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땅 구석구석

[제주 오름 가봐수까 ①-1] 윗세오름 어리목 탐방로 (어리목~윗세오름~남벽분기점~윗세오름~영실)

↑ 영실 쪽 선작지왓과 백록담 화구벽. 왼쪽이 누운오름이고 화구벽 아래가 붉은오름이다.

 

☞ 내맘대로 평점(★ 5개 만점). 등산 요소 ★★★★ 관광 요소 ★★★★★

 

by 김지지

 

■어리목에서 윗세오름으로

 

우리 코스는 어리목~윗세오름 대피소~남벽분기점~영실

2019년 11월 24일 오전 9시 20분, 어리목 탐방로 입구(970m)는 크고 깨끗했다. 새벽에 이슬비가 내려서인지 일요일인데도 인적이 드물었다. 어리목은 제주말로 ‘길목’이라는 뜻이다. 이름처럼 이곳에서 길이 갈라진다. 한라산 백록담 분화벽으로 이어지는 큰 등성이는 윗세오름 대피소(1700m)로, 반대쪽 작은 등성이는 어승생악 오름(1169m)으로 향한다.

왕복 1시간 정도면 충분한 어승생악을 먼저 다녀오고 싶었으나 윗세오름 본게임을 먼저 하고 하산 후 시간이 남으면 잔여 경기를 하기로 시간을 안배했다. 하지만 지금은 해가 빨리 지는 11월 말이다. 결국 어승생악은 올라가지 못하고 하루 일정을 마쳐야 했다.

한라산 등정 코스 지도

 

알다시피 한라산 등정 코스는 성판악과 관음사를 들머리로 삼는 2개 코스 뿐이다. 정상에는 오르지 않고 가까이서 백록담의 화구벽(火口壁)을 올려다 보는 윗세오름 코스는 세 곳이다. 윗세오름 대피소로 연결되는 영실과 어리목 그리고 돈내코다. 한라산 정상을 기준으로 영실은 남서쪽, 어리목은 북서쪽, 돈내코는 남동쪽에 자리잡고 있다. 일반인들이 즐겨 이용하는 코스는 영실로 올라가 영실로 내려오는 원점회귀 코스다. 어리목(970m)에 비해 영실(1280m)의 고도가 높아 윗세오름 대피소까지 거리가 짧고 시간이 덜 걸리기 때문이다. 영실기암과 선작지왓 등의 절경도 영실 쪽에 있다.

한라산 백록담 분화구. 사진 아래쪽이 남벽이다. (출처 한라산국립공원)

 

우리 계획은 어리목에서 윗세오름 대피소로 올라갔다가 영실로 내려오는 것이다. 예상 산행 시간은 4~5시간 정도다. 다만 이 정도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어 윗세오름 대피소에서 돈내코로 이어지는 남벽 분기점(1600m)까지 갔다가 대피소로 돌아오는 왕복 2시간의 코스를 추가했다. 따라서 코스를 정리하면 어리목 →(4.7㎞)→ 윗세오름 대피소 →(2.1㎞)→ 남벽분기점 →(2.1㎞)→ 윗세오름 대피소 →(3.7㎞) →영실 순이다. 지도상 거리는 12.6㎞이고 예상 시간은 6~7시간이다.

어리목에서 윗세오름 대피소로 오르는 길

 

초입에서 먼저 우리를 맞은 것은 초록의 조릿대 군락

9시 40분 어리목 주차장에서 윗세오름 입구로 들어섰을 때 먼저 우리를 맞은 것은 초록의 조릿대 군락이었다. 낙엽이 다 떨어진 나목(裸木)에도 초록의 이끼가 끼어 있어 늦가을인데도 온통 초록 일색이다. 고교친구인 종서가 입은 항공점퍼까지 쑥색이어서 그의 뒷모습이 자연의 일부처럼 보인다. 바닥에 쌓인 낙엽은 새벽에 내린 비를 맞고 반들거렸다. 초입부터 흥분되고 감탄사가 터져나온다.

