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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이 정도는 알고 떠나자⑪ – 피렌체(1) : 르네상스, 메디치 가문, 코시모, 로렌초

↑ 미켈란젤로 광장에서 내려다 본 피렌체 시가지 전경. 아르노 강을 끼고 적갈색 지붕의 중세풍 건물들이 눈부시게 펼쳐진다.

 

by 김지지

 

■피렌체, 무수한 천재들이 서로 기량 뽐내며 경쟁 벌여

 

피렌체는 이탈리아 중부에 위치한 토스카나 주의 주도다. 토스카나 지방은 피렌체, 피사, 시에나, 루카 등을 품고 있다. 나직한 구릉이 겹겹이 이어져 있고 구릉 꼭대기에는 성당, 수도원, 성벽 들이 거의 빠짐없이 세워져 있다. 로마가 이탈리아의 정치적 수도라면, 피렌체는 문화예술의 수도다. 잠시이긴 하지만 5년(1865~1870) 간 이탈리아 왕국의 수도인 때도 있었다.

피렌체는 도시 자체가 역사이고 예술이다. 어딜 가도 중세의 고풍스러운 골목과 낭만적인 자연경관 일색이다. 타임캡슐을 타고 중세 시대로 되돌아간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운송 수단을 이용하지 않고 걸으면서 여행을 하는 것이 가장 아름답다는 것을 가르쳐 주는 대표 도시답게 도시 전체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성벽을 북단에서 남단까지 걸어봐야 40~50분 정도면 족하다.

피렌체는 11세기 말까지만 해도 로마, 베네치아, 밀라노, 볼로나 보다는 작고 낙후했다. 당시의 주요 산업은 양모 가공업이었다. 영국 등 다른 나라에서 양모를 대량으로 수입·가공해 다시 유럽 각국으로 수출하는 방식으로 사업을 키워나갔다. 그러던 중 11세기 말 십자군 원정이 시작되면서 교통과 무역의 요충지로 부상했다. 이를 이용해 금융업에 진출, 자본을 축적했다. 이 자본은 피렌체가 중세의 어둠에서 벗어나 14~16세기 르네상스를 화려하게 꽃 피우는 종잣돈 역할을 했다. 그 덕에 피렌체에는 지금까지 ‘르네상스의 요람’ ‘중세의 아테네’ ‘이탈리아 예술의 수도’ 등 다양한 수사가 따라다닌다.

 

아르노강을 끼고 형성된 피렌체의 고풍스러운 시가지 모습

 

르네상스 태동하고 발흥한 곳

르네상스는 14~16세기 유럽에서 일어난 문화예술의 진흥과 부흥운동이다. 지난 1000여 년간 신과 교회 중심의 체제 하에서 억눌리고 잃어버렸던 인간적인 것들을 되살려 보자는 문화운동이다. 침체되고 암울한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찬란했던 고대 그리스와 로마 문명을 재현·계승하면서 새로운 문화예술을 창조하려는 자연발생적인 움직임이었다. 그렇다고 무조건 과거로 돌아가자는 단순한 복고운동은 아니었다. 문화 예술과 학문의 대대적인 진흥을 통해 미래를 개척하겠다는 의지도 컸다.

‘로마인 이야기’의 저자 시오노 나나미는 “보고 싶고 알고 싶고 이해하고 싶다는 욕망의 분출이 나중에 후세인들이 르네상스라고 부르게 된 정신운동의 본질”이라면서 “욕망이 분출해 열심히 공부하거나 작품을 만들었는데 그 과정에서 아주 자연스럽게 수많은 걸작이 탄생했다”고 르네상스를 평가했다.

르네상스가 태어난 시기에 대한 논란은 있어도 태동하고 발흥한 장소가 피렌체라는 데에는 이견이 없다. 르네상스가 태어난 시기를 14세기의 맹아로 잡든 15세기의 개화로 잡든 르네상스를 선도한 인물들은 거의 피렌체를 터전 삼아 활동했다. 건축과 미술 분야가 주로 알려졌지만 언어·문학·사학·철학 등 인문학은 물론이고 수학·화학·지리·천문 등 자연과학에 이르기까지 거의 대부분의 분야를 망라하고 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나 미켈란젤로 같이 특정 분야로 한정하기 어려운 불세출의 거장들도 여럿이다. 산드로 보티첼리, 조토 디 본도네, 레온 바티스타 알베르티, 필리포 브루넬레스키, 프란체스코 페트라르카, 조반니 보카치오 등 르네상스를 이끈 천재들을 배출하거나 그들에게 활동 무대를 제공해 준 곳도 피렌체였다. ‘신곡’을 쓴 단테도, 현대 정치학의 시조로 평가받는 ‘군주론’의 저자 마키아벨리도 이곳에서 활동했다.

