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박스

[공부합시다!] ‘창조적 파괴’가 화두인 세상… 이를 처음 개념화한 조지프 슘페터는 누구이고 개념은 무엇인가

↑  하버드대 교수 시절(1948년)의 슘페터

 

by 김지지

 

2020년 4·15 총선에서 미래통합당의 완패 후 ‘창조적 파괴’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통합당 안팎에서 높다. ‘창조적 파괴’는 낡은 것은 계속 파괴하고 새로운 것은 계속 창조하면서 끊임없이 경제구조를 혁신해 가는 산업개편 과정을 뜻하는 경제학 개념이다. 따라서 정당 보다는 기업과 산업 등에 끊임없이 요구되고 있는 관심사다. 이 ‘창조적 파괴’를 처음 개념화한 조지프 슘페터는 누구이고 그가 개념화한 ‘창조적 파괴’는 무슨 뜻일까.

 

20세기가 케인스의 시대라면 21세기는 슘페터의 시대

조지프 슘페터(1883~1950)가 ‘창조적 파괴’나 ‘혁신’ 용어를 처음 거론한 저서는 28세이던 1911년 펴낸 ‘경제 발전의 이론’이다. 그는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시골 대학에서 경제학을 가르치고 있었지만 책 출간 후 세계 경제학계의 관심을 끌었고 책은 20세기를 빛낸 경제학 고전 가운데 한 권으로 꼽혔다.

슘페터 저서 ‘경제발전의 이론'(1911년)

 

그런데 일부 글을 보면 ‘창조적 파괴’ 용어의 창시자는 독일의 마르크스 이론가이자 사회학자인 베르너 좀바르트이고 슘페터는 전파자라고 되어 있다. 글에 따르면 좀바르트가 1913년 저서인 ‘전쟁과 자본주의’에서 ‘창조적 파괴’라는 용어를 처음 만들어 냈다는 것이다. 그런데 슘페터의 저서 ‘경제 발전의 이론’은 1911년에 출판되었다. 결국 이 문제는 전문가 영역이어서 이 정도 선에서 문제제기만 하고 본론으로 들어간다.

조지프 슘페터(1883~1950)는 동갑내기 존 메이너드 케인스(1883~1946)와 더불어 20세기 경제학계의 양대 거두로 인정받고 있다. 다만 전성기가 서로 달라, 케인스가 당대의 정치가들에게 조언하는 것을 좋아하고 자신의 주장과 이론이 현실 경제에 많이 수용된 덕에 생전에 각광을 받은 것과 달리 슘페터는 현실과 거리를 둔 채 냉정하게 대상을 관찰하고 연구하는 데만 힘을 쏟아 생전에는 별로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다가 사후에 집중적인 평가를 받았다.

존 메이너드 케인스

 

전문가들은 20세기가 케인스의 시대였다면 21세기는 슘페터의 시대라고 말한다. 슘페터의 저작 인용이 케인스를 넘어서기 시작한 것도 21세기 들어서였다. 그래서 그에게 붙은 수식어가 ‘21세기의 경제학자’다. 미국의 경영학자 피터 드러커에 따르면 슘페터는 ‘주요 경제학자 중 유일하게 기업가의 역할에 주목한 학자’였다.

 

생전에는 별로 이름을 알리지 못하다가 사후에 집중적인 평가 받아

슘페터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모라비아(현재의 체코 동부)의 지방도시 트리치에서 부유한 직물 제조업자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4살 때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 한동안 생활이 어려웠으나 10세 때 어머니가 33살 연상의 퇴역 장군과 재혼한 덕에 귀족적인 상류층 생활을 할 수 있었다.

슘페터의 젊은 시절 모습. 왼쪽은 27살(1910년), 오른쪽은 17살(1900년) 때다.

 

1901년 입학한 빈대에서 법학과 경제학을 공부하고 1906년 같은 대학에서 법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25세 때인 1908년 영국으로 건너가 학자들과 교류를 확대하고 이집트 카이로에서 변호사로 일했다. ‘이론경제학의 본질과 주요 내용’이라는 책을 출간, 학계에 두각을 나타낸 것도 카이로에서였다. 1909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체르노비츠대 교수로 부임, 제국을 통틀어 최연소 경제학 교수로 각광을 받았다. 1911년 ‘경제발전의 이론’을 출간하고 이듬해 그라츠대로 자리를 옮겨 1918년까지 근무했다. 1차대전 종전 후에는 재무장관(1919)과 민간은행장(1920)을 역임하고 독일 본대의 교수(1924)로 부임했으나 개인적인 불행이 연이어 엄습했다.

비록 빚투성이였지만 본에서 안정적 삶을 살던 그에게 찾아온 첫 번째 불행은 1926년 어머니의 죽음이었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고 두 달 후에는 1년 전 결혼한 20살 연하의 두 번째 부인이 출산 중 아이와 함께 숨지는 불행까지 겹쳤다. 그는 충격을 받고 세속에 관심을 끊은 채 경제학 연구에만 몰두했다. 히틀러를 피해 1932년 건너간 미국의 하버드대에서는 유럽에서의 아픈 기억을 지워버리려는 듯 사실상 외톨이로 지내며 연구에만 전념했다. 하지만 미국에서의 삶도 편안하지는 못했다. 당시 그가 몸담고 있던 하버드대 경제학과에 케인스주의가 맹위를 떨쳐 학생들이 그를 외면했기 때문이다.