어리목 코스 초입의 조릿대 군락

 

허리 높이까지 자란 조릿대숲 사잇길을 10여분 지나니 어리목 Y자 계곡이다. 그 위에 놓인 목교를 건너고부터 오름길이 시작된다. 급경사가 아닌데다 나무 데크로 잘 조성해놓아 오르는데 무리가 없다. 조금 더 전진하면 급경사까지는 아니어도 가파르다. 제법 땀이 난다. 초입 기준 2.4㎞, 1시간 20분을 그렇게 올라가니 갑자기 사방이 탁 트인 고원이 나타난다. 사제비동산(1423m)이다. 이곳부터는 널빤지와 침목을 깔아놓은 길이어서 나름 분위기도 있고 발도 편하다. 한라산 고지의 바람이 온몸을 깜싸안는다. 폭설이 내렸을 때 길을 잃지 말라고 일정 거리마다 길 옆에 꽂아놓은 붉은 깃발이 마치 우리를 위해 도열해 있는 듯하다.

이곳에도 조릿대 군락 일색이다. 구상나무도 드문드문 보이다가 점차 군락을 이루고 있다. 1년 전 가을 대학친구들과 떠났던 일본 도호쿠지방 도와다 하치만타이 국립공원 북부의 핫코다산과 비슷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백록담의 화구벽이 아직은 보이지 않지만 사제비동산은 시야가 탁 트여 눈이 호강하는 시작점이다. 눈은 계속 행복해 하고 입에서는 탄성의 연속이다. 마주치는 사람들 얼굴에서도 만족감과 행복감이 넘쳐난다. 우리 땅에 이런 곳이 있다는 걸 이제야 알았다니 산신(山神)께 죄송할 따름이다.

함께 한 친구들. 왼쪽은 어리목 탐방로 입구, 오른쪽은 윗세오름 대피소에서 남벽으로 향하는 진입로

 

백록담 분화벽은 부악(釜岳)이라는 별칭처럼 가마솥을 엎어놓은 형상

조만간 또 다시 와야겠다고 다짐하면서 둘레길 수준의 완경사 길을 40분 정도 걸어가니 만세동산(1606m)이다. 고원은 더 넓어지고 시야는 막힘이 없다. 만세동산 전망대에 올라 사방을 바라본다. 멀리 서쪽으로는 부드러운 곡선의 오름들이 손짓을 하고 동쪽으로는 백록담의 서쪽 분화벽이 웅장한 모습으로 우뚝하다. 연신 카메라 셔터에 손이 간다. 백록담 분화벽은 부악(釜岳)이라는 별칭처럼 가마솥을 엎어놓은 형상이다. 주변은 여전히 조릿대 군락이고 듬성듬성 구상나무 군락지도 있다. 진행 길 왼쪽은 민대가리오름(1644m), 오른쪽은 족은오름(1699m)이다. 만세동산부터는 길이 비교적 완만하다. 놀멍쉬멍하며 걸으면 된다. 약간의 오르막은 양념이다.

무엇보다 날씨가 환상적이다. 전날 밤 기상예보에 오전 내내 비가 온다고 했는데 막상 도착하니 어리목 초입에서만 약간의 이슬비만 내리다가 그쳤을 뿐 만세동산부터는 그렇게 맑고 쾌청할 수가 없다. 올 가을 경험한 최고의 날씨다. 그 덕에 한가로운 가을 정취를 만끽할 수 있어서 그냥저냥 행복했다. 종서가 “제주 날씨는 언제나 현장에 가봐야 알 수 있다”며 한마디 한다.

 

윗세오름은 어리목, 영실, 돈내코 코스가 만나는 교차점이자 종점

윗세오름 대피소에 도착하니 12시 25분이다. 어리목 입구에서부터 2시간 45분 걸렸다. 만세동산에서 윗세오름 대피소까지 1.5㎞이니 어리목에서부터 따지면 4.7㎞다. 윗세오름은 어리목, 영실, 돈내코 코스가 만나는 교차점이자 종점이다. 대피소는 생각보다 넓고 컸다.

