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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이 정도는 알고 떠나자⑬ – 피렌체(3) : 피렌체 두오모, 브루넬레스키, 기베르티, 도나텔로, 산 마르코 미술관, 프라 안젤리코, 사보나롤라

↑  피렌체 두오모의 옆 모습

 

by 김지지

 

■피렌체 두오모와 세례당, 필리포 브루넬레스키와 로렌초 기베르티

 

피렌체의 두오모(대성당)는 피렌체 시내 어디서도 아치형 돔의 일부가 보일 정도로 거대하고 화려하다. 정식 명칭은 ‘꽃의 성모 마리아’라는 뜻의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이다. 두오모는 크게는 대성당, 세례당, 종루로 나뉜다. 대성당은 흰색, 녹색, 분홍색 대리석이 적절히 조화되어 화려하면서도 특이한 색깔을 드러내는 성당 외벽과, 아름답고 거대한 붉은 돔이 인상적이다.

피렌체 정부가 두오모 건립을 추진한 것은 13세기 말이었다. 당시 인근의 경쟁 도시인 피사와 시에나가 화려한 두오모를 이미 완성했거나 건립 중이었는데 피렌체가 대성당으로 사용하던 ‘산타 레파라타 성당’이 규모에서 이에 미치지 못했기 때문이다.

피렌체 정부는 900년 정도나 되어 허물어져가던 ‘산타 레파라타 성당’을 헐어내고 그곳에 기독교 사상 가장 큰 ‘신의 집’을 짓겠다는 포부를 가지고 두오모를 짓기로 했다. 두오모는 1296년 9월 8일 착공했다. 설계와 공사는 아르놀포 디 캄비오(1245~1302)가 맡았다. 이후 화가이자 건축가로 이탈리아 르네상스 미술의 선구자인 조토 디 본도네(1267~1337)를 거쳐 안드레아 피사노, 프란체스코 탈렌티, 조반니 디 라포 기니 등 초기 르네상스 건축 명장들의 역량이 총동원되어 14세기 말 건물 공사를 얼추 마무리했다.

피렌체 두오모 전경. 산 조반니 세례당(왼쪽)과 조토의 종탑과 쿠폴라(돔)이 한 눈에 보인다.

 

문제는 성당 꼭데기에 설치할 쿠폴라(돔)였다. 84m 높이의 건물 위에 직경 43m의 거대한 쿠폴라(반구형으로 된 지붕이나 천장)를 올리는 것은 누가 봐도 불가능해 보였다. 이 난공사를 해결하기 위해 전문가들이 머리를 맞댔으나 뾰족한 해결책을 찾지 못했다. 그래서 1418년 공모전을 열었고 필리포 브루넬레스키(1377~1446)와 로렌초 기베르티(1378~1455)가 경합을 벌였다.

 

피렌체 두오모는 성당 외벽과 거대한 붉은 돔이 인상적

두 사람은 이미 한 차례 공모전에서 경합을 벌인 적 있었다. 1401년 모직물 가공업조합이 후원한 공모전이었는데 두오모 바로 앞에 있는, 피렌체의 수호성인인 산 조반니를 위한 팔각형 모양의 산 조반니 세례당의 청동문 제작을 누구에게 맡길 것인가를 결정하는 공모였다. 이 세례당은 4세기 무렵 건조되었다가 1059년 재건을 시작해 1128년에 완공한, 피렌체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었다.

세례당은 비록 규모는 작지만 벽의 상단과 천장에 최후의 심판과 창세기를 소재로 한 비잔틴 스타일의 금빛 모자이크가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다. 현존하는 중세 로마네스크 양식의 모자이크 중에서 단연 으뜸이다.

세례당 벽의 상단과 천장에는 최후의 심판과 창세기를 소재로 한 비잔틴 스타일의 금빛 모자이크가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다.

 

청동문 제작을 공모할 당시 세례당에는 동남북 방향의 3개의 청동문 중 1개(남문) 밖에 완성되지 않은 상태였다. 이 남문은 안드레아 파사노가 1329~1336년 고딕풍으로 완성했다. 따라서 1401년의 공모전은 나머지 북문과 동문을 완성할 작가를 선정하기 위한 공개 경쟁이었다.

