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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례 오산 사성암] 고승(高僧) 4인과의 인연을 부각한 스토리텔링 보다는 섬진강, 구례벌판, 지리산 능선 조망이 매력적인 곳이지요

↑ 사성암 전경 (출처 구례군청)

 

by 김지지

 

■언제부터 유명해졌을까

전남 구례군 문척면 죽마리의 오산(鰲山․531m)과 사성암(四聖庵)은 사실상 한몸이다. 멋진 조망터(오산)에 사찰(사성암)이 둥지를 튼 이후, 딱히 내세울 것 없는 오산이 사성암 덕분에 전국적으로 이름을 알리고 오산 덕분에 사성암의 조망이 인기를 끌면서 둘은 떼려야 뗄 수 없는 실과 바늘같은 관계가 되었다. 사성암은 오랫동안 존재감이 없었다. 1920년에 창간한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를 검색하면 1934년 동아일보에 한 차례 등장하는데 사성암이 아니라 사성암매 즉 사성암 매화를 거론한다. 이후에도 검색되지 않다가 1959년과 1984년 조선일보에서 각각 한 건씩 검색된다. 1990년부터는 전국의 모든 신문을 한곳에 모아놓은 카인즈(KINDS)를 검색하니 사성암의 모습을 스케치한 것이 아니라 그냥 사성암이라는 단어가 한 번 걸쳐나올 뿐이다. 2000년대 초반에도 사성암에는 도선국사가 수도했다는 도선굴도 보잘 것 없었고, 전각도 몇 채 되지 않은 조촐한 암자에 불과했다. 단지 절벽에 목재 기둥을 덧대 건립한 유리광전만 홀로 눈길을 끌었다.

그렇다면 사성암은 언제부터 유명해진 것일까. 세 가지를 추정할 수 있다. 첫째는 깎아지른 절벽에 기둥을 세워 하늘에 떠있는 듯한 유리광전(약사전)의 등장이고 둘째는 2000년대 초반 중창불사를 하면서 새로 뚫은 시멘트길이다. 셋째는 2014년 8월 문화재청이 ‘오산 사성암 일원’을 명승 제111호로 지정한 것이다.그러자 유리광전이 언제 지어졌는지가 또다시 궁금했다. 구글과 네이버를 뒤져도 건립 연도가 나오지 않아 사성암에 전화를 거니 구례군청 문화관광과에 문의하란다. 해서 문화관광과에 전화를 걸어 물어보니 공무원이 “내가 직접 사성암 종무소에 전화를 걸어 1990년대 말에 지어져다”는 답을 들었다고 친절하게 콜백 전화로 알려준다. 사성암이 유명해진 또 하나 이유를 들자면 역대 고승들과 연관지은 스토리텔링이다. 그런 점에서 사성암은 수행처보다는 세련된 관광지 느낌을 준다. 그런데 2021년 6월 문화재청이 ‘오산과 사성암 일원’을 명승에서 해제한다고 발표해 궁금증을 불러일으켰다. 사성암 인근 주민들이 재산권 침해를 사유로 명승지정 해제를 요구했기 때문인데 잘된 결정인지 아닌지는 시간이 알려줄 것이다.

오산은 구례읍에서 바라보면 굽이굽이 흐르는 섬진강 물을 자라가 먹고 있는 모습과 닮았다고 해서 ‘자라 오(鰲)’ 자를 써서 이름이 ‘오산(鰲山)’이다. 섬진강을 사이에 두고 지리산의 당당한 산줄기가 솟아 있어 주눅이 들 수도 있으나 지리산 능선을 바라보는 재미에 빠진 등산객들이 줄을 잇는다. 봄이면 벚꽃 산행을 즐기려고 가을이면 황금 들녘을 보려고 사성암에 들른 길에 오산 정상까지 오르는 등산객도 있다.

