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박스

‘농구 황제’ 마이클 조던의 일대기를 다룬 다큐멘터리 ‘The Last Dance’가 ‘코로나19’ 사태를 맞아 폭발적 인기를 끌고 있다는데… 조던 이전의 농구 스타는 윌트 체임벌린과 카림 압둘 자바

↑ 드리블링하는 마이클 조던

 

by 김지지

 

스포츠가 사라진 ‘코로나 시대’에 팬들은 옛 스타들의 하이라이트 장면이나 추억의 명승부 등을 꺼내 보며 갈증을 달래고 있다. 이런 시기에 ‘가뭄에 단비’ 같은 작품이 찾아왔다. 미국 스포츠 전문 채널 ESPN이 ‘농구 황제’ 마이클 조던의 일대기를 다룬 다큐멘터리 ‘더 라스트 댄스(The Last Dance)’를 공개한 것이다. 다큐에서는 당시 경기장 안팎에서 촬영한 500시간 분량의 미공개 영상을 바탕으로 1990년대 황금기를 지낸 조던과 ‘불스’ 왕조의 내밀한 이야기들을 담았다. 미국에서는 시청률 대박을 터뜨렸다. 1부는 평균 630만 명, 2부는 580만 명이 시청한 것으로 집계돼 ESPN 다큐멘터리 사상 최다 시청자 수를 기록했다.

ESPN 다큐멘터리 ‘더 라스트 댄스(The Last Dance)’

 

농구 역사상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굵은 발자취 남겨

프로야구 선수를 꿈꾸던 마이클 조던(1963~ )이 농구로 방향을 튼 것은 고교 2학년 때였다. 고교를 졸업할 무렵 조던은 ‘좀 잘하는’ 농구 선수였을 뿐 전미 고교 유망주 300위 내에도 들지 못했다. 그러나 조던의 잠재력을 알아챈 노스캐롤라이나대 농구 감독이 그를 스카우트하면서 조던의 농구 인생은 중요한 전기를 맞는다. 대학에서 조던의 농구 기량은 일취월장했다. 조던의 현란한 드리블을 제대로 쫓아가지 못한 심판들이 수없이 트래블링 반칙을 선언할 정도로 발놀림이 빨랐다. 심판들의 오심은 대학 측이 심판들에게 조던의 동작을 슬로비디오로 보여주고서야 잠잠해졌다.

노스캐롤라이나대학 시절의 마이클 조던

 

조던은 1984년 6월에 실시된 미 프로농구(NBA) 신인 드래프트에서 하킴 올라주원, 샘 보위에 이어 3번째로 지명되어 시카고 불스에 입단했다. 입단 첫해에 평균 28.2점을 득점하는 놀라운 기량을 보이며 그해 신인왕 타이틀을 차지함으로써 곧 다가올 ‘조던의 시대’를 예고했다.

조던은 1986년 4월 플레이오프 1라운드에서 63점을 넣어 플레이오프 최다 득점 신기록을 세웠다. 1986년 3월부터 2001년 12월까지는 무려 866경기 연속으로 두 자릿수 득점 행진을 펼쳤다. 1986~1987년 시즌에서 평균 37.1점이란 가공할 득점력으로 첫 NBA 득점왕 타이틀을 따낸 것을 시작으로 1988~1989년 시즌까지 3시즌 연속 득점왕을 차지했다.

그러나 혼자서 팀을 우승시키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1989년 필 잭슨이 지휘봉을 잡고 스코티 피펜과의 환상적인 조합이 무르익으면서 1991년 마이클 조던은 또다시 득점왕에 오르고 시카고 불스는 처음 NBA 정상에 등극했다. 이후 1993년까지 조던은 3연속 득점왕에 오르고 시카고 불스 역시 3연속 우승을 차지하며 미 NBA 무대를 평정했다. 그러나 ‘농구 황제’라는 찬사에 시샘이 난 듯 운명은 그를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았다. 거액의 골프 도박에 연루되었다는 사실이 알려져 그동안 출중한 실력과 모범적인 사생활에 감동했던 팬들을 충격에 빠뜨렸다.