르네상스 당시 피렌체 인구를 8만~9만 명 정도로 추산할 때 실로 경이로운 현상이 아닐 수 없다. 이 모든 것은 메디치, 바르디, 페루치 등 주요 가문들이 든든한 물적 토대가 되어주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중에서도 정점은 르네상스를 전폭적으로 지원하고 후원한 메디치 가문이다.

 

■메디치 가문, 피렌체 르네상스 화려하게 꽃 피운 주역

 

메디치 가문은 제왕이나 군주가 아닌데도 코시모 데 메디치(1389~1464)가 1434년 사실상 피렌체의 실권을 장악한 참주정을 시작한 후부터 1737년 가문의 대가 끊길 때까지 300여 년 간 온갖 부침을 겪으며 피렌체를 사실상 통치한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가문이다.

피렌체 가문의 주요 인물들

 

그 사이 피렌체 밖에서는 레오 10세와 클레멘스 7세 등 3명의 교황을 배출하고 카트린 데 메디치(프랑스어로 카트린 드 메디시스)를 프랑스 국왕 앙리 2세의 왕비로 만드는 등 유럽 여러 나라와 인척 관계를 맺어 가문의 영향력을 확대했다.

메디치 가의 최전성기는 코시모 데 메디치가 집권한 1434년부터 코시모의 손자인 로렌초 데 메디치(1449~1492)가 사망한 1492년까지 60년 간이고 피렌체에서 르네상스의 꽃을 피운 기간은 코시모 1세 메디치(1519~1574)가 사망한 1574년까지 140년 간이다. 좁은 피렌체 시내에서 한 세기에 한 명 태어나기도 어려운 무수한 천재들이 서로 기량을 뽐내며 경쟁을 벌인 것도 그 시기였다.

메디치 가 사람들은 제왕이나 군주가 아닌데도 피렌체의 정치와 경제와 행정은 물론 시민들의 생활에까지 모든 것을 총괄하는 놀라운 정치력을 발휘했다. 메디치 가문이 전성기를 누리던 시기, 이탈리아에는 30개 정도의 도시국가가 있었다. 그중 5대 강국은 로마교황청, 밀라노공국, 베네치아공화국, 나폴리왕국, 피렌체공화국이었다.

 

메디치 가문이 존재감을 확실히 드러낸 것은 1378년 ‘치옴피의 난’ 때

메디치 가문은 원래 약사 집안이었다. 메디치라는 이름 자체가 약사를 의미하는 이탈리아어 메디코에서 유래했다. 가문의 문장도 동그란 알약 모양이다. 메디치 가문은 약국 운영으로 돈이 모이자 직물 교역으로 업종을 확장해 14세기 초 부를 쌓았다.

메디치 가문이 존재감을 확실히 드러낸 것은 1378년 7월 피렌체 하층 노동자들의 폭동인 ‘치옴피의 난’ 때 메디치 가의 살베스트로 메디치가 노동자 편에 서면서였다. 하지만 메디치 가는 1382년 알비치 가문이 정권을 잡아 독재정치를 시작하면서 피렌체에서 추방되었다. 그러나 메디치 가에는 경제적으로 가문의 기반을 탄탄하게 구축한 조반니 디 비치(1360~1429)가 있었다. 당시 피렌체는 영국과 베네룩스3국 등에서 대규모로 모직을 수입해 정제·염색한 후 수출하는 것으로 부를 축적했는데 조반니도 같은 방식으로 재산을 쌓았다.

조반니는 그렇게 모든 자금으로 금융업에 진출, 로마·베네치아·제노바·나폴리 등에 지점을 둘 정도로 피렌체에서 가장 번창한 은행가가 되었다. 교황청의 운영자금 관리도 전담해 막대한 부를 축적했다. 당시는 부유한 상인이라면 피렌체 정치에 의무적으로 참여하는 것이 관례였다.

조반니 디 비치

 

조반니는 1421년 곤팔로니에레(최고행정관) 자리를 수락했으나 정적들의 표적이 될 만한 일은 경계했다. 철저히 자신을 낮추고 겸손하게 처신해 시민의 민심을 얻었다. 조반니는 1429년 숨지기 전 아들 코시모 데 메디치에게 생전에 자신이 지켰던 이런 생활방식을 유언으로 남겼다.

 

▲코시모 데 메디치의 등장, 무력이나 혈통이 아닌 돈이 힘이 되는 시대의 개막

코시모 데 메디치(1389∼1464)는 아버지에게서 막대한 재산과 사업 수완을 물려받으면서 겸손과 예의와 예술을 사랑하는 기질도 함께 물려받았다. 코시모는 부친의 가르침대로 이동할 때 말을 타지 않았고 자선사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마키아벨리는 이런 그를 가리켜 “중후하고 예의바르고 덕망 넘치는 사람”이라고 평했다.