윗세오름 대피소

 

대피소에서 멀리 바라보면 고도가 높은 곳에서부터 차례로 붉은오름, 누운오름, 족은오름이고 윗세오름이라는 뜻은 이 3개의 오름을 통칭하는 이름이다. 세 오름 모두 굼부리(분화구를 일컫는 제주말)가 없는 원추형이다. 붉은오름(해발고도 1740m, 비고 75m)은 세 오름 중 가장 위쪽에 있다. 흙이 유난히 붉어 이름이 붙여졌다. 누운오름(해발고도 1711m, 비고 71m)은 길게 누운 모양에서 이름이 지어졌다. 꼭대기에 망대같은 바위가 있다. 한쪽으로는 대피소와 맞닿아 있고 다른 쪽으로는 족은오름과 이어진다. 가장 아래에 위치한 오름은 족은오름(해발고도 1699m, 비고 64m)이다. 그러나 이런 사실은 나중 서울 와서 자료를 찾아 알게 된 것이고 현장에서는 알지 못해 세 오름의 위치를 구분하지 못해 답답했다.

비고(比高)는 제주도에서만 사용하는 용어다. 사전적 의미는 ‘어떤 범위 안의 최고 높이와 최저 높이의 차’를 의미한다. 쉽게 말하면 해발고도를 감안하지 않은 오름 자체 높이를 말한다. 360여개 오름들을 등정하는데 난이도를 비교하려면 비고를 아는 게 그만큼 이해가 빠르기 때문일 것이다.

왼쪽부터 족은오름, 누운오름, 붉은오름. 그 뒤가 백록담 분화벽이다.

 

☞ 어리목 탐방로 동영상

 

제주조릿대는 천덕꾸러기

윗세오름 코스는 온통 조릿대 바다다. 군락이어서 등산객 눈에는 멋져 보이지만 제주도에서 조릿대는 천덕꾸러기 신세다. 1980년대 중반 한라산에서 말의 방목을 금지하고 기후에 변화가 생기면서 조릿대가 급속히 증가했다. 조릿대의 땅속 줄기가 다른 식물의 서식을 방해해 한라산 생태계를 교란했다. 결국 산철쭉과 털진달래 등으로 가득 찼던 곳은 제주조릿대 숲으로 변하고 이로 인해 한라산의 생물종 다양성은 감소했다.

그러자 2016년 환경부가 경고했다. 조릿대가 계속 확산하면 한라산이 국립공원과 유네스코 생물권보전지역에서 제외될 수 있다고. 다급해진 제주도가 말의 방목과 벌채를 통한 조릿대 제거효과를 실험하는 ‘조릿대 관리방안 연구 대책’ 5개년 안을 마련했다. 한라산의 장구목, 만세동산, 선작지왓 등에서 조릿대를 벌채하고, 말을 방목한 후 조릿대의 고도별 생물량을 측정하고 주변 환경변화를 조사하는 방식이었다.

다행히 조릿대 번식을 막고 생태계를 회복시키는 데 말 방목과 벌채가 큰 효과를 거둔 것으로 나타났다. 2019년 제주도 세계유산본부에 따르면 2016년보다 조릿대 양이 큰 폭으로 감소하고 식물 다양성도 말 방목지에서는 36종(2016년)이 52종으로, 벌채지에서는 37종이 65종으로 증가했다. 그럼에도 2019년 현재 여전히 한라산 해발 400m 이상 총 면적 442㎢ 가운데 78.5%인 347㎢가 조릿대로 뒤덮인 것으로 조사되고 있어 조릿대 제거가 간단치 않음을 알 수 있다.

