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박스

바우하우스(Bauhaus) 100년… 예술·디자인·건축에서 새로운 삶의 방식 제안한 정신혁명이었다

↑  데사우 시절의 바우하우스 교사(校舍). 1925~1926년 지어졌다.

 

by 김지지

 

바우하우스 탄생 100주년을 맞아 독일은 지금 ‘바우하우스 축제 중’이다. 600여 개의 기념 행사가 쏟아지고 있다. 바우하우스의 정신과 성취를 알아본다.

 

“기계화는 거부할 수 없는 대세이다. 기계 제품에 인간의 영혼을 불어넣어야 한다”

미술과 공예와 건축을 종합한 독일의 바우하우스(1919~1933) 학교는 현대 산업디자인과 모더니즘 건축의 산실이다. 이 바우하우스 설립의 직접적인 연원을 좇다 보면 독일 근대 디자인 운동의 선구자 헤르만 무테지우스(1861~1927)와 맞딱뜨린다. 그가 활약한 20세기 초, 독일은 영국과 함께 유럽에서 가장 강대한 산업국가였다. 그러나 예술적 독창성과 상업적 활용면에서는 영국에 뒤졌다. 독일은 질시 어린 눈으로 영국을 주시하다가 1896년 건축가이자 공무원인 무테지우스를 주영 독일대사관의 문화 담당관으로 런던에 파견했다. 무테지우스는 대사관 직원(1896~1903)으로 근무하면서 영국의 합리적인 주택 건축과 참신한 공예품 생산에 관심을 기울였다. 그 결과물이 영국의 미술공예운동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영국의 주택’(1904년)이라는 3권짜리 책이었다.

헤르만 무테지우스(왼쪽)와 그가 영국의 미술공예운동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저서 ‘영국의 주택’(1904년)

 

무테지우스는 영국의 공예와 건축물에서 받은 감명을 독일에서 미술공예학교를 진흥하는 것으로 구체화했다. 그의 주도로 건축가·디자이너·기술자·공예가·기업인들이 규합된 ‘독일공작연맹’이 1907년 가을 뮌헨에서 발족했다. 미술과 공예와 공업을 결합해 더욱 향상된 제품을 생산함으로써 다른 국가들과의 산업 경쟁에서 우위를 차지하자는 게 설립의 목적이었다. 그는 수공예를 전통 장식의 모방에만 의존하는 구습으로 치부하며 산업화 시대에 맞는 새로운 공예의 기준으로 규격화(표준화)를 역설했다. 그러면서 산업화 시대의 규격화는 생산 증대뿐만 아니라 예술적 질도 담보해야함을 강조했다. 이후 디자인은 전통 공예에서 산업 예술로 급격한 변화를 겪었다.

 

초대 교장 그로피우스는 바우하우스라는 교향악단을 세계 최고로 키운 위대한 지휘자

변화를 주도한 사람은 독일공작연맹에 창립 회원으로 참여한 건축가 겸 디자이너 페터 베렌스(1868~1940)였다. 그는 1903년 뒤셀도르프 지역의 미술공예학교 교장으로 임명되었을 때부터 전통 공예와 기계 생산을 조합하는 방향으로 교과과정을 재구성했다.

페터 베렌스

 

1907년부터는 독일 최대 가전 회사인 ‘아에게(AEG)’의 디자인 고문으로 활동했다. 베렌스는 상품 디자인, 인쇄물, 건물 등에서 독창적인 디자인을 제시하고 기업 로고, 광고, 전구, 건물 등 회사 내에서 이뤄지는 모든 심미적 결정을 감독했다. 사실상 세계 최초의 브랜드 컨설턴트였다. 베렌스가 설계한 AEG 터빈 공장은 현대적인 건축의 전형으로 극찬을 받았다. 당시 베렌스의 건축사무소에는 훗날 세계적인 건축가로 이름을 날리게 될 르 코르뷔지에, 발터 그로피우스, 미스 반 데어 로에 등이 포진했다.

