뱅기타고 세계로

[이탈리아, 이 정도는 알고 떠나자⑩] 베네치아(2) : 티치아노, 조르조네, 틴토레토, 매너리즘 양식, 프레스코와 유화

↑ 조르조네의 ‘폭풍우’(82×73㎝, 1508년). 그림에서 주목할 것은 번개가 치는 언덕을 따라 있는 도시의 풍경이 그림 속 인물만큼이나 중요한 요소라는 것이다. 당시까지만 해도 풍경이나 자연은 중심인물을 위한 배경으로만 존재할 뿐 별다른 의미를 지니지 못했다.

 

by 김지지

 

■티치아노, 최초의 국제적 화가이자 회화의 군주

베첼리오 티치아노(1488~1576)는 서양 회화의 기본 매체가 되는 ‘캔버스에 유화’ 기법을 개척한 공로를 인정받아 ‘회화의 군주’로 불린다. 베네치아 미술을 빛내고 르네상스 미술에서 확고한 위치를 차지했다. 무엇보다 베네치아에 뿌리를 두면서도 활동 범위가 나라 밖에까지 뻗쳤던 최초의 국제적 화가였다. 덕분에 그는 생전에 부와 명예를 누린 서양 회화사 최초 화가로 기록되고 있다.

티치아노 자화상

 

티치아노는 베네치아 북쪽에서 멀지않은 피에베 디 카도레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그림에 재능이 있어 베네치아의 모자이크 작업실에서 도제로 일했다. 그러다가 베네치아 회화가 하나의 화파를 이루는 데 크게 기여한 조반니·젠틸레 벨리니 형제에게 사사했다. 1511년 독립적인 첫 번째 큰 작업을 했는데 파도바의 스쿠올라 델 산토에 그린 내부 벽화다. 벽화는 가벼운 채색, 생생한 색감의 특징을 보이는 색채 위주의 표현으로 앞으로의 티치아노의 미술 세계를 예고했다.

1514년쯤 베네치아에 자신의 공방을 열어 활동을 시작했으나 후원자가 없어 직접 공방을 찾아오는 고객을 상대로 주문을 받았다. 티치아노 최초의 야심작이자 자신의 이름을 도시 안팎에 널리 알려 티치아노 시대의 개막을 알린 그림은 30살 무렵에 그린 베네치아 최대 제단화 ‘성모 승천’(360×690㎝, 1518년)이다. 베네치아에서 산 마르코 대성당 다음으로 큰 고딕성당인 프라리 성당 즉 ‘산타 마리아 글로리오사 데이 프라리 성당’에 보관되어 있다.

‘성모 승천’은 화면 중앙에 붉은색 옷을 입은 성모 마리아가 천사들에게 둘러싸여 승천하는 장면으로 황금빛과 붉은빛의 화려한 색채로 천상의 아름다움을 표현했다. 또한 성모의 승천 장면을 관람객이 아래쪽에서 올려다보도록 그려 성모가 하늘로 오르는 모습을 더욱 생동감 넘치게 표현했다. 이후 많은 작품을 그렸는데 지금까지 남아 있는 게 300여 점이나 된다. 종교화, 역사화, 알레고리화, 초상화, 여성 누드화 등 주제와 형식도 다양하다. 이중 발군은 초상화다.

티치아노의 ‘성모 승천’(360×690㎝, 1516~1518년)

 

티치아노의 ‘성모 승천’은 산타 마리아 글로리오사 데이 프라리 성당의 제단화로 그려졌다.
생전에 부와 명예를 누린 서양 회화사 최초 화가 

그의 초상화는 매력적인 생동감 때문에 항상 인기가 많았다. 실제 인물과도 비슷해 그 인물의 인생까지 느끼게 한다는 평을 들었다. 그러다보니 당대 권력자 치고 티치아노 앞에 앉아 초상화 포즈를 취하지 않은 사람이 없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선금을 주고도 1~2년을 기다리는 것이 다반사였다고 하니 예술가가 일찍이 이렇게 대우를 받은 적이 없었다. 각국의 왕과 군주와 제후들 그리고 교황에게도 그의 그림은 인기가 높았다.