공모전에는 7명이 응모했다. 그중 25살의 필리포 브루넬레스키와 24살의 로렌초 기베르티가 최종 경합을 벌였다. 그러나 두 사람의 기량이 워낙 출중해 심사위원단은 어느 한 사람을 선정하지 못하고 두 사람에게 문을 하나씩 맡아 작업하도록 했다. 그러자 공동 1등이라는 데 자존심이 상한 브루넬레스키는 청동문 제작을 포기하고 로마로 떠났다. 경쟁자인 기베르티 밑에서 조수를 하던 도나텔로도 브루넬레스키를 따라 로마로 갔다. 1401년 공모전에 출품한 두 사람의 모형 작품이 현재까지 피렌체 국립 바르젤로 미술관에 진열되어 있어 특성을 비교할 수 있다.

 

기베르티, 세례당의 청동문 제작에 50년 쏟아부어

브루넬레스키가 로마에서 고대 건축 연구에 열정을 쏟고 있을 때 기베르티는 1403년 홀로 북문 제작에 착수했다. 이후 1425년까지 23년에 걸친 작업 끝에 아름다운 황금빛 문을 완성했다. 기베르티는 두 짝의 북문에 28장면으로 된 ‘그리스도의 생애’를 부조로 제작했다. 미켈란젤로가 훗날 이 걸작품을 보고 “천국으로 들어가는 문”이라고 감격해했다고 해서 그 뒤부터 ‘천국의 문’으로 불린다.

‘천국의 문’은 기베르티가 새로운 원근법 이론을 적용해 부조의 바닥면이 평평한 것이 아니라 회화의 배경처럼 깊이와 공간감을 주었다는 점에서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기베르티는 이후 동문까지 맡아 1425년 착수하고 27년 만인 1452년 완성했는데 그동안 두 문을 제작하는데 걸린 시간이 50년이나 되었다. 사실상 한평생을 다 보낸 것이다. 이 때문에 기베르티는 몇몇 조각품을 빼고는 이렇다 할 예술적 업적을 남기지 않았다. 현재 세례당에 달려 있는 문은 정교한 모조품이고 진품은 두오모의 부속건물인 두오모 오페라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기베르티가 그리스도의 생애를 청동으로 제작한 ‘천국의 문’(왼쪽). 우측 상단은 ‘천국의 문’ 중간 쯤에 본인이 자신의 얼굴(왼쪽)을 부조한 것이고 하단은 ‘천국의 문’ 일부를 확대한 모습이다.

 

브루넬레스키, 돔 설치 후 ‘르네상스 건축의 아버지’로 불려

브루넬레스키와 기베르티 간의 2차 경쟁은 성당 건물을 거의 완공한 상태에서 성당 천장에 쿠폴라를 설치하기 위한 1418년의 공모전이었다. 당시 피렌체 정부는 로마의 판테온보다 더 크고 넓은 돔을 건설하겠다고 큰소리를 쳤지만 돔 건축 공법이 중세를 거치며 사장된 데다 지지대 없이 뚜껑을 얹어야 한다는 점에서 당시 기술로는 좀처럼 해결할 수 없는 난공사였다.

브루넬레스키는 로마의 판테온을 비롯해 고대 로마의 건축물들과 유적들, 비잔틴과 고딕 양식의 건축들을 낱낱이 분석해 그것들의 구조와 공간적 특징들을 파악한 경험을 살려 독창적인 기법을 제안했다. 그것은 쿠폴라의 얼개틀(높은 곳에서 공사를 할 수 있도록 설치한 임시 가설물) 없이 쿠폴라를 세우겠다는 기발한 발상이었다.

그는 무게를 분산하기 위해 돔 속에 일정한 공간을 두고 또 다른 내부 돔을 지어 서로 지지하면서 하중을 나누도록 하는 ‘이중 쉘’ 공법을 사용했다. 즉 무거운 안쪽 돔 지붕과 가벼운 바깥쪽 돔 지붕이 서로를 받치도록 함으로써 하중을 분산시켜 거대한 쿠폴라가 가능토록 한 것이다. 심사위원들은 처음에는 잘 믿지 않았지만 모형을 보고 브루넬레스키를 책임자로 선정했다.

브루넬레스키는 1420년 자신의 방식대로 쿠폴라를 올리기 시작했다. 돔 제작에 필요한 건설기계도 스스로 만들었다. 브루넬레스키가 마침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우아하고 거대한 쿠폴라를 선보인 것은 공사 시작 16년만인 1436년이었다. 이후 브루넬레스키는 ‘르네상스 건축의 아버지’로 불렸다.

두오모 돔. 꼭대기에서 관광객들이 시내를 바라보고 있다.

 

현재 두오모 옆 건물에는 아르놀포 디 캄비오와 필리포 브루넬레스키의 조각상이 있다. 캄비오는 두오모 건물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고 브루넬레스키는 고개를 들어 쿠폴라를 바라보고 있다.