페터 베렌스가 설계한 AEG(아에게) 터빈 공장. 현대적인 건축의 전형으로 극찬을 받았다.

 

이중 발터 그로피우스(1883~1969)에게 주어진 운명은 10여 년 후 건축·디자인 전문학교 바우하우스를 설립하고 뿌리내리게 하는 것이었다. 그로피우스는 독일 베를린에서 건축가의 아들로 태어나 뮌헨 공과대(1903~1907)에서 건축을 전공했다. 졸업 후 독일공작연맹에 가입·활동하고 베렌스 설계사무소에서 근무(1907~1910)했다. 그때의 경험은 “기계화는 거부할 수 없는 대세이고 기계 제품에 인간의 영혼을 불어넣기 위해서는 미술가의 개입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생각으로 이어졌다.

발터 그로피우스

 

예술과 기술 통합하고 실현의 장으로 미술과 산업 연결하는 바우하우스 구상

기능과 실용을 중시한 그로피우스의 미의식은 1911년 그가 처음 의뢰받아 설계한 라인강변 알펠트에 있는 파구스 제화공장에서 그대로 나타났다. 전체 10개 동으로 지어진 이 공장 단지는 근대건축과 산업디자인의 발전을 보여주는 기념비적 건물로 인정받아 2011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그로피우스가 설계한 파구스 제화공장

 

그로피우스는 건축 실력을 인정받아 1915년 작센대공국이 문화도시 바이마르에 설립한 조형예술학교와 공예학교 교장에 발탁되었다. 그는 산학을 연계한 혁신적인 학교 체제를 시도했으나 기존의 아카데미 교육 방식에 젖어 있는 교수들과, 수공업을 고집하는 장인연맹의 반대에 부닥쳐 실패했다. 그러던중 1918년 11월 독일제국이 공화국으로 바뀌고 사회민주당 정권이 들어서자 급진적 예술가 단체인 ‘그룹 11월’과 ‘예술을 위한 노동회의’ 등에 가입·활동했다. 전쟁으로 초토화된 조국의 새출발을 돕기 위해서도 팔을 걷어붙였다. 이런 그에게 바이마르시가 젊은 세대에게 실용적이고 지적인 기술을 가르쳐달라고 도움을 요청했다.

그로피우스는 1919년 4월 1일 조형예술학교와 공예학교를 통합한 ‘바이마르 국립 바우하우스’의 문을 열고 초대 교장으로 부임했다. ‘바우하우스(Bauhaus)’는 독일어로 ‘건물(haus)을 짓는다(bau)’는 뜻의 ‘하우스바우(Hausbau)’를 도치한 이름이다. 그로피우스는 바우하우스 창립 선언문에서 “이제 미술가와 공예가 사이에 가로놓인 높다란 장벽을 없애고 새로운 공예가 집단을 만들자. 건축과 조각과 회화를 하나의 통일 속에 포용하고… 새로운 미래의 건축을 창조하자”고 역설했다. 예술과 기술을 통합하고 그 실현의 장으로 미술과 산업을 연결하는 바우하우스를 구상한 것이다. 그로피우스는 미술과 공예가 건축으로 귀결되는 것을 목표로 했으나 바우하우스 건축학과는 1927년 설치되었다.

1919년 바우하우스 개교 당시 본관. 앙리 반 데 벨데가 설계하고 건축했다. 개교 전에는 바이마르 미술학교 교사로 사용되었다. 현재는 바이마르 바우하우스 대학의 본관이다.