왼쪽부터 마이클 조던, 필 잭슨, 스코티 피펜

 

세 차례나 은퇴했다가 복귀

조던의 공개 사과로 잠잠해질 무렵이던 1993년 7월 23일에는 아버지가 강도에게 살해되는 비극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조던은 이때의 충격으로 1993년 10월 6일 은퇴를 선언했다. 하지만 몸속에서 꿈틀거리는 승부욕을 어쩌지 못해 1994년 3월 31일 농구 선수가 아닌 야구 선수로 경기장에 들어섰다. 시카고 화이트삭스의 마이너리그에서 뛰었으나 역시 야구는 그의 본업이 아니었다. 타율은 0.202에 그쳤다.

야구선수 마이클 조던

 

실망한 조던은 1995년 3월 18일 “내가 돌아왔다(I’m Back)”라는 유명한 말과 함께 전격적으로 복귀 선언을 했다. 1995년 3월 19일 복귀 첫 경기에서 조던은 19점 득점에 그치고 팀은 패했지만 그것은 17개월간의 공백을 메우기 위한 워밍업일 따름이었다. 3월 28일 경기에서 조던은 무려 55 득점을 쏟아부으며 전성기의 기량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그동안 하락세를 면치 못하던 시카고 불스는 조던 복귀 이듬해인 1996년 72승 10패라는 역대 NBA 시즌 최다승을 기록하며 옛 명성을 이어갔다. 시카고 불스는 1997년과 1998년에도 우승, 3연속 우승이라는 위업을 달성하는 기쁨을 누렸으나 조던은 1999년 1월 13일 두 번째 은퇴를 발표했다. 이듬해 1월 조던은 선수가 아닌 워싱턴 위저즈의 공동 구단주가 되어 나타났지만 또다시 필드에 대한 열정을 어쩌지 못해 2001년 9월 25일부터 다시 위저즈의 선수로 뛰었다. 2003년 4월 16일 조던이 세 번째이자 마지막으로 은퇴함으로써 ‘농구 황제’는 ‘농구의 전설’로 남게 되었다.

조던은 농구 역사상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굵은 발자취를 남겼다. 시카고 불스를 6차례나 NBA 챔피언으로 끌어올리고 개인 통산 득점왕 10차례, 플레이오프 MVP 6차례, 정규 시즌 MVP 5차례, 올스타 14번 출장, 올스타전 MVP 3차례, 스틸왕 3차례에 오르는 등 공수 양면에서 농구 선수가 할 수 있는 각종 기록을 갈아치웠다.

 

AP가 ‘20세기 최고’로 선정한 것은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조던만의 화려한 플레이 때문

그가 은퇴했을 때 15시즌 통산 경기당 평균득점은 역대 최고인 30.12점이나 되었고 통산 득점은 카림 압둘 자바(3만 8,387점), 칼 멀론(3만 6,928점)에 이어 3위(3만 2,292점)였다. 그러나 3위 기록은 2014년 12월 LA 레이커스의 코비 브라이언트와 2019년 3월 르브론 제임스에 의해 추월당함으로써 5위로 밀려났다. 2020년 5월 현재 3위 기록은 제임스, 4위 기록은 브라이언트가 갖고 있다. 브라이언트는 2020년 1월 헬기 추락사로 3만 3,643점에 멈춰선 반면 현역인 제임스의 기록은 지금도 계속 늘어나고 있다.

조던은 올림픽과도 인연이 있어 대학 때는 LA 올림픽(1984), 프로 때는 바르셀로나 올림픽(1992)에 출전해 두 차례 모두 미국의 우승을 이끌었다. 압둘 자바, 윌트 체임벌린 등 쟁쟁한 선수들을 제치고 AP가 선정한 ‘20세기 최고’로 꼽힐 수 있었던 것은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조던만의 화려한 플레이 때문이었다.

조던이 현란한 드리블, 폭발적인 슬램덩크, 상상을 초월하는 고난도 슛, 엄청나게 긴 체공 시간 등으로 종횡무진할 때마다 농구 팬들은 탄성을 쏟아냈다. 큰 키로 골밑을 제압하는 센터들이 코트를 지배하던 시대에 보통키(198cm)의 조던이 보여준 것은 인간의 동작이 아니라 신의 동작이었다. 그래서 붙여진 별명이 ‘농구의 신’ ‘에어 조던’이었다.

