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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 북동부의 뉴잉글랜드 6개주를 가다 ⑧] 매사추세츠주州, 플리머스, 청교도, 메이플라워호, 추수감사절, 노스애덤스, 매스 모카, 레녹스, 탱글우드

↑  플리머스 항구 전경

 

by 김정일

前 금융인·뭐라도학교 교장, 現 소나무 농사꾼

 

■매사추세츠州

▲플리머스((Plymouth) 

 

영국의 청교도들이 신대륙에서 첫 발 내디딘 곳

뉴포트에서 장원 구경을 더 하려다가 비가 너무 많이 내려 계획을 바꿔 청교도의 첫 기착지인 매사추세츠주의 플리머스로 떠났다. 뉴포트에서 플리머스까지 북동쪽으로 이동거리는 58마일, 소요시간은 1시간 10분이다. 주도 MA-24 북향길을 타고 가다가 국도 US-44 동향길로 바꿔 탄다.

플리머스는 400여 년 전 영국 국교회의 박해를 피해 신앙의 자유를 찾아 102명이 목조 범선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생면부지의 땅으로 무작정 건너와 갖은 고생을 하며 정착한 곳이다. 신대륙에 첫 발을 내디딘 그들은 그곳 이름을 그들이 떠났던 기항지 영국 항구의 이름 그대로 플리머스라고 불렀다.

메이플라워호가 출항한 영국의 플리머스 항

 

플리머스는 미국의 역사, 문화, 민속적인 면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뉴잉글랜드가 원주민 인디언들의 마을에서 서양의 범주로 병합되는 시발점이 되는 지역이다. 그런데 막상 둘러보니 유명세에 비해 기대 이하였다. 비가 추적추적 내려 더욱 그랬다. 역사 공부를 통해 의미를 찾아보는 것이 옳을 것 같다.

 

청교도들, 영국 정부의 압박 피해 신대륙 식민지 개척 대열에 합류

중세 시대 유럽에 종교개혁의 회오리가 휘몰아쳤다. 외견상 평온을 유지하고 있던 영국에서도 존 위클리프 등의 개혁 바람과 대륙에서 거세게 밀려드는 인문주의 물결을 타고 가톨릭 교회에 대한 반감이 고조되었다. 교회 개혁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조금씩 머리를 들었다.

이때 공교롭게도 헨리8세 국왕이 왕비 캐서린과의 이혼을 허락하지 않는 교황의 조치에 대하여 반기를 들었다. 헨리8세가 로마교황을 대신하여 영국 교회의 최고지도자임을 선포하는 ‘수장령’을 발표함으로써 비정상적인 동기이지만 영국에서도 종교개혁이 시작되었다. 1563년 마침내 국교회(Anglican church)가 수립되었으나 교직 제도는 경직적으로 운영하는 로마가톨릭의 체제를 그대로 따랐다.

이런 상황에서 봉건적 교회 질서를 타파하고 도덕적 신앙적 순수함을 추구하면서 신앙의 양심을 지켜나가기 위한 청교도 운동이 일어나 국교회에 대한 비판과 개혁 운동이 전개되었다. 그러나 청교도들의 개혁적 염원이 그 견고한 교회체제와 정치체제를 타파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오히려 교회와 정부의 박해가 날로 심화되어 경제적 제재와 투옥으로 이어졌다. 결국 일부 청교도들은 영국에서의 교회개혁을 포기하고 별도의 새 교회와 새 사회를 건설하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일단의 청교도들이 모국(영국)을 등지고 네덜란드로 망명한 것은 1608년이다. 당시 네덜란드는 스페인에서 독립한 지 얼마 되지 않은 프로테스탄트 국가였다. 교회와 국가를 버리고 도망가는 청교도들에 대한 영국 정부의 박해는 더욱 심해졌다. 청교도들은 10여 년간 극심한 생활고를 견디며 경제적 신앙적 안정을 도모했으나 독립전쟁 중이던 네덜란드의 정치적 상황과 종교적 이질감이 섞여 당초 그들이 추구했던 이상적 신앙사회 모델은 새로운 위기에 봉착했다.

그들은 이런저런 돌파구를 모색하다가 당시 바람이 불기 시작한 신대륙 식민지 개척 대열에 합류하기로 결심했다. 이웃 나라 네덜란드에서도 적응하지 못했는데 미개인과 짐승만 사는 미지의 땅에 정착하기 위하여 문명사회를 떠난다는 것은 대단한 용기와 결단이 필요했다. 그럼에도 그들에게는 다른 대안이 없었다.

