복구를 청하면서 “많은 폐해가 있으나 전하가 정사를 맡지 않을 때 일어난 일이니 지금부터 임금의 권한을 발휘하라”는 작심 상소였는데 이는 고종에게...
전태일 평화시장 앞에서 분신자살
그 시절 청계천 평화시장의 노동현실은 비참했다. 하루 15시간이 넘는 중노동에 일요근무·철야작업은 예사였고, 만성 위장병과 신경통ㆍ피부병 등도 다반사였다. 대부분이 20대 초반이었고 시다(보조원)는 12∼15세의 어린 소녀들이었다. “사흘밤이나 잠이 안오는 주사를 맞고 일을 해 눈도 보이지 않고 손도 마음대로 펴지지 않는다”며 울음을 터뜨리는 어린 시다 앞에서 재단사 전태일은 절망감을 느껴야했다. 그 역시 극빈의 삶을 살았다. 아버지는 폭음과 술주정을 일삼았고 어머니는 병이...
美 연방대법원, 공공버스에서 인종차별 위헌 판결
1955년 12월 1일 미 앨라배마주 몽고메리시에 사는 중년의 흑인여성 로사 파크스 부인이 버스에 올라타 백인석 뒷자리에 앉았다. 그러나 곧 백인 전용석이 다 차버리자 운전기사가 그녀에게 자리를 비워줄 것을 요구했다. 그날따라 몹시 피곤했던 그녀는 일어서지 않았다. 인종차별 반대의 불꽃이 점화되는 순간이었다. 기사는 경찰을 불렀고 그녀는 ‘운전기사가 승객 자리를 지시할 수 있다’는 시(市) 조례를 위반한 혐의로 유치장에 수감됐다. 1년 전 “분리된 시설은 본질적으로...
김종필·오히라 메모 작성 후 교환
↑ 김종필(왼쪽)과 오히라 5·16 후 박정희 국가재건최고의 의장은 한일회담을 서둘렀다. 산업을 일으키려면 돈이 필요했고, 돈은 ‘청구권’ 명목으로 일본에서 받아낼 요량이었다. 회담은 1951년부터 진행됐지만 10년이 지나도록 좀처럼 진전을 보지 못하고 있었다. 혁명 후인 1961년 6월 20일 제6차 회담을 재개했으나 양국 간의 이견이 좁혀지지 않자 박정희는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을 특사로 파견, 조기타결을 지시했다. 1962년 10월 20일, 일본을 방문한...
일본군, 미군과의 과달카날 해전에서 태평양전쟁 개전 이래 첫 대패
태평양전쟁 개전 초부터 1942년 여름까지 일본군은 파죽지세로 태평양의 섬들을 잠식해 들어갔다. 파푸아뉴기니 동쪽에 위치한 솔로몬 제도 가운데 가장 큰 섬인 과달카날섬 역시 거의 무혈입성이었다. 1942년 8월 7일, 미군이 함대를 동원해 섬에 상륙하려하자 일본군은 미군 함대에 야습을 감행, 치명적인 타격을 주긴 했으나 결국에는 7000명이나 되는 미 해병대의 상륙을 막지 못하는 결정적인 실수를 범하고 말았다. 이후 섬을 둘러싼 수차례의 육·해전 끝에 제공권과 제해권이 미군에...
우리나라 폭발물 사고 사상 최대인 이리역 폭발사고
1977년 11월 11일 밤 9시15분, 전북 이리시(현 익산시)의 시민들은 월드컵 아시아 예선전 한국 대 이란 경기를 TV로 지켜보고 있었고, 시내 삼남극장에서는 700여 명의 방청객이 몰려든 가운데 ‘하춘화쇼’가 시작되고 있었다. 코미디언 진행자 이주일이 막 오프닝 멘트를 마친 순간, 갑자기 “꽝!”하며 천지를 진동하는 대형 폭발음과 함께 엄청난 불기둥이 이리역에서 솟아올랐다. 다량의 폭약을 싣고 인천을 떠나 광주로 향하던 한국화약 소속 화물열차가 이리역에서 대기 중...
헨리 모턴 스탠리 기자, 5년간 소식 끊긴 리빙스턴을 아프리카에서 발견
그 무렵 데이비드 리빙스턴은 5년 간이나 바깥세상과 소식이 끊겨 있었다. 16년 만에 아프리카에서 돌아온 1856년에 이미 그는 국민적 영웅이었고, 탐험기 ‘남아프리카 전도여행’이 7만 권이나 팔려나가 부와 명예를 한꺼번에 거머쥔 유명인사였다. 사자에게 물려 평생 왼팔을 들지 못하면서도 아프리카의 동서를 육로로 가로질러 대서양과 인도양을 모두 바라보고, 발견한 거대한 폭포를 ‘빅토리아 폭포’로 이름지어 여왕의 이름을 후세에 영원토록 알린 것도 리빙스턴이었다. 그런데 네 번째...