처음 공사를 시작할 때 두오모 구조는 중세 양식이었으나 공사 기간이 길어 완공될 무렵 돔 부분과 조형 정신은 르네상스 양식으로 마무리되었다. 결과적으로 한 건물 안에 두 시대의 양식이 도입된 아주 독특한 건물이 만들어졌는데 이는 오늘날 피렌체 고딕 양식으로 불린다.

아르놀포 디 캄비오(왼쪽)과 필리포 브루넬레스키 동상

 

두오모 내부는 화려한 외관과 달리 소박해

두오모 내부는 로마 십자가 형태로 꾸며졌다. 높이 146m, 길이 106m의 내부는 대리석으로 장식된 화려한 외관과 달리 매우 소박하다. 더구나 대부분의 진품 예술품들을 인근의 두오모 오페라 박물관으로 옮겨 놓은 탓에 조금은 심심한 느낌마저 든다.

거대한 쿠폴라 안쪽 공간에는 프레스코화 ‘최후의 심판’이 그려져 있다. 조르조 바사리와 페데리코 추카리가 1572년에서 1579년 사이 약 7년 만에 완성했다. 하늘과 가장 가까운 중심부에서는 빛이 새어나오고 하늘과 가장 먼 곳에는 지옥의 풍경을 그려 넣었다. 두오모 안에는 도메니코 디 미켈리노(1417~1491)의 그림 ‘단테와 신곡’도 있다. 단테가 1465년 피렌체의 풍경 앞에 서서 명저 ‘신곡’을 들고 작품 속 배경인 천국과 지옥을 가리키는 단테의 모습이다.

두오모 내부 모습(왼쪽). 천장에 있는 쿠폴라 안쪽 공간의 그림은 ‘최후의 심판’이다. 오른쪽은 ‘단테와 신곡’ 그림이다.

 

피렌체와 시에나 사이에 1364년 벌어졌던 ‘카시나 전투’를 승리로 이끈, 잉글랜드 용병 대장을 그린 파울로 우첼로의 ‘존 하쿠드의 기마상’(1436) 그림도 놓칠 수 없는 작품이다. 두오모 내부의 스테인드글라스는 도나텔로와 기베르티가 만들었다. 두오모 지하로 내려가면 두오모가 세워진 자리에 있던 과거 산타 레파라타 성당의 흔적이 보존되어 있다. 브루넬레스키의 무덤 또한 여기에 자리잡고 있다. 두오모의 파사드(건축물의 주된 출입구가 있는 정면부)는 1587년 파괴되었다가 19세기 말에 신고딕 양식으로 꾸며져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두오모 종탑과 도나텔로

 

두오모 옆의 종탑은 조토 디 본도네(1267~1337)가 설계했다고 해서 ‘조토의 종탑’으로 불린다. 종탑은 바로 옆 두오모처럼 흰색, 녹색, 분홍색으로 외관이 꾸며져 있어 두오모와 잘 어울린다. 높이가 85m로 414개의 계단을 올라가면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 보여 인기가 많다.

산 조반니 세례당(왼쪽)과 조토의 종탑

 

종탑의 설계는 조토가 했지만 장식은 도나텔로(1386~1466) 평생의 역작이었다. 흔히 르네상스 초기 미술을 대표하는 인물로 브루넬레스키(건축), 알베르티(이론), 마사초(그림)와 함께 도나텔로(조각)를 꼽을 정도로 도나텔로는 조각에서 발군이었다.

도나텔로는 피렌체에서 태어났다. 일찍이 금은 세공사 밑에서 수련을 받고 기베르티 밑에서 조수를 했으나 10대 후반이던 1403년 스승의 경쟁자였던 브루넬레스키를 따라 로마로 가 그곳에서 로마의 옛 문화유산을 살피고 연구했다.

종탑은 상부층에 한 면에 4개씩 도합 16개의 벽감이 있었다. 이 벽감은 모두 좁고 깊고 높은 위치에 있어 거기에 들어갈 조각을 제작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도나텔로는 1415년 4개의 예언자 조각상을 제작하는 것을 시작으로 20년 가까운 세월을 벽감 조각에 바쳤다.