메디치 가의 은행업은 계속 번창했다. 제네바, 리옹, 아비뇽, 런던 등 유럽의 주요 10여 개 도시에도 지점을 설치해 글로벌 금융 네트워크를 구축했다. 코시모는 이를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복식부기를 도입했다. 회계사도 고용해 과학적인 금융업과 기업 경영을 추구했다.

코시모는 이렇게 벌어들인 막대한 부를 배경으로 피렌체가 공화정인데도 사실상 피렌체의 전권을 행사했다. 무력이나 혈통이 아닌 돈이 힘이 되는 시대가 온 것이다. 사실 혈통이 빵빵한 유럽의 왕들은 외형만 근사했지 알고보면 적자에 허덕이는 허세덩어리였다. 용병을 고용해 전쟁 한 번 치루고 나면 빚더미에 올라앉았다.

메디치 은행은 이런 유럽의 왕들이 벌이는 전쟁에 돈을 대주고 이권을 따내 막대한 부를 더욱 축적하고 영향력을 확대했다. 그러자 피렌체의 유력 가문들이 메디치 가를 견제했다. 결국 코시모는 1433년 반역죄로 몰려 감옥에 갇혔다가 피렌체에서 추방당했다.

그러자 피렌체 경제에 비상등이 켜졌다. 결국 추방령을 철회하라는 여론이 높아졌고 그 틈을 타 메디치 가 사람들이 정부 요직을 장악했다. 그 덕에 코시모는 1434년 9월 피렌체로 돌아와 곤팔로니에레(최고행정관)로 추대되었다.

코시모 데 메디치 조각상. 피렌체 우피치 미술관 밖에 있다.

 

코시모가 이상적으로 생각한 정치 체제는 참주정

코시모는 본격적으로 친정을 시작하면서 소수의 사람이나 집단이 권력을 독점적으로 행사하는 과두제가 피렌체 정치에는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가 이상적으로 생각한 정치 체제는, 형식은 공화제이면서도 실질 내용은 참주정이었다.

참주정은 고대 아테네에서 겉으로는 나타나지 않으면서 전권을 휘두르며 독재를 하는 인물을 ‘참주’라고 한 데서 유래한다. 즉 국가를 도덕과 법에 의한 규율이 아니라 자신의 판단대로 통치하는 정치제제를 말한다.

종종 ‘참주’를 ‘전제군주’나 ‘폭군’과 혼용하기도 하는데 기원을 살펴보면 다른 말이다. 물론 한 사람이 절대권력을 행사한다는 점에서는 동일하고 그 권력 행사가 전제적이고 잔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는 유사하다. 그러나 ‘참주’는 ‘폭군’과 다른 한 가지 특징이 있다. 권력을 잡는 과정에서 폭군에게는 필요하지 않은 ‘인민의 지지’가 있다는 점이다.

코시모는 군주의 칭호도 없고 군주처럼 호화로운 생활도 하지 않지만 실질적인 군주였다. 피렌체가 공화정인데도 막대한 부와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참주정을 편 사실상 국가의 통치자였다. 정치 현안들이 그의 저택에서 결정되고 그가 뽑은 사람이 공식적인 직위를 얻었다. 피렌체 사람들은 평화와 전쟁을 결정하고 법을 통제함으로써 사실상 왕의 역할을 하는 그를 ‘무관의 제왕’으로 받아들였다.

코시모는 계급이 아니라 능력 위주로 인재를 등용했다. 다른 유력 가문에 타격을 주려는 의도가 숨어 있긴 하지만 유럽 처음으로 누진세를 도입한 것도 코시모였다. 사업 수완도 탁월해 가문의 재산을 계속 불려나갔다.

그럼에도 코시모의 이름이 오늘날까지 널리 알려진 것은 피렌체를 통치하고 가문의 재산을 불린 데 있지 않고 막대한 자금을 들여 예술과 학문을 부흥·육성했기 때문이다. 코시모는 금융업자이자 정치가였지만 성격은 인문학자에 어울렸다. 그는 어려서 산타 마리아 델리 안젤리 수도원 학교에서 인문학을 공부했다. 라틴어와 고대 그리스어는 물론 히브리어와 아랍어도 배웠다. 이를 바탕으로 신학, 문학, 역사, 철학을 공부했다. 학자와 예술가들과 토론도 즐겼다.

그 시절 그리스 학자들이 피렌체에 대거 모여들면서 고전 철학과 역사, 미술 등에 대한 흥미가 촉발했는데 특히 플라톤 철학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었다. 코시모는 플라톤 연구를 위해 ‘아카데미아 플라토니카’(플라톤 아카데미)를 창설하고 고전학자를 초빙했다. 점차 이탈리아 전역에서 인재들이 모여들었다. 이는 학문연구소의 단순한 창설이 아니라 플라톤이 고대 아테네에 창설한 아카데미아의 부활이자 르네상스의 본격적인 태동이었다.

