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박스

서울시가 한말(韓末)의 중심지역인 ‘정동(貞洞)’을 근대 역사의 상징 공간으로 재조성한다는데… 당시 정동은 열강 외교의 거점, 근대적 의료·교육의 산실, 신문화의 요람, 개신교 포교의 출발지였다

↑  하늘에서 촬영한 정동 일대. 덕수궁(중앙) 석조전 왼쪽 하단에 미 대사관저가 있고 그 바로 아래에 중명전과 예원학교가 보인다. 덕수궁 왼쪽 숲 옆에 덕수초등학교와 영국 대사관이 있고 덕수초등학교 앞 공터는 옛 경기여고 땅이다. 사진 하단에 정동제일교회가 있고 사진 중앙 우측에 서울시립미술관이 있다. (출처 서울연구원)

 

by 김지지

 

서울시가 한말(韓末)의 중심지역인 정동(貞洞)을 우리나라 근대 역사의 상징 공간으로 재조성할 계획이다. 대한제국 황궁이었던 덕수궁을 중심으로 외국 공사관들 사이에 공원을 만들고 역사적 의미를 담은 보행광장과 시민 휴식 공간을 2022년까지 곳곳에 조성한다. 서울시 계획에 따르면, 현재 옛 러시아공사관 부지에 조성되어 있는 정동공원은 ‘근대 외교 마을’을 상징하는 외교역사공원으로 바뀐다. ‘공사관 거리’라고도 불리는 정동 일대에는 미국, 프랑스, 영국 등 19세기 세계열강이 잇따라 들어와 공사관을 지었다. 지금도 러시아, 영국, 네덜란드 대사관 등이 몰려 있다.

 

한말(韓末), 정동의 중심은 경운궁

1876년 일본과의 강화도조약 이후 1897년 대한제국이 수립될 때까지 우리나라와 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한 국가는 일본을 포함해 미국(1882), 영국(1883), 독일(1883), 이탈리아(1884), 러시아(1884), 프랑스(1886) 등 11개국에 이른다. 이 가운데 조선에 공사관이나 영사관을 개설한 나라는 9개국으로 대부분 서울 정동에 둥지를 틀어 정동은 외교가의 거점으로 자리잡았다. 정동은 또한 의료·교육 분야에서 이뤄진 우리나라 근대화와 개신교 선교를 동시에 체험한 역사의 현장이기도 했다.

서울 정동의 중심지인 경운궁(현재 덕수궁)의 한말(韓末) 모습. 멀리 왼쪽부터 러시아공사관, 중명전, 미국공사관, 망대, 돈덕전, 영국공사관, 구성헌 등이 보인다. 뒤의 산은 인왕산(왼쪽)과 북악산이고 저 멀리 보이는 산이 북한산이다.

 

‘정동’이라는 지명은 태조 이성계의 둘째부인 신덕왕후 강씨의 무덤 ‘정릉(貞陵)’에서 유래한다. 신덕왕후는 이성계가 고려의 장군이었을 때 만나 1392년 조선이 건국되었을 때 왕후로 책봉되었으나 4년 후 세상을 떠나 영화는 오래 가지 못했다. 당시 도성 안에 묘지를 쓰는게 금지되었지만 태조는 왕비를 애틋하게 생각해 왕비의 묘를 사대문 안에 들여놓게 하고 묘 이름을 ‘정릉’으로 명명했다.

그러나 첫째부인의 소생인 이방원(태종)이 왕위에 오르면서 평온하던 정릉에 소용돌이가 쳤다. 이방원이 정적관계이자 눈엣가시였던 새어머니 신덕왕후의 묘를 파헤쳐 1409년 양주 사을한록(현재 성북구의 정릉)으로 이장했기 때문이다. 이방원은 이장 후 남아있는 건물 자재는 다른 건물을 짓는데 사용하도록 하고 정릉을 지키던 신장석(왕이나 왕비의 능 앞에 세우는 입석상)은 이듬해 홍수로 청계천 광통교의 흙다리가 무너졌을 때 돌다리의 교대석(다리의 양쪽 끝을 받치는 기둥)으로 사용하게 했다. 이후 신장석은 600년 가까이 광통교 다리 밑에 묻혀있다가 2005년 청계천 복원공사로 햇볕을 보게되었다.

