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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상인의 일본 산책] 규슈 후쿠오카의 다자이후(太宰府)는 백제와 관련 깊은 행정관청… 텐만구(天滿宮)에 묻힌 ‘학문의 신(神)’ 스가하라 미치자네(菅原道眞)는 가야계 후손

↑ 텐만구(天滿宮) 본전. 오른쪽 나무는 토비우메(飛梅)라는 흰 매화이고 왼쪽 나무는 황후의 매화로 불리는 붉은 매화다.

 

by 장상인 JSI 파트너스 대표

 

규슈(九州) 후쿠오카(福岡) 지역을 여행할 때 필히 거치는 곳이 다자이후(太宰府)이다. 후쿠오카에서 동남쪽으로 19㎞ 지점에 있는 유적도시이다. 이곳을 자주 가는 이유는 공항에서 가까운 점도 있지만 역사적으로 큰 의미가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지인에 따르면, 다자이후는 원래 행정관청이었다고 한다. 후쿠오카(옛 이름은 쓰쿠시․筑紫)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오늘날의 오카야마(岡山)현, 야마구치(山口)현, 에히매(愛媛)현 등 4곳에 있었다고 한다.

다자이후(太宰府) 유적지

 

4개의 다자이후를 후쿠오카로 일원화한 것은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었을 법하다. 전 규슈 역사박물관 부관장인 후지이(藤井) 씨는 그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중앙정부의 지시에 따라 어떤 때는 오카야마, 어떤 때는 야마구치의 다자이후가 대외관계의 업무를 맡았었습니다. 그러나 규슈의 다자이후로 일원화한 것은 조선과의 관계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지리적인 여건 때문에 비롯된 것이었을까? 아무튼 일본 문명의 시작은 숙명적으로 규슈가 창구가 되어 역사의 수레바퀴를 따라 오늘에 이르렀다.

 

다자이후(太宰府)는 나·당 연합군과의 ‘백촌강 전투’ 패전의 산물

다음은 다자이후 안내를 맡은 한 일본인 자원봉사자에게서 들은 내용이다. “660년 나·당 연합군에 의해 백제가 멸망하자 일본에서 구원병을 보냈습니다. 여러분께서도 잘 아시는 덴지천황(天智天皇, 626~672)입니다. 안타깝게도 663년 백촌강 전투(한국에서는 백강 전투)에서 나·당연합군에 패하자 일본은 성(城)을 쌓기 시작했습니다. 664년 쓰시마(對馬島)와 하카타(博多)에 군사를 배치하고, 외교·정치·문화 등을 담당하는 행정관청을 내륙으로 옮긴 것입니다. 그곳이 바로 다자이후 행정청입니다. 500년간 번영을 누린 일본 서부지역의 수도인 셈이지요. 건물은 없어졌지만 인고의 세월을 견디어온 주춧돌들이 일부 남아 있습니다. 색깔이 퇴색되고 깨진 돌들이 바로 그 당시에 놓였던 주춧돌입니다.”

덴지천황(天智天皇). 1899년 그림

 

모두가 역사적인 사실이다. 일본은 백촌강 전투에서 400여 척의 전함과 2만 7000명의 구원병을 모두 잃었다. 이 전투의 패전으로 말미암아 백제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됐다.

백촌강 전투 전황도

 

급한 것은 일본이다. 백제가 멸망한 후 일본은 정부 차원에서 신라와 당나라의 침입에 대비해 미즈키(水城)와 오노조(大野城)를 축조했다.

미즈키(水城)는 길이 1.2㎞, 폭 60m, 높이 14m의 토성(土城)이다. 오노조(大野城)는 다자이후 북쪽에 있는 시오지산(四王寺山) 정상에 위치한 8㎞의 토담과 석벽이다. 특히 이 성은 665년 백제 망명자들의 아이디어를 따라 덴지천황(天智天皇)이 진두지휘해서 쌓은 백제식 산성이다. 그만큼 백제와 관련이 깊은 곳이다.