마이클 조던의 슬램덩크 슛 모습

 

NBA가 미국이라는 울타리를 뛰어넘어 지구촌 스포츠로 격상할 수 있었던 것도 조던이라는 걸출한 스타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스포츠 산업에 끼친 ‘조던 효과’도 엄청났다. 조던이 입단할 때 2,000만 달러이던 불스 구단의 값은 조던이 마지막 투혼을 불사르던 1999년 2억 달러로 치솟았다. 나이키 등 조던과 광고 계약을 맺은 기업들도 ‘조던 특수’에 엄청난 돈을 벌었다. 누가 뭐래도 1990년대는 마이클 조던의 시대였다.

 

“체임벌린을 막는 방법은 묶어두거나 총으로 쏴 버리는 것밖에 없다”

마이클 조던이 천하를 호령하기 전, 미국의 프로농구사를 화려하게 장식한 인물은 윌트 체임벌린(1936~1999)과 카림 압둘 자바(1947~ )다. 그중 216㎝의 장신 센터 체임벌린은 통산 최다 리바운드(2만 3,924개)를 비롯해 한 게임 최다 득점(100점)과 최다 리바운드(55개), 한 시즌 최다 득점(4,029점) 기록을 갖고 있는 미 프로농구사의 상징적 인물이다. 한동안은 통산 최다득점(3만 1,419점) 기록도 갖고 있었으나 1984년 압둘 자바(3만 8,387점)에 의해 깨지고 뒤이어 칼 멀론(3만 6,928점)과 마이클 조던(3만 2,292점)에게 연속 추월을 당해 4위에 랭크되었다가 지금은 현역 후배들에 밀려 순위가 계속 떨어지고 있다.

체임벌린은 필라델피아 워리어스에 입단한 1959년부터 LA 레이커스에서 은퇴한 1973년까지 14년간 경기당 평균 30.1 득점에 22.9 리바운드를 기록했다. 데뷔 첫해 평균 37.6 득점을 기록, 신인왕과 MVP를 동시에 차지하는 등 통산 4회 MVP에 올랐다. 특히 입단 첫해인 1959∼1960 시즌부터 1965∼1966 시즌까지 7시즌 연속 득점왕에 오르고 총 11시즌에서 리바운드왕에 올라 체임벌린의 시대임을 온 천하에 알렸다. 플레이오프에는 13회 진출했으나 천적인 보스턴 셀틱스에 번번이 막혀 우승의 기쁨은 2회만 맛보았다.

전문가들은 체임벌린의 가장 위대한 시즌은 8분을 제외하고 전 경기에 출전한 1961~1962 시즌이라고 입을 모은다. 그 시즌에서 체임벌린은 평균 50.4점, 25.7 리바운드를 기록하고 지금도 깨지지 않는 한 시즌 최다 득점인 4,029점을 기록했다. 한 시즌 득점 2위에 올라 있는 마이클 조던이 1986~1987 시즌에 3,041점을 세운 것과 비교하면 얼마나 큰 점수인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1962년 3월 2일 뉴욕 닉스와의 경기에서는 100점을 올리는 전무후무한 대기록을 세웠다. 당시만 해도 3점짜리 득점이 없었기 때문에 100점에 그쳤지 3점슛 제도가 있었다면 100점을 훨씬 넘었을 것이라는 게 중론이다. 당시 체임벌린의 라이벌인 빌 러셀은 “체임벌린을 막는 방법은 라커룸에 묶어두거나 아니면 총으로 쏴 버리는 것밖에 없다”고 할 정도로 그는 코트에서 훨훨 날았다.