조릿대 제거를 위해 한라산에 방목된 말 (출처 제주도세계자연유산본부)

 

■윗세오름 대피소~남벽분기점

 

백록담 분화구의 서벽을 왼쪽으로 끼고 돌아 남벽분기점까지 가는 길

윗세오름 대피소에서 잠시 쉬려다가 동절기(11월 1일~2월 28일)에는 입하산 시간이 빠르다는 것을 알고 바로 백록담 남벽분기점으로 직진했다. 동절기가 되면 바뀌는 한라산 탐방로별 입·하산 시간을 알아본다.

▲어리목 통제소·영실 통제소는 오후 2시에서 낮 12시로 ▲윗세오름 대피소는 오후 1시30분에서 오후 1시로 ▲성판악 코스(진달래밭)·관음사 코스(삼각봉 대피소)는 낮 12시30분에서 12시로 ▲돈내코 안내소는 오전 10시30분에서 10시로 ▲어승생악 탐방로 입구는 오후 5시에서 4시다. 하산시간은 ▲윗세오름 오후 4시에서 오후 3시 ▲남벽분기점 오후 2시30분에서 2시다.

영실 탐방로 쪽으로 가다가 뒤돌아본 윗세오름 대피소

 

결국 남벽분기점으로 진입하려면 윗세오름 대피소에서 오후 1시를 넘어서는 안되고 남벽분기점에서 떠나는 시간은 오후 2시를 넘기면 안된다. 우리는 12시 25분쯤 윗세오름 대피소를 벗어나 남벽분기점으로 향했다. 백록담 분화구의 서벽을 왼쪽으로 끼고 돌아 남벽분기점까지 가는 길이다.

1700m 내외의 고지여서 분화구 벽이 운무에 가려졌다가 드러내기를 반복해 한동안 절벽 전체 사진을 찍지 못했다. 그러다가 서벽에 가까워질수록 절벽 모습이 조금씩 뚜렷해지더니 결국 몸 전체를 드러내 사진을 찍도록 허용한다.

진행길 방향 오른쪽으로 완만하면서도 규모가 큰, 신라 왕릉의 10배 크기는 족히 될 듯한 오름이 계속 붙어있는데 무슨 이름인지 알지 못해 답답했다. 윗세오름의 위치를 정확히 표시한 지도가 의외로 드물기 때문이다. 역시 서울로 돌아와 지도를 보고 방애오름이라는 것을 알았다. 남벽분기점으로 가기 전, 방애오름샘도 있다. 모양이 방아같다고 해서 붙여졌다.

 

백록담 남벽은 가파르게 흘러내린 용암이 굳는 과정에서 형성된 주상절리

대피소에서 2.1㎞ 떨어진 남벽분기점 전망대(1600m)에 도착한 시간은 1시간 정도 지난 1시 24분이다. 남벽은 백록담에는 남쪽이지만 전망대에서는 북쪽이다. 최소한 10만년 전, 가파르게 흘러내린 용암이 굳는 과정에서 형성된 주상절리가 10만 년 간의 풍화에 휩쓸려 지금은 제각기 다른 모양의 기암괴석으로 남아 있다. 고개를 높이 쳐들고 깎아지른 수직절벽을 올려다보면 압도당하는 기분이 든다. 남벽 왼쪽 옆에도 오름이 있다. 웃방애오름이다. 남벽전망대에서 백록담까지는 고도차가 200m다. 국립공단 측이 절벽 오른쪽으로 백록담행 등산길을 준비한다고 하는데 기약은 없다.

남벽분기점에서 올려다본 백록담 분화벽

 

남벽분기점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간단히 식사를 마치니 오후 2시다. 그러자 남벽분기점 통제소의 젊은 직원이 “돈내코로 내려가든 윗세오름 대피소로 올라가든 2시에 떠나야 한다”며 소몰이하듯 우리를 내몬다. 다시 1시간 걸려 윗세오름 대피소로 돌아오니 등산객이든 하산객이든 아무도 없다. 우리가 마지막 등산객이다.