 

명저 ‘자본주의, 사회주의, 민주주의’에서 ‘창조적 파괴’ 개념 확실히 해

슘페터는 아랑곳하지 않고 연구에 매진, 1942년 ‘자본주의, 사회주의, 민주주의’를 출판했다. 그는 책에서 자본주의의 생산자 즉 기업가는 이윤 극대화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사적 제국이나 자신의 왕조를 건설하고자 하는 몽상과 의지 ▲승리하고자 하는 의지나 성공하고자 하는 의욕 ▲창조의 기쁨 등 다양한 동기에 의해 움직이는 존재로 파악했다. 그러한 동기가 혁신을 낳고, 부단한 창조적 파괴로 이어지면서 경기가 순환하고 자본주의가 발전한다는 것이다.

세기의 명저 ‘자본주의, 사회주의, 민주주의'(1942년)

 

슘페터는 발전의 주체를 ‘기업가 정신’에서 찾았다. 그가 말하는 기업가란 일반적인 경영자와는 다른 존재다. 기업가는 획기적인 방식으로 ‘새로운 결합’을 수행해 기존의 균형 상태를 뒤흔든다. 이 새로운 결합이 혁신인데, 슘페터는 혁신을 다섯 가지 유형으로 분류했다. ▲소비자들이 아직 모르는 재화 또는 새로운 품질의 재화 생산 ▲해당 산업 부문에서 사실상 알려지지 않은 생산 방법 도입 ▲새로운 판로 개척 ▲원료 혹은 반제품의 새로운 공급 ▲독점적 지위 등 새로운 조직의 실현 등이다. 그에 따르면 혁신은 과거의 지식이나 기술, 투자를 쓸모없게 만든다. 그가 강조하는 ‘창조적 파괴’라는 개념이 여기서 나오는 것이다. 슘페터는 이러한 창조적 파괴 행위가 자본주의의 역동성과 경제 발전을 가져오는 원동력이라고 강조했다.

그런데 슘페터는 ‘기업가 정신’이 고도로 발달하게 되면 되레 자본주의가 사회주의로 이행한다고 전망했다. 이 역설의 근거로 슘페터가 꼽는 이유는 이렇다. ▲첫째, 창조적 파괴에 의해 자본주의가 발전할수록 발전 자체가 기계화되고 이 같은 기계화가 발전의 원동력인 기업가의 기능 또는 기업가 정신을 무력화한다. ▲둘째, 창조적 파괴 과정에서 거대 기업이 생겨나는 반면 일부 기업과 근로자가 몰락함에 따라 그동안 자본주의를 옹호하던 지식계급이 반 자본주의적 성향의 정치 세력을 형성한다. ▲셋째, 거대 기업이 개인이나 가족에 의해 운영되지 않고 주식회사 형태를 통해 대중에 분산되면 기업가들의 기업에 대한 열정은 물론 자본주의 체제를 사수하려는 열정이 식어버린다.

이런 이유를 들어 “자본주의는 성공하겠지만 오히려 그로 인해 스스로를 쇠퇴시키는 요인을 만들어 결국 붕괴하고 특정한 형태의 공적 통제 또는 사회주의가 자본주의를 대체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물론 그가 말하는 사회주의는 마르크스의 사회주의와는 다른 개념이다. 슘페터의 사회주의는 ‘창조적 파괴’를 일으키는 ‘혁신적인 기업가’ 집단이 소멸하면서 자본주의 사회구조가 약화하고 이에 따라 지식인들이 자본주의 비판자로 돌아서면서 사회주의로 이행하는 것을 말한다.

슘페터

 

“케인스가 아닌 슘페터야말로 세계화 경제 시대의 진정한 길잡이”

그는 사회주의를 위한 혁명은 경제적 혁명이지 결코 정치적 혁명이 되어서는 안 된다며 경제적 혁명을 장기간의 진화과정으로 보았다. 즉 자본주의를 사멸시키는 것은 계급투쟁이 아니라 자본주의 문 앞에서 기다리는 합리주의이다. 이렇게 그는 자본주의가 자신의 실패에 의해서가 아니라 성공에 의해 사멸하고 그 자리를 사회주의에 내줄 것이라고 역설적 주장을 전개했다.

자본주의 붕괴를 예측한 슘페터의 전망은 현재까지 빗나간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관료화된 거대 기업 아래서도 기업들의 창조적 파괴가 지속적으로 일어나고 있고, 지식인들이 자본주의의 적대 세력이 되기는커녕 자본주의가 주는 기회에 편승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창조적 파괴’와 ‘혁신’을 주장한 슘페터의 주장과 이론은 1990년대부터 각광을 받고 재조명되었다.

조지프 슘페터

 

그것은 ‘창조적 파괴’에 입각한 기업가들의 끊임없는 경쟁, 혁신적인 경영 방법, 지속적인 기술 혁신이 사회 발전의 원동력이라고 본 그의 전망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기 때문이다. 또한 자본주의 위기가 지속적으로 재발하고 있는 현실도 그의 전망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자본주의 위기가 반복될수록 사회질서는 자본주의를 수정·보완하는 개혁 조치들이 거듭되어 자본주의 본래의 모습을 점점 잃게 된다.

자본주의라는 이름이 남아 있더라도 체제의 내용과 방식은 변할 수밖에 없다. 오늘날 자본주의가 발달한 많은 나라에서 사회복지나 기간산업 국유화 등 사회주의적인 제도를 채택하고 있는 것이 이를 설명해주고 있다. 많은 경제학자가 “케인스가 아닌 슘페터야말로 세계화 경제 시대의 진정한 길잡이”라고 칭송을 아끼지 않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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