청교도들은 영국을 떠나는 시도를 3번 했다. 사우샘프턴(8.5)과 다트마쓰(8.21) 출항은 실패하고 플리머스(9.6)만 성공했다.

 

영국을 떠나 플리머스 땅을 밟기까지의 역정

1620년 7월 22일 네덜란드 라이덴에 거주하던 청교도들은 비장한 결단을 내렸다. 신앙적 삶의 완성을 향해 신대륙으로 떠나기로 하고 일단 영국으로 돌아갔다. 영국 사우샘프턴 항구에는 180t급의 ‘메이플라워호’와 작은 ‘스피드웰호’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120명이 2대의 배에 탑승하고 대서양 횡단을 시도했으나 스피드웰호가 잦은 고장과 사고로 회항하면서 출발이 지연되었다. 결국 항해의 불편함과 고통에 기진맥진한 사람 20명이 탈락했다.

1620년 9월 6일 드디어 여자들과 아이들을 포함한 102명을 태운 메이플라워호가 단독으로 영국 플리머스항을 출발했다. 이들 중 청교도는 41명뿐이었고 식민지 회사에서 식민지 건설을 위해 모집한 사람들과 용인들이 61명이었다. 우렁찬 찬송과 기도로 안전한 항해를 기원하며 두 달을 항해했는데도 육지는 나타나지 않았다. 도대체 아메리카라는 땅이 정말 있기는 한 건지 와락 겁이 날 때도 있었다.

66일 간 극심한 바람과 파도로 인해 육체적·정신적으로 탈진한 100여 명의 청교도를 태운 메이플라워호가 코드곶만(Cape Cod Bay)에 닻을 내린 것은 11월 11일이었다. 당초에는 버지니아 식민지 소속 허드슨강에 가려던 것인데 풍랑에 밀려 엉뚱한 곳에 내리게 된 것이다. 코드곶만은 암초가 많고 파도가 거센 곳이다. 결국 긴 항해에 기진맥진한 사람들은 더 이상 항해를 포기하고 닻을 내렸다.

코드곶만과 플리머스 위치

 

그런데 상륙하려는 순간 뜻하지 않은 사태가 발생했다. 같이 온 식민지 건설노무자들이 자기들은 자기들대로 행동하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배 위에는 금방 폭동이라도 날 것 같은 험악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앞으로 이 공동체가 무법천지가 될 가능성이 우려되었다. 이들은 머리를 맞대고 자치에 관한 협약서를 기초하고 식민지 건설노무자들과 용인들을 설득하여 서명을 받았다. 이것이 아메리카에서 성문화된 최초의 합의문서인데 주민의 평등권과 자치권 보장에 관한 ‘메이플라워 협약서’다. 계약을 통해 순례자들은 평등, 자치, 공정한 법에 의한 통치를 서로에게 약속했다. 서약에 기초해 존 카버(1576?~1621)를 초대 총독으로 선출했다.

11월 11일 16명의 무장 선발대가 상륙용 보트를 타고 육지에 내려 이곳저곳을 정찰하고 약간의 땔나무를 가지고 돌아왔다. 다음 날은 주일이어서 쉬고 13일에는 부녀자들이 밀린 빨래감을 가지고 해변으로 내려가 빨래를 했다. 이렇게 약 한 달 동안 낯선 땅을 정찰하면서 땔감과 식량을 조금씩 조달하니 정착하기에 꽤 좋은 조건들을 갖추고 있다는 판단이 들었다. 경작지로 적합한 땅이 펼쳐져 있고, 원주민들이 옥수수를 재배하던 흔적도 있고, 옆에는 큰 강이 흘렀다.

‘메이플라워 서약’ 장면 (1899년, Jean Leon Gerome Ferris 그림)

 

겨울 지내고 나니 거의 절반 죽고 50명 남짓만 살아남아

무엇보다 매서운 한파가 닥쳐오고 있어서 빨리 거처를 마련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12월 11일 정찰대 18명을 선두로 플리머스에 상륙했다. 그들보다 앞서 이곳을 탐험했던 모험가 존 스미스(1580~1631)가 ‘플리머스’라 이름 붙인 곳이었다. 오늘날 ‘플리머스 바위(Plymouth Rock)’라고 명명한 그 곳에 첫 발을 내디딤으로써 신대륙에서의 새 삶이 시작되었다.