그때까지도 윗세오름 세 곳이 어디인지를 알지 못해 대피소 직원 2명에게 물어봤으나 모두 모른다고 한다. 대피소라면 윗세오름의 중심이고 부근에서 세 오름이 있을텐데 모른단다. 이것이 한라산국립공단의 수준인가 답답함을 느끼며 하산을 재촉했다.

돈내코 탐방로(500m)는 15년간 길이 막혔다가 2009년 12월 개설되었다. “돈 내고 들어가야 하는 곳”이라는 우스갯소리가 있을 만큼 아름다운 곳이나 이름은 다소 엉뚱하다. 돗(돼지)과 내(하천)·코(입구)가 합쳐진 말이기 때문이다. 야생 멧돼지가 물을 마시러 내려오는 계곡이란 뜻이다. 돈내코 탐방안내소에서 남벽분기점으로 올라갈 경우 거리는 7㎞이고 3시간 30분 정도 걸린다.

 

■윗세오름에서 영실로

 

족은오름 전망대에서 바라보면 광활하고 거대한 자연의 파노라마가 사방으로 펼쳐 있어

하산길은 영실 쪽이다. 대피소에서 영실 쪽으로 방향을 정하니 길 양쪽으로 완만한 구릉이 있고 그 사이에 널빤지로 만든 길이 길게 이어진다. 구릉 사이를 벗어나니 남쪽 서귀포 방향으로 너른 평원이 펼쳐있고 그 끝 지점에 뭉게구름이 한가롭게 걸쳐있다.

선작지왓 평원과 서귀포 방향의 뭉게구름

 

길은 계속 평원이다. 눈이 호강한다. 안구정화란 이럴 때 쓰는 말이다. 우리나라 어디에 가도 이처럼 높은 곳에 시야가 탁 트인 평지 초원이 있을까 싶다. 지평선이 없는 나라에서 너른 평야가 있다한들 그 끝의 종착지는 모두가 산이다. 그러나 이곳 평원의 끝은 산이 아니라 구름이거나 내리막 지평선이다. 그렇게 걸어가다가 만난 노루샘에서 목을 축이니 멀지 않은 곳에 완만한 구릉이 보인다. 족은오름 전망대다.

전망대로 오르는데 입구에서 까마귀가 나무 데크 옆 기둥 위에 앉아서 우리를 내려다본다. 처음에는 미동도 않더니 가까이 다가가자 그제서야 귀찮다는 듯 날아간다. 제주에서 까마귀는 신성한 새다. 제주 사람들은 까마귀가 검은 옷을 입은 무당이라며 까마귀 우는 모습에서 하루를 점친다고 한다.

족은오름 전망대에 오르니 광활하고 거대한 자연의 파노라마가 사방으로 끝없이 펼쳐진다. 저 멀리 백록담 화구벽이 늠름하다. 화구벽 위 하늘은 맑고 쾌청하나 높은 하늘에는 솜털 같은 구름이 드문드문하다. 백록담을 위에서 옹위하는 듯한 모습이다. 짙푸른 하늘과 새하얀 구름이 대비되어 환상적이다. 초원을 잠식한 조릿대는 바람에 맞춰 가볍게 박자를 타듯 둠칫둠칫 춤을 추는 듯하다. 서쪽으로는 만세동산을 비롯해 이런저런 오름들의 능선이 부드럽다.

 

영실기암은 백록담, 물장오리와 더불어 한라산 3대 명소

족은오름에서 영실 쪽 방향은 국내 최고(해발 1500~1700m) 초원지대인 선작지왓이다. 제주어로 ‘바위(작지)들이 서 있는 들판(왓)’이라는 뜻이다. 역시 조릿대 천국이다. 그 사이로 고산 식물들이 하나둘씩 얼굴을 내밀고 있고 너른 들판에는 털진달래와 산철쭉이 듬성듬성 자리 잡고 있다. 지금은 꽃이 피지 않았지만 5~6월 경에는 털진달래와 산철쭉이 번갈아 피어 선작지왓에 산상화원이 펼쳐진다. 선작지왓을 지나면 구상나무 숲이다. 그 사이에 널빤지 길을 조성해 자연훼손을 막고 있다.

