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오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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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미 한국 대사관 창설

1949년 3월 25일, 장면 초대 주미 대사가 미국 트루먼 대통령에게 신임장을 제정했다. 이로써 광복 후 점령국·피점령국 관계를 유지해온 한미 양국이 비로소 대등한 동반자 관계로 전환됐다.

장면 대사는 주로 정치인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막 건국된 대한민국을 세계 속에 뿌리내리게 한, 우리나라 외교사의 첫 페이지를 장식하는 인물이다. 그에게 주어진 첫 외교 활동은 1948년 9월 파리에서 열린 제3회 유엔총회에 수석 대표로 참석하는 일이었다. 각국 대표를 상대로 한 3개월 간의 노력은 마침내 대한민국이 유엔의 승인(12월 12일)을 받는 결실을 맺도록 했다.

장면은 유엔의 승인을 얻은 그해 말 미국으로 건너가 대한민국을 승인(1949년 1월 1일)한 미국과 현안을 논의하던 중 1월 5일 갑자기 주미대사로 발령이 나자 곧바로 일제 때 임시정부의 구미위원회가 들어있던 빌딩을 임시 청사로 정한 뒤 1시간 당 5달러의 렌트카(곧 ‘뷰익’을 구입)를 빌려타고 각국 대사를 만나 신생국의 존재를 알려나갔다.

장면의 활약상은 6·25때 두드러졌다. 6월 24일 밤 10시 30분경(미국 시각) 이승만 대통령이 전쟁소식을 알려오자 즉각 미 국무성으로 달려가 유엔 안보리 소집을 협의했다. 25일과 27일 유엔 안보리가 소집되었을 때는 북한의 즉각철수와 군사행동 결의안이 통과되도록 국제사회를 설득했다. 라디도 프로그램에도 출연해 미국인의 지지를 호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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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경제공동체(EEC) 출범

유럽은 작은 땅에 여러나라가 얽혀있는 탓에 역사적으로 늘 경쟁과 대립과 전쟁이 끊이지 않았다. 이는 중국과 이슬람 세력에 뒤져있던 유럽이 역사의 중심으로 우뚝서게 한 동인(動因)이 되기도 했지만 피해가 너무 컸다. 2차 대전이 끝나자 유럽인들은 반복되는 재앙을 피하기 위해 그들의 오랜 꿈인 유럽통합을 모색했다.

그리고 1950년 5월 9일, 프랑스 외무장관 로베르 슈만이 석탄과 철강산업의 통합을 제창하며 꿈의 실현에 나섰다. 이 제안은 유럽연합이 이 날을 ‘유럽의 날(Europe Day)’로 기념할 만큼 유럽통합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 날이다. 이듬해 4월 프랑스·서독·이탈리아·벨기에·네덜란드·룩셈부르크 등 6개국이 ‘유럽석탄철강공동체(ECSC)’를 발족시키면서 ‘유럽 합중국’을 향한 유럽인들의 먼 여정이 시작됐다.

1957년 3월 25일에는 6개국 대표가 로마에 모여 회원국간 자본·상품·노동력·서비스의 자유로운 이동을 목표로 한 유럽경제공동체(ECC)와 유럽원자력공동체(EURATOM) 창설에 조인함으로써 유럽통합은 이제 거역할 수 없는 대세로 굳어졌다. 1967년 7월에는 ECC·ECSC·EURATOM이 유럽공동체(EC)로 헤쳐모여 유럽통합의 기틀을 더욱 공고히 했다.

공동시장을 단일시장으로 전환하려는 시도가 진행되는 가운데 독일의 통일과 소련의 몰락은 유럽에 새로운 통합방식을 요구했다. 1993년 11월, 궁극적으로 유럽연방을 지향하는 ‘마스트리히트 조약’이 발효됨으로써 오늘날의 ‘유럽연합(EU)’이 출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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