이 신장석은 세련된 당초문양과 구름문양이 새겨져 고려말 조선초기 전통문양의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으나 2005년 다리의 교대석을 발견했을 때 거꾸로 놓여 있어 전문가들의 이런저런 추측을 낳고 있다. 즉 신덕왕후와 정적 관계에 있던 이방원의 의도적인 복수심이 아니겠느냐는 것이다.

현재 청계천 광통교 아래에 놓여있는 정릉의 신장석. 당초 문양은 불상이나 거꾸로 설치해 토끼모양을 하고 있다.

 

한말(韓末), 정동의 중심은 경운궁으로 불렸던 지금의 덕수궁이다. 월산대군(성종의 형)의 민간 저택을 궁으로 승격시킨 왕은 조선 제14대왕 선조다. 선조는 임진왜란 후 한양으로 돌아왔으나 경복궁과 창덕궁이 파괴되어 마땅한 거처가 없었다. 그래서 창덕궁을 복원하는 동안 월산대군의 저택을 임시 거처인 행궁으로 삼았다. 선조는 점차 행궁의 경계를 넓혀가면서 15년 동안 생활하다가 1608년 행궁에서 눈을 감았다.

선조의 뒤를 이어 왕에 오른 광해군은 이 행궁에서 즉위하고 생활하다가 창덕궁이 복원되자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겼다. 이때부터 행궁에 ‘경운궁’이라는 정식 궁호가 내려졌다. 그런데 말이 궁이지 규모는 여전히 대감집의 저택 수준에 불과했다. 더구나 광해군이 선조의 계비인 인목대비를 이곳에 유폐시키고 ‘서궁’으로 격하해 사실상 궁의 기능을 정지시켰다.

참고로 서울에는 조선 궁궐이 다섯 있다. 조선 태조가 한양으로 천도하면서 경복궁을 세웠다. 태종이 다시 한양으로 옮겨오면서 창덕궁을 세웠다. 세종이 즉위하자 태종이 상왕이 되어 살던 궁궐은 성종 대에 창경궁으로 거듭났다. 선조는 의주에서 한양으로 환도한 후 성종의 형 월산대군의 옛집에 행궁을 차렸다. 지금의 덕수궁이다. 인조는 이괄의 난을 만나 광해군이 세운 경덕궁에 잠시 거처했다. 영조는 경덕궁을 경희궁이라 개명하고 새 주인이 됐다. 정조와 고종은 세 궁궐의 주인이었다. 정조는 창경궁(출생)·경희궁(동궁)·창덕궁(국왕)으로, 고종은 창덕궁(즉위)·경복궁(친정)·경운궁(황제정)을 거쳐 갔다.

 

서양 공사관이 둥지 틀고 서양 선교사들이 정착하면서 거대한 서양인 집성촌으로 변모

경운궁이 궁궐의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은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한 아관파천(1896년 2월) 후였다. 고종은 정동 언덕에 위치한 러시아공사관에 거주하면서 “경복궁으로는 환궁하지 않겠다”며 경운궁 보수를 명했다. 고종이 아관파천 후 경운궁을 새 거처로 삼은 주요 이유는 그 무렵 정동에 모여 사는 서양인들의 치외법권적 환경에 대한 기대 때문이었다. 그래서 경운궁을 중건할 때 경운궁 주변에 있던 민간인 집들은 징발하면서도 미국, 영국, 러시아 공사관은 그대로 두었다. 서양인들도 지근거리에서 고종의 보호를 받을 수 있어 환영했다.

1900년 경의 정동 일대 모습. 1902년 캐나다 선교사 제임스 게일이 서양에 소개한 지도다. 경운궁을 중심으로 각종 기관과 도로와 동네 이름이 국한문으로 병기되어 있다.