눈보라와 비바람 속에 정착촌 건설이 시작되었다. 그 사이 폐렴이나 폐결핵으로 보이는 질병이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가기 시작했다. 첫 겨울이 미처 지나기도 전에 여러 사람이 사망했다. 인디언들의 눈을 피해야했기에 시체를 밤에 몰래 표지도 없이 묻었다. 3월 말 대여섯 채의 건물이 들어섰을 때에는 거의 절반이 죽고 50명 남짓만 살아남았다. 메이플라워를 타고 온 18명의 기혼 여성 중 5명만 살아남았다. 그야말로 목숨을 건 신앙의 순례였다.

청교도들은 뜻밖에 영어를 할 줄 아는 사모세트(Samoset)와 스콴토(Squanto)라는 인디언을 만나 많은 정보와 도움을 받았다. 사모세트는 원래 메인주 지역에 살던 원주민인데 이곳을 탐사하던 영국 탐험대를 따라 뉴펀들랜드까지 동행한 적이 있어 영어를 조금 배운 적이 있다. 스콴토는 스페인에 포로로 잡혀갔다가 영국으로 도망친 후 그곳에서 한 식민회사의 간부를 따라 뉴잉글랜드로 돌아온 원주민이다.

이들을 통하여 플리머스의 본래 지명은 파우툭세트(Pautuxet)라는 것, 1617년에 전염병이 크게 돌아 이곳에 있던 인디언 촌락민들이 대부분 희생되었다는 것, 이 지역의 여러 인디언 부족 중에서 최강의 추장은 ‘위대한 추장’이라는 뜻의 마사소이트(Massasoit)라고 불리는 사람인데 플리머스 서남쪽 약 40마일 지점에 위치한 나라간세트(Narragansett)만 일대에 살고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1621년 3월 22일 마사소이트가 스콴토의 안내를 받아 60여 명의 전사들과 함께 플리머스를 찾아와 우호협정을 맺고 돌아갔다. 청교도들은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이런 사람들의 호의가 하나님이 그들에게 보내주신 특별한 도구였다고 생각했다. 그 외에도 이 원주민들은 전통 방식의 옥수수 재배법, 청어를 비롯한 고기 잡는 법, 단풍나무에서 즙을 채취하는 방법, 노루나 짐승을 사냥하는 법 등을 청교도들에게 가르쳐 주었다.

 

메이플라워호 모형 선박, 플리머스 바위, 플리머스 정착촌에 실망

비가 부슬부슬 내렸지만 400년 전의 그 메이플라워호를 보기위해 메이플라워호가 떠 있는 선착장으로 갔다. 비싼 입장료를 내고 들어가 “이 배가 오리지날 메이플라워냐”고 물으니 모형 제작품이라고 한다. 엄밀한 고증을 거쳐 영국산 목재를 사용해 원형 그대로 1957년 복원한 뒤 영국 데번항을 출발하여 이곳 플리머스까지 시험 항해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전시한 것이란다. 그래서 배의 이름도 메이플라워Ⅱ라고 명명했다. 전장 32.46m, 폭 7.7m, 흘수선이 3.96m에 3개의 돛대를 갖춘 크지 않은 범선이다. 배는 갑판과 아래층 선실, 그 아래층 창고의 3층 구조로 되어 있었다. 갑판에는 높은 돛대에 수많은 밧줄이 얼기설기 매어져 있고 선장실과 각종 부속실이 있다. 아래층 선실은 몇 개의 방으로 나뉘어 침대, 부엌, 가축우리 등으로 꾸며졌다.

메이플라워 호

 

어마어마한 파도에 흔들리면서 지구 저 끝 미지의 땅을 상상하며 여자들과 아이들을 포함한 102명이 어둡고 비좁은 공간에서 생활했다고 생각하니 그들의 고통이 얼마나 컸을지 짐작이 갔다. 일행이 신대륙에서 첫 겨울을 나면서 무더기로 죽어 간 것도 두 달여의 항해가 얼마나 고통스럽고 힘들었는지를 말해 준다.

비가 부슬부슬 내려서 그런지 입장객은 우리 뿐이었다. 방마다 관광안내인들이 여기저기 옛날 복장으로 기다리고 있었는데, 가뜩이나 음습한 선실이 더 구질구질해 보였다. 항해 중에 2명이 죽고 3명의 아기가 태어났다. 말로 다할 수 없는 처절한 고생에다 생명을 담보하면서까지 거룩한 신앙생활을 위하여 모든 편안함과 안락함과 재산을 내던지고 미지의 땅을 찾아나선 이들의 절대 신앙은 얼마나 고결한 것인가?