1433년에는 피렌체의 산타 크로체 성당에 있는 감실 형식으로 된 ‘수태고지’ 부조를 완성하고 비슷한 시기 고대 이래 처음으로 독립된 청동 나체상 ‘다비드상’(158㎝)을 제작했다. 거인 골리앗을 쓰러뜨리고 그의 목을 밟고 있는 모습이 대리석 조각상보다 더 극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도나텔로의 청동 나체상 ‘다비드상’의 앞뒷면. 피렌체의 바르젤로 미술관 소장

 

아카데미아 미술관에 있는 미켈란젤로의 ‘다비드’가 아름답고 젊은 청년의 모습으로 묘사된 것과 달리 도나텔로의 다비드는 강단있는 소년의 모습으로 형상화되어 있다. 그러면서도 사색에 잠긴 얼굴, 부드러운 머리카락, 청동의 감각적인 표면에 드러난 신체의 곡선 등이 어우러져 매우 관능적인 모습이다. 제작 시기는 1430~1440년대다. 문헌상 최초 기록에 따르면 피렌체의 메디치 궁 정원에 있었으나 지금은 피렌체의 바르젤로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다. 바르젤로에는 도나텔로에게서 수학한 베로키오가 메디치 가의 주문으로 제작한 ‘다비드’(1470년경)도 있다.

 

도나텔로 평생에 걸친 역작은 피렌체 두오모 종탑의 장식

도나텔로는 1444년부터 10년간 파도바에서 활동하면서 예술가로서의 기량을 발휘했다. 1445년부터 5년간 제작해 파도바의 성 안토니오 대성당 광장에 세워진, 고대 이래 최초의 청동 기마상(높이 4m)도 도나텔로의 작품이다. 사방에서 다 볼 수 있는 입체적인 조각을 만드는 것이 쉽지 않던 시절에 말이 힘차게 걷고 있는 모습으로 만든다는 것은 고도의 기법을 필요로 했다. 이 청동 기마상은 이후 수많은 기마상들의 모델이 되었다.

도나텔로는 68세인 1454년경 피렌체로 돌아와 비극적인 작품을 연이어 제작해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그중 하나인 목조 조각상 ‘참회하는 막달라 마리아’(1455년)는 험하고 추한 상으로 충격을 주었지만 사실 묘사의 극치를 보여주고 정신적인 숭고함을 잘 드러낸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인간 내면의 복잡한 갈등을 예리하게 간파하고 그것을 예술적으로 절묘하게 승화시켰다는 것이다. 피렌체의 두오모 오페라 박물관에서 만날 수 있다.

도나텔로의 목조 조각상 ‘참회하는 막달라 마리아’. 두오모 오페라 박물관 소장

 

코시모는 도나텔로가 생계를 걱정하지 않고 창작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도나텔로는 은혜를 잊지 못해 1466년 세상을 떠나면서 2년 전 세상을 떠난 코시모의 무덤 곁에 묻어달라고 유언을 남겼다. 지금도 피렌체의 산 로렌초 성당에 있는 메디치 가의 묘지에는 코시모의 무덤 옆에 도나텔로의 무덤이 있다.

 

■산 마르코 미술관과 프라 안젤리코

 

산 마르코 미술관은 피렌체 두오모에서 걸어서 10분 거리에 있다. 미술관에 중세 수도원의 건물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것은 미술관의 전신이 산 마르코 수도원이기 때문이다. 1982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될 만큼 귀중한 미술작품과 희귀본 자료를 다수 소장하고 있다. 정식 명칭은 산 마르코 국립박물관이지만 주로 미술관으로 불리는 것은 소장품 대부분이 미술작품이기 때문이다.

산 마르코 미술관

 

산 마르코 수도원은 본래 실바네스트리 수도회 소유였던 것을 1436년 도미니크 수도회가 인수했다. 코시모 데 메디치는 2년 전인 1434년 피렌체의 경쟁 가문에 의해 추방되었다가 피렌체로 돌아와 청빈을 내세운 도미니크 수도회를 적극 후원했다. 그중 하나가 수도원의 재건축이었다.

메디치 가문이 총애하는 건축가 미켈로초가 1437년 재건축 공사를 시작해 16년 만인 1452년 지금의 수도원 건물을 완성했다. 미켈로초는 1층에는 성당, 참회실, 정원을 만들고 2층에는 수사들의 방을 43개 꾸몄다.

재건축 준비가 한창이던 1436년 피렌체로 온 신앙심 깊은 수도자이자 유명 화가가 있었다. 프라 안젤리코(1395~1455)였다. 안젤리코는 ‘천사와 같은 수사’라는 뜻으로 그에 대한 존경과 사랑을 표현하기 위해 후세 사람들이 붙여준 이름이다. 본명은 귀도 디 피에트로다.