유럽 최고 명가 합스부르크가(家) 몰락
20세기 초까지 유럽 최고의 명가를 꼽으라면 단연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가(家)이다. 그러나 1차대전이 이 가문에 치명타를 날렸다. 오스트리아가 패전국이 됐으니 오스트리아를 이끌어온 합스부르크가에 불똥이 튀는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1918년 11월 11일 독일의 항복과 함께 오스트리아의 카를1세가 왕위에서 물러나고 이튿날 공화국이 수립됨으로써 합스부르크가는 오스트리아 제국과 함께 역사 저편으로 사라졌다. 더구나 1919년 4월 3일 공화국 의회가 ‘가계(家系)와 절연하고...
중국 청나라 말기의 절대권력자 서태후 사망
중국 청나라 말기 절대권력을 행사한 ‘서태후’는 이름이 아니다. 1861년 함풍제가 병사하고 후궁에서 태후에 오른 서태후가 서쪽에, 정실이 동쪽에 기거해 편의상 사람들이 그렇게 불렀을 뿐이다. 17세에 궁녀로 입궁한 그녀가 귀인과 빈을 거쳐 태후 자리에까지 오를 수 있었던 것은 황제 생전에 총애를 받아서가 아니었다. 함풍제의 뒤를 이을 유일한 아들이 그의 핏줄이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과감한 결단력에 간교한 계책까지 갖춘 야심가였고 남성을 능가하는 활달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한국언론사상 초유의 언론 통·폐합
1980년 11월 14일, 한국언론사상 유례가 없는 언론통폐합 조치가 이뤄졌다. 한국신문협회와 한국방송협회가 임시총회를 열어 상업방송 체제를 공공방송으로 전환하고 지방주재기자를 철수하며 유일한 대형민간통신사를 신설한다는 내용 등을 담은 결의문을 채택한 것이다. 그러나 포장만 ‘자율’이었을 뿐 통폐합 언론사 사주들을 보안사로 끌고가 도장을 찍게 한 사실상의 ‘강제’였다. 11월 12일 오후 6시쯤 전두환 대통령이 결재한 ‘언론창달 보고서’에 따라 보안사가 언론사 사주들을 소환,...
최익현 일본 대마도로 끌려가 73세로 순국
대원군의 위세가 하늘을 찌를 듯 하던 1873년 11월 3일(양력 12월 22일). 이미 9일 전인 10월 25일(음력) “각종 세금 때문에 백성들이 도탄에 빠지고 있다”며 당대 실권자인 대원군을 간접 비난하는 상소를 올렸던 최익현(1833~1907)이 또 다시 상소를 올려 대원군을 궁지로 몰아넣었다. 만동묘와 서원 복구를 청하면서 “많은 폐해가 있으나 전하가 정사를 맡지 않을 때 일어난 일이니 지금부터 임금의 권한을 발휘하라”는 작심 상소였는데 이는 고종에게...
전태일 평화시장 앞에서 분신자살
그 시절 청계천 평화시장의 노동현실은 비참했다. 하루 15시간이 넘는 중노동에 일요근무·철야작업은 예사였고, 만성 위장병과 신경통ㆍ피부병 등도 다반사였다. 대부분이 20대 초반이었고 시다(보조원)는 12∼15세의 어린 소녀들이었다. “사흘밤이나 잠이 안오는 주사를 맞고 일을 해 눈도 보이지 않고 손도 마음대로 펴지지 않는다”며 울음을 터뜨리는 어린 시다 앞에서 재단사 전태일은 절망감을 느껴야했다. 그 역시 극빈의 삶을 살았다. 아버지는 폭음과 술주정을 일삼았고 어머니는 병이...
美 연방대법원, 공공버스에서 인종차별 위헌 판결
1955년 12월 1일 미 앨라배마주 몽고메리시에 사는 중년의 흑인여성 로사 파크스 부인이 버스에 올라타 백인석 뒷자리에 앉았다. 그러나 곧 백인 전용석이 다 차버리자 운전기사가 그녀에게 자리를 비워줄 것을 요구했다. 그날따라 몹시 피곤했던 그녀는 일어서지 않았다. 인종차별 반대의 불꽃이 점화되는 순간이었다. 기사는 경찰을 불렀고 그녀는 ‘운전기사가 승객 자리를 지시할 수 있다’는 시(市) 조례를 위반한 혐의로 유치장에 수감됐다. 1년 전 “분리된 시설은 본질적으로...