메이플라워 모형전시장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청교도들이 처음 미국 땅에 발을 디디며 밟았다는 돌 즉 ‘플리머스 바위’가 그리스식 전각 속에 전시되어 있었다. 엉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성도 의문이고 실제로 배에서 내릴 만한 장소에 위치한 것도 아니었다. 상징적 의미를 부각하기 위하여 창안해낸 관광상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모래바닥 위에 놓여 있는 타원형의 바위에 ‘1620’이라고 숫자가 음각되어 있다. 독립혁명이 발발하면서 사람들은 바위를 자유의 상징으로 삼으려고 시내 광장으로 옮기다가 바위가 두 동강이 났는데, 1880년에 두 바위를 다시 붙이고 1620이라는 연대를 새겨 넣었다.

플리머스 바위

 

청교도들이 이 땅에 정착해서 살던 마을을 원주민 왐파노악족(Wampanoag) 인디언들의 집과 함께 모형으로 조성한 플리머스 정착촌(Plymouth Plantation)은 허접했다. 옥수숫대와 짚풀과 나뭇가지로 얼기설기 엮어 만든 움막형 집들이 정착 초기 환경을 보여주긴 했으나 입장객은 거의 없고 입장료만 비싸서 플리머스 방문은 낚인 기분이 들어 건성으로 돌아보고 나왔다.

플리머스 정착촌

 

하나님의 은혜와 추수를 감사하는 축제 열어

여름으로 접어들면서 청교도들은 차츰 안정을 찾아갔다. 옥수수는 잘 익었고 포도는 예상 밖으로 잘 재배되었다. 해안지대 여기저기를 탐색하며 인근의 인디언 원주민들과 모피 교역을 하는 여유도 생겼다. 뉴잉글랜드의 가을은 너무나 아름다웠고 옥수수는 대풍이었다. 그들은 10월 어느날을 ‘감사절(Thanksgiving day)’로 정하고 온갖 어려움 속에서 지켜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축제를 열기로 했다. 지금까지 그들에게 큰 도움이 되어준 마사소이트와 그의 왐파노악 전사들도 초대했다.

감사 축제는 실로 오랜만에 경험하는 흥겨움 속에 진행되었다. 사슴, 바닷가재 등으로 만든 요리에 푸짐한 음식과 과일, 거기에다 포도주와 야생 칠면조 고기까지 곁들인 흥겨운 잔치에 손님들은 정신을 못차릴 정도로 흠뻑 빠져버렸다. 처음 맛보는 음식과 달콤한 포도주에 취한 인디언들은 사흘이 지나서야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이것이 오늘날 추수감사절의 유래가 되었으며, 이 전통이 계속 이어져 1863년 링컨 대통령이 국경일로 선포하고, 1941년 연방의회에서 11월 넷째 목요일을 추수감사절로 입법했다.

첫 추수감사축제 (1914년, Jennie Augusta Brownscombe 그림)

 

그럼에도 불구하고 플리머스 정착지는 험난한 순례자의 길이었다. 옹색하고 보잘 것 없는 이 작은 마을을 지금의 캐나다 지역에 진출한 프랑스인들과 지금의 올버니(Albany)에서 뉴욕에 이르는 허드슨 강변에 식민지를 개척한 네덜란드인들이 위협해왔다. 또 파메트(Pamet), 나라간세트(Narragansett), 모헤건(Mohegan), 페코트(Pequot), 매사추세트(Massachusett), 나우세트(Nauset) 등지의 여러 원주민 부족들이 사방으로 에워싸고 있는 것도 위협적이어서 한시도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규모는 작지만 상징성은 뉴잉글랜드의 정신적 지주

그러던 중 1년 뒤인 1621년 11월 11일 포춘호가 영국에서 35명의 성인 남녀들을 태우고 플리머스에 도착함으로써 그들에게 기쁨과 용기를 심어주었다. 이들 중에는 1년 전 먼저 온 정착민들의 가족들도 포함되어 있어서 큰 기쁨을 안겨주었다. 반면 이 배에는 거금을 들여 메이플라워호의 항해를 도와준 식민지 회사의 빚을 빨리 갚으라는 독촉장도 같이 실려 왔다. 정착민들은 아직 안정을 찾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값이 나갈 만한 물자를 충분히 구하지 못했기 때문에 채무를 이행하지 못하고 있었다. 부지런히 일해서 어획물, 모피, 목재 등을 구해서 빚을 갚아야 하는데 오히려 영국에서 오는 보급품에 대한 채무만 늘어가는 형국이었다.