 

산 마르코 미술관은 사실상 안젤리코의 전용 미술관

안젤리코는 피렌체 부근 비키오에서 태어났다. 그는 청년기에 삽화가로 도제 수업을 받아 실력있는 화가로 명성을 얻었다. 초기 작품은 당시 유행하던 국제고딕 양식으로 제작된 세밀하고 화려한 채색 필사본이 주를 이루었다. 예술가로서 유망한 미래가 열려 있었으나 20대 초반에 도미니크회 수도회에 입회하고 피에솔레에 있는 산 도미니크 수도원에서 수사로 활동했다. 당시 그는 프라 조반니(요한 수사)로 불렸다. 안젤리코는 수도원 생활을 하면서도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풍부한 표정의 인물들을 대담하게 묘사한 ‘수태고지’(1426년경)를 그렸다.

안젤리코 초상

 

채색 필사본과 제단화로 명성이 드높았던 안젤리코가 대대적인 리모델링 공사가 진행될 산 마르코 수도원의 장식화를 맡아 피렌체로 간 것은 1436년이었다. 안젤리코는 1445년까지 9년 동안 머물며 회랑, 복도, 수사들의 독방에 프레스코화를 한 점씩 그려 넣었다. 덕분에 안젤리코의 전용 미술관이라고 해도 될 만큼 오늘날 산 마르코 미술관에는 그의 작품들이 많다.

 

기도하지 않고는 결코 붓질을 하지 않은 수도자이자 화가

산 마르코 미술관의 소박한 입구를 통해 안으로 들어가면 넓은 정원을 둘러싸고 아치가 이어지는 회랑이 눈에 들어온다. 회랑을 따라 걷다 보면 수사들의 독방이 줄지어 있는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나온다. 2층으로 올라가면 마주하게 되는 벽면에 그 유명한 안젤리코의 ‘수태고지’(1442년경)가 눈길을 사로잡는다. 수태고지는 예수 탄생의 일화에서 천사 가브리엘이 마리아에게 나타나 예수 그리스도의 잉태 사실을 알리는 것을 말한다. 그 순간은 그리스도교가 정착한 5세기 이래 서구 미술의 중요한 주제로 다뤄졌다.

미술관 2층으로 올라가면 안젤리코의 ‘수태고지’ 그림을 먼저 마주하게 된다. 오른쪽은 ‘수태고지’ 그림

 

피렌체의 우피치 미술관에도 시모네 마르티니,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그린 ‘수태고지’가 소장되어 있으나 안젤리코의 ‘수태고지’는 다른 작품들과 분위기가 확연히 다르다. 그림을 보면 황금빛이 은은하게 공간을 비추는 가운데 천사와 마리아 모두 겸손하게 머리를 숙이고 있고 마리아는 순종하는 자세로 두 손을 모으고 있다. 마리아가 천사의 얘기를 듣고 천사에게 ‘반문’하지만 곧이어 ‘순종’하는 아주 짧고도 중요한 순간이 절묘하게 표현되어 있다. 이런 구성이 널리 알려진 것은 안젤리코의 ‘수태고지’ 이후였다. 그림에는 천사와 마리아가 있는 아치 모양이 알파벳 M자를 이루는데 마리아의 이니셜이다.

기도하지 않고는 결코 붓질을 하지 않았다고 할 만큼 진실하고 경건한 수도자였던 그의 삶과 영성은 작품에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그림은 그가 신에 도달하기 위한 간접적인 길이고 신을 찬미하는 기도문이었다. 그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그릴 때 눈물을 흘렸으며 때로는 무릎을 꿇고 그림을 그렸다. 또한 신의 은총 덕에 작품을 하고 있다고 생각해 일단 작업을 시작하면 다시 고치는 일 없이 똑같은 자세로 끝을 맺기도 했다.

 

수사들의 43개 방에는 성서 이야기 담은 프레스코화 그려져 있어

복도를 따라 2층에 빼곡하게 들어 차 있는 수사들의 독방 43개에는 각기 다른 성서 이야기를 담은 프레스코화가 그려져 있다. 아무런 장식도 살림살이도 없는 수사들의 방에 그려진 그림은 캔버스나 패널이 아닌 벽면에 직접 그린 것이다. 그 무렵 안젤리코 역시 르네상스의 한 가운데를 살아 르네상스라는 혁명적 변화를 모를 리 없었으나 그의 그림에서는 중세적 분위기가 물씬 풍겨났다. 형태와 색채는 절제하고 르네상스의 특징인 사실성과 원근법은 무시했다.

수사들의 방에는 1~43번까지 번호가 붙어 있다. 1번 방에는 부활한 예수를 처음 발견한 마리아가 손을 잡으려 하자 예수가 “나를 잡지 마라”라고 말하는 장면, 2번 방에는 죽은 예수의 시신을 가운데 두고 슬퍼하는 장면을 그린 ‘애도’가 그려져 있다. 12~14번 방은 산 마르코 수도원장이었던 사보나롤라의 방으로 사보나롤라의 추종자 프라 바르톨로메오가 사보나롤라를 그린 2점의 초상화와 유품들이 있다.

