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오늘

영국 정부, 인도·파키스탄 분리 독립안 발표

1947년 6월 3일, 영국의 루이스 마운트배튼 인도 총독이 1857년 세포이항쟁 이후 90년간 영국의 식민지였던 인도를 힌두교 지역과 무슬림 지역으로 나눠 각각 제헌의회를 세운다는 독립안(案)을 발표했다. 분리안은 두 종교 세력을 대표하는 국민회의파와 무슬림연맹에 의해 각각 승인됐다. 2차대전을 전후로 힌두교의 국민회의파를 중심으로 순조롭게 진행되던 독립 일정에 차질이 생긴 것은 모하메드 알리 지나가 이끄는 무슬림연맹이 분리를 요구하면서였다. 지나는 당초에는 힌두·회교도의 단결을 강조했었으나 1920년 간디의 국민회의를 탈퇴하고 1935년 무슬림연맹의 지도권을 장악하고 나서는 파키스탄 독립에 자신의 삶을 걸었다.

1937년 국민회의가 무슬림연맹과 연립조직을 구성하라는 영국의 제의를 거부하고, 국민회의 의장 네루가 무슬림의 정치적 존재를 부정하는 선언을 하면서 힌두·회교도의 대립은 더 이상 화해할 수 없는 단계로 치달았다. 1946년 8월 16일에는 파키스탄을 분리하지 않으려는 영국의 계획안이 알려지면서 이에 항의하는 회교도들의 시위로 캘커타에서만 5000명이 죽는 유혈 참사를 빚었다.

캘커타 대학살이 보복으로 이어지는 악순환이 계속되자 결국 영국은 내전과 분단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고, 국민회의파도 곳곳에서 진행되고 있는 종교 갈등과 이에따른 살육을 마냥 모른 채 할 수만은 없었다. 간디는 인도의 분리를 “생체해부하는 것”이라며 강하게 반대했으나 결국 영국령 인도는 1947년 8월 15일, 인도와 파키스탄 2개 국가로 분리 독립됐다. 이 과정에서 또 대규모 학살이 자행됐다. 힌두교도와 시크교도가 파키스탄으로부터, 이슬람교도가 인도로부터 쫓겨나면서 1400만 명의 난민이 발생하고 100만 명이 살해된 것이다. 회교도 4500만 명은 인도에 그대로 머물렀다. 분리 후에도 양국은 경계 지역인 카슈미르를 둘러싸고 3차례나 대규모 전쟁을 치렀지만 지금도 긴장은 해소되지 않고 있다. 분리 당시 인도를 가운데에 두고 동·서로 나뉘었던 파키스탄은 1971년 결국 동파키스탄이 떨어져나가 방글라데시로 독립하면서 결과적으로 영국령 인도는 세 나라로 쪼개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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