 

금융업자이자 정치가였지만 성격은 인문학자에 어울려

코시모는 유럽 각국에 사람을 보내 고서와 귀중본 등의 장서도 열심히 수집했다. 당시 고문서는 지혜와 학문의 보고였다. 종교에만 치중했던 중세 시절, 잊고 지냈던 고대인의 과학, 예술, 문화의 결정체가 고문서에 풍부하게 담겨 있었다. 고문서를 구입할 수 없는 곳에는 필경사를 보내 베껴오게 했다.

수집한 고문서에는 고대 로마 최고 시인인 베르길리우스의 초기 작품, 6세기에 편찬된 유스티니아누스 법전, 그리스·로마의 고전 문헌과 성서 관련 문헌 등 희귀본이 망라되었다. 고대 그리스나 히브리어, 아람어 문서는 당시 유럽의 공용어나 마찬가지였던 라틴어로 번역되었다.

번역서들은 유럽에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은 물론 고대 그리스·로마의 역사학, 문학, 과학의 가치를 전 유럽에 새롭게 전파하면서 르네상스의 토대를 마련해주었다. 코시모는 1443년 산 마르코 수도원 내부에 메디치 도서관을 만들어 고문서 장서들을 분류·보관하고 일반에 공개했다. 세계최초 공공도서관의 등장이었다.

산 마르코 수도원 내부

 

메디치 도서관은 곧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중심지로 부상했다. 초대 관장을 지낸 토마소 파렌투첼리는 중에 교황 니콜라오 5세가 되었는데 풍부한 학식 덕분에 ‘인문주의자들의 교황’이라는 칭송을 들었다. 도서관 장서는 코시모 후계자들에 의해서도 계속 늘어나 나중에는 고대 사본이 1만여 점, 파피루스 사본이 2,500여 점에 달했다. 이 도서관은 나중에 로마 바티칸 도서관의 모델이 되었다.

코시모는 미술과 건축에서도 미켈로초(건축가 겸 조각가), 도나텔로(건축가), 안젤리코(화가 겸 수도사), 기베르티(조각가) 등 많은 예술가들을 지원해 르네상스의 걸작들을 탄생시켰다. 그중 코시모가 특히 아낀 예술가는 조각에서 뛰어난 도나텔로(1386~1466)였다. 코시모는 도나텔로가 생계를 걱정하지 않고 창작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각별히 관심 쏟은 분야는 기독교와 성당

조반니와 코시모 부자가 문화와 예술을 지원하면서도 각별히 관심을 쏟은 분야는 기독교와 성당이었다. 코시모는 피렌체와 인근 지역의 성당과 수도원 등의 건축과 복원에 거금을 쏟아부었다. 그 결과 산 마르코 수도원이 복원·증축되고 메디치 가 궁전이 새로 지어졌으며 피렌체 두오모(대성당)의 돔이 완성되었다. 아버지 조반니는 두오모에 청동제 대문을 설치했다.

이처럼 부자가 경쟁적으로 성당에 돈을 쏟아부은 이유 중에는 면죄부를 받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그 무렵 은행업을 포함한 금융업은 사실상 고리대금업이었다. 그런데 당시 고리대금업은 지옥행으로 통하는 직업으로 인식되어 금융업 종사자들은 돈을 벌면서도 늘 꺼림직했다.

당시 교황은 부자들의 그런 불안감을 이용했다. 즉 고리대금업자라도 성당을 위해 돈을 쓰면 지옥행이 면해진다는 이른바 면죄부를 발행한 것이다. 코시모가 피렌체의 산 마르코 수도원을 교황에게 바친 것도 면죄부 때문이었다. 현재 수도원 내 코시모 기도실 입구에 새겨져 있는 “내(코시모)가 교회를 지어 헌납할 경우 지옥행이 면해질 것이라고, 교황 에우제니오 4세가 보장했다”라는 문구가 이런 사실을 설명하고 있다.

코시모는 1464년 8월 1일 세상을 떠났다. 피렌체 의회는 피렌체 공화국의 발전에 기여한 공으로 그에게 조국의 아버지를 뜻하는 ‘국부’라는 칭호를 부여했다.

코시모 사후 그의 역할은 장남인 피에로 데 메디치(1416~1469)에게 맡겨졌다. 그러자 메디치 가가 약해진 틈을 이용해 또다시 유력 가문들이 과두정체의 부활을 기도했다. 피에로는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그들의 기를 꺾어놓았으나 5년 만에 숨을 거뒀다.

 

▲로렌초 데 메디치, 운명과 신으로부터 최대한의 사랑을 받은 사람

로렌초 데 메디치(1449~1492)는 코시모의 손자이자 피에로의 아들이다. 아버지가 일찍 죽어 1469년 20살에 아버지의 권한을 물려받았다. 그리고 머지않아 피렌체와 메디치 가를 최고 정점에 올려놓아 ‘훌륭한’ ‘화려한’이라는 뜻의 ‘일 마니피코’로 칭송받았다.