특히 티치아노를 총애한 군주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이자 스페인의 왕이었던 카를 5세였다. 카를 5세는 1532년 티치아노를 자신의 전속 초상화가로 임명하고 기사 작위를 수여했다. 티치아노가 카를 5세를 모델로 그린 ‘카를 5세 기마상’(332×279㎝, 1548년)은 이후 화가들에게 기마 초상화의 기준이 되었다.

티치아노의 ‘카를 5세 기마상’(332×279㎝, 1548년)

 

카를 5세는 예술 마니아답게 유럽 각지의 내로라하는 예술가들을 스페인으로 불러들였다. 그 결과 예술의 불모지나 다름없던 스페인을 새로운 예술의 중심지로 만들어 훗날 스페인이 관광대국이 되는데 큰 역할을 했다.

1556년 스스로 물러난 카를 5세의 뒤를 이어 스페인의 왕이 된 아들 펠리페 2세도 티치아노를 후원했다. 티치아노가 이렇게 스페인 왕실과 맺은 인연은 죽는 날까지 40년 넘게 이어졌다. 티치아노는 프랑스 황제 프랑수아 1세, 교황 바오로 3세, 베네치아의 총독 등 여러 귀족과 군주들의 화가로도 활약했는데 예술가가 일찍이 이렇게 대우를 받은 적이 없었다.

 

관능적인 여성 누드화도 개척

티치아노는 베네치아의 외향적 문화를 그림으로 완벽하게 묘사했다. 이 때문에 16세기 베네치아의 역사를 말해주는 문헌이 모조리 사라져도 그의 초상화와 제단화를 보면 이 도시의 일상생활을 쉽게 재구성할 수 있다는 말까지 회자된다.

티치아노가 개척한 중요한 영역 중에는 관능적인 여성 누드화도 있다. 대표적인 그림이 현재 피렌체의 우피치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 ‘우르비노의 비너스’(165×119㎝, 1538년)다. 그림을 보면 아름다운 여인이 누드로 누워 있다. 귀족풍의 실내와 우아한 비너스의 자태가 르네상스 규방 미학의 정점을 보여주지만 조르조네의 ‘잠자는 비너스’(1510년)와 비슷해 새롭지는 않다. 차이가 있다면 나체 여인이 누워있는 장소가 목가적인 자연 풍경에서 화려한 저택 실내로 바뀌고, 잠자는 여인이 침대에 기대어 깨어있는 모습으로 바뀐 정도이다.

티치아노의 ‘우르비노의 비너스’(165×119㎝, 1538년). 이그림이 회화사에서 중요한 것은 고개를 살며시 돌리고 있는 전통적인 비너스 표현과 달리 비너스가 감상자를 똑바로 응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이 그림에는 중요한 의미가 있다. 고개를 살며시 돌리고 있는 전통적인 비너스 표현과 달리 비너스가 감상자를 똑바로 응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렇게 감상자의 시선을 자신에게 유도하는 여성의 표현은 이후 서양 미술에서 여성 누드 와상을 그리는 전형적인 방식으로 자리잡았다. 프란시스코 데 고야의 ‘벌거벗은 마하’(190×97㎝, 1803년), 에두아르 마네의 ‘올랭피아’(130×190㎝, 1863년)가 대표적 예다. 사랑스러우며 성적인 욕망을 드러내는 여인의 시선은 이후 무수한 관람자를 유혹해왔다. 티치아노는 1576년 8월 26일 숨져 베네치아 프라리 성당에 묻혔다.

 

■조르조네, 구도적 공간보다 색채의 꾸밈 중시한 베네치아 화파 창시자

베네치아 아카데미아 미술관에는 생전에 몇 점의 작품만을 남기고 33세에 요절한 조르조네(1477~1510)의 ‘폭풍우’(82×73㎝, 1508년)도 있다. 현재 독자가 읽고 있는 이 글의 표지로 올린 ‘폭풍우’는 아카데미아 미술관의 대표작으로 자연스럽고 표현력이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림에서 주목할 것은 번개가 치는 언덕을 따라 있는 도시의 풍경이 그림 속 인물만큼이나 중요한 요소라는 것이다. 당시까지만 해도 풍경이나 자연은 중심인물을 위한 배경으로만 존재할 뿐 별다른 의미를 지니지 못했다.