김종필·오히라 메모 작성 후 교환
↑ 김종필(왼쪽)과 오히라 5·16 후 박정희 국가재건최고의 의장은 한일회담을 서둘렀다. 산업을 일으키려면 돈이 필요했고, 돈은 ‘청구권’ 명목으로 일본에서 받아낼 요량이었다. 회담은 1951년부터 진행됐지만 10년이 지나도록 좀처럼 진전을 보지 못하고 있었다. 혁명 후인 1961년 6월 20일 제6차 회담을 재개했으나 양국 간의 이견이 좁혀지지 않자 박정희는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을 특사로 파견, 조기타결을 지시했다. 1962년 10월 20일, 일본을 방문한...
일본군, 미군과의 과달카날 해전에서 태평양전쟁 개전 이래 첫 대패
태평양전쟁 개전 초부터 1942년 여름까지 일본군은 파죽지세로 태평양의 섬들을 잠식해 들어갔다. 파푸아뉴기니 동쪽에 위치한 솔로몬 제도 가운데 가장 큰 섬인 과달카날섬 역시 거의 무혈입성이었다. 1942년 8월 7일, 미군이 함대를 동원해 섬에 상륙하려하자 일본군은 미군 함대에 야습을 감행, 치명적인 타격을 주긴 했으나 결국에는 7000명이나 되는 미 해병대의 상륙을 막지 못하는 결정적인 실수를 범하고 말았다. 이후 섬을 둘러싼 수차례의 육·해전 끝에 제공권과 제해권이 미군에...
우리나라 폭발물 사고 사상 최대인 이리역 폭발사고
1977년 11월 11일 밤 9시15분, 전북 이리시(현 익산시)의 시민들은 월드컵 아시아 예선전 한국 대 이란 경기를 TV로 지켜보고 있었고, 시내 삼남극장에서는 700여 명의 방청객이 몰려든 가운데 ‘하춘화쇼’가 시작되고 있었다. 코미디언 진행자 이주일이 막 오프닝 멘트를 마친 순간, 갑자기 “꽝!”하며 천지를 진동하는 대형 폭발음과 함께 엄청난 불기둥이 이리역에서 솟아올랐다. 다량의 폭약을 싣고 인천을 떠나 광주로 향하던 한국화약 소속 화물열차가 이리역에서 대기 중...
헨리 모턴 스탠리 기자, 5년간 소식 끊긴 리빙스턴을 아프리카에서 발견
그 무렵 데이비드 리빙스턴은 5년 간이나 바깥세상과 소식이 끊겨 있었다. 16년 만에 아프리카에서 돌아온 1856년에 이미 그는 국민적 영웅이었고, 탐험기 ‘남아프리카 전도여행’이 7만 권이나 팔려나가 부와 명예를 한꺼번에 거머쥔 유명인사였다. 사자에게 물려 평생 왼팔을 들지 못하면서도 아프리카의 동서를 육로로 가로질러 대서양과 인도양을 모두 바라보고, 발견한 거대한 폭포를 ‘빅토리아 폭포’로 이름지어 여왕의 이름을 후세에 영원토록 알린 것도 리빙스턴이었다. 그런데 네 번째...
유럽 최고 명가 합스부르크가(家) 몰락
20세기 초까지 유럽 최고의 명가를 꼽으라면 단연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가(家)이다. 그러나 1차대전이 이 가문에 치명타를 날렸다. 오스트리아가 패전국이 됐으니 오스트리아를 이끌어온 합스부르크가에 불똥이 튀는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1918년 11월 11일 독일의 항복과 함께 오스트리아의 카를1세가 왕위에서 물러나고 이튿날 공화국이 수립됨으로써 합스부르크가는 오스트리아 제국과 함께 역사 저편으로 사라졌다. 더구나 1919년 4월 3일 공화국 의회가 ‘가계(家系)와 절연하고...