 

경운궁이 1년 공사 끝에 궁궐의 모습을 갖추게 되자 고종은 1897년 2월 경운궁으로 거처를 옮겨 한말 역사의 격동기를 보냈다. 이로써 경운궁은 행궁이 아닌 정궁으로 승격했다. 경운궁의 영역이 넓어진 것은 1900년과 1904년에 일어난 경운궁의 화재 후였다. 지번은 정동 1번지가 되었다. 경운궁은 1907년 고종이 상왕으로 은퇴하고 일본이 고종에게 은퇴한 임금이라는 뜻으로 ‘덕수(德壽)’라는 궁호를 붙이면서 ‘덕수궁’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고종은 1919년 승하할 때까지 22년간 덕수궁에 머물렀다.

정동의 첫 서양인 거주자는 1883년 5월 초대 주한특명전권공사로 부임한 미국의 루시어스 푸트(1826~1913)였다. 그는 1883년 5월 20일 고종에게 신임장을 봉정한 후 민비의 친족인 민계호의 사저(정동 10번지, 현 미국대사관저)를 1883년 6월 구입해 미국의 공사관과 공사관저로 사용했다. 푸트는 점차 주변의 땅과 가옥들을 사들여 공사관 부지를 넓혀나갔다. 푸트의 거주 후 영국(정동 4번지), 러시아(정동 15번지), 프랑스(정동 29번지) 등 서양 각국의 공사관이 정동에 둥지를 틀고 서양 외교관과 선교사들이 정동 지역에 정착하면서 정동은 거대한 서양인 집성촌으로 변모했다.

루시어스 푸트

 

미 공사관

 

처음 정동을 선교지로 삼은 이는 미국 의료선교사 호러스 알렌

서양인들이 정동을 선택한 이유는 몇 가지로 설명된다. 무엇보다 서울 성벽과 언덕이 주변에 쳐져있어 안전했다. 제물포와 한강으로부터 출입이 용이하고, 남대문·서대문·서소문과 가까워 진출입이 자유로운 것도 장점이었다. 도성 안쪽인데도 외진 곳이라 빈터가 많아 대지·가옥 구입비용이 상대적으로 저렴하고 구릉지가 있어 전망이 좋다는 점도 매력적이었다. 1884년 4월 주한총영사로 부임한 영국의 윌리엄 애스턴 역시 정동 4번지에 자리잡은 현재의 영국영사관 부지를 사들였다.

당시 서울 성곽 모습. 멀리 왼쪽이 인왕산이다.

 

이처럼 미국과 영국이 공관을 설치하자 미국 선교사들이 하나둘 정동에 터를 잡았다. 이들 중 가장 먼저 정동 땅을 먼저 밟은 이는 일본에서 활동하던 미국 감리교 선교사 로버트 매클레이였다. 그러나 보름만에 돌아갔기 때문에 공식적으로 정동을 선교지로 삼은 것은 1884년 9월 조선에 들어온 미국의 의료선교사 호러스 뉴턴 알렌이었다. 그의 방한 후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 헨리 아펜젤러, 윌리엄 스크랜턴 등 많은 미국 선교사들이 공사관 주변에 선교 거점을 마련했다. 선교사들이 보기에 정동은 미국 공사관의 보호를 받고 일반 백성들과의 접근이 용이해서 좋았다. 당시 서울 전역은 지저분하고 더러워 위생상 좋지 않았는데 언덕이 많아 배수가 잘되고 공기가 맑다는 것도 작용했다.

알렌은 지금의 덕수궁 중명전이 있는 자리에 선교사 사택을 마련했다. 이후 알렌의 집에는 1886년 조선 땅을 밟은 애니 앨러스(나중에 벙커 부인), 릴리어스 호튼(나중에 언더우드 부인), 메리 헤이든(나중에 기포드 부인) 등 독신 여선교사들도 들어와 살았다.

호러스 알렌

 

알렌은 조선에서 서양인 최초이자 유일한 의사로 크게 환영을 받았다. 고종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 서양식 국립병원인 제중원을 1885년 4월 개원했다. 1887년 11월 초대 주미공사 박정양을 수행해 미국으로 건너갔다가 1889년 9월 돌아온 후에는 1890년 주한 미국공사관의 서기관과 부총영사로 임명되어 의료보다는 한미 외교에 힘을 쏟았다. 이후 1897년 7월 주한 미국공사 겸 총영사, 1901년 6월 주한 미국 특별전권공사 등 핵심 역할을 맡았다가 을사조약이 체결되기 전인 1905년 3월 해임되어 6월 조선을 떠났다. 알렌의 정동 자택은 왕실이 사들여 1899년 황실도서관 용도로 중명전을 건립했다. 1905년 지금의 모습으로 재건된 중명전에서는 그해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되어 통한의 역사 현장이기도 하다.