 

옛 건축 교육 대신 20세기 산업사회에 부응하는 새로운 전인 교육 제시

바우하우스가 등장하기 전까지 유럽의 건축을 지배한 것은 화가·판화가·조각가·건축가의 고등교육을 목적으로 설립된 프랑스 국립미술학교 에콜 데 보자르였다. 보자르식 건물에서, 강철 지주(支柱)는 무거운 석재 뒤에 숨겨져 마치 석재가 건물의 중량을 지탱하는 것처럼 보였고 콘크리트 외장은 화려한 장식 속에 감춰졌다. 건물 거의 모두가 로마 궁전이나 고딕식 대성당 같은 아름답고 웅장한 것들과 어딘지 닮아 있었다. 그로피우스는 이러한 건축을 ‘현대의 후퇴’로 생각하고 옛 건축 교육 대신 20세기 산업사회에 부응하는 새로운 전인 교육을 제시했다.

바우하우스에는 학교라면 당연히 있어야 할 교수(선생)와 학생이라는 전통적인 구분이 존재하지 않았다. 교수와 학생 간의 일방적인 위계와 차별도 없앴다. 가르치는 사람은 중세의 길드 전통에 따라 장인으로 불리고 배우는 사람은 수준에 따라 직인이나 도제로 불렸다. 바우하우스는 천재의 감각에 의존하는 예술적 감각과, 숙련을 필요로 하는 장인의 기술을 통합하는 데 진력했다. 통합의 이유는 낮은 신분으로 인식되고 있는 직공과 고귀한 예술가의 구분을 없애는 데 있었다.

학생들은 6개월간 형태와 색채에 대한 기본 원리를 배우는 예비 과정을 마친 뒤 합격 판정을 받으면 도제로 등록되어 자신이 선택한 공예나 기술 분야에서 3년간 엄격한 훈련을 쌓았다. 그로피우스는 예술적·장인적·공업적 기술을 종합하기 위해 라이오넬 파이닝어, 파울 클레, 바실리 칸딘스키, 하네스 마이어, 미스 반 데어 로에 등 당대의 쟁쟁한 화가·건축가들을 바우하우스로 초빙했다.

 

1925년 바이마르에서 탄광 도시 데사우에 둥지 틀어

바우하우스에 새로운 변화가 시도된 것은 1923년이었다. 그해 교수로 합류한 헝가리 태생의 예술가 라슬로 모호이너지의 제안에 따라 바우하우스의 교육 방향을 중세주의와 낭만주의적 공예 중심에서 산업디자인 중심으로 방향을 틀었기 때문이다. 1923년 8월 바우하우스의 첫 전시는 이러한 전환을 입증하는 자리였다.

라슬로 모호이너지

 

하지만 바이마르 시민들은 바우하우스의 작품을 이해하지 못했고 학생들의 자유분방한 행동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더욱이 바이마르 지역 의회는 바우하우스의 혁신적 실험을 달가워하지 않았으며 지역 공예가들은 산업체들과 긴밀한 협력을 주장하는 바우하우스에 적대적인 입장을 취했다. 여기에 바우하우스가 공산당이나 유대인과 관련이 있다는 비방까지 난무했다. 결국 1924년 그로피우스에게 사임 압력이 가해지고 바우하우스의 재정 지원까지 삭감되면서 학교가 폐교될 위기에 처했다. 다행히 바우하우스의 명성을 익히 알고 있는 데사우, 프랑크푸르트, 뮌헨 등 여러 도시가 괜찮은 유치 조건을 제시해 그 가운데 1925년 사회민주당이 집권하고 있는 탄광 도시 데사우에 둥지를 틀었다.

데사우는 급격한 인구 증가에 따른 주택 문제를 해결해주기를 기대했다. 그로피우스는 건축의 산업화를 데사우에 실현하는 것으로 기대에 부응했다. 1926년 10월 완공된 바우하우스 교사(校舍)는 이러한 활동의 출발점이었다. 교사는 강의실, 공방, 극장, 식당, 체육관, 스튜디오, 사무실, 기숙사를 서로 연결하고 옥상에는 정원이 있는 복합 건물로 꾸며졌다. 특히 그동안 유럽과 독일에서 일반적으로 지어진 뾰족한 지붕의 전통적인 건물들과는 달리 비대칭적인 평면 구성, 평평한 지붕, 흰색으로 칠한 벽, 길 쪽으로 나 있는 수평적인 창문 등으로 설계해 당시의 건축 문화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교수들의 사택으로 지어진 4채의 ‘마이스터 하우스’ 역시 현대 기능주의 건축의 획기적인 건물로 평가받았다. 바우하우스 교사와 마스터스 하우스는 1996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마이스터 하우스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낯익은 물건 가운데 바우하우스 디자인 꽤 많아