중국 청나라 말기의 절대권력자 서태후 사망
중국 청나라 말기 절대권력을 행사한 ‘서태후’는 이름이 아니다. 1861년 함풍제가 병사하고 후궁에서 태후에 오른 서태후가 서쪽에, 정실이 동쪽에 기거해 편의상 사람들이 그렇게 불렀을 뿐이다. 17세에 궁녀로 입궁한 그녀가 귀인과 빈을 거쳐 태후 자리에까지 오를 수 있었던 것은 황제 생전에 총애를 받아서가 아니었다. 함풍제의 뒤를 이을 유일한 아들이 그의 핏줄이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과감한 결단력에 간교한 계책까지 갖춘 야심가였고 남성을 능가하는 활달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한국언론사상 초유의 언론 통·폐합
1980년 11월 14일, 한국언론사상 유례가 없는 언론통폐합 조치가 이뤄졌다. 한국신문협회와 한국방송협회가 임시총회를 열어 상업방송 체제를 공공방송으로 전환하고 지방주재기자를 철수하며 유일한 대형민간통신사를 신설한다는 내용 등을 담은 결의문을 채택한 것이다. 그러나 포장만 ‘자율’이었을 뿐 통폐합 언론사 사주들을 보안사로 끌고가 도장을 찍게 한 사실상의 ‘강제’였다. 11월 12일 오후 6시쯤 전두환 대통령이 결재한 ‘언론창달 보고서’에 따라 보안사가 언론사 사주들을 소환,...
최익현 일본 대마도로 끌려가 73세로 순국
대원군의 위세가 하늘을 찌를 듯 하던 1873년 11월 3일(양력 12월 22일). 이미 9일 전인 10월 25일(음력) “각종 세금 때문에 백성들이 도탄에 빠지고 있다”며 당대 실권자인 대원군을 간접 비난하는 상소를 올렸던 최익현(1833~1907)이 또 다시 상소를 올려 대원군을 궁지로 몰아넣었다. 만동묘와 서원 복구를 청하면서 “많은 폐해가 있으나 전하가 정사를 맡지 않을 때 일어난 일이니 지금부터 임금의 권한을 발휘하라”는 작심 상소였는데 이는 고종에게...
전태일 평화시장 앞에서 분신자살
그 시절 청계천 평화시장의 노동현실은 비참했다. 하루 15시간이 넘는 중노동에 일요근무·철야작업은 예사였고, 만성 위장병과 신경통ㆍ피부병 등도 다반사였다. 대부분이 20대 초반이었고 시다(보조원)는 12∼15세의 어린 소녀들이었다. “사흘밤이나 잠이 안오는 주사를 맞고 일을 해 눈도 보이지 않고 손도 마음대로 펴지지 않는다”며 울음을 터뜨리는 어린 시다 앞에서 재단사 전태일은 절망감을 느껴야했다. 그 역시 극빈의 삶을 살았다. 아버지는 폭음과 술주정을 일삼았고 어머니는 병이...
美 연방대법원, 공공버스에서 인종차별 위헌 판결
1955년 12월 1일 미 앨라배마주 몽고메리시에 사는 중년의 흑인여성 로사 파크스 부인이 버스에 올라타 백인석 뒷자리에 앉았다. 그러나 곧 백인 전용석이 다 차버리자 운전기사가 그녀에게 자리를 비워줄 것을 요구했다. 그날따라 몹시 피곤했던 그녀는 일어서지 않았다. 인종차별 반대의 불꽃이 점화되는 순간이었다. 기사는 경찰을 불렀고 그녀는 ‘운전기사가 승객 자리를 지시할 수 있다’는 시(市) 조례를 위반한 혐의로 유치장에 수감됐다. 1년 전 “분리된 시설은 본질적으로...
김종필·오히라 메모 작성 후 교환
↑ 김종필(왼쪽)과 오히라 5·16 후 박정희 국가재건최고의 의장은 한일회담을 서둘렀다. 산업을 일으키려면 돈이 필요했고, 돈은 ‘청구권’ 명목으로 일본에서 받아낼 요량이었다. 회담은 1951년부터 진행됐지만 10년이 지나도록 좀처럼 진전을 보지 못하고 있었다. 혁명 후인 1961년 6월 20일 제6차 회담을 재개했으나 양국 간의 이견이 좁혀지지 않자 박정희는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을 특사로 파견, 조기타결을 지시했다. 1962년 10월 20일, 일본을 방문한...