그렇지만 영국에서 건너오는 이주자들이 늘어나면서 인구가 점점 증가하고 정착지의 경제도 서서히 발전과 안정의 길로 들어섰다. 플리머스는 나중에 출발한 매사추세츠 식민지 등에 비하여 크게 성장하지는 못했지만 뉴잉글랜드의 정신적 지주로서의 지위와 역할을 훌륭하게 감당하고 신앙적 삶의 자세로 깊은 인상을 남긴 순례자들의 조상이 되었다.

플리머스는 일부러 넓게 방파제를 둘러놓은 듯 바다를 막아 형성하고 있는 코드곶만(Cape Cod Bay)의 안쪽 해안에 자리잡고 있다. 돌돌 말린 고사리 순 모양으로 뻗어나간 코드곶만은 알통을 자랑하듯 팔을 뻗어 주먹을 감아쥔 듯한 특이한 지형이 인상적이다. 이젠 역사적 자부심을 관광자원삼아 살아가고 있는 쇠락한 곳으로 바뀌었다.

부연할 것은 정착민들이 플리머스 정착지 초기에 상호 우호관계를 유지해오던 왐파노악 인디언 부족과 1675~1678년 사이에 소위 ‘필립왕의 전쟁’(King Philip’s War)이라고 하는 끔찍한 전쟁을 벌였다는 것이다. 영국 식민지들의 걷잡을 수 없는 팽창 정책에 위협을 느껴 오던 5개의 다른 인디언 부족들이 여기에 공동으로 참여하면서 전쟁은 더욱 확대되었다. 당시 왐파노악 부족의 지도자는 필립이었다. 이 전쟁은 규모가 워낙 커서 뉴잉글랜드 식민지의 존속 자체를 위협할 만한 사건이었다.

매사추세츠와 코네티컷을 중심으로 한 뉴잉글랜드 동맹의 결속된 힘이 바탕이 되어 결국 식민지 측의 승리로 끝나기는 했지만, 전쟁의 대가는 양쪽 모두에게 치명적이었다. 퓨리턴 식민지들은 막대한 전쟁 비용과 인명의 손실을 입었으며, 12개의 정착지는 완전히 폐허가 되었다. 원주민들이 입은 피해가 그보다 훨씬 더 컸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비가 계속 내려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가 없어서 다음 목적지인 콩코드로 가 일찌감치 숙소를 정해 쉬기로 마음을 먹었다. 플리머스에서 콩코드까지 이동거리 60마일, 소요시간 1시간 10분이다. 주도 MA-3번 북향길을 따라 가다가 주간고속도로 95번 북향길에 합류해서 간다.

시간 여유가 있다면 코드곶만에서 하루, 말사스 포도원(Martha’s Vineyard)과 낸투켓(Nantucket)에서 하루, 프로비던스(Providence)와 블록섬(Block Island)에서 하루씩 묵어간다면 더욱 멋진 여행이 되겠지만 시간이 부족해서 건너뛰는 게 아쉽기만 하다.

 

▲노스애덤스(North Adams)

 

고풍스런 유럽식 건물들이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도시임을 선언하고 있어

이번엔 노스애덤스(North Adams)다. 매사추세츠주 서쪽 끝 버크셔 카운티에 있어 동쪽 끝 플리머스와는 멀어도 아주 멀다. 따라서 같은 매사추세츠주라도 플리머스를 거쳐 노스애덤스로 바로 간다는 것은 누가 보아도 납득할 수 없는 코스다. 그러니 각자 일정과 코스에 맞춰 계획을 잡아야 한다. 나는 북쪽의 메인주, 뉴햄프셔주, 버몬트주를 여행한 뒤 뉴욕주로 남하하면서 노스애덤스를 들렀다. 버몬트를 떠나 다시 매사추세츠로 넘어오니 지난번 느꼈던 분위기와 사뭇 다르다.

노스애덤스로 진입하자 거대한 붉은 벽돌 공장들이 눈에 들어오고 도시 냄새가 난다. 광활하게 뻗어있는 메인 스트리트를 중심으로 다소 어둡지만 고풍스런 유럽식 육중한 석조 또는 벽돌조 건물들이 호텔이나 회사 간판을 매달고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도시임을 선언하고 있다.