부활한 예수를 처음 발견한 마리아가 손을 잡으려 하자 예수가 “나를 잡지 마라”라고 말하는 장면의 1번방(왼쪽)과 죽은 예수의 시신을 가운데 두고 슬퍼하는 장면의 2번방

 

북쪽 회랑 끝에 마련한 39번 방은 수도원의 든든한 후원자 코시모 데 메디치를 위한 방으로 그곳에는 메디치 가의 후원을 받았던 화가 베노초 고촐리의 ‘동방박사의 경배’(1442년)가 있다. 동방박사는 메디치 가문의 수호성인이고 가문이 동방박사 형제회의 중요 후원자였다. 그림 속에는 코시모 데 메디치와 그의 아들 피에로 데 메디치, 피에로의 후계자인 로렌초 데 메디치가 있다.

미켈란젤로의 스승으로 유명한 도메니코 기를란디요의 대표작 ‘최후의 만찬’은 메디치 가에서 주관한 피렌체의 인문학 아카데미에 참여하는 지식인들이 자주 모였던 아래층 수사들의 식당에 있다. 예수가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을 하던 중 “너희 중 하나가 나를 배신할 것이다”라는 말에 제자들이 술렁거리고 요한은 예수에게 쓰러졌으며 유다만 따로 예수 앞에 앉아있는 장면으로 사실적이면서도 원근법에 충실한 구도가 특징이다.

도메니코 기를란디요의 대표작 ‘최후의 만찬’

 

수도원 2층에는 유럽 최초의 공공도서관이 자리잡고 있다. 코시모는 산 마르코 수도원을 개축하면서 도서관을 만들어 희귀본을 소장하고 연구를 원하는 이들에게는 도서관을 개방했다.

 

안젤리코, 선종 후 ‘천사 같은 화가’로 불려

안젤리코는 1445년 로마 교황의 부름을 받고 성 베드로 대성당과 바티칸 궁 니콜라오 5세 예배당에 프레스코화를 그리고 1447년 오르비에토 주교좌 성당의 프레스코화를 그렸다. 1448년 피에솔레로 돌아와 1450년 수도원장으로 부임했다. 교황 니콜라오 5세가 피렌체의 대주교로 임명하려 했으나 사양했다.

1455년 2월 로마의 도미니코 수도원에서 선종하고 시신은 산타 마리아 델라 미네르바 성당에 안치되었다. 선종 후, ‘천사 같은(angelic)’ 화가라는 뜻의 ‘픽토르 안젤리쿠스’로 불렸다. 이것이 나중에 영어식 ‘프라 안젤리코’로 번역되었다. ‘프라’는 수사들의 이름 앞에 붙이는 호칭으로 ‘형제’라는 뜻이고, ‘안젤리코’는 ‘천사 같은’이라는 뜻이니 ‘천사 같은 수사 형제’다. 1982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복자와 동등한 전례가 공식적으로 승인되고, 1984년 같은 교황에 의해 예술가와 미술가의 수호성인으로 선포되었다.

 

■지롤라모 사보나롤라, 회개와 금욕으로 신정(神政) 펼친 수도사

 

베키오 궁전 앞 시뇨리아 광장 바닥에는 붉은 색 돌에 새겨진 작고 초라한 원형 표지석이 있다. 지롤라모 사보나롤라(1452~1498)가 화형을 당한 자리임을 알려주는 표지석이다. ‘1498년 5월 23일, 이곳에서 지롤라모 사보나롤라 수도사가 도미니코 수도사 및 실베스트로 수도사와 함께 부당한 판결로 교수형을 받은 뒤 화형에 처해졌다. 4세기 후 추모의 뜻을 담아 이 기념비를 세운다’라고 기록된 표지석은 사보나롤라가 수년간 회개와 금욕 위주의 신정(神政)을 펼쳤으나 결국에는 개혁 피로감에 지친 군중의 손에 화형에 처해졌음을 알려주고 있다.

사보나롤라는 볼로냐의 북동부에 위치한 페라라에서 태어났다. 대학에서 의학을 전공했지만 타락한 세계와 로마 교회에 절망해 20살이던 1472년 ‘세계의 몰락’이라는 시를 쓰고 1475년 볼로냐의 도미니코 수도원에 들어갔다. 수도원에서 엄격한 금욕생활을 하던 그가 피렌체의 산 마르코 수도원으로 옮겨 그곳에서 수사 생활을 시작한 것은 1482년이었다. 사보나롤라의 눈에 비친 그 무렵의 피렌체는 환락에 빠지고, 타락한 예술과 제멋대로 살아가는 인간 군상이 만드는 혼란과 문란의 도시였다.