그러나 조르조네는 풍경과 자연을 독자적인 그림의 주체로 삼아 작품 분위기를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로 등장시켰다. 전례없는 이 기법은 풍경화가 당당하게 회화의 주인공 자리를 꿰차는 회화사의 한 분기점으로 자리잡는데 결정적으로 영향을 미쳤다. 조르조네는 종교화나 고전적인 주제의 작품에도 목가적인 풍경을 자주 사용했다. 여기에 빛과 색채를 이용해 작품에 분위기와 감정을 입혀 시적인 아름다움이 느껴지도록 했다. 이른바 ‘조르조네스크 기법’이다.

조르조네는 르네상스가 선호하는 짜임새 있는 구도적 공간보다 시각적인 조절에 의한 색채의 꾸밈을 통해 미묘한 분위기를 조성했다. 조르조네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처럼 형상의 윤곽이 날카롭게 보이지 않도록 가장자리를 부드럽게 하거나 번지게 하는 ‘스푸마토 기법’도 사용했다.

조르조네 자화상

 

조르조네는 여성 누드에 대한 기존의 인식도 바꿨다는 평을 듣고 있다. 고대 이래 미술에서 주로 다뤄진 누드는 젊고 아름다운 아폴로나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처럼 신의 완벽함을 드러내는 남성이었다. 하지만 조르조네는 눈을 감기 몇 달 전, 누워있는 여체를 그린 ‘잠자는 비너스’(108×175㎝, 1510년)를 완성함으로써 여성 누드의 새 장을 열었다. 이 그림은 현재 독일 드레스덴의 ‘옛 거장 회화갤러리(Gemaldegalerie Alte Meister)’에 있어 흔히 ‘드레스덴의 비너스’로 불리기도 한다.

‘잠자는 비너스’는 한 여인이 붉은 천에 기대어 잠든 모습을 그리고 있다. 그녀는 오른팔로 베개를 하고, 왼손은 아랫배 사타구니에 놓은 채 한창 잠에 빠져 있다. 잠든 그녀 뒤쪽으로 들과 산이 넓게 펼쳐져 있다. 가까운 언덕은 짙은 초록빛을 띠지만, 멀어질수록 초록색 농도는 조금씩 옅어진다. 그림 오른편에는 더 높은 언덕에 서너 채 집들이 놓여 있고, 멀리에는 들과 산과 또 다른 집들이 보인다.

여성이 벗은 몸으로 묘사되는 경우는 그 당시까지의 서구 회화사를 통틀어 없었던 일이었다. 적어도 이런 자세와 구도 속에서 이 정도 크기로 그린 것은 1500년 무렵까지 매우 혁신적인 일이었다. 벌거벗은 여인을 야외 풍경의 한가운데 놓은 경우는 더더욱 그러했다. 비스듬히 누워 수줍은 듯 가슴을 드러낸 이 새로운 형태의 누드화는 여체가 더 이상 ‘불편한 느낌’이 아니라는 사실을 새롭게 알려주었다. 그 무렵 풍경이 묘사될 경우 그것은 화면의 중심을 차지하지 못했다. 풍경은 언제나 그림의 여러 요소 가운데 하나의 요소, 하나의 첨가물에 불과했다. 그러나 조르조네는 풍경을 그림의 포괄적 바탕이자 근거로 삼았다.