오산 정상 팔각정에서 바라본 섬진강과 구례벌판과 지리산 능선

 

■성지이면서 최고 조망터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전남 구례를 삼대삼미(三大三美)의 땅으로 소개했다. 세 가지 크고 아름다운 것이라는 뜻으로 섬진강과 지리산과 너른 들판을 말한다. 이 삼대삼미를 한 눈에 조망할 수 있는 곳이 사성암이다. 창건 연대에 관한 문헌상 근거는 빈약하지만 백제 성왕 때인 544년 인도 출신의 고승 연기조사가 구례에 화엄사를 창건한 후 다음해 세운 것으로 전해진다. 연기조사는 화엄사에 이어 구례의 천은사와 연곡사, 지리산 천왕봉의 법계사, 경남 산청의 대원사, 전북 고창의 연기사와 소요사, 전남 나주의 운흥사 등도 창건한 한국 불교의 초석과도 같은 존재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사성암은 4명의 성인을 기리는 암자다. 구례 화엄사를 창건해 한반도 화엄종의 시조가 된 연기조사, 화엄경의 중심사상인 일체유심조를 깨닫고 대중화한 원효대사, 신라 말 한국풍수의 창시자 도선국사, 고려시대 화엄종 중심으로 불교 개혁을 주창했던 진각국사다. 이처럼 한국 불교를 일으켜 세운 4명의 성인이 동시에 인연을 맺었으니 성지 중의 성지인 셈이다. 다만 1000년의 세월을 넘어 4명의 고승이 한 장소에서 수도를 했다는 것은 문헌상 근거가 있다기 보다 신비와 전설의 옷을 입힌 스토리텔링일 가능성이 높다. 4인의 고승들이 시기를 달리해 사성암에서 수도했다면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 기록될 법도 한데 어디에도 관련 내용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고승과의 인연을 찾기보다는 사성암 자체에서 풍기는 세련된 멋과 사성암에서 내려다보는 산, 강, 들판의 조망에 만족하는 게 좋을 듯 싶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가치가 있다. 드라마 ‘추노’ ‘토지’ ‘더킹’과, 영화 ‘군도’ ‘명당’에 등장하고 2020년 CNN이 선정한 ‘한국의 아름다운 사찰 33’에 선정된 것에서 존재감을 확인할 수 있다.

 

■접근 수단은

사성암은 오산의 9부 능선 쯤에 자리잡고 있다. 접근 수단은 크게 3가지다. 승용차와 셔틀버스와 택시다. 승용차로는 아래에서 사성암까지 2㎞ 정도의 급경사 S자 포장도로를 5분 정도 올라간다. 사성암 아래에는 20~30대 정도를 주차하는 간이주차장이 있고 간이주차장에서 사성암까지 300~400m 정도는 가파른 오르막이다. 몇분 거리이지만 경사에 익숙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숨이 차는 구간이다. 관광객이 많을 때는 간이주차장이 만차여서 다시 내려와 셔틀버스를 타고갈 수도 있다. 셔틀버스 주차장은 구례군 문척면 죽마리 오섬권역 다목적교류센터 주차장이다. 28인승 셔틀버스의 차비는 왕복 3400원, 편도 1700원이다. 주차장에는 택시도 있다. 왕복은 1만 2000원, 편도는 7000원이다. 등산을 겸해 걸어 올라갈 때는 2.4㎞에 1시간 정도 소요된다.

사성암 아래 간이주차장

 

■사성암 탐방

사성암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절벽 위에 세워진 유리광전(우측)과 나한전(좌측)이다. 나한전 뒤로는 몇 채의 전각과 소원바위, 도선굴, 배례석 등이 있고 곧이어 오산 정상으로 이어진다. 다른 사찰은 경내가 넓어 원하는 전각만 둘러볼 수 있으나 이곳은 좁은 공간에 전각들이 다닥다닥 붙어있어 선택의 여지 없이 모든 전각을 둘러보게 된다. 다만 유리광전이 그러하듯 대부분 최근에 새로 단장하고 보수한 것들이어서 깔끔하다는 인상을 줄 뿐 고찰의 느낌은 없다.