시내 입구에 차를 대고 전방을 바라보니 교회만 예닐곱 개가 한눈에 들어온다. 천주교, 감리교, 침례교, 회중교회, 에피스코팔교회 등 거대한 교회 건물들이 마치 이웃처럼 한 블록 안에서 마주 보고 있다. 사진 한 컷에 4개의 교회 첨탑이 들어올 정도로 교회가 많다. 거리 이름도 교회 거리다.

노스애덤스 메인스트리트

 

저마다 다양한 건축양식을 자랑하는 교회를 둘러보는데 미국 성공회인 에피스코팔교회(Episcopal church) 앞에서 누군가 잔디를 깎고 있다가 지나가는 우리를 보며 명랑하게 인사를 건넨다. 도시 한 가운데에 이렇게 많은 교회가 한 곳에 밀집되어 있는 경우는 처음 본다고 하니까 이 동네에서는 어느 곳으로 눈을 돌려도 교회 첨탑이 보인다며 껄껄 웃는다. 그러더니 자기네 교회가 가장 훌륭하다며 안내를 해 줄테니 들어가서 보겠냐고 묻는다.

 

한국 만큼이나 교회 많으나 교회마다 웅장하고 아름다운 건축미 자랑

그는 예초기를 마당에 던져놓고 주머니에서 묵직한 열쇠뭉치를 꺼내서 교회 문을 열더니 교회당의 불을 모두 켠다. 교회는 카톨릭풍으로 각종 성화와 조각상들이 화려하면서도 정갈하게 장식되어 있고 정성스럽게 관리되고 있었다. 그가 교회 전면의 강대상으로 우리를 안내하면서 단상 위에까지 올라오라고 한다. 그리고는 스테인드 글라스를 비롯 그 밑의 타일 모자이크 성화, 사도 요한을 성인으로 모시는 교회로서 요한의 상징 독수리 청동조각과 그림을 열심히 설명해 준다. 에피스코팔 교회는 교회마다 각각의 수호성인 사도가 있다고 한다.

내가 방문한 에피스코팔 교회

 

교회 벽면에 있는 스테인드 글라스 성화는 앞의 것은 티파니에서, 좌측 뒤에 있는 것은 보스턴에서, 우측 것은 영국 버밍엄에서 직접 제작해서 보내온 것이라며 매우 아름답다고 자랑을 늘어놓는다. 그리고는 사진을 찍게 하고 2층으로 데리고 올라가서 뒷벽의 장미 스테인드 글라스를 설명한다. 또한 교회의 천장과 기둥은 통나무를 조각하여 아름답게 엮은 것으로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희귀한 것이라고 강조한다. 목사님이시냐고 물었더니 자기는 교회 건물관리회사 직원이며, 이 교회에 출석하고 있다고 소개한다.

한국에 교회가 너무 많다는 말이 있는데 뉴잉글랜드는 인구가 얼마 안되는 조그마한 도시인데도 이렇게 교회들이 많다. 그것도 모두 웅장하고 아름다운 건축미를 자랑한다. 청교도들이 신앙의 힘으로 눈물과 땀을 쏟아 건설한 나라임을 알 수 있다.

 

▲매스 모카(MASS MoCA)

 

연간 12만 명이 방문하는 미국 현대 예술의 메카

노스애덤스의 역사는 200년 이상을 거슬러 독립전쟁 당시까지 올라간다. 영국 식민지 시절 후직강(Hoosic River)의 두 줄기 합류 지점에 위치한 지리적 특성에다 물류 이동의 장점을 살려 신발, 벽돌, 목재, 철공, 대리석 등 다양한 소규모 제조공장들이 들어섰다. 그러다가 1860년 현재의 매스 모카(MASS MoCA) 터에 대규모 염색공장이 설립되었다. 남북전쟁으로 군복을 대량생산하면서 염색공장은 날로 번창해서 현재 매스 모카에서 사용하고 있는 26개의 공장 건물 중 25개가 이때 건설되었다. 1905년에는 종업원이 3200명이나 되는 세계 첨단 염색공장으로 유명했다. 그러나 대공황과 직물 가격의 폭락으로 1942년 문을 닫았다.