400~500년 전에 그려진 그림들이 대개 그러하듯이, ‘잠자는 비너스’도 수백 년 시간이 지나가는 동안 여러 수집가를 거쳤고, 그렇게 주인을 달리하는 사이 상당한 마모와 훼손에 시달렸다. 오래된 그림이 흔히 그러하듯이 ‘잠자는 비너스’의 원작자가 누구인지 오랫동안 논란거리였다. 조르조네가 그리기 시작했지만 완성하지 못한 채, 그는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그 후 제자 티치아노가 하늘과 풍경을 마무리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조르조네의 ‘잠자는 비너스’(108×175㎝, 1510년)

 

단명한 탓에 남아있는 작품 얼마 되지 않아

조르조네는 베네치아에서 서북쪽으로 조금 떨어진 베네토주 카스텔프랑코에서 태어났다. 미술사에는 그에 대한 기록이 거의 없어 삶의 전모를 알 수는 없지만 16세기의 전기작가 조르조 바사리는 그를 화가이자 탁월한 가수, 류트 연주자로 기록하고 있다. 바사리는 “조르조네는 온화한 성격의 미남이었고 머리를 멋있게 길렀다”고도 했다.

조르조네는 일찍이 고향을 떠나 베네치아의 조반니 벨리니 공방에서 체계적으로 그림을 배웠다. 개인 화실을 연 후에는 다양한 실험적인 그림들로 동시대 베네치아 화가들을 압도하는 명성을 얻었으나 1510년 베네치아를 휩쓴 흑사병으로 33세의 젊은 나이로 일찍 생을 마감함으로써 그의 재능을 아는 주변 사람들을 안타깝게 했다.

그가 이룬 성과는 조반니 벨리니 공방에서 함께 견습생활을 한 베첼리오 티치아노(1488~1576), 세바스티아노 델 피옴보(1485~1547)로 계승되면서 색채와 빛으로 당대 미술에 혁신을 가져온 베네치아 화파 탄생에 절대적으로 기여했다. 그를 베네치아 화파의 창시자로 부르는 이유다. 다만 단명한 탓에 남아있는 작품은 얼마 되지 않는다. 주요 작품으로는 ‘카스텔프랑코의 성모’(1504년), ‘전원의 합주’(1509년) 등이 있다.

 

■틴토레토, 르네상스 마무리 역할 맡은 매너리즘의 대가

틴토레토(1519~1594)는 베네치아에서 염색장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본명은 따로 있지만 평생 ‘작은 염색장인’이라는 뜻의 틴토레토로 불렸다. 그는 어려서 당시 베네치아 화파를 이끌던 티치아노(1488~1576) 공방에서 그림을 배웠으나 반항아적 성격으로 스승의 내침을 받아 공방 생활은 오래 가지 못했다.

틴토레토 자화상

 

틴토레토의 출중한 재능 때문에 자신의 명성에 그림자가 드리워질 것을 우려한 스승(티치아노)이 제자를 내친 것이라는 주장도 있지만 동시대 화가들과 평론가들이 “틴토레토는 지나치게 성급하고 참을성이 없으며 폭풍처럼 난폭하다”고 기록해 반항아적 성격을 뒷받침 하고 있다. 특히 동시대 화가 겸 전기작가인 조르조 바사리는 “앞뒤를 헤아릴 줄 모르는 무모한 자” “회화가 과도하고 절제하지 않는 무작위적 주관에 의한 환상에 사로잡혀있다”라고 평했다. 틴토레토에 대한 부정적 평가는 틴토레토 사후에도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이유가 무엇이든 스승의 공방을 떠나게 된 틴토레토는 미켈란젤로의 드로잉과 티치아노의 색채를 미적 목표로 삼고 사실상 독학으로 그림을 공부했다. 20대 초반에 화실을 열었으나 후원자나 그림을 주문하는 이가 적어 어려움을 겪었다. 다행히 그림을 그리는 속도가 빨라 저가에 다작이 가능했다. 틴토레토는 그림에 자신이 생기자 과거 스승이었던 티치아노의 그림을 공개적으로 비판했다. 그가 보기에 티치아노의 그림은 화려한 색채와 감각적인 분위기로만 치장되어 있을 뿐 지적 구성과 기획력이 부족했다.

틴토레토가 당시 베네치아 미술계의 정점이던 티치아노를 비판했다는 것은 티치아노의 영향력을 생각할 때 엄청난 모험이었다. 티치아노는 자신의 권위와 인습을 부정하는 과거의 제자를 탐탁치 않게 여겼다.