일본군, 미군과의 과달카날 해전에서 태평양전쟁 개전 이래 첫 대패
태평양전쟁 개전 초부터 1942년 여름까지 일본군은 파죽지세로 태평양의 섬들을 잠식해 들어갔다. 파푸아뉴기니 동쪽에 위치한 솔로몬 제도 가운데 가장 큰 섬인 과달카날섬 역시 거의 무혈입성이었다. 1942년 8월 7일, 미군이 함대를 동원해 섬에 상륙하려하자 일본군은 미군 함대에 야습을 감행, 치명적인 타격을 주긴 했으나 결국에는 7000명이나 되는 미 해병대의 상륙을 막지 못하는 결정적인 실수를 범하고 말았다. 이후 섬을 둘러싼 수차례의 육·해전 끝에 제공권과 제해권이 미군에...
우리나라 폭발물 사고 사상 최대인 이리역 폭발사고
1977년 11월 11일 밤 9시15분, 전북 이리시(현 익산시)의 시민들은 월드컵 아시아 예선전 한국 대 이란 경기를 TV로 지켜보고 있었고, 시내 삼남극장에서는 700여 명의 방청객이 몰려든 가운데 ‘하춘화쇼’가 시작되고 있었다. 코미디언 진행자 이주일이 막 오프닝 멘트를 마친 순간, 갑자기 “꽝!”하며 천지를 진동하는 대형 폭발음과 함께 엄청난 불기둥이 이리역에서 솟아올랐다. 다량의 폭약을 싣고 인천을 떠나 광주로 향하던 한국화약 소속 화물열차가 이리역에서 대기 중...
헨리 모턴 스탠리 기자, 5년간 소식 끊긴 리빙스턴을 아프리카에서 발견
그 무렵 데이비드 리빙스턴은 5년 간이나 바깥세상과 소식이 끊겨 있었다. 16년 만에 아프리카에서 돌아온 1856년에 이미 그는 국민적 영웅이었고, 탐험기 ‘남아프리카 전도여행’이 7만 권이나 팔려나가 부와 명예를 한꺼번에 거머쥔 유명인사였다. 사자에게 물려 평생 왼팔을 들지 못하면서도 아프리카의 동서를 육로로 가로질러 대서양과 인도양을 모두 바라보고, 발견한 거대한 폭포를 ‘빅토리아 폭포’로 이름지어 여왕의 이름을 후세에 영원토록 알린 것도 리빙스턴이었다. 그런데 네 번째...
유럽 최고 명가 합스부르크가(家) 몰락
20세기 초까지 유럽 최고의 명가를 꼽으라면 단연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가(家)이다. 그러나 1차대전이 이 가문에 치명타를 날렸다. 오스트리아가 패전국이 됐으니 오스트리아를 이끌어온 합스부르크가에 불똥이 튀는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1918년 11월 11일 독일의 항복과 함께 오스트리아의 카를1세가 왕위에서 물러나고 이튿날 공화국이 수립됨으로써 합스부르크가는 오스트리아 제국과 함께 역사 저편으로 사라졌다. 더구나 1919년 4월 3일 공화국 의회가 ‘가계(家系)와 절연하고...
중국 청나라 말기의 절대권력자 서태후 사망
중국 청나라 말기 절대권력을 행사한 ‘서태후’는 이름이 아니다. 1861년 함풍제가 병사하고 후궁에서 태후에 오른 서태후가 서쪽에, 정실이 동쪽에 기거해 편의상 사람들이 그렇게 불렀을 뿐이다. 17세에 궁녀로 입궁한 그녀가 귀인과 빈을 거쳐 태후 자리에까지 오를 수 있었던 것은 황제 생전에 총애를 받아서가 아니었다. 함풍제의 뒤를 이을 유일한 아들이 그의 핏줄이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과감한 결단력에 간교한 계책까지 갖춘 야심가였고 남성을 능가하는 활달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한국언론사상 초유의 언론 통·폐합
1980년 11월 14일, 한국언론사상 유례가 없는 언론통폐합 조치가 이뤄졌다. 한국신문협회와 한국방송협회가 임시총회를 열어 상업방송 체제를 공공방송으로 전환하고 지방주재기자를 철수하며 유일한 대형민간통신사를 신설한다는 내용 등을 담은 결의문을 채택한 것이다. 그러나 포장만 ‘자율’이었을 뿐 통폐합 언론사 사주들을 보안사로 끌고가 도장을 찍게 한 사실상의 ‘강제’였다. 11월 12일 오후 6시쯤 전두환 대통령이 결재한 ‘언론창달 보고서’에 따라 보안사가 언론사 사주들을 소환,...