다행히 스프래그 전기회사(Sprague Eletric Company)가 공장을 인수해서 제2차 세계대전 중 중요 고성능 무기 부품을 생산했다. 전후에는 제미니 달 탐사 시스템 개발을 비롯한 전자부품을 생산해서 1966년에는 도시 전체 인구 1만 8,000명 중 4,100여 명이 이 회사 직원이었다. 그렇지만 이 회사도 1985년에 문을 닫는데, 해외로부터 저가의 전자부품이 수입되면서 경쟁력을 잃었기 때문이다.

회사가 문을 닫은 후 가동 중지된 거대한 낡은 공장들만 여기저기 산재하여 지역 경제가 죽어가고 도시는 공동화되었다. 그러자 지역의 정치 경제 지도자들을 중심으로 주민들이 나서 광대한 폐공장지대 활성화 방안을 다각도로 모색했다.

매스 모카 전경 (출처 매스 모카)
낡은 공장건물들을 복합문화공간으로 재개발

마침 거대 현대예술품을 전시할 공간을 찾고 있던 미술대학 교수들을 만나 낡은 공장건물들을 복합문화공간으로 재개발하기로 뜻을 모으고 자치단체의 과감한 지원을 받아 ‘매스 모카’를 출범시켰다. 검게 그을러 버려졌던 19세기의 낡은 적벽돌 공장 건물들을 허물지 않고 있는 그대로 재단장해서 1999년 현대 미술관 매스 모카를 개관함으로써 21세기의 세련된 현대 도시로 재탄생한 것이다. 노스애덤스의 모습은 20세기 초의 사진과 비교해 보면 외관상으로는 백년 동안 거의 변화가 없는 듯한데, 내용상으로는 많은 변화가 진행되었다.

매스 모카는 매사추세츠 현대예술박물관(Massachusetts Museum of Contemporary Art)의 약자다. 미술관으로서 뿐만 아니라 각종 음악 댄스 축제와 공연으로도 사람들을 끌어 모은다. 매스 모카는 연간 12만 명의 관람객이 방문하는 미국 현대예술의 메카로 발전했다. 거대 공장의 무척 높고 넓은 공간이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불어 넣어 전통적 미술관에서는 전시하기 어려운 실험적 대작들과 복합 예술품들이 제작되어 전시되고 있다.

매스 모카 입구 (출처 매스 모카)

 

축구장만한 단일 전시실을 비롯해서 높은 천장을 가진 실험극장 등 다양한 문화예술 공간과 작업실이 갖춰지자 상상력이 풍부한 예술가들이 모여들었다. 예술적 영감이 살아 숨쉬는 공간을 창의적 아이디어를 필요로 하는 식당, 출판사, 스튜디오, 디자인회사, 디지털 콘텐츠회사 등에게 임대하여 창조산업의 매개 역할을 함으로써 지역 경제를 활성화시키는 노력도 지속하고 있다. 주마간산 여행이라 이 현대예술의 마을에서 번득이는 감성의 세례를 받아보지 못하고 짧은 일정을 마무리하고 다시 떠나야 했다. 여행은 늘 아쉬움의 연속이다.

 

▲레녹스의 탱글우드(Tanglewood)

 

레녹스는 자체로도 전통과 아름다움을 지닌 곳이지만 탱글우드 때문에 더 유명

노스애덤스에서 1시간 정도 남쪽으로 내려가면 뉴욕주와 매사추세츠주의 경계 지점에 레녹스(Lenox)란 소도시가 있다. 다운타운을 찾아가는 중에 마침 도로 옆 잔디광장에서 파머스 마켓(farmers’ market)이란 장이 섰다. 잔디밭 둘레에 하얀 텐트를 연달아 둘러치고 각각의 농장이름을 걸어놓고 각종 빵, 버섯요리, 버터, 채소, 꽃 등을 팔았다.

이 조그마한 잔디광장을 가운데로 해서 반원형 출입구를 한 세익스피어 연극극장이 약간 높은 지대 위에 우아하게 서 있다. 반대편 낮은 지대에는 번스타인 극장이 있다. 점심시간이다보니 진열된 음식이 신선하고 맛있어 보였다. 동네 사람들이 장바구니를 들고 나와 음식을 시식도 하면서 장을 보고 있다. 우리도 이것저것 둘러보며 빵 조각, 치즈 조각 등을 맛보는 재미에 빠져 돌아다니다가 푸짐한 빵을 하나 사서 바로 옆 아파트 잔디밭 야외식탁에 앉아 아침에 싸온 도시락을 꺼내 펼쳐 놓고 맛있게 먹었다.