 

붓칠이 거칠고 물감칠이 두껍게 마감된 그림 많아

틴토레토의 성격은 작품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그림을 보면 르네상스 그림이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붓칠이 거칠고 물감칠이 두껍게 마감된 것들이 많다. 화면 구성은 역동적이고 명암 대비는 극명하며 강렬한 빛에 민낯을 드러낸 인물은 창백했다. 신화나 성경의 장면을 공포영화나 스릴러영화의 장면처럼 그리곤 했으며 양식상의 기복도 심했다.

틴토레토 특유의 양식을 보여주고 베네치아 사회에 그의 이름을 알리게 된 사실상의 공식 데뷔작은 현재 아카데미아 미술관에 소장된 대형 유화 ‘성 마가의 기적’(541×415㎝, 1548년)이다. 대형작품을 선호하는 틴토레토의 화풍에 걸맞게 가로 길이만 5m가 넘는다.

틴토레토의 ‘성 마가의 기적(416×544㎝, 1548년)

 

틴토레토의 성격은 그림값을 파격적으로 깎아주거나 공짜로 그려주는 데서 나타나기도 한다. 그중 유명한 사례가 ‘스쿠올라 그란데 디 산 로코’라는 이름의 종교 자선단체에 그림을 기중한 경우다. 전염병 치유 능력이 있다는 성 로코를 수호성인으로 모시는 이 단체는 베네치아에 신축 건물을 1560년 완공한 뒤 1564년 내부 장식용 그림을 공모하면서 화가들에게 물감을 쓰지 않은 드로잉을 먼저 제출하면 그것을 심사해 대상자를 선정하겠다고 발표했다.

스쿠올라 그란데 디 산 로코 건물. 오른쪽은 예배당이다.

 

그런데 틴토레토는 공모전에서 자신이 발탁되면 나머지 작품 수주에서 유리한 위치에 설 수 있다고 계산해 드로잉만 제출하라는 규칙을 어기고 아예 유화를 완성해 해당 단체에 제출했다. 이 단체가 규칙에 위배된다며 문제삼자 틴토레토는 아예 작품을 기증하겠다고 했다. 단체는 당황해했으나 당시에는 화가가 기증하는 작품은 무조건 수용하는 것이 관례여서 그림을 받아들여야 했다. 조르조 바사리가 전하는 이 일화는 틴토레토가 때로는 몰염치한 행동을 하고 그림을 그리는 속도가 매우 빨랐음을 알려준다.

틴토레토는 이후 1587년까지 24년 동안 이 건물 내부에 ‘그리스도의 십자가 처형’(536×1224㎝, 1565년)을 비롯해 56점의 그림을 그렸다. 이들 작품은 베네치아 매너리즘의 진수를 보여주는 걸작이다. 크기도 대부분 5m가 넘는다. 그래서 오늘날 틴토레토의 작품을 보려면 ‘스쿠올라 그란데 디 산 로코’ 건물로 가야 한다.

틴토레토의 ‘그리스도의 십자가 처형’ (518×1224㎝, 1565년)

 

틴토레토의 예술적 가치는 이 건물에 들어서는 순간 확인된다. 1층 매표소를 지나면 바로 ‘수태고지’, ‘동방박사의 경배’, ‘영아 학살’, ‘이집트로의 도피’ 등 8점의 명작들이 이어진다. 2층에 오르면 ‘그리스도의 승천’ 등 크고 작은 작품들이 벽면과 천장을 빼곡히 장식하고 있다. 틴토레토의 대표작 ‘빌라도 앞에 선 예수’, 길이가 12m가 넘는 ‘십자가에 매달린 그리스도’도 이곳에서 만날 수 있다. 작품마다 특유의 색채와 빛, 역동성, 드라마틱한 구성이 엿보인다.

 

당대 화가들의 평가는 우호적이지 않아

틴토레토의 그림 양식에 기복이 심하다는 것은 그만큼 그림을 자유자재로 그렸다는 것을 뜻한다. 실제로 그는 주문자가 요구하면 티치아노 혹은 티치아노의 후계자로 알려진 파울로 베로네제(1528~1588) 등 다른 화가의 양식으로 돈을 적게 받고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사실 스승 티치아노는 늘 주문이 밀려 새로운 주문을 받지 못할 때가 많았다. ‘은하수의 기원’(149×168㎝, 1575년)은 틴토레토가 주문자의 취향에 맞춰 티치아노의 화풍으로 그린 것으로 틴토레토의 걸작 중 하나이다.