구상나무 숲을 지나면 또다시 신세계가 펼쳐진다. 멀리는 오백나한이 가까이는 병풍바위가 에워싸고 있고 화산 분출구가 영실계곡 쪽으로 터져 있는 영실기암이다. 비고(389m) 상으로는 제주도 오름 중 산방산(395m)에 이어 두 번째로 높다. 세 번째는 어승생악(350m)이다.

영실 분화구와 오백나한

 

영실기암은 움푹 내려앉은 계곡을 에워싸고 하늘을 찌를 듯 뾰족뾰족하고 거대한 수직 암벽 봉우리들의 집합체다. 바위 곳곳에 오랜 세월 풍파의 흔적이 새겨져 있다. 춘화, 녹음, 단풍, 설경 등 사계절 내내 아름다운 모습과 울창한 수림이 어울려 빼어난 경치를 보여주는 명승지(명승 제84호)로 유명하다. 백록담, 물장오리와 더불어 한라산 3대 명소다.

오백나한 또는 오백장군은 하늘로 솟아있는 이상야릇하게 생긴 기암괴석들을 가리킨다. 장군은 돌기둥들이 오랑캐를 물리쳐주는 장군의 형상같다고 해서, 나한은 수백의 아라한 들이 서 있는 것 같다고 해 붙여졌다. 병풍바위는 웅장한 주상절리 암벽이다.

구상나무 숲을 빠져나오면 영실까지는 영실기암과 영실 탐방로 입구를 한 눈에 내려다보면서 걷는 내리막길이다. 나무데크여서 힘들지 않다. 영실기암과 병풍바위 전경이 눈에 들어오는 전망대(1500m)에서는 서귀포 해안과 산방산, 차귀도가 한 눈에 들어온다. 영실(靈室)은 한라산 정상의 남서쪽 산허리에 깎아지른 듯한 기암괴석들이 하늘로 솟아있고 석가여래가 설법하던 영산(靈山)과 흡사하다고 해 이름이 지어졌다. 간단히 ‘산신령이 사는 골짜기’라는 뜻도 있다. 윗세오름 대피소(2시 54분) → 노루샘(3시 4분) → 족은오름 전망대(3시 18분) → 영실기암 전망대(4시 6분)를 거쳐 영실에 도착하니 5시 3분이다.

병풍바위 (출처 문화유산채널)

 

☞ 영실기암 동영상

☞ 영실 탐방로 동영상

 

하산 후 택시를 타고 영실에서 어리목으로 이동하는데 주변이 깜깜

당초 계획대로 영실에서 택시를 타고 어리목으로 이동하려고 했으나 등산객 중 가장 늦게 내려오는 바람에 영실에서 대기 중인 택시는 모두 철수한 상태였다. 할 수 없이 택시를 영실까지 불렀는데 휴게소에서 대기 중인 택시는 2만원이지만 전화로 콜을 했기 때문에 2만 5천원이란다. 그래도 강원도나 경기도 산에 비하면 저렴한 편이다. 택시를 타고 영실에서 어리목으로 이동하는데 주변이 깜깜하다. 어승생악을 먼저 가지 않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했다면 한창 깜깜한 시간에 영실로 내려왔을 터이니.

영실 코스와 어리목 코스를 비교할 때 영실이 한라산의 웅장함과 진면목을 감상하는 코스라면 어리목 코스는 들머리에서 사제비동산까지 이어지는 울창한 숲, 백록담 화구벽을 향해 올망졸망 솟아오른 수많은 오름 등 제주 특유의 풍광을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느낌이 다르다.