바우하우스의 유산은 건물로 한정되지 않았다.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낯익은 물건 가운데 바우하우스에서 디자인한 것이 꽤 많기 때문이다. 벽을 따라 위아래에 찬장을 붙여놓은 싱크대, 쇠파이프로 만들어진 의자 등의 가구, 이동식 벽, 조립식 건축 자재, 소리를 흡수하는 천 등이 그것이다. 바우하우스의 작업장에서 생산된 가장 성공적인 작품은 1924년 첫 선을 보인 ‘바겐펠트 램프’ 디자인으로, 산업사회의 유리와 금속을 거실로 들여와 호평을 받았다. 장식없는 단순함과 튼튼함과 재료의 실용성을 인정받아 1920년대 후반과 1930년대에 대량 제조되어 유행했다. 이는 바우하우스의 실험적 디자인이 성숙 단계에 이르렀음을 알리는 신호였다. 가장 잘 알려진 바우하우스 제품은 마르셀 브로이어가 디자인한 ‘바실리 의자’와 ‘캔틸레버 의자’다. 특히 ‘바실리 체어’는 안락의자의 혁신을 가져왔다. 자전거의 철제 프레임에서 영감을 얻어 의자에 최초로 강철 파이프를 썼다.

 

왼쪽부터 바겐펠트 램프, 바실리 의자, 캔틸레버 의자

 

그로피우스는 1928년 2월 “할 일은 다했으니 앞으로 건축에 전념하겠다”며 교장에서 물러났다. 하네스 마이어가 후임 교장으로 부임했으나 공산주의 이념을 가르치는 것을 부담스럽게 생각한 시 당국에 의해 1930년 여름 해임되었다. 뒤를 이어 부임한 3대 교장은 기능주의 옹호자인 미스 반 데어 로에였다. 그는 마이어의 정치 성향이 남긴 흔적을 지워나갔으나 1932년 데사우의 시정을 장악한 나치가 “볼셰비즘과 퇴폐주의를 만연시킨다”며 바우하우스를 폐쇄하는 바람에 바우하우스는 다시 베를린으로 세 번째 이사했다. 하지만 베를린 바우하우스 역시 나치 정권의 탄압과 게슈타포의 감시로 인해 1933년 4월 자진 폐교했다. 14년 동안 33명의 교수와 1,250명의 학생이 배출되었다.

학교 폐쇄는 교수와 학생들을 영국, 프랑스, 미국 등 세계 도처로 분산시켜 오히려 국제적인 영향력을 발휘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로피우스는 영국을 거쳐 1937년 하버드대 건축학과로 자리를 옮겨 바우하우스의 정신을 미국에 이식했다. 미스 반 데어 로에는 미국 일리노이 공과대에서 건축과 교수로 활동하며 많은 건축가를 배출했고 라슬로 모호이너지는 시카고에서 ‘뉴바우하우스’ 운동을 전개했다.

바우하우스 출신 교수와 학생들이 전파한 바우하우스 철학은 전 세계 건축 동향에 영향을 미쳤다. 이스라엘의 텔아비브에도 1933년부터 바우하우스 형식의 건물이 4,000여 채나 건립되었다. 이 건물들은 2003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선정되었다. 바우하우스는 현대사회의 시각 환경을 바꿔놓고 현대건축의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로피우스는 건축가라기보다는 지도자로 바우하우스라는 교향악단을 세계 최고로 키운 위대한 지휘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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