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오늘

역사속 오늘

연합국의 노르망디 상륙작전

일찌감치 해안 사수를 명령하고 전 해안의 요새화를 준비해 온 히틀러에게 “1944년 봄부터 영국 남부 해안에 수십만명의 연합군이 몰려들고 다량의 무기와 탄약, 보급품 등이 쌓이고 있다”는 정보가 전달되었다. 히틀러는 상륙 지점을 예측하는 데 골몰했다. 연합군의 역(逆)정보로 목표가 노르웨이인지 덴마크인지 프랑스인지 헷갈리던 차에 연합군이 이따금씩 프랑스 칼레 지방에 출동하는 제스처를 취하자 히틀러는 칼레를 상륙 예상지로 꼽았다.

상륙 일자도 오리무중이었다. 상륙 저지 역할을 맡은 롬멜은 ‘사막의 여우’라는 별명에 어울리지 않게 “악천후로 연합군이 1주일 이내에는 상륙할 수 없다”며 전선을 비우고 생일을 맞은 아내 품으로 달려갔다. 당초 6월 5일로 예정됐던 상륙이 하루 연기될 정도로 1944년 6월은 25년 이래 최악의 악천후를 기록했다. 6월 6일, 마침내 ‘D-데이’가 다가왔다. 작전명은 ‘오벌 로드’였다. 아이젠하워가 연합군 총사령관을 맡고 몽고메리가 상륙 작전을 지휘했다. 상륙 지점은 프랑스 코탕탱 반도에 있는 90㎞ 길이의 노르망디 해안이었다.

6월 5일 늦은 밤, 미국·영국·캐나다군으로 구성된 40개 사단의 연합군 16만 명과 2000척의 함정이 영국을 출발했다. 상륙용 주정(舟艇)도 4000척이나 됐고, 전투기 만도 1만 1000기나 돼 7초 간격으로 이륙했다. 6월 6일 새벽 0시15분, 낙하산 부대가 해안 뒤편에 떨어진데 이어 새벽부터는 독일군의 완강한 저항을 뚫고 상륙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히틀러는 이때까지도 진짜 공격이 따로 있을 것으로 판단하고 병력 보강을 주저했다. 연합군은 6월 16일까지 총병력 61만7000명과 9만5000대의 전차를 상륙시켜 독일군에 결정적인 타격을 가하며 전세를 역전시켰지만 피아간의 피해가 너무 컸다.

역사속 오늘

中 위안스카이(원세개) 사망

위안스카이(袁世凱)의 정치적 출발점은 조선이다. 시골 향시에 두 번이나 떨어지고 건달들과 어울려다니며 망나니 노릇을 하던 그가 승승장구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조선이 자리잡고 있었다. 조선과의 첫 만남은 1882년 임오군란에서 시작됐다. 하급관료에 불과했으나 갑신정변 때 출병한 이홍장(李鴻章)과 조선 땅에서 인연을 맺으면서 앞길에 서광이 비췄다. 청의 군대를 끌여들여 동학농민혁명을 제압한 그는, 1894년 청일전쟁이 일어나기 1주일 전 귀국하면서 12년 동안 맺어온 조선과의 인연을 일단락지었다.

귀국해서도 7000명 규모의 현대식 ‘신건(新建) 육군’ 지휘를 맡아 도약의 발판을 마련했다. 1900년 의화단 사건으로 대부분의 군수뇌부들이 죽거나 몰락한 것도 그에게는 행운이었다. 1901년 11월 이홍장마저 죽어 그의 앞길에 거칠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어 보였다. 그래도 서태후의 죽음 만은 피하고 싶었다. 서태후가 죽으면 그와 악연이 있는 광서제의 친정 체제가 시작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광서제가 그를 보복할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행운의 여신은 그를 버리지 않았다. 1908년 서태후가 죽기 하루 전 광서제가 먼저 죽은 것이다. 그래도 청나라 황족과 만주족 중신들은 무식쟁이 위안스카이를 인정하지 않아 결국 푸이왕의 아버지 순친왕에 의해 모든 관직을 박탈당하고 은퇴해야 했다. 톈진에 몸을 숨기고 훗날을 도모하고 있던 1912년 3월 쑨원 등 신해혁명 세력의 도움으로 임시대총통에 올랐으나 오히려 독단과 전횡으로 혁명 세력을 무력화시켰다. 곳곳에서 ‘토원(討袁)’ 운동과 독립선언이 잇따랐지만 위안은 이들을 진압하며 1913년 10월 정식 대총통에 올랐다. 그리고는 황제 제도의 부활을 꿈꿨다.

1916년 1월 1일 마침내 황제에 올랐으나 이는 결국 ‘토원’의 불길에 기름을 끼얹는 자충수가 되고 말았다. 다시 ‘토원’ 운동이 거세게 일어나자 위안스카이의 수족들까지 황제 제도 취소를 요구하며 반발했기 때문이다. 결국 3개월 만에 황제직을 포기했으나 내리막길에는 가속도가 붙는 법이다. 만성 피로와 요독증으로 1916년 6월 6일 눈을 감았다. 이후 중국은 군웅할거시대로 빠져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