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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상인의 일본 산책] 규슈 후쿠오카의 ‘코우로칸(鴻臚館)’은 당과 신라의 외교사절단·상인들을 접대했던 영빈관

↑ 현대식으로 복원한 코우로칸(鴻臚館) 외부 모습

 

by 장상인 JSI 파트너스 대표

 

당(唐)·신라(新羅)와의 교류 창구인 코우로칸(鴻臚館)을 찾아서

규슈(九州)의 사가현 가라쓰에 있는 나고야성(名護屋城) 박물관에 <당(唐)·신라(新羅)·발해(渤海)와의 교류>라는 전시 테마가 있다. 그곳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7세기 후반 일본은 법령제(法令制)에 기인하여 천황을 중심으로 한 중앙집권 국가체제를 정비하였다. 따라서 중국 당나라와의 교류와 함께 신라·발해와의 왕래도 활발히 추진하였다. 규슈(九州)에 있는 코우로칸(鴻臚館)이 당(唐)·신라(新羅)와의 교류의 창구였다.”

코우로칸(鴻臚館)에 대한 나고야성 박물관의 기록을 근거로 하여 역사기행을 나섰다. 먼저 후쿠오카의 하카다(博多)역에 있는 관광 안내소를 찾았다. 젊은 여성 두 명이 열심히 컴퓨터를 뒤지다가 답(答)을 주었다. “후쿠오카 성터 ‘평화대(平和臺)공원’ 안에 ‘코우로칸’에 관한 역사 자료관이 있습니다.”

일단 택시를 잡아탔다. 운전사도 비교적 나이가 든 사람을 골라서 후쿠오카 성터로 가자고 했다.

“옛날에 신라와 당나라의 교류의 창구였던 ‘코우로칸’을 아십니까?” “글쎄요. 코우로칸? 워낙 역사에 관한 지식이 없어서… 잘 모르겠습니다.” 택시 운전사와의 대화에서는 별 소득이 없었다.

후쿠오카 성터 평화대공원 입구에서 내려 매표소의 안내원에게 물었더니 이렇게 답해주었다. “성(城) 담벼락을 따라 똑바로 가셔서 오른쪽으로 돌아가세요. 거기에 코우로칸이 있습니다. 그런데 가봐야 볼거리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요금은 무료입니다.”

“가봐야 볼거리가 없다?” 다소 실망스러운 말이었지만 일단 발걸음을 옮겼다. 망루문만 남아있는 후쿠오카 성은 쓸쓸한 기운마저 감돌았다. 바람이 제법 쌀쌀했다. 커다란 까마귀들이 떼를 지어 날며 기분 나쁜 목청을 높였다. 일본 사람들은 까마귀를 길조(吉鳥)라고 한다. 그렇지만 모든 사람들이 다 그런 것은 아니다. 흉조라고 생각 하는 사람들도 많다. 나는 까마귀들의 영접(?)을 받으면서 코우로칸을 찾았다. 코우로칸은 성터공원 후미진 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망루문만 남아있는 후쿠오카 성

 

발길 뜸한 ‘코우로칸’ 유적 전시관

입구 안내소에 있는 직원이 반색을 하며 맞이했다. 사람 구경을 못하다가 너무나 반가웠던 것 같다. 그는 방문자 기록 명부를 내밀었다. “단지 참고용으로 적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이 찾으시는지, 어디서 오시는지를 알아보기 위해서입니다. 성함은 안 적으셔도 됩니다.”

그와의 대화는 꽤나 길게 이어졌다. 어차피 찾아오는 사람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연간 2만 명 정도가 다녀간다고 했다. 주로 중국, 대만 관광객이 많고, 한국 사람들도 많이 오는 편이라고 했다. “이 곳이 바로 그 옛날 코우로칸이 있었던 자리입니다. 지금은 매립하여 도심지가 되었지만, 그 시절에는 여기까지 배가 들어 왔답니다. 천천히 구경하십시오.” 나가하마 씨는 친절하게 안내했다.

나는 ‘코우로칸’ 안으로 들어섰다. 실제로 아무것도 없는 사진과 모형 뿐이었다. 그래도 일본 사람들답게 세세한 기록이 전시되어 있었다. 코우로칸의 실제 위치, 교역 내용, 교역 국가 등의 내용들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었던 것이다.

코우로칸 내부 모습 (출처 후쿠오카시)

 

유적의 존재가 확인된 곳은 후쿠오카 코우로칸 뿐

코우로칸은 일본 고대의 아츠카(飛鳥, 536~701), 나라(奈良, 710~753), 헤이안 시대( 平安時代, 794~1047)에 신라와 당나라의 외교사절단과 상인들을 접대했던 일종의 영빈관이었다. 또 일본에서 당나라나 신라로 파견하는 사절단을 환송하는 시설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코우로칸은 교토, 오사카, 후쿠오카에 설치되어 있었으나, 유적의 존재가 확인된 곳은 후쿠오카의 코우로칸 뿐이다.