종서 스마트폰에 찍힌 산행거리와 시간을 보니 총거리는 13.32㎞에 총시간은 7시간 20분이었다. 그중 운동시간은 6시간 15분이었고 휴식시간은 1시간 5분이었다. 해발고도는 최저 990m, 최고 1730m를 가리켰다.

하늘에서 내려다본 영실기암. 왼쪽이 병풍바위, 가운데가 영실기암과 분화구다. 멀리 보이는 것이 백록담 분화벽. 위에서 보면 영실기암이 오름인 것을 한 눈에 알 수 있다. (출처 한라산국립공원)

 

■오름이 뭐꼬

 

악(岳), 봉(峯), 산(山)의 의미로도 사용되지만 화산 분출이 수반되어야 오름

제주 오름에 관심이 생긴 것은 2년 전이었다. 언론에서 ‘제주 오름’ 표현을 쓴 것이 20년도 더 되는데 그제서야 관심을 가졌다니 무심했거나 무지했기 때문일 것이다. ‘오름’은 ‘자그마한 산’이라는 뜻의 제주도말이다. 악(岳), 봉(峯), 산(山)의 의미로도 사용되지만 화산 분출이 수반되어야 오름이다. 제주에는 한라산 산록에서 해안에 이르기까지 봉긋하게 솟아있는 완만한 봉우리들이 널리 퍼져있는데 이 대부분을 오름이라고 보면 된다.

제주도 사람들에게 오름은 엄마·아빠 같은 일상어였으나 우리가 학교에서 배운 단어는 오름이 아니라 ‘기생화산’이었다. 한라산의 분화구가 분출을 끝낸 뒤 한라산 기슭 중산간 지대에 있는 마그마가 약한 지반을 뚫고 나와 주변에서 분출되어 생성한 지형이라는 의미다. 제주의 땅에는 크고 작은 368개의 오름이 있고 땅 아래에도 160여 개의 용암동굴이 있다. 작은 섬 한 곳에 이렇게 많은 오름과 동굴이 있는 경우는 세계적으로 제주가 유일하다.

오름은 들판 한가운데에, 바닷가에, 작은 마을 뒤편에 순하면서도 날것 그대로의 모습으로 편하게 자리잡고 있다. 그러다보니 제주도 사람들에게 오름은 단순한 지질학적 공간, 그 이상이다. 그래서 죽으면 오름으로 돌아간다고 믿고 있다. “오름에 올라가본 일이 없는 사람은 제주 풍광의 아름다움을 말할 수 없고, 오름을 모르는 사람은 제주인의 삶을 알지 못한다”는 말이 괜한 말이 아니다.

선작지왓에서 영실 쪽으로 하산하는 길. 멀리 보이는 것이 모두 오름들이다.

 

오름의 색다른 자연풍경과 분위기에 빠져 오름 순례하는 ‘오름꾼’도 많아

오름은 멀리서 보면 대부분 봉긋하게 부푼 모습이지만 막상 올라가보면 저마다의 독특한 모양새를 하고 있다. 그래서 이 색다른 자연풍경과 분위기에 빠져 오름 순례하는 ‘오름꾼’도 많다. 오름은 차로 입구까지 갈 수 있어 접근이 쉽고, 올라가는 길이 짧고, 아이들이나 노약자가 갈 수 있을 정도로 편하고, 올라가면 조망이 트인다는 게 매력이다. 몇몇 오름을 빼놓고는 한 번 오르내리는데 1~2시간 정도면 족하다. 10분 만에 정상에 오를 수 있는 오름도 많다. 물론 윗세오름처럼 사실상 산행을 해야 하는 오름도 있다. 오름이라도 느낌이 제각기 다르다. 우람한 삼나무 숲을 거느리고 있는가 하면, 너른 초지의 능선으로만 이뤄진 것도 있다. 깎아지른 벼랑처럼 파인 분화구도 있고 부드러운 곡면을 그리는 분화구도 있다.