 

▲유리광전, 나한전(53불전), 지장전, 산왕전

유리광전은 기둥 아래에서 올려다보면 깎아지른 수직 절벽에 등과 옆구리를 기댄 채 아슬아슬하게 매달려있는 것처럼 보인다. 일부 공간만 절벽 암석을 활용하고 나머지 공간은 20여미터의 기둥 3개가 떠받쳐 허공에 떠 있는 모습이다. 20여년 전에 지어지고 수년 전 보수까지 한 터라 말끔하고 깔끔하다. 유리광전은 현세 중생의 모든 재난과 질병을 없애주고 고통에서 구제해주는 약사여래부처를 모시는 법당이다. 약사여래부처의 정식 명칭이 약사유리광여래여서 많은 사찰에서는 약사전이라고 한다.

유리광전 앞에서 바라본 모습(왼쪽)과 옆에서 바라본 모습

 

유리광전 밖에서 주변 조망만 살피고 내려가는 사람들이 많은데 반드시 안으로 들어가야 하는 이유가 있다. 법당 안 유리창 너머에 원효대사가 20여미터 높이의 바위절벽에 손톱으로 선각(線刻)했다는 높이 4m의 마애약사여래불이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마애여래입상을 모시기 위해 암벽을 감싸는 형태로 유리광전을 지었음을 알 수 있다. 스토리에 원효대사를 끼워넣었지만 전문가들이 고려 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하기 때문에 사실이 아니다. 유리광전에서 내려와 반대편 나한전이 있는 108개의 돌계단으로 올라간다.

유리광전 안에서 볼 수 있는 마애약사여래불 선각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돌계단을 오르다보면 계단 중간지점에 거대한 두 그루의 귀목이 보인다. 귀목의 ‘귀’가 귀할 귀(貴)인지 귀신 귀(鬼)인지는 설명이 없다. 섬진강을 내려다보며 사성암을 지키는 수호대장 같은 존재로 보인다. 원효대사와 의상대사가 심었고 수령이 800년에 달한다고 하는데 크기로 봤을 때 수령은 과장이다.

돌계단을 다 오르면 전각 몇 채가 옹기종기 모여있다. 그중 첫 번째 만나는 전각이 53불전이다. 화엄세계의 53불과 500나한을 함께 모신 법당으로 나한전으로도 불린다. 나한은 부처의 가르침을 받고 깨달음에 이른 부처의 제자 중 한 명이다. 나한전도 꼭 들어가봐야 하는데 창문을 통해 가까이는 귀목을, 멀리는 섬진강을 내려다볼 수 있기 때문이다.

아래에서 올려다본 나한전(왼쪽)과 나한전 창문으로 비친 귀목과 섬진강 모습

 

지장전은 염라대왕 등 10왕을 모시는 전각이다. 명부세계의 왕인 염라대왕을 모신 곳이라 하여 명부전이라고도 하고, 염라대왕 외에도 지옥에서 죄의 경중을 정하는 10분(십왕)을 모신 곳이라 하여 시왕전(十王殿)이라도 한다. 지장전의 주존은 지장보살이다. 석가의 위촉을 받아, 그가 죽은 뒤 미래불인 미륵불이 출현할 때까지 일체의 중생을 구제하도록 의뢰 받은 보살이다.

산왕전은 거대 바위 사이에 자리잡고 있다. 뒤에도 거대바위가 버티고 있다. 불교미술학자 조용헌은 이를 두고 “좌우에 바위 암벽이 꽉 끼이는 여자들의 스커트처럼 양 옆으로 바짝 붙어 있다. 뒤쪽에도 또한 바위 맥이 내려오고 있다. 그야말로 기운이 빠질 수 없는 꽉 조이는 지점에 산왕전이 자리 잡고 있다”고 했다. 산왕전을 바라보면 오른쪽으로 바위와 맞닿아 있는데 바라보는 위치에 따라 자연이 조각한 관세음보살처럼 보인다. 이곳 산왕전은 산신각(山神閣)으로도 불린다. 건물 안에 독성, 칠성, 산신을 함께 모시면 삼성각이라 하고 따로 모시면 칠성각, 산신각, 독성각이 된다.