이런 틴토레토에 대해 그와 경쟁하던 화가들은 틴토레토를 염치없고 주제넘는 인물이라며 경계했다. 그러나 틴토레토의 가격파괴 전략은 돈 욕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틴토레토 특유의 열의와 에너지 때문이라고 설명하는 평론가도 있다.

틴토레토가 많이 그린 주제 중 하나는 ‘최후의 만찬’이다. 틴토레토는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한 1547년부터 사망 해인 1594년까지 적어도 8번 이상 이 주제로 그림을 그렸다. 그중 대표작은 틴토레토가 세상을 뜨기 불과 몇 달 전, 산 조르조 마조레 교회당을 위해 그린 ‘최후의 만찬’(569×366㎝, 1594년)이다. 일반적으로 ‘최후의 만찬’에는 예수와 열두제자만이 등장하지만, 틴토레토의 작품에서는 그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등장하고 공중에는 여러 영혼들이 떠다니며 북적거린다.

틴토레토 ‘최후의 만찬’ (366×569㎝, 1592~1594년)

 

말년에는 열정과 당당함을 뒤로 한 채 명상적인 주제의 그림들을 즐겨 그렸다. 베네치아 화파의 르네상스를 마무리하는 역할이 틴토레토에게 주어진 것은 한때 스승이던 티치아노가 1576년, 티치아노의 후계자인 베로네제가 1588년 각각 세상을 떠난 후였다. 그러나 그 무렵 틴토레토에 대한 당대 화가들의 평가는 우호적이지 않았다. 심지어는 훗날의 평론가들조차 그를 부정적인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 ‘매너리즘의 대가’로 규정했다.

 

■매너리즘 양식, 르네상스와 바로크 이어주는 교량

미술사에서 매너리즘은 르네상스 이후 바로크 시대가 도래하기 전까지인 16세기 중후반(1530~1600)에 이탈리아에서 나타났던 과도기적인 미술 양식을 말한다. 성숙기 르네상스와 바로크를 이어주는 교량 역할로도 거론된다. 그러나 이탈리아 미술사가들은 매너리즘 명칭이 예술 성격상 적절하지 않다고 해 말기 르네상스 미술로 부르기도 한다.

매너리즘은 16세기 중후반에 활동하던 화가들이 레오나르도 다빈치,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라파엘로 산치오 등의 천재성에 기가 눌리고 허무감에 빠져 새로운 기법을 시도하지 않고 르네상스의 화풍에 약간의 기교를 더한 수준에 머물러 있다며 18세기의 평론가들이 그들을 가리켜 ‘현실에 안주한’ ‘한물간’ 매너리즘 화가라고 비판하면서 자리잡은 미술 용어다.

미술 사학자들은 당시 화가들이 매너리즘에 빠지게 된 이유로 1527년 로마의 대약탈을 꼽는다. 이후 이탈리아는 정신적인 동요와 불안 속에 휩싸이게 되고 예술에서는 마니에리즘이라는 새로운 흐름이 전개되었다. 냉철하고 이성적인 르네상스 정신과 탐구적 의지는 사라지고 르네상스의 기반 위에서 현실에 안주하려는 극히 소극적이고 후진적인 자세를 보이는 마니에리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지난날 활발하던 시대에 나온 형식들이 원리로 굳어져 화가들은 예술을 시작하려면 이 원리부터 배워야 했다. 그에 따라 마니에리즘 미술가들은 권위있는 아카데미를 설립, 선배들의 걸작을 공식화하고 교과서적으로 정리해 가르치고 배울 수 있게 했다. 이를 통하면 누구라도 걸작을 생산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매너리즘은 미술에서는 개성적인 양식이 아닌 모방이나 아류 등 부정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으나 오늘날에는 사회 모든 분야에 걸쳐 혁신과 노력 없이 현상 유지에 급급해 하는 태도를 지칭한다.