 

미즈키(水城)와 오노조(大野城) 위치도

 

위쪽은 오노조(大野城), 아래쪽은 미즈키(水城)

 

텐만구(天滿宮)는 ‘일본 학문의 神’을 모시기 위해 지은 곳

곧 다자이후를 뒤로 하고 텐만구(天滿宮)로 향했다. 그곳에는 일본인들이 ‘학문의 신(神)’으로 추앙하는 스가하라 미치자네(菅原道眞, 845~903)란 인물이 묻혀 있다.

‘학문의 신’ 스가하라 미치자네(菅原道眞)

 

스가하라는 당시 천황의 신임을 받아 대신으로 승진하였으나, 주변 사람들의 모함에 의하여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다자이후로 좌천되었다. 그는 이곳에서 가난과 병고와 씨름하다가 생을 마감하였다고 한다. 스가하라의 제자가 마차에 그의 시신을 싣고 가던 중 마차가 움직이지 않아, 그곳에 그를 매장하고 안락사(安樂寺)를 지었다고 한다. 그가 죽은 후 천재지변이 계속되자 사람들은 스가하라가 한을 품고 벌을 내리는 것으로 믿었다. 따라서 조정에서는 그에게 정일위(正一位)를 하사하고 안락사 텐만구(天滿宮)로 모시게 되었다.

당나라 시인 백낙천(白樂天)보다 뛰어나다고 칭송받던 시인이자 문장가였던 스가하라는 11세 때 ‘달밤에 매화를 보다’라는 시를 짓는 등 매화를 좋아하였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다자이후 주변에 있는 130종 6,000그루의 매화나무가 봄철 관광객들을 사로잡는다. 특히, 신전 앞에는 도비우메(飛梅)라는 커다란 매화나무가 있다. 토비우메는 흰 매화이고 맞은편에 황후의 매화를 뜻하는 붉은 매화가 있다.

본전 앞마당에 있는 토비우메(飛梅). 원조 토비우메는 이미 죽고 지금은 10대 매화가 대를 잇고 있다.

 

하이얏트 레지덴셜 호텔의 회장인 이와타 고하치(岩田耕八) 씨는 도비우매의 전설적인 이야기를 나에게 들려주었다. “이곳 다자이후로 좌천된 스가하라 선생을 그리워한 나머지 교토에 있던 매화나무가 이곳까지 날아와 하루 만에 꽃을 피웠다”고. 그래서 도비우메(飛梅) 즉, 날아온 매화(梅花)라고 이름이 붙여진 것이다. 전설의 고향에서나 나올법한 얘기지만, 애틋한 사연은 사람들의 마음을 흔들고도 남았다. 사람이 살면서 본의 아니게 오해와 질시를 받을 수 있으며, 때로는 억울한 누명을 쓸 수 있다. 얼마나 억울했으면 매화나무에게 자신의 심경을 토로했을까.

6000여 그루의 매화나무 중 이 도비우메가 가장 먼저 꽃망울을 터트리고, 뒤이어 나머지 매화들이 꽃을 피운다고 했다. 도비우메가 첫 꽃망울을 터트린 날은 방송이나 신문들이 앞을 다투어 보도한다. 스가하라 미치자네가 세상을 떠난 지 천 년이 넘었으나 그는 여전히 존경을 받고 있고, 그와 관련한 매화나무도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비록 사후에 만들어진 이야기라 할지라도 가슴 뭉쿨한 아름다운 스토리다.

텐만구(天滿宮) 경내 안내도

 

입시철만 되면 입시생 부모들이 찾아와 빌어

이곳 텐만구에는 또 하나의 이색풍경이 있다. 각양각색의 부적들이 나비처럼 아니 매화꽃처럼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다. 입시생을 가진 부모들이 자녀의 합격을 기원하기 위해 부적을 사서 벽에 매달거나 나뭇가지에 묶는다. 입시철이 되면 일본전역에서 모여들어 ‘학문의 신’의 신전 앞에서 두 손을 모은다. 부적을 매는 부모들의 심정은 우리나 일본이나 차이가 없는 것 같다.