이 오름을 탐방하기 좋은 계절이 11월의 가을이다. 오름 색깔이 초록에서 갈색으로 변하고, 부드러운 곡선은 더욱 또렷해지고, 능선마다 솜털 보송한 억새들이 환하게 반짝이며 물결치기 때문이다. 11월은 한 해 중 가장 바람이 적고 습도가 낮고, 비도 거의 오지 않는 시기다. 관광객도 줄어들어 어딜 가나 한적하다.

 

■구상나무

 

제주 구상나무, ‘지구상의 유일한 종(種)’으로 인정받아

고사목 덕분에 ‘살아 100년 죽어 100년’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는 구상나무는 한겨울에도 푸른빛을 잃지 않는 우리나라의 자생 품종이다. 덕유산, 지리산 등 우리나라 남부 지방의 높은 산에 사는데 제주도 한라산에 가장 많이 자생하고 있다.

구상나무의 존재를 처음 알게된 서양인은 1907년 제주도에서 활동하던 프랑스의 포리 신부다. 그는 분비나무와 비슷하지만 잎과 열매의 생김새가 사뭇 다른 상록침엽수를 한라산에서 발견하고는 나무의 표본을 채집해 미국 하버드대 부설 수목원에서 활동하던 식물학자 어니스트 윌슨에게 보냈다.

윌슨은 1917년 제주도를 방문해 한라산 백록담 기슭에 무리 지어 살고 있는 구상나무를 살펴보았다. 그리고 이 나무가 당시에는 알려지지 않은 새 품종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자 ‘한국의 침엽수’를 뜻한 ‘Abies koreana’라는 학명을 붙여 전 세계에 구상나무의 존재를 알렸다. 윌슨은 제주도 주민들이 ‘쿠살낭’이라고 부르는 것을 듣고 구상나무라고 이름을 붙였다. 제주도 사투리로 ‘쿠살’은 해녀들이 바다에서 잡는 ‘성게’를, ‘낭’은 나무를 가리킨다. 구상나무의 잎이 성게 가시처럼 생겼다고 해서 ‘쿠살낭’이라고 부른 것이다.

윗세오름 대피소에서 백록담 화구벽으로 가는 길에서 군락을 이루고 있는 구상나무. 오른쪽은 고사목이다.

 

구상나무가 세상에 알려지자 유럽의 식물 애호가들이 제주도를 찾아와 씨앗을 가져가 재배하기 시작했다. 이후 서양에서 정원수와 크리스마스트리로 인기를 끌고 있지만 우리는 사용료를 내고 구상나무 품종을 역수입하는 불공정을 받아들여야 했다. 구상나무 관련 재산권이 미국 스미소니언 박물관에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식물 중 억울한 사례는 또 있다. 1947년 미국인 식물 전문가가 북한산에서 채집해 미국으로 가져가 개량한 뒤 ‘미스킴라일락’이라는 이름으로 상품화한 한국 토종 털개회나무(수수꽃다리)가 그것이다. 수수꽃다리는 현재 미국 라일락 시장의 30%를 차지할 정도로 인기가 좋다. 개량된 미스킴라일락은 국내에도 수입된다. 1917년 미국이 지리산에서 가져간 노각나무는 해외에서 고급 정원수로 탈바꿈했고, ‘하루백합’으로 개량된 토종 원추리 역시 외국에서 인기 있는 우리나라 토종 자원들이지만 지금은 로열티를 물며 수입해야 하는 실정이다.

구상나무는 서식지와 개체 수가 급격히 줄어들고 있고 고사목이 급증하고 있는 추세다. 전문가들은 기온 상승 추세가 이어질 경우 구상나무가 한반도에서 완전히 사라질 가능성도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그래서 국제자연보전연맹이 ‘위험에 처한 적색목록’에서 멸종위기 종으로 지정하고 국제적인 관심을 보이고 있다.

남벽분기점 가는 길에 펼쳐진 구상나무 군락. 멀리 남벽 통제소(흰 점)가 보이고 그 오른쪽이 돈내코로 가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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