레녹스 시가

 

레녹스는 그 자체로도 전통과 아름다움을 지닌 곳이지만 탱글우드(Tanglewood) 때문에 더 유명하다. 탱글우드(Tanglewood)는 아름다운 호수가 내려다 보이는 광대한 잔디밭과 숲 사이에 음악관을 지어 보스턴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정기연주를 비롯한 다채로운 음악회를 개최해 많은 사람들이 모여드는 곳이다.

음악관은 우아하고 아름다운 건축물이라는 통념을 깨고 엉성하게 판자를 이어 붙인 가건물 형태의 넓은 홀을 세우고 관객석의 뒷면을 잔디 광장으로 개방해서 잔디밭에 앉아서도 음악을 들을 수 있게 했다. 정장을 하고 음악회장에 가는 것이 아니라 도시락을 싸가지고 잔디 위에 펼쳐놓고 먹으며 자유롭게 음악을 즐기는 파격의 음악회다. 최고 수준의 숲과 공원, 부드럽게 펼쳐지는 먼 산들의 실루엣, 그 선 위로 보이는 새파란 하늘빛과 조각구름들, 세계 정상의 음악을 한자리에서 오감으로 느끼는 비빔문화의 전당인 듯하다.

 

탱글우드의 연주회가 처음 열린 것은 1937년

탱글우드가 보스턴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여름 본거지가 된 것은 193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의사였던 테이팬(Tappan)의 가족이 기증한 210에이커의 광활한 숲속에서 보스턴 심포니 오케스트라가 전곡 베토벤 곡으로 여름 음악 페스티벌을 시작하면서 탱글우드 음악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1938년 부채꼴 모양의 5,100석의 코우제비츠키 옥외 창고 연주회관(Koussevitzky Music Shed)을 짓고 첫 연주회를 연 후로 보스턴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연례 연주회가 계속 되었고, 마침내 탱글우드 숲은 음악 애호가들의 순례지가 되었다.

탱글우드 안의 코우제비츠키 옥외 창고 연주회관

 

1986년 인접한 땅을 추가해 페스티벌 광장이 40% 가량 넓어졌다. 1994년 개장한 오자와 세이지홀과 번스타인 캠퍼스는 탱글우드 음악센터 활동의 중심 무대가 되었다. 탱글우드는 보스턴 심포니 뿐만 아니라 다양한 기악과 성악 연주회, 현대 음악 페스티벌, 팝송과 재즈 공연 등 풍부하고 독특한 음악을 엄선해 선보임으로써 매년 30여만 명이 탱글우드를 찾아오게 하고 있다.

올해는 1937년의 보스턴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탱글우드 첫 연주회를 기념하여 그때의 연주회처럼 전곡 베토벤 곡을 연주한다고 한다. 6월부터 시즌이 개막되는 탱글우드 숲 입구 앞의 너른 주차장에는 차량 몇 대만이 썰렁하게 주차되어 있다. 수많은 인파가 숲 광장에 들어차 음악을 즐기는 광경을 상상하면서 숲을 한 바퀴 돌아보았다. 다람쥐가 들락거리며 뛰어다니는 잔디밭을 호젓하게 걸었다. 잔디 광장 여기저기 심어놓은 나무 중에 기묘하게 붙어서 공생하는 연리지 나무가 많다. ‘tangle’이란 단어의 뜻이 ‘얽히다’, ‘뒤엉키다’인데, 이 숲의 이름이 이 연리지 나무에서 유래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신기했다.

이곳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실내 연주홀은 일본이 자랑하는 음악가 오자와 세이지를 기념하여 이름을 붙였다. 잔디가 깔린 부드러운 구릉이 내려와 평지와 만나는 곳에 붉은 벽돌로 지은 단순하고 소박한 3층 건물이다. 마치 과거 중고등학교의 둥근 깡통천장을 한 허름한 강당같아 보인다. 유리창을 통하여 들여다보니 객석의 의자들도 딱딱하고 평범한 학교강당식 나무의자다. 오자와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희사한 돈으로 이 아름다운 명소에 기념 연주홀을 지었으며 입구에는 기부자들의 명단이 새겨져 있다.

탱글우드 안의 오자와 세이지홀

 

김정일

은행 지점장 퇴직 후, 뭐라도 배우고 나누자는 취지로 설립한 ‘뭐라도학교’ 초대교장으로 3년간 활동하다 지금은 강원도 원주에서 10년째 소나무와 씨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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