산왕전

 

▲소원바위, 도선굴, 배례석

전각들 주변에는 도선굴, 소원바위, 배례석도 있다. 부처의 형상을 닮은 바위 앞에서 빌면 한 가지 소원은 꼭 이루어진다고 해 이름이 소원바위다. 산왕전 옆쪽으로 도선국사가 수행했다는 도선굴이 있는데 이름이 도선굴인 것은 나름 근거가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1530년 편찬)의 구례현 산천편에 ‘오산은 현의 남쪽 15리에 있다. 산 정상에 바위 하나가 있고, 바위에 빈틈이 있는데 그 깊이를 헤아릴 수 없다. 세상에 전하기를 “중 도선이 예전에 이 산에 살면서 천하의 지리를 그렸다” 한다’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혹자는 도선굴에 들어서면 반대쪽에서 비치는 빛에 의해 나이 든 보살님이 편안하게 앉아있는 모습이 보인다고 하는데 확인하진 못했다.

소원바위

 

도선굴로 들어가 반대쪽으로 나오면 배례석이 있다. 절을 찾은 불자들이 부처님께 합장하고 예를 갖추는 장소인데 오래전 사성암에 불상을 모시기 전 스님들이 배례석에서 화엄사의 부처님을 바라보며 부처님께 예를 올렸다고 한다. 그러나 불자가 아닌 관광객 눈에는 절벽 위에 아슬아슬하게 쌓아놓은 돌담이고 전망대다.

배례석과 구례 일대. 저 멀리 지리산 능선이 길게 뻗어있다.

 

■데크전망대와 오산 정상의 팔각정 전망대

배례석을 지나면 절벽 위에 만든 데크길이 짧게 이어지고 곧 데크전망대다. 이곳에서 바라보는 지리산 능선과 섬진강 줄기가 참으로 환상적이다. 배례석에서 바라보는 풍광과 큰 차이는 없지만 지도 안내판을 설치해 주변 지형의 이름을 알려준다. 과거 지리산을 종주할 때 걸었던 만복대, 성삼재, 노고단, 반야봉, 천왕봉의 위치를 알 수 있어 반갑다. 지리산 능선의 앞산은 구례와 하동의 경계에 있는 황장산이다. 지리산 때문에 동네 뒷동산으로 보이지만 942m나 되는 명산이다. 아래에는 사성암과 오산을 둘러싸고 유유히 휘돌아가는 섬진강 줄기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왼쪽이 상류이고 오른쪽이 하류다.

데크전망대(왼쪽)와 오산 정상 팔각정 모습

 

데크전망대를 지나 데크계단을 오르면 마침내 오산(531m) 정상이다. 사성암에서 500m 거리다. 사방이 탁 트인 정상의 팔각정에서도 배례석과 데크전망대에서 보았던 풍광이 펼쳐진다. 차이가 있다면 좀더 높은 곳에서 바라보고 섬진강 하류 쪽이 더 많이 보인다는 것이다. 가을에 오산을 다녀온 이는 9월 풍광이 가장 좋다고 한다. 일교차가 심한 9월의 새벽이면 섬진강에서 모락모락 피어나는 운무가 들판을 덮기 때문에 마치 천상에 앉아있는 것 같다고 한다. 누렇게 물든 황금들판도 눈부시게 아름답다고 한다. 사성암 아래 간이주차장에서 출발해 사성암의 전각들을 둘러보고 오산으로 올라갔다가 다시 간이주차장으로 내려가는데 40~50분이 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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