중명전(1899년)

 

중명전(현재)
호러스 언더우드, 경신학교 설립하고 새문안교회 창립

미 장로회 소속 선교사 호러스 언더우드(1859~1916)는 1885년 4월 미 감리회 소속 헨리 아펜젤러와 함께 내한, 미 공사관과 알렌의 집에서 가까운 곳에 위치한 저택을 구했다. 1885년 10월부터 이곳 사랑채에서 몇몇 학생들을 모아놓고 가르치다가 정동 13번지의 집과 1,000여 평의 대지를 사서 1886년 5월 언더우드학당(구세학당)을 세웠으니 경신학교의 시작이다.

호러스 언더우드

 

언더우드학당의 시작은 고아원이었다. 처음에 1명으로 시작한 언더우드학당은 예수교학당(1890~1893), 민로아학당(1893~1897), 중학교(1901~1902), 예수교중학교(1902~1905)로 운영되다가 1905년부터 경신학교(1905~1945), 경신중학교(1945~1950), 경신중고등학교(1950~현재)로 변모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언더우드는 1903년 황성기독교청년회(YMCA) 회장으로 피선되고 1915년 4월 YMCA 안에 ‘조선기독교대학’을 설립·개교했다. 조선기독교대학은 1917년 4월 연희전문학교로 인가를 받고 1917년 9월 지금의 연세대 자리로 교사를 옮겼다. 해방 후 연희대학교로 개명하고 1957년 1월 세브란스 의과대와 병합해 오늘의 연세대를 이루고 있다.

 

언더우드학당

 

언더우드는 1887년 9월 27일 사랑방에서 14명의 교인들과 함께 첫 예배를 보았다. 오늘날 ‘새문안교회’와 한국장로회는 이날을 뿌리로 삼고 있다. 교회는 교인수가 많아지자 1895년 지금의 신문로2가 시티은행 빌딩이 있는 자리에 한옥 예배당을 건축하고 그리로 옮겼다. 그러다가 1910년 신문로 1가 43번지 현재 위치에 서양식 예배당을 마련하고 오늘에 이르고 있다. 언더우드는 1889년 3월 제중원 여의사 릴리어스 호턴과 결혼했다.

언더우드의 정동 집은 1901년 이곳에서 운영되던 경신학교가 연지동으로 이전한 후 1902년 경운궁에 팔려나갔다. 이곳은 일제 강점기에는 미국 감리교 여선교부에서 구입해 독신 여선교사 사택으로 해방 후까지 사용하다가 1977년 예원중학교 소유로 넘어가 지금은 예원학교 운동장으로 사용되고 있다.

새문안교회 첫 예배당인 언더우드의 사랑채

 

언더우드보다 2개월 늦게 들어온 의료선교사 존 헤론은 미국 공사관과 담을 같이 쓰는 한옥을 구입한 뒤 1886년 7월 18일 이곳에서 국내 첫 개신교 세례를 베풀었다. 헤론은 그로부터 4년 뒤인 1890년 7월 이곳 자택에서 눈을 감았다. 이 집도 1902년 경운궁 소유로 넘어갔다가 해방 후인 1959년 미국 대사관의 소유로 바뀌었다. 간호사 애니 엘러스도 1887년 6월 부모없는 여아 1, 2명을 데려다가 가르쳤다. 정동여학당의 시작이다. 정동여학당은 1895년 10월 서울의 동쪽 연지동으로 새 교사를 마련하고 연지여학교로 개칭했다가 1909년 정신여학교로 개칭되어 사립학교 인가를 받았다.

 

헨리 아펜젤러, 배재학당 설립하고 정동제일교회 창립

미국 감리회 선교부 지역은 지금의 정동길과 서울 성벽을 따라 서소문 방향으로 형성되었다. 1885년 5월 3일 서울에 들어온 윌리엄 스크랜턴에 의해 병원이 가장 먼저 생겨났고, 이를 중심으로 헨리 아펜젤러의 배재학당, 메리 스크랜턴의 이화학당이 순차적으로 들어섰다.