후쿠오카의 코우로칸은 아츠카(飛鳥), 나라(奈良) 시대에는 그때의 상황에 따라 대군((筑紫大郡), 소군(筑紫小君), 관(筑紫館)의 이름으로 사용되었으나, 헤이안 시대에 중국의 외교시설인 ‘코우로지(鴻臚寺)’를 모방하여 코우로칸이라는 명칭으로 통일하였다. ‘코우(鴻)’의 의미는 ‘크다’는 것이고, ‘로(臚)’는 ‘전한다’는 것이다.

아무튼 7세기 후반에 하카다만(博多灣)에 돌출한 구릉지에 세워진 이 ‘코우로칸’은 커다란 계곡을 남북으로 가른 산등성이를 이용해서 남관(南館)과 북관(北館)을 설치하였고, 계곡은 수로로 활용했다. 코우로칸은 7세기 후반부터 11세기 전반까지 약 400년간 대외 교섭의 창구로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던 것이다.

 

코우로칸을 CG로 재현한 모습

 

2004년 국사적(國史跡) 지정 받아

코우로칸의 위치에 대해서 하카다(博多) 등 여러 가지 설이 있었으나 규슈대학의 나카야마(中山次朗) 박사가 만요슈(萬葉集), 고서화, 지형, 출토 유물 등을 토대로 후쿠오카 성터 설(說)을 주장한 이후부터 정설(定說)로 굳어졌다고 한다.

1987년 12월, 현재의 평화대야구장(平和臺野球場) 외야석 보수공사와 함께 시행된 발굴 조사에서 이 설을 뒷받침 할 유물들이 쏟아져 나왔다. 현재까지 확인된 유물들은 나라시대 이전의 담장, 나라시대의 담장과 기둥건물, 헤이안 시대의 대형 초석건물, 중국의 청자와 백자, 이슬람 도자기, 서남아시아의 유리 그릇 등 그 당시 국제적인 무역 거래를 했던 흔적들이 속속 드러난 것이다.

이 코우로칸은 2004년 5월 21일 국사적(國史跡) 지정을 받았다. 후쿠오카성(城)이 이미 사적지로 지정받은 바 있어 코우로칸까지 2중으로 지정을 받은 것은 일본 최초의 일이라고 한다. 후쿠오카 학자들은 그만큼 코우로칸이 역사적으로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흥분하고 있지만, 일반인들에게는 그다지 알려지지 않았다.

“역사는 시대의 증인이자 진리의 빛이며, 기억의 되살림이고, 삶의 스승이다.”는 말이 있다. 그래서 묻혀있는 역사의 흔적을 찾아내는 것은 너무나 중요한 일이다. 역사는 흘러간 과거가 아니라 다가올 미래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후쿠오카 성(城)과 초대 번주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

후쿠오카의 성의 초대 번주(藩主)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 1568~1623)는 우리와도 아픈 관계가 있다. 그의 부친은 원래 오다 노부나가의 휘하에 있었다. 구로다는 나이 10살 때인 1577년,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인질로 맡겨져 성장했다. 그는 1582년, 히데요시를 따라 일본의 쥬고쿠(中國)와 규슈(九州) 공략의 전투에 참가하여 공을 세웠다.

임진왜란 때는 제3군 1만 1000여 명의 병력을 이끌고 조선의 다대포를 거쳐 김해에 상륙, 침공을 개시하였다. 정유재란 때도 제3군 1만 여명을 이끌고 조선을 침략하였다. 그는 히데요시가 죽은 후에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충성을 맹세하였다. 유명한 세키가하라 전투 때 고바야카와 히데아키를 도쿠가와 측과 내통하게 하여 큰 공을 세움으로써 전투를 승리로 이끄는 데에 기여하였다. 그 공을 인정받아 후쿠오카번(福岡藩) 초대 번주(藩主, 50만석)가 되었다.

후쿠오카의 성의 초대 번주(藩主)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 (출처 후쿠오카 박물관)

 

이 성(城)은 1601년에서 1607년에 걸쳐 7년 만에 축성되었다. 성(城)의 이름은 구로다(黑田)의 연고지인 비젠노 쿠니(備前國), 현재의 오카야마(岡山) 현 오쿠군 후쿠오카(邑久郡 福岡)에서 ‘후쿠오카’를 따왔다고 한다. 메이지유신(明治維新, 1868~1911) 이후부터 1945년까지는 육군의 주둔지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건조물의 대부분은 해체되거나 매각되었으나 이 성터는 1957년에 나라의 사적지로 지정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후쿠오카 성을 지키는 새라는 것을 알리려는 것일까? 까마귀들이 무리지어 성터를 돌면서 목청을 높였다. “까옥 까옥 까옥-” 소리가 내 귀에는 이렇게 들렸다. “나는 결코 불행을 몰고 다니는 새가 아니다. 단지, 불행을 예고 해 줄 뿐이다”라고.

 

장상인 JSI 파트너스 대표

대우건설과 팬택에서 30여 년 동안 홍보업무를 했다. 2008년 홍보컨설팅회사 JSI 파트너스를 창업했다. 폭넓은 일본 네트워크를 가지고 있으며 현지에서 직접 보고 느낀 것을 엮어 글쓰기를 하고 있다. 저서로 <현해탄 파고(波高) 저편에> <홍보는 위기관리다> <커피, 검은 악마의 유혹>(장편소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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