사보나롤라는 수년 간 피렌체에서 생활하다가 피렌체를 떠나 작은 도시들을 전전하며 대중 설교로 명성을 얻었다. 그러자 1490년 로렌초 데 메디치가 사보나롤라를 피렌체로 불러들였다. 사보나롤라는 1491년 산 마르코 수도원장으로 부임하자 로마 교황과 교회의 부패를 비난했다. 그를 피렌체로 불러들인 메디치 일가의 사치와 허영에 대해서도 거침없이 독설을 쏟아냈다. 부자의 교만과 사치 그리고 음란과 방탕도 질타의 대상이었다.

사보나롤라 동상. 그의 고향 페라라에 있다.

 

높은 학식, 금욕 생활, 열정적 설교로 대중의 인기 끌어

사보나롤라는 외모상으로는 호감을 주는 인물이 아니었으나 대중을 끌어들이는 무언가가 있었다. 그것은 높은 학식과 금욕 생활, 열정적이고 진지한 설교였다. 사보나롤라는 메디치 정권 하에서 르네상스의 세례를 받아 신에게서 멀어진 피렌체인들을 향해 “회개하지 않으면 신의 징벌이 내려질 것”이라고 설교하면서 “무시무시한 폭풍우와 역병과 전쟁, 홍수와 기근이 닥칠 것”이라고 경고했다. “머지않아 로렌초 데 메디치와 교황 인노첸시오 8세가 죽고, 외국 왕이 군대를 이끌고 알프스 산맥을 넘어 이탈리아를 침공할 것”이라고도 예언했다. 놀랍게도 로렌초와 교황은 1492년 죽었다.

피렌체 사람들은 점차 쾌락, 도박, 축제 등을 멀리하면서 사보나롤라에게 전폭적인 신뢰를 보냈다. 1494년 8월에는 사보나롤라의 예언대로 프랑스 왕 샤를 8세가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를 침공했다. 프랑스군이 거칠 것 없이 이탈리아 북부 지역을 휩쓸면서 피렌체로 접근해오자 피렌체 시민들은 극도의 공포에 빠져들었다.

그러던 중 10월 말 메디치 가의 통치자 피에로 데 메디치가 샤를 8세에게 찾아가 항복에 가까운 조건에 동의하자 메디치 가문에 대한 피렌체 시민들의 분노가 폭발했다. 결국 피에로는 가족과 함께 피렌체를 빠져나가 베네치아로 도망쳤다. 그러자 피렌체의 실질적인 통치체인 시뇨리아가 원로들을 소집해 메디치 가 독재의 종식을 선포했다. 상원격인 ‘100인 위원회’는 피렌체가 공화정임을 확인했다.

사보나롤라는 1494년 11월 피렌체에 입성한 샤를 8세를 만나 “신이 이탈리아의 죄악을 벌주시기 위해 당신을 보내신 것”이라고 한껏 치켜세우면서도 “당신이 피렌체 시민을 존중하지 않는다면 신은 당신 대신 다른 사람을 택할 것이고 당신을 무서운 회초리로 멸망시키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대중에게는 프랑스의 침략이 “신께서 내리는 칼” “신이 내리시는 노여움의 시련”이라며 자신의 예언이 맞았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시민들은 사보나롤라를 따라 샤를 8세를 해방자로 맞이하고 환호했다. 고무된 샤를 8세는 피렌체를 약탈하지 않고 10여 일만에 피렌체에서 철수했다.

프라 바르톨로메오가 그린 사보나롤라 초상화(1498년경, 왼쪽)와 사보나롤라가 화형을 당한 자리임을 알려주는 원형 표지석

 

사보나롤라의 지나친 신정(神政)에 시민들 반발

시민들은 메디치 가문에 등을 돌리고 사보나롤라를 구원자로 받아들였다. 이후 수년 간 피렌체는 유례없는 신정(神政)의 도가니 속으로 빠져들었다. 이른바 ‘사보나롤라의 소년들’은 거리를 행진하면서 찬송가를 부르고, 춘화나 도색 잡지 등 사악한 모든 것들을 찾아내 불태웠다. 1497년 2월 7일에는 ‘사보나롤라의 소년들’이 보석과 액세서리 등 사치품들, 르네상스의 정신을 담은 예술품들, 재미를 주거나 풍기를 문란케 하는 서적들을 수거해 시뇨리아 광장에서 18m 높이에 72m의 둘레로 쌓은 뒤 불태우는 ‘허영의 화형식’ 행사를 가졌다.