텐만구에는 만지면서 소원을 빌면 모두 이뤄진다는 고신규(御神牛)라 불리는 황소 조각상도 있다. 1984년 히로히토 천황이 하사했다고 한다. 이곳에 황소 조각상이 세워진 것은 스가하라 미치자네가 소띠이기 때문이란다. 다소 미신적인 요소가 깃들어 있으나, 인간의 속성을 감안한 스토리텔링에 수긍이 갔다. 황소의 뿔은 이미 동(銅) 색깔이 아닌 하얀색으로 닳았고, 몸통 곳곳도 하얗게 변색돼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소원을 빌면서 조각상을 쓰다듬었기 때문이다.

황소상 ‘고신규(御神牛)’

 

최인호 소설 ‘제4의 제국’에서 스가하라(菅原道眞)를 가야민족의 후세라고 주장

흥미로운 것은 일본사람들로부터 ‘학문의 신’으로 존경받는 인물이 가야민족의 후예라는 것이다. 최인호 씨가 펴낸 ‘제4의 제국’(여백출판사 발간)에 스가하라 미치자네의 역사적 발자취가 다음과 같이 정리되어있다.

“도명사 텐만구의 표문 서쪽에는 ‘일본서기’의 내용대로 ‘하세의 요지(窯址)’란 석비가 세워져 있다. 하세(土師)씨는 훗날 스가하라(菅原道眞) 씨로 성을 바꿨다.… 종발성 전투에서 고구려의 5만 대군에게 크게 패한 가야의 연합군은 어디로 도망쳤던 것일까.… 금관가야의 유민들이 한꺼번에 사라져버린 곳은 바로 섬나라인 일본인 것이다.… 일본으로 집단 망명한 가야인 들의 도래인 집단이 바로 하세(土師)- 문자 그대로 ‘흙의 스승’이란 것이다.… 100명의 가야도공들이 모여 살던 이곳은 다른 이름인 ‘하세마을’ 로 불리고 있다.… 스가하라는 바로 이곳 하세마을에서 큰어머니 카쿠쥬(覺壽)의 보호 아래 목동 일을 하면서 소잔등을 타고 학문에 전념했다… 현재 다자이후의 텐만구에 스가하라 뿐만 아니라 그의 큰어머니를 모시고 있다.… 역사의 즐거움. 영원히 침묵할 것 같던 역사가 어느 순간 찰나적으로 보이는 그 황홀한 관음. 그 쾌락은 성욕을 능가한다.… 일본인들이 학문의 신으로 존경하는 스가하라 미치자네가 바로 가야의 후손이라는 명백한 사실은 나를 황홀한 쾌감으로 전율케 했다.… 스가하라는 하세 씨의 후예인 것이다.”

최인호 소설 ‘제4의 제국’

 

지중해를 중심으로 마치 그리스와 마케도니아 같은 도시국가가 번영하였듯이, 현해탄을 중심으로 가야와 왜가 철의 무역과 발달된 문명으로 큰 번영을 누렸던 폴리스적 동맹관계가 있었을 것이라는 작가 최인호 씨의 육감에 큰 박수를 보낸다.

사실, 후쿠오카에는 우리나라와 이름이 똑같은 가야산이 있다. 일본인들은 그 산이 한국의 가야산과 닮았다고 입을 모은다. 가야인들이 그 당시 규슈에 정착하여 고국을 그리워하며, 이 지역의 산 이름을 가야산으로 명명했던 것 같다. 역사는 우리 모두가 얽히고설키어 다함께 살아가는 과정의 연속인가보다.

 

장상인 JSI 파트너스 대표

대우건설과 팬택에서 30여 년 동안 홍보업무를 했다. 2008년 홍보컨설팅회사 JSI 파트너스를 창업했다. 폭넓은 일본 네트워크를 가지고 있으며 현지에서 직접 보고 느낀 것을 엮어 글쓰기를 하고 있다. 저서로 <현해탄 파고(波高) 저편에> <홍보는 위기관리다> <커피, 검은 악마의 유혹>(장편소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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