로렌초 데 메디치

 

메디치 가의 지도자가 바뀌면 늘 그러하듯 다른 유력 가문들이 견제한다. 그 무렵에는 피렌체의 파치 가문이 메디치 가를 눈엣가시로 여겼다. 교황 식스토 4세(재위 1471~1484) 역시 순순히 자신을 따르지 않는 메디치 가를 곱게 보지 않았다. 파치 가문은 교황 식스토 4세와 짜고 1478년 메디치 가문의 수장들을 암살할 계획을 세웠다. 이른바 ‘파치가의 음모’다.

암살범들은 1478년 4월 26일, 로렌초와 줄리아노 형제가 두오모에서 미사에 참석한다는 사실을 알고 그날을 거사일로 정했다. 그들은 먼저 성당 안에서 동생 줄리아노에게 칼을 휘둘렀다. 동생은 20여 군데 칼을 맞고 현장에서 즉사했다. 암살범들은 로렌초도 찔렀으나 로렌초는 약간의 상처만 입은 채 몸을 피했다.

피렌체 시민들은 눈앞에서 벌어진 암살극을 생생하게 지켜보았으나 암살범 뒤에 거물급 배후가 도사리고 있다고 생각해 아무도 암살범 진압을 시도하지 않았다. 암살범들의 쿠데타가 성공할 경우 벌어질 보복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런데 갑자기 로렌초가 피투성이 차림으로 기도실 2층 난간에 나타나 “나는 괜찮다”며 “암살범들을 처단하라”고 외쳤다. 로렌초가 살아있는 것을 확인한 성당 안 시민들은 앞다퉈 암살범 5명을 체포해 성당 밖으로 끌고나갔다. 그러고는 “파치가가 배후”라는 사실을 자백받은 뒤 살해했다. 시민들은 폭도로 돌변했다. 재판 절차도 거치지 않고 관련자들을 복수했다. 공모자라면 그것이 누구든 살해했다.

사흘 동안 피렌체에 광기가 몰아쳤다. 시체는 전부 피렌체 시내를 관통하는 아르노 강에 던져졌다. 파치 가 구성원들은 부녀자를 제외한 전원이 체포되어 사형에 처해졌다. 파치 가를 표시하는 것은 모든 장소에서 제거되었다. 로렌초도 암살 음모 관련자들을 하나둘 제거했다. 당시 현장에 있던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암살범의 처형 장면을 연필 스케치로 남겼다. 화가 보티첼리는 반역자들이 목에 밧줄을 건 죽은 모습을 바르젤로 미술관 벽에 남겼다.

이탈리아 화가 오도아르도 보라니가 그린 파치가의 음모 그림(1865년, 왼쪽). 흥분한 군중이 음모의 주인공 자포코의 시체를 발견한 에피소드를 주제로 그렸다. 사진 오른쪽은 교수형을 당한 암살 공모자의 모습을 1479년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스케치한 그림이다.

 

‘파치 가의 음모’에서 살아남아 절대적인 권위와 파워 과시해

로렌초는 살해된 동생 줄리아노의 이름을 자신의 셋째 아들에게 물려줬다. ‘줄리아노 데 메디치’다. 동생 줄리아노를 오늘날 유명하게 한 것은 비너스, 아그리파와 함께 미술 시간 석고 데생의 가장 유명한 모델 ‘줄리앙’이다. 곱슬머리에 계란형 얼굴의 전형적 조각 미남인 ‘줄리앙’ 석고의 원 조각상인 ‘줄리아노상’은 미켈란젤로가 조각했다. 현재 산 로렌초 성당 내 메디치 예배당에 있다.

미켈란젤로가 제작한 줄리아노 데 메디치 조각상. 산 로렌초 성당 내 메디치 예배당에 있다.

 

로렌초는 줄리아노가 살해되기 며칠 전, 동생의 애인이 낳은 유복자에게 줄리오 데 메디치라는 이름을 지어주고 메디치 가족의 일원으로 받아들였다. 아이는 훗날 교황 클레멘스 7세(재위 1523~1534)가 되어 메디치 가의 영향력을 더욱 확대했다. 그러면 줄리아노를 왜 ‘줄리앙’으로 부르는 걸까. 고전 조각의 석고상을 모사하는 건 19세기 말까지 프랑스 미술 아카데미의 전통적인 교육 방식이었고, 석고 두상 또한 프랑스에서 주로 제작했기 때문에 프랑스어 ‘줄리앙’으로 불린 것이다.

교황 클레멘스 7세

 

‘파치 가의 음모 사건’ 후 메디치 가문의 지배력은 더욱 견고해지고 절대적인 권위와 파워를 과시했다. 문제는 여전히 무소불위의 힘을 갖고 있는 식스토 4세 교황이었다. 피렌체인들이 메디치 가의 묵인 하에 파치 가와 공모자들을 잔인하게 보복하자 교황도 로마에 거주하는 피렌체 은행가와 상인들을 체포하고 메디치 가 재산을 압류했다.