매너리즘이 부정적 이미지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하나의 미술 양식으로 재평가받은 것은 20세기 초였다. 당대 작가들로부터 18세기의 평론가들에 이르기까지 비판을 받았던 틴토레토 역시 19세기 영국의 비평가 존 러스킨을 통해 작품의 가치를 새롭게 인정받았다. 러스킨은 틴토레토가 르네상스 후기 베네치아 사회의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환경에서 영적이고 정신적인 가치를 지닌 예술가라고 재해석했다. 20세기의 사르트르는 틴토레토를 “귀족의 미학에 맞서 부르주아 계급의 취향과 입장을 대변하고자 한 저항가”로 규정했다.

 

■프레스코와 캔버스에 유화

프레스코화는 고대 크레타, 그리스, 로마 때부터 그려온 아주 오래된 기법이다. 중세는 물론 르네상스 시대에도 궁정이나 성당 벽화는 어김없이 이 기법으로 그렸다. 프레스코는 벽면에 석회 모르타르를 바르고 그 위에 그림을 그리는 화법이다. 석회 모르타르가 마르기 전에 수용성 물감으로 채색하는데 풀이나 꽃, 광물질을 빻거나 갈아서 다양한 가루로 만든 물감에 접착제를 섞어 사용한다.

채색 후 벽이 마르면 수용성 물감이 벽에 스며들면서 고착되어 색채가 분명해지고 화면에 견고하게 붙어서 수백년은 거뜬히 견디게 된다. 그래서 서기 1세기 폼페이 벽에 그려진 프레스코화가 지금까지 남아 있는 것이다.

나폴리에서 발굴한 프레스코화

 

문제는 작업이 까다롭다는 것이다. 벽에 먼저 석회 반죽을 칠하고 건조되기 전에 빠른 붓 터치로 그림을 그려야 하므로 작품 구상이나 데생 등의 준비작업을 완벽하게 마친 후 그려야 하고 그린다 해도 몇 시간 안에 발라놓은 석회 면적만큼의 양을 끝내야 한다. 수정도 사실상 할 수 없어 잘못 그리면 석회 모르타르를 긁어내야 한다.

그러던 중 템페라 그림이 등장하는데 석회 모르타르가 마른 다음에 물감에 계란이나 수액, 아교 등을 섞은 템페라 물감을 사용해 그림을 그리면 정밀하고 선명한 색채 구사가 가능했다.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언제든 수정할 수 있어 작가의 긴장도도 완화할 수 있다. 이 기법으로 다수의 명작을 그린 화가가 산드로 보티첼리다. 그러나 이 방식도 화가들이 직접 안료를 만들어 써야 하는 상황에서 안료가 잘 배합되지 않으면 다양한 색을 낼 수 없고 안료에 달걀 노른자를 섞으면 너무 빨리 말라버린다는 단점이 있다.

 

최초 유화로 알려진 그림은 1432년 얀 반 에이크가 그린 ‘신비의 양’

그러던 중 안료를 기름에 개어 사용하는, 당시로서는 첨단기법인 유화가 14세기 초 북해 연안의 플랑드르 지방(북프랑스와 남벨기에)에서 처음 등장했다. 당시 플랑드르 지방의 에이크 형제는 니스를 린시드유와 섞어서 안료로 쓰면 물감을 다루기 쉽고 바니시(광택이 있는 투명한 피막을 형성하는 도료)의 양에 따라 건조 속도를 조절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얀 반 에이크. 자화상으로 추정

 

엄밀히 말하면 에이크가 유화 기법을 처음 발명한 사람은 아니다. 12세기 독일 수도사가 쓴 책에 유화 기법이 자세하게 설명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에이크가 유화를 발명한 최초의 인물이 아니더라도 유화 기법을 능숙하게 익히고 그 절차를 완전하게 하여 보급한 미술가라는 점은 분명하다.