최익현 일본 대마도로 끌려가 73세로 순국
대원군의 위세가 하늘을 찌를 듯 하던 1873년 11월 3일(양력 12월 22일). 이미 9일 전인 10월 25일(음력) “각종 세금 때문에 백성들이 도탄에 빠지고 있다”며 당대 실권자인 대원군을 간접 비난하는 상소를 올렸던 최익현(1833~1907)이 또 다시 상소를 올려 대원군을 궁지로 몰아넣었다. 만동묘와 서원 복구를 청하면서 “많은 폐해가 있으나 전하가 정사를 맡지 않을 때 일어난 일이니 지금부터 임금의 권한을 발휘하라”는 작심 상소였는데 이는 고종에게...
전태일 평화시장 앞에서 분신자살
그 시절 청계천 평화시장의 노동현실은 비참했다. 하루 15시간이 넘는 중노동에 일요근무·철야작업은 예사였고, 만성 위장병과 신경통ㆍ피부병 등도 다반사였다. 대부분이 20대 초반이었고 시다(보조원)는 12∼15세의 어린 소녀들이었다. “사흘밤이나 잠이 안오는 주사를 맞고 일을 해 눈도 보이지 않고 손도 마음대로 펴지지 않는다”며 울음을 터뜨리는 어린 시다 앞에서 재단사 전태일은 절망감을 느껴야했다. 그 역시 극빈의 삶을 살았다. 아버지는 폭음과 술주정을 일삼았고 어머니는 병이...
美 연방대법원, 공공버스에서 인종차별 위헌 판결
1955년 12월 1일 미 앨라배마주 몽고메리시에 사는 중년의 흑인여성 로사 파크스 부인이 버스에 올라타 백인석 뒷자리에 앉았다. 그러나 곧 백인 전용석이 다 차버리자 운전기사가 그녀에게 자리를 비워줄 것을 요구했다. 그날따라 몹시 피곤했던 그녀는 일어서지 않았다. 인종차별 반대의 불꽃이 점화되는 순간이었다. 기사는 경찰을 불렀고 그녀는 ‘운전기사가 승객 자리를 지시할 수 있다’는 시(市) 조례를 위반한 혐의로 유치장에 수감됐다. 1년 전 “분리된 시설은 본질적으로...
김종필·오히라 메모 작성 후 교환
↑ 김종필(왼쪽)과 오히라 5·16 후 박정희 국가재건최고의 의장은 한일회담을 서둘렀다. 산업을 일으키려면 돈이 필요했고, 돈은 ‘청구권’ 명목으로 일본에서 받아낼 요량이었다. 회담은 1951년부터 진행됐지만 10년이 지나도록 좀처럼 진전을 보지 못하고 있었다. 혁명 후인 1961년 6월 20일 제6차 회담을 재개했으나 양국 간의 이견이 좁혀지지 않자 박정희는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을 특사로 파견, 조기타결을 지시했다. 1962년 10월 20일, 일본을 방문한...
일본군, 미군과의 과달카날 해전에서 태평양전쟁 개전 이래 첫 대패
태평양전쟁 개전 초부터 1942년 여름까지 일본군은 파죽지세로 태평양의 섬들을 잠식해 들어갔다. 파푸아뉴기니 동쪽에 위치한 솔로몬 제도 가운데 가장 큰 섬인 과달카날섬 역시 거의 무혈입성이었다. 1942년 8월 7일, 미군이 함대를 동원해 섬에 상륙하려하자 일본군은 미군 함대에 야습을 감행, 치명적인 타격을 주긴 했으나 결국에는 7000명이나 되는 미 해병대의 상륙을 막지 못하는 결정적인 실수를 범하고 말았다. 이후 섬을 둘러싼 수차례의 육·해전 끝에 제공권과 제해권이 미군에...
우리나라 폭발물 사고 사상 최대인 이리역 폭발사고
1977년 11월 11일 밤 9시15분, 전북 이리시(현 익산시)의 시민들은 월드컵 아시아 예선전 한국 대 이란 경기를 TV로 지켜보고 있었고, 시내 삼남극장에서는 700여 명의 방청객이 몰려든 가운데 ‘하춘화쇼’가 시작되고 있었다. 코미디언 진행자 이주일이 막 오프닝 멘트를 마친 순간, 갑자기 “꽝!”하며 천지를 진동하는 대형 폭발음과 함께 엄청난 불기둥이 이리역에서 솟아올랐다. 다량의 폭약을 싣고 인천을 떠나 광주로 향하던 한국화약 소속 화물열차가 이리역에서 대기 중...