윌트 체임벌린

 

압둘 자바의 한마디로 美 대학농구 규정까지 바뀌어

압둘 자바(1947~ )는 고등학교 때 이미 스타였다. 그의 고교는 자바가 재학 중이던 3년 동안 95승 6패라는 경이적인 승률에 71연승 기록을 세웠다. 자바는 1965년 UCLA에 입학했으나 대학 1학년생은 전국대회에 출전할 수 없다는 규정에 막혀 1년 동안 전국대회에 출전하지 못했다. 2학년이 되자 UCLA의 30연승을 이끌며 UCLA를 무적의 팀으로 만들고 자신은 MVP로 선정되었다. 언론이 MVP 수상 소감을 물었을 때 자바는 “여러분은 하늘을 나는 새가 새장에 갇혀 있을 때의 기분을 아는가”라고 말했다. 소감은 바로 신문과 방송 스포츠뉴스의 헤드라인을 장식했고 이듬해 미국 대학농구연맹은 1학년생도 전국대회 리그에 참가할 수 있도록 규정을 바꾸었다. 그의 발언 한마디가 미국 대학농구 규정을 바꾼 것이다.

UCLA는 자바가 졸업할 때까지 3년 동안 미국 정상을 차지했다. 자바는 1969년 밀워키 벅스에 드래프트되었다. 데뷔 첫해 자바는 평균 28.8 득점(2위), 14.5 리바운드(3위)를 기록, 그해 신인상을 차지했다. 1970~1971 시즌에는 밀워키 벅스가 66승 16패라는 경이적인 승률로 구단 사상 처음으로 시즌 우승을 차지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 시즌에서 평균 31.7 득점을 기록해 자바는 득점왕과 함께 정규리그 MVP, 챔피언시리즈 MVP 등 3관왕이 되었다. 1971~72 시즌에도 34.8 득점을 기록, 2년 연속 득점왕과 MVP를 거머쥐고 1973~74 시즌에도 3번째 MVP를 수상했다.

 

압둘 자바가 슬램 덩크까지 자유자재로 구사하자 NBA ‘덩크슛 금지’ 선언

자바는 1975년 6월 미 최고의 명문 구단 LA 레이커스로 트레이드되었다. 자바를 떠나보낸 밀워키 벅스는 그 후 한 번도 NBA 정상에 오르지 못했다. 자바를 영입한 LA 레이커스 역시 한동안 NBA 정상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러나 1980년 ‘어시스트의 귀재’ 매직 존슨이 입단하면서 LA 레이커스는 전성시대를 맞았다. 자바와 존슨은 환상의 콤비를 이뤄 LA 레이커스를 5번(1980, 1982, 1985, 1987, 1988)이나 NBA 정상에 올려놓았다. 자바는 1984년 체임벌린의 통산 득점(3만 1,419점) 기록을 제치고 통산 득점 1위에 올랐다.

자바는 키가 219㎝나 되면서도 ‘스카이훅 슛’과 ‘슬램 덩크’라는 신무기까지 갖춰 천하무적이었다. ‘스카이훅 슛’은 상대 수비수를 등진 상태에서 그대로 몸을 돌리면서 점프해서 팔을 세운 채 손목 스냅을 이용해 던지는 고공 슛으로 그가 훅슛을 던지면 누구도 막지 못했다. 게다가 슬램 덩크까지 자유자재로 구사하자 급기야 다른 팀들이 이의를 제기하기에 이르렀다. 재미를 반감시키고 자칫 농구대가 파손될 염려가 있다는 것이다. 결국 NBA는 ‘덩크슛 금지’를 선언했다. 물론 이 규정은 나중에 다시 바뀌었다.

압둘 자바(왼쪽)가 스카이 훅슛을 하는 모습

 

자바는 1969년부터 은퇴하던 1989년까지 20시즌 동안 모두 6차례 우승의 기쁨을 만끽하고 정규리그 MVP도 5차례나 차지했다. 올스타전에는 19회 출전했다. 20년 동안 1,560경기에 출전, 평균 24.6 득점을 기록하고 총 3만 8,387점을 득점했으며 리바운드는 1만 7,440개를 기록했다. 통산 득점은 현재까지 NBA 사상 최고점수로 기록되어 있다. 당시 덩크슛을 그대로 놔두고 3점슛까지 있었다면 통산 득점 기록은 4만 점을 족히 넘겼을 것이고 어쩌면 불멸의 기록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1989년 4월 코트를 떠나서도 자바는 다방면의 재능을 보였다. 영화와 드라마에 출연하고 프로덕션을 운영했다. 특히 이소룡의 유작 영화 ‘사망유희’에서는 이소룡과의 격투 신을 선보여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이소룡 영화 ‘사망유희’에 출연한 압둘 자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