교황은 로렌초를 교황의 법정으로 소환하겠다며 로렌초를 파문했다. 그러면서 로렌초를 추방하지 않으면 피렌체 공화국 전체에 성무금지 처분을 내리겠다고 피렌체 정부에 통고했다. 성무금지 처분은 태어나는 아이는 세례를 받을 수 없고 결혼을 할 수 없으며 죽어가는 사람도 마지막 구원을 받지 못하는 무서운 처벌이다.

피렌체 정부가 교황의 요구를 거부하자 교황은 정말로 피렌체 전체에 성무금지 처분을 내렸다. 그래도 피렌체인은 동요하지 않았다. 베네치아공화국, 밀라노공국, 페라라공국, 만토바후국, 프랑스왕 루이 11세가 피렌체와의 동맹관계를 재확인해준 것도 큰 힘이 되었다.

 

‘훌륭한’ ‘화려한’이라는 뜻의 ‘일 마니피코’로 칭송받아

다만 나폴리왕국만 교황 편에 서서 1479년 여름 교황·나폴리 연합군을 결성해 피렌체 영토로 접근했다. 피렌체는 버텨보려 했으나 경제 상황 악화와 페스트 확산으로 더 이상 어쩔 수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나폴리군이 피렌체 부근까지 다가왔다. 로렌초는 나폴리로 가서 담판을 짓기로 하고 1479년 겨울 나폴리로 가서 협상을 벌였다. 그 결과, 피렌체가 전쟁 배상금을 지불하고 파치 가 사람들을 풀어주는 대신 피렌체와 나폴리는 동맹국이 되었다.

위기에서 벗어난 로렌초가 1480년 3월 피렌체로 돌아오자 시민들이 대대적으로 환영했다. 교황은 로렌초가 나폴리와 평화협정을 맺은 것에 더욱 화가 치밀었다. 그러던 중 1480년 7월 투르크 군대가 남이탈리아에 상륙하더니 나폴리를 거쳐 로마로 진군하겠다고 위협했다. 사태가 긴박하게 돌아가 교황이 로렌초를 응징할 여유가 없어지자 양측의 갈등은 소강상태로 접어들었다.

교황 식스토 4세

 

그런 가운데 1484년 8월 식스토 4세 교황이 죽고 인노첸시오 8세(재위 1484~1492)가 새 교황으로 즉위하면서 로렌초와 교황청 간의 갈등관계는 막을 내렸다. 더구나 로렌초가 자신의 딸을 교황이 즉위하기 전에 얻은 아들과 결혼시킴으로써 새 교황과는 밀월관계로 이어졌다.

로렌초는 안정을 되찾자 할아버지 코시모처럼 학문과 예술을 장려하고 보호하는데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다만 할아버지 코시모의 주요 관심사가 교회였다면 로렌초의 관심은 인간을 위한 문화·예술 활동의 지원이었다. 로렌초는 고대 그리스·로마 시대의 역사·철학·문화에 관심이 많았다. 자신의 대저택 마당에 그리스·로마 시대의 조각상을 그러모아 피렌체의 예술가들에게 실습 재료로 활용하게 했다.

 

피렌체의 르네상스 문화 최고조에 달해

저택 마당은 세계 최초의 사설 예술아카데미였다. 당시 10대였던 미켈란젤로도 이곳에 매일 드나들며 조각 작업을 하다가 로렌초의 눈에 들었다. 덕분에 미켈란젤로는 메디치 궁에 계속 머무는 혜택을 받았다. 레오나르도 다빈치 역시 로렌초의 지원을 받았다. 밀라노공국의 루도비코 스포르차 공작에게 다빈치를 추천한 것도 로렌초였다. 이런 로렌초가 있었기에 피렌체의 르네상스 문화는 최고조에 달했다.

하지만 조부에 비해 사업 수완은 떨어졌다. 또한 아무런 관직이 없는데도 정부 공채 조작, 재판 개입, 공금 착복, 요직 장악, 불량주화 발행, 정략 결혼 등을 거리낌없이 저질러 경쟁 가문으로부터 ‘독재자’라는 비판을 받았다. 반면 동시대 피렌체의 역사가 구이치아르디니는 “만약 피렌체에 독재자가 있어야 한다면 이보다 더 훌륭하고 매력적인 독재자는 없을 것”이라며 두둔했다. 로렌초는 1492년 4월 8일 눈을 감았다. 그의 죽음은 피렌체는 물론 이탈리아 전역을 비탄에 빠뜨렸다.