헨리 모턴 스탠리 기자, 5년간 소식 끊긴 리빙스턴을 아프리카에서 발견
그 무렵 데이비드 리빙스턴은 5년 간이나 바깥세상과 소식이 끊겨 있었다. 16년 만에 아프리카에서 돌아온 1856년에 이미 그는 국민적 영웅이었고, 탐험기 ‘남아프리카 전도여행’이 7만 권이나 팔려나가 부와 명예를 한꺼번에 거머쥔 유명인사였다. 사자에게 물려 평생 왼팔을 들지 못하면서도 아프리카의 동서를 육로로 가로질러 대서양과 인도양을 모두 바라보고, 발견한 거대한 폭포를 ‘빅토리아 폭포’로 이름지어 여왕의 이름을 후세에 영원토록 알린 것도 리빙스턴이었다. 그런데 네 번째...
유럽 최고 명가 합스부르크가(家) 몰락
20세기 초까지 유럽 최고의 명가를 꼽으라면 단연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가(家)이다. 그러나 1차대전이 이 가문에 치명타를 날렸다. 오스트리아가 패전국이 됐으니 오스트리아를 이끌어온 합스부르크가에 불똥이 튀는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1918년 11월 11일 독일의 항복과 함께 오스트리아의 카를1세가 왕위에서 물러나고 이튿날 공화국이 수립됨으로써 합스부르크가는 오스트리아 제국과 함께 역사 저편으로 사라졌다. 더구나 1919년 4월 3일 공화국 의회가 ‘가계(家系)와 절연하고...
중국 청나라 말기의 절대권력자 서태후 사망
중국 청나라 말기 절대권력을 행사한 ‘서태후’는 이름이 아니다. 1861년 함풍제가 병사하고 후궁에서 태후에 오른 서태후가 서쪽에, 정실이 동쪽에 기거해 편의상 사람들이 그렇게 불렀을 뿐이다. 17세에 궁녀로 입궁한 그녀가 귀인과 빈을 거쳐 태후 자리에까지 오를 수 있었던 것은 황제 생전에 총애를 받아서가 아니었다. 함풍제의 뒤를 이을 유일한 아들이 그의 핏줄이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과감한 결단력에 간교한 계책까지 갖춘 야심가였고 남성을 능가하는 활달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한국언론사상 초유의 언론 통·폐합
1980년 11월 14일, 한국언론사상 유례가 없는 언론통폐합 조치가 이뤄졌다. 한국신문협회와 한국방송협회가 임시총회를 열어 상업방송 체제를 공공방송으로 전환하고 지방주재기자를 철수하며 유일한 대형민간통신사를 신설한다는 내용 등을 담은 결의문을 채택한 것이다. 그러나 포장만 ‘자율’이었을 뿐 통폐합 언론사 사주들을 보안사로 끌고가 도장을 찍게 한 사실상의 ‘강제’였다. 11월 12일 오후 6시쯤 전두환 대통령이 결재한 ‘언론창달 보고서’에 따라 보안사가 언론사 사주들을 소환,...
최익현 일본 대마도로 끌려가 73세로 순국
대원군의 위세가 하늘을 찌를 듯 하던 1873년 11월 3일(양력 12월 22일). 이미 9일 전인 10월 25일(음력) “각종 세금 때문에 백성들이 도탄에 빠지고 있다”며 당대 실권자인 대원군을 간접 비난하는 상소를 올렸던 최익현(1833~1907)이 또 다시 상소를 올려 대원군을 궁지로 몰아넣었다. 만동묘와 서원 복구를 청하면서 “많은 폐해가 있으나 전하가 정사를 맡지 않을 때 일어난 일이니 지금부터 임금의 권한을 발휘하라”는 작심 상소였는데 이는 고종에게...
전태일 평화시장 앞에서 분신자살
그 시절 청계천 평화시장의 노동현실은 비참했다. 하루 15시간이 넘는 중노동에 일요근무·철야작업은 예사였고, 만성 위장병과 신경통ㆍ피부병 등도 다반사였다. 대부분이 20대 초반이었고 시다(보조원)는 12∼15세의 어린 소녀들이었다. “사흘밤이나 잠이 안오는 주사를 맞고 일을 해 눈도 보이지 않고 손도 마음대로 펴지지 않는다”며 울음을 터뜨리는 어린 시다 앞에서 재단사 전태일은 절망감을 느껴야했다. 그 역시 극빈의 삶을 살았다. 아버지는 폭음과 술주정을 일삼았고 어머니는 병이...