오늘날 최초 유화로 알려진 그림은 1432년 얀 반 에이크가 그린, 당시 벨기에 겐트의 생 바봉 성당의 제단화로 그린 ‘신비의 양’이다. 유화는 곧 일급비밀로 취급되었으나 소문을 들은 이탈리아 화가들이 정보를 캐기 위해 플랑드르를 드나들었다. 이후 유화 물감은 마음대로 색을 섞을 수 있고, 잘못 그리면 마른 뒤 고칠 수 있으며, 광택과 깊은 맛을 낼 수 있어 화가들이 즐겨 쓰는 회화 재료로 급부상했다.

얀 반 에이크가 벨기에 겐트의 생 바봉 성당의 제단화로 그린, 24개의 패널로 구성된 ‘신비의 양’(350×461㎝, 1432년). 위베르 반 에이크(형)가 1425년 그리기 시작하다가 죽자 동생(얀 반 에이크)이 완성했다.

 

무엇보다 가장 큰 장점은 잘 변질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그렇기에 사실적인 표현을 추구한 15세기 화가들에게 유화 기법은 그야말로 신이 내린 축복이었다. 특히 기후가 습하고 염분이 많은 바다에 인접해 있어 그림이 다른 지역보다 더 잘 변질되는 베네치아에는 적격이었다. 게다가 베네치아가 해상무역의 중심지여서 고급 안료와 그림 재료들의 수입이 원활한 것도 큰 장점이었다. 따라서 베네치아에서 유화 기법이 발달한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베네치아 화가들은 고급 안료를 마음껏 사용한 덕분에 사치스러운 비단, 반짝이는 보석, 아름다운 태피스트리 등을 풍부하고 신선한 색채로 구사할 수 있었다.

 

15세기 화가들에게 유화 기법은 신이 내린 축복

캔버스는 유화와 늘 함께 하는 실과 바늘같은 존재다. 그것을 반영하는 표현이 ‘캔버스에 유화(Oil on canvas)’다. 캔버스는 우리나라의 삼베와 같이 거칠게 짜인 직물의 일종이다. 라틴어로 ‘대마’라는 뜻의 ‘cannabis’에서 유래했는데 대마와 아마 섬유는 오래 전부터 항해용 돛을 만드는 재료였다. 캔버스가 등장하기 전까지 유화의 지지체는 나무판 판넬이었다. 하지만 대형 유화가 등장하면서 질 좋은 나무판이 부족해졌다. 그때 대안으로 등장한 것이 돛을 만드는 데 쓰이는 천이었다.

이 캔버스 천을 널리 사용한 화가들이 베네치아 화파였다. 베네치아 화가들은 캔버스 천에 유화로 채색한 그림을 액자 틀에 보관했다. 덕분에 이동이 편리해진 ‘캔버스에 유화’ 방식은 미술 시장에 혁명적인 변화를 불러왔다. 즉 건물을 통째로 옮기지 않는 한 매매가 불가능한 프레스코화나 템페라화와 달리 캔버스화는 종이처럼 둘둘 말아 옮길 수 있다는 점에서 미술작품도 일반상품처럼 누구나 사고 팔 수 있게 된 것이다.

작업방식이 변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화가들은 장식해야 할 건물에서 직접 작업하지 않고, 자신의 공방에서 작품을 완성한 후 설치할 장소로 옮기기만 하면 되었다. 그래서 베네치아 유명 화가들은 모두 공방을 운영하고 이 유명 화가의 지도하에 제자들이 협력해 작품을 완성하는 협업 제작체계를 운영했다. 공방을 운영하는 화가 중 특히 주문을 많이 받았던 화가는 티치아노였다. 그가 유화기법을 계속 발전시킨 것도 밀려드는 주문에 대응하려면 그림을 빠르게 제작해야 했기 때문이다.

 

<목차>

시리즈 16-1 클릭

시리즈 16-2 클릭

시리즈 16-3 클릭

시리즈 16-4 클릭

시리즈 16-5 클릭

시리즈 16-6 클릭

시리즈 16-7 클릭

시리즈 16-8 클릭

시리즈 16-9 클릭

시리즈 16-10 클릭

시리즈 16-11 클릭

시리즈 16-12 클릭

시리즈 16-13 클릭

시리즈 16-14 클릭

시리즈 16-15 클릭

시리즈 16-16 클릭

error: Content is protect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