동시대를 살았던 마키아벨리는 로렌초 사후 집필한 자신의 저서 ‘피렌체사’(1512년) 마지막 부분에서 “로렌초는 운명과 신으로부터 최대한의 사랑을 받은 사람이다. 그가 한 모든 일은 행복한 결과로 끝나고 그의 적은 모두 불행한 종말을 고했다”라고 기록했다. 로렌초의 시신은 산 로렌초 성당 내 지하시설인 메디치 예배당에 안치되었다.

산 로렌초 성당

 

그런데 오늘날 이 메디치 예배당에서는 로렌초보다 미켈란젤로의 조각상이 더 유명하다. 로렌초와 줄리아노를 포함해 미켈란젤로가 14년 동안 조각한 8명의 조각상이 이곳에 있다. 로렌초 성당은 최초의 르네상스식 교회이자 메디치가의 가족 교회로 브루넬레스키가 설계하고 5년간의 공사 끝에 1428년 완성되었다.

산 로렌초 지하에 위치한 메디치 예배당

 

▲메디치 가문의 다른 통치자들

로렌초의 지위를 물려받은 인물은 1492년 당시 20살의 아들 피에로 디 로렌초 데 메디치(1472∼1503)다. 그런데 피에로는 ‘위대한 자’로 불렸던 아버지 로렌초와 달리 ‘불행한 자’로 불렸다. 재임 기간 중 프랑스왕 샤를 8세의 침입을 받아 1494년 11월 메디치 가문이 피렌체 공화국에서 추방되었기 때문이다.

메디치 가문이 떠나고 없는 피렌체는 사실상 도미니크회 수도사 사보나롤라가 통치했다. 사보나롤라는 수년간 피렌체에서 환락과 음란과 사치의 풍조를 몰아내고 회개와 금욕 위주의 신정(神政) 정치를 구축했다. 이 과정에서 비과학적인 이적과 예언을 남발하다가 결국에는 군중의 불신을 자초해 1498년 5월 화형에 처해졌다. 사보나롤라 사후 피에로 소데리니를 수반으로 하는 피렌체 공화정부가 들어섰다. 마키아벨리는 1498년 6월 소데리니 정부에서 외교·안보를 담당하는 서기관에 임명되었다.

메디치 가의 부활은 1512년 8월 메디치 가의 복귀를 요구하는 스페인군의 피렌체 포위 후 이뤄졌다. 소데리니는 메디치 가 지지자들의 사임 압력에 밀려 피렌체를 떠났다. 이로써 메디치 가의 피렌체 복귀는 순조롭게 이뤄졌다. 복귀 당시 로렌초의 세 아들 중 장남인 피에로는 1503년에 죽고 없었고 둘째 조반니 데 메디치는 추기경이었기 때문에 세속 정치에 나설 수 없어 결국 셋째 줄리아노 2세 데 메디치(1479~1516)가 메디치 가문을 대표했다.

이런 가운데 조반니가 1513년 3월 레오 10세 이름의 교황으로 즉위함으로써 메디치 가문의 영향력은 예전으로 되돌아갔다. 그러나 메디치 가의 핵심 멤버들은 단명했다. 줄리아노 2세는 1516년 죽고 장남인 피에로의 아들 로렌초 2세 데 메디치(1492~1519) 역시 그로부터 3년 후 죽었다. 결국 메디치 가의 실세는 1523년 교황으로 즉위한 교황 클레멘스 7세(재위 1523~1534) 뿐이었다. 그는 1478년 ‘파치 가의 음모’로 살해된 줄리아노의 혼전 아들이었다.

그는 사촌인 교황 레오 10세(재위 1513∼1521)의 보좌 업무를 수행하다가 레오 10세의 뒤를 이은 교황 하드리아누스 6세가 취임 1년만인 1523년 사망하자 이전투구, 뇌물투여, 음모 등으로 점철된 콘클라베(추기경단의 선거회의)를 거쳐 1523년 교황으로 즉위했다.

라파엘로가 1519년 그린 교황 레오 10세(가운데), 줄리오 데 메디치(왼쪽)와 루이지 데 로시 추기경. 줄리오는 나중에 교황 클레멘스 7세로 즉위한다.

 

클레멘스 7세는 갖은 술수로 1532년 피렌체의 공화제를 폐지하고 자신의 서자인 알렉산드로 데 메디치(1510~1537)를 피렌체 공화국의 통치자로 임명했다. 알렉산드로는 교황 아버지를 믿고 폭정을 일삼다가 27살인 1537년 암살되었다. 이로써 약 190년간 이어진 메디치 가문의 장자 계열의 후손은 끊어졌다.

 

교황 레오 10세, 메디치 가문의 영향력 되살려

그 사이 메디치 가문은 혼인을 통해 프랑스, 영국, 스페인 왕실과 연결되었다. 각국 왕실로서는 유럽 각지로 금융 네트워크를 운영하며 경제력은 물론 정보력까지 갖춘 메디치 가문의 협력을 노린 정략적인 결혼이었다. 거액의 지참금은 기본이었다. 유럽 왕실과의 혼인으로 유럽 최고 수준의 문화를 자랑하는 피렌체의 문화도 함께 유럽 왕실로 흘러 들어갔다. 그 시초는 로렌초 2세 데 메디치(1492~1519)의 딸인 카테리나 데 메디치(프랑스어로 카트린 드 메디시스, 1519~1589)다.