美 연방대법원, 공공버스에서 인종차별 위헌 판결
1955년 12월 1일 미 앨라배마주 몽고메리시에 사는 중년의 흑인여성 로사 파크스 부인이 버스에 올라타 백인석 뒷자리에 앉았다. 그러나 곧 백인 전용석이 다 차버리자 운전기사가 그녀에게 자리를 비워줄 것을 요구했다. 그날따라 몹시 피곤했던 그녀는 일어서지 않았다. 인종차별 반대의 불꽃이 점화되는 순간이었다. 기사는 경찰을 불렀고 그녀는 ‘운전기사가 승객 자리를 지시할 수 있다’는 시(市) 조례를 위반한 혐의로 유치장에 수감됐다. 1년 전 “분리된 시설은 본질적으로...
김종필·오히라 메모 작성 후 교환
↑ 김종필(왼쪽)과 오히라 5·16 후 박정희 국가재건최고의 의장은 한일회담을 서둘렀다. 산업을 일으키려면 돈이 필요했고, 돈은 ‘청구권’ 명목으로 일본에서 받아낼 요량이었다. 회담은 1951년부터 진행됐지만 10년이 지나도록 좀처럼 진전을 보지 못하고 있었다. 혁명 후인 1961년 6월 20일 제6차 회담을 재개했으나 양국 간의 이견이 좁혀지지 않자 박정희는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을 특사로 파견, 조기타결을 지시했다. 1962년 10월 20일, 일본을 방문한...
일본군, 미군과의 과달카날 해전에서 태평양전쟁 개전 이래 첫 대패
태평양전쟁 개전 초부터 1942년 여름까지 일본군은 파죽지세로 태평양의 섬들을 잠식해 들어갔다. 파푸아뉴기니 동쪽에 위치한 솔로몬 제도 가운데 가장 큰 섬인 과달카날섬 역시 거의 무혈입성이었다. 1942년 8월 7일, 미군이 함대를 동원해 섬에 상륙하려하자 일본군은 미군 함대에 야습을 감행, 치명적인 타격을 주긴 했으나 결국에는 7000명이나 되는 미 해병대의 상륙을 막지 못하는 결정적인 실수를 범하고 말았다. 이후 섬을 둘러싼 수차례의 육·해전 끝에 제공권과 제해권이 미군에...
우리나라 폭발물 사고 사상 최대인 이리역 폭발사고
1977년 11월 11일 밤 9시15분, 전북 이리시(현 익산시)의 시민들은 월드컵 아시아 예선전 한국 대 이란 경기를 TV로 지켜보고 있었고, 시내 삼남극장에서는 700여 명의 방청객이 몰려든 가운데 ‘하춘화쇼’가 시작되고 있었다. 코미디언 진행자 이주일이 막 오프닝 멘트를 마친 순간, 갑자기 “꽝!”하며 천지를 진동하는 대형 폭발음과 함께 엄청난 불기둥이 이리역에서 솟아올랐다. 다량의 폭약을 싣고 인천을 떠나 광주로 향하던 한국화약 소속 화물열차가 이리역에서 대기 중...
헨리 모턴 스탠리 기자, 5년간 소식 끊긴 리빙스턴을 아프리카에서 발견
그 무렵 데이비드 리빙스턴은 5년 간이나 바깥세상과 소식이 끊겨 있었다. 16년 만에 아프리카에서 돌아온 1856년에 이미 그는 국민적 영웅이었고, 탐험기 ‘남아프리카 전도여행’이 7만 권이나 팔려나가 부와 명예를 한꺼번에 거머쥔 유명인사였다. 사자에게 물려 평생 왼팔을 들지 못하면서도 아프리카의 동서를 육로로 가로질러 대서양과 인도양을 모두 바라보고, 발견한 거대한 폭포를 ‘빅토리아 폭포’로 이름지어 여왕의 이름을 후세에 영원토록 알린 것도 리빙스턴이었다. 그런데 네 번째...
유럽 최고 명가 합스부르크가(家) 몰락
20세기 초까지 유럽 최고의 명가를 꼽으라면 단연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가(家)이다. 그러나 1차대전이 이 가문에 치명타를 날렸다. 오스트리아가 패전국이 됐으니 오스트리아를 이끌어온 합스부르크가에 불똥이 튀는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1918년 11월 11일 독일의 항복과 함께 오스트리아의 카를1세가 왕위에서 물러나고 이튿날 공화국이 수립됨으로써 합스부르크가는 오스트리아 제국과 함께 역사 저편으로 사라졌다. 더구나 1919년 4월 3일 공화국 의회가 ‘가계(家系)와 절연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