그 무렵 교황 알렉산데르 6세가 프랑스 샤를 8세의 침입을 받아 로마의 산 탄젤로 성에 감금되었다가 풀려나는 정치적 위기에 직면해 있었다. 교황은 프랑스 군대를 쫓아낼 목적으로 밀라노, 베네치아 등 북부 도시들과 함께 신성동맹을 맺으면서 피렌체에 동참을 요청했다. 그러나 피렌체 정부는 사보나롤라의 거부로 동맹에 가담하지 않았다. 심지어 교황을 신랄하게 비난하기까지 했다.

교황은 자식을 다섯이나 둔 세속적인 교황으로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인물이었다. 사보나롤라에게 이런 교황은 결코 용납될 수 없는 악의 근원이었다. 교황은 사보나롤라의 설교를 금지시켰으나 군중의 인기를 한 몸에 받고 있는 사보나롤라의 태도는 확고했다. 교황은 결국 사보나롤라를 1497년 6월 파문하면서 피렌체 정부에 “사보나롤라를 로마로 보내거나 피렌체에 투옥하지 않으면 피렌체 전체를 파문하겠다”고 위협했다.

그 무렵 피렌체 시민들은 지나치게 금욕적인 체제를 힘들어했다. 지나친 신정(神政)으로 피렌체의 경제가 엉망이 되고 흉년으로 굶주림에 시달리던 사람들이 거리에서 죽어가고 역병까지 발생했다. 그러자 시민들이 사보나롤라에게 등을 돌리고 반발의 조짐을 보였다.

 

결국 피렌체 군중 앞에서 화형당해

그러던 차에 사보나롤라를 궁지에 몰아넣는 일이 일어났다. 1498년 3월 사보나롤라가 속해 있는 도미니쿠스 수도회에 반감을 품어온 프란체스코회의 한 수도사가 자신과 사보나롤라가 ‘불의 시련’을 하자고 도전장을 내민 것이다. 서로 불속에 뛰어들어 누구의 신앙심이 더 깊은가를 시험하는 신성재판을 열자고 제안한 것이다.

프란체스코회 측은 장작불을 태운 후 그 속을 걸어갈 때, 괴로운 표정을 짓거나 피하면 신의 은총을 받지 못한 것이고 이를 패한 것으로 여기기로 했다. 사보나롤라는 내키지 않았지만, 그의 제자들은 이것이야말로 스승의 놀라운 영험을 보여 줄 수 있는 기회로 여겼다.

결국 제안은 받아들여져 1498년 4월 7일 시뇨리아 광장에 불의 시련을 위한 장작더미가 설치되었다. 그러나 방법을 둘러싼 논쟁만 벌일 뿐 어느 한쪽도 불속으로 뛰어들지 않고 옥신각신해 시간만 흘러갔다. 이런 그들을 향해 군중이 비난하는 가운데 별안간 장대비가 쏟아졌다. 그러자 도미니쿠스 수도회 몇 명이 “기적”이라며 “신이 불의 시련을 원하지 않으시는 증거다”라고 소리쳤다. 이유가 무엇이든 결과적으로 사보나롤라는 불속으로 뛰어들지 않았다. 이는 이적(異蹟)과 예언이라는 수단에 의지하던 사보나롤라의 권위에 치명적인 상처를 입혔다.

결국 실망한 시민들은 폭동을 일으켰고 피렌체 시 정부는 사보나롤라와 2명의 제자를 체포·고문한 뒤 5월 22일 사보나롤라와 제자에게 사형선고를 내렸다. 사보나롤라는 한때 그의 열렬한 추종자였으나 곧 무서운 적대자로 돌아선 피렌체 군중이 지켜보는 가운데 5월 23일 시뇨리아 광장에서 2명의 수도사와 함께 화형되었다.

사보나롤라의 처형 모습을 그린 ‘시뇨리아 광장에서의 처형’. 화가는 알려져 있지 않다. 산 마르코 박물과 소장

 

훗날 신교의 루터나 칼뱅은 사보나롤라의 개혁 정신과 청빈한 삶에 깊이 영향을 받았다며 사보나롤라를 높이 평가했다. 루터는 사보나롤라를 “신교 최초의 순교자”라고 하고 칼뱅은 사보나롤라가 했던 그대로 스위스 제네바에 하느님의 왕국을 건설하려다가 개혁 시스템을 구축하기 보다는 비과학적인 이적과 예언을 남발해 군중의 불신을 자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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