헨리 아펜젤러

 

헨리 아펜젤러(1858~1902)는 1885년 7월 정동에 사저를 마련하고 1885년 8월 이곳에서 2명의 학생에게 영어를 가르쳤다. 배재학당의 시작이자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사학(私學)의 시작이었다. 아펜젤러는 곧 서소문 쪽 언덕에 관료들이 살던 7,000여 평 학교 부지를 마련하고 급한대로 집을 수리한 뒤 1886년 6월 8일 고종이 하사한 ‘재목을 키운다’는 뜻의 배재학당 이름으로 학교 문을 열었다.

배재학당(1887년)

 

아펜젤러는 1885년 10월 11일 조선에서 첫 성찬식을 집례했다. 정동제일교회는 이날을 교회 창립일로 기념한다. 아펜젤러의 아내가 1885년 11월 서울 정동에서 낳은 앨리스 아펜젤러는 조선에서 태어난 최초의 서양아이로 기록되었다.

1902년 6월 11일 전남 목포에서 열리는 성경번역자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배를 타고 제물포항을 떠났다가 아펜젤러를 태운 배가 전북 군산 앞바다 어청도 부근을 지나던 중 마주 오는 배와 충돌·침몰하면서 23명의 승객과 함께 바닷속으로 자취를 감췄다.

정동제일교회(1903년)

 

아들(윌리엄 스크랜턴)은 병원 세우고 어머니(메리 스크랜턴)는 이화학당 설립

윌리엄 스크랜턴(1856~1922)은 독자적인 주택과 선교 부지를 마련하기 위해 서울 성벽 언덕 아래에 있는, 넓은 마당에 사랑채와 헛간이 딸린 독립 가옥 2채를 구입했다. 7월 29일 서울로 올라온 아펜젤러도 이곳에 짐을 풀었는데 성벽과 붙은 서쪽 집엔 아펜젤러 가족이 그 아래 동쪽 집엔 스크랜턴 가족이 자리잡았다. 스크랜턴은 1886년 6월 15일 ‘미국인 의사병원’이란 간판을 내걸고 환자를 진료하기 시작했다. 10년 후 이전한 이 병원 자리에는 1885년 10월 아펜젤러의 집에서 시작된 정동제일교회의 건물이 들어섰다.

어머니 메리 스크랜턴(왼쪽)과 아들 윌리엄 스크랜턴

 

스크랜턴이 의료 활동을 통한 선교 사업에 전념하는 동안 어머니 메리 스크랜턴(1832~1909)은 여성교육에 힘썼다. 어머니가 조선에 왔을 때 나이가 53세나 되어 사람들은 ‘대부인’으로 불렀다. 대부인은 정동에 도착하자마자 학교 부지 구입에 나서 1885년 10월 북쪽 성벽과 연결된, 지금의 정동 32번지 언덕에 1,000여 평 되는 넓은 대지를 구입했다. 아펜젤러와 스크랜턴(아들)이 사들인 집들은 양반들이 살던 저택인 반면 대부인이 사들인 곳은 성벽 아래 가난한 사람들이 살던 곳이었다. 대부인은 대지 안에 있는 초가집을 헐고 교사를 지으며 학생을 모집했다. 첫 학생은 이름을 알 수 없어 ‘김씨 부인’으로 불린 고관의 소실이었다. 1886년 5월 31일, 이 김씨 부인만을 상대로 한 역사적인 첫 수업이 시작되었다. 이화여대와 이화여고의 뿌리인 이화학당의 시작이었다.

이화학당

 

손탁 호텔은 외교사절들의 사교장

그 무렵 지금의 이화여고 동문 쪽인 정동 29번지에는 한옥으로 된 손탁호텔이 문을 열어 서양 외교사절들의 사교장 역할을 했다. 이곳은 원래 미국 장로교 선교사 다니엘 기포드가 살던 곳이었는데 고종 왕실이 사들였다가 1895년 마리 앙투아네트 손탁(1854~1922)에게 하사한 곳이다. 자세한 개인사가 알려지지 않은 손탁의 고향은 프랑스와 독일의 국경에 위치한 알자스 로렌 지방이다. 이곳의 지정학적 위치에 따라 국적은 프랑스에서 독일로 바뀌었다가 러시아로 이주한 후 러시아 사람이 되었다.