카테리나 데 메디치(프랑스어로 카트린 드 메디시스)

 

카테리나는 일찍 부모가 죽어 고아로 자랐으나 이탈리아 르네상스를 흠모한 프랑수아 1세(재위 1515~1547)가 자신의 아들인 앙리와 결혼시켜 앙리 2세(재위 1547~1559)의 왕비가 되었다. 카트린으로 불리게 된 그녀의 후손들은 유럽 역사의 주역이 되었다. 아들인 프랑수아 2세(재위 1559~1560), 샤를 9세(재위 1560~1574), 앙리 3세(재위 1574~1589)는 프랑스 국왕을 지냈다. 카트린의 딸 엘리자베트는 합스부르크 왕가 출신이면서 스페인 최전성기의 국왕인 펠리페 2세(재위 1556~1598)와 혼인해 이사벨 데 발로이스라는 이름의 왕비가 되었다.

프랑스의 프랑수아 1세는 이탈리아 르네상스를 진정으로 사랑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에게 거처할 곳과 연금을 주어 프랑스 앙부아즈 교외에 살도록 한 것도 프랑수아 1세였다. 레오나르도는 그의 보살핌을 받다가 프랑스에서 눈을 감았다. 프랑수아 1세는 미술중개상을 고용해 이탈리아에서 미켈란젤로, 티치아노, 라파엘로 같은 르네상스 거장의 걸작도 프랑스로 옮겨왔다. 오늘날 루브르를 장식하고 있는 숱한 이탈리아 걸작은 그의 치세에 프랑스로 옮겨졌다. 프랑수아 1세는 문화국가 프랑스의 초석을 다진 군주로 프랑스인의 사랑과 존경을 받고 있다.

프랑스는 문화예술뿐 아니라 음식문화도 함께 들여왔다. 음식을 포크로 먹고 접시에 담아 코스로 줄기는 풍습은 당시 카트린이 시집가면서 프랑스로 처음 전해진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신대륙에서 유럽으로 전해졌던 칠면조와 토마토도 카트린이 프랑스로 시집가는 것을 계기로 메디치 가문을 통해 비로소 프랑스에 소개되었다.

프랑수아 1세

 

300년 만에 문을 닫고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 지배로 들어가

장자 계열의 후손이 끊어진 후 피렌체의 통치권은 가문의 핵심에서 먼 코시모 1세 데 메디치(1519~1574)에게 1537년 넘어갔다. 코시모 1세는 스페인 출신의 나폴리 총독의 딸과 정략결혼했다. 막대한 결혼 지참금을 가져온 부인을 위해 1549년 아르노 강 남쪽의 피티 궁전을 매입한 뒤 웅장한 왕실 건물로 재건축해 입주했다. 장남 프란체스코 1세 데 메디치(1541~1587)에게는 자신이 거처로 사용하던 베키오 궁전을 물려주었다.

코시모 1세는 장남인 프란체스코 1세가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딸과 결혼해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와 사돈을 맺게 되자 마치 자신이 황제나 된 것처럼 거들먹거렸다. 피렌체를 강압적으로 통치하고 과중한 세금을 거둬들여 피렌체 경제를 거의 파탄지경으로 몰고 갔다. 다만 예술과 과학은 선조들처럼 열심히 후원했다. 코시모 1세는 1569년 피렌체 공화국을 토스카나 공국으로 만들고 자신은 토스카나의 대공으로 즉위했으나 5년 후인 1574년 사망했다.

코시모 1세 데 메디치

 

이후 페르디난도 1세, 코시모 2세, 페르디난도 2세로 통치자가 이어지던 메디치 가문이 결정적으로 추락한 것은 코시모 3세(1642~1723) 때였다.

그는 무절제한 주색잡기에 빠지고 세금을 가혹하게 거둬들여 피렌체 시민들과 유리된 삶을 살았다. 그러다가 코시모 3세를 이은 잔 가스토네가 1737년 죽음으로써 3명의 교황과 2명의 프랑스 왕비를 배출한 이 위대한 가문은 300년 만에 문을 닫고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의 지배로 들어갔다.

다행히 메디치 가의 방대한 컬렉션은 잔 가스토네의 누나 안나 마리아 루이사 데 메디치(1667~1743)가 상속하면서 뿔뿔이 흩어지지 않고 한 곳에 모일 수 있었다. 안나가 이들 컬렉션을 피렌체에서 반출하지 않는다는 조건 하에 정부에 기증했기 때문이다. 이 메디치 가 컬렉션을 볼 수 있는 게 우피치 미술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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