망중한을 보내고 있는 손탁(오른쪽에서 두 번째)

 

내부를 서양식으로 꾸민 손탁의 사저는 손탁양저, 손탁빈관, 한성빈관 등으로 불리며 미국·러시아·영국·프랑스 공사와 외국 선교사들이 자주 찾아와 회합을 가졌다. 당시 정동은 외교의 중심지이자 신문화의 요람지로 50여 명의 서양인이 살고 있었다. 그러자 조선의 개화파 관료와 지식인들도 자연스럽게 손탁의 사저로 모여들었다.

그 무렵 정동구락부가 결성되면서 손탁의 사저는 더욱 북적거렸다. 정동구락부는 서양의 외교관들과 민영환·이완용·윤치호·이상재 등 조선인 관료들이 사교를 목적으로 조직한 친목모임이었다. 회원들은 모임을 거듭하면서 조선의 중립국화를 꾀하는 등 점차 정치적 색채를 띠었다. 결성 시기는 도쿄아사히신문 1895년 6월 29일자에 ‘러시아·영국·미국 공사 등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던 이완용·윤치호 등이 그들 나라 공사관원과 함께 정동구락부라는 것을 조직하려고 계획 중’이라는 기사가 나온 것으로 미루어, 대략 1895년 7월 무렵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외국인들의 서울 방문이 빈번해지면서 그들을 접대하고 머물게 할 숙소가 절실해졌다. 그런 시기에 고종이 왕실 재정으로 건축자금을 지원하자 손탁은 1902년 10월 2층으로 된 벽돌건물을 준공했다. 손탁호텔은 러시아풍 2층 양옥에 25개의 욕실이 딸린 객실을 갖추었다. 위층에는 귀빈식 객실, 아래층에는 일반 객실과 주방·연회장·식당·커피숍으로 활용되었다. 당시 서울에는 1900~1901년 무렵 건립된 팔레호텔, 임페리얼호텔 등이, 인천에는 일본의 해운업자가 건립한 조선 최초의 호텔인 대불호텔(1888)과 중국인이 건립한 스튜어트호텔(1889) 등이 영업을 하고 있었다.

1902년 2층양옥으로 지어진 손탁호텔

 

영국 정치가 윈스턴 처칠, 미국 작가 마크 트웨인도 손탁호텔에 투숙

손탁호텔에 머물렀던 손님 중에는 훗날 영국의 총리가 될 젊은 시절의 윈스턴 처칠, 미국 작가 마크 트웨인, 미국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의 딸 앨리스 등도 있었다. 처칠은 러일전쟁이 한창이던 1904년 말 종군 기자로 일본을 경유해 만주로 취재를 하러 가는 길에 손탁호텔에 머물렀다. 트웨인 역시 러일전쟁 취재차 조선에 와 종군하면서 손탁호텔의 단골 손님이 되었다. 1905년 을사조약을 전후한 시점에 이토 히로부미 등도 이곳에 투숙, 조약 체결을 배후에서 조종하고 압박했다.

그러던 중 1905년 을사조약 체결로 사실상 조선의 주권이 일본 손에 넘어가고 1907년 고종이 강제로 퇴위하면서 손탁의 기반이 사실상 사라졌다. 결국 손탁은 1909년 팔레호텔의 주인인 프랑스의 호텔경영자 보에르에게 손탁호텔을 팔고 자신이 심부름꾼으로 부리던 한국 아이를 양자로 데리고 프랑스로 떠났다.

손탁호텔 건물은 1917년 이화학당으로 넘어가 기숙사로 사용되다가 이화학당의 프라이홀 신축을 위해 1922년 헐리면서 역사 속으로 자취를 사라졌다. 프라이홀은 1923년 9월 완공했으나 1975년 화재로 소실되어 지금은 그 자리에 이화100주년 기념관이 자리를 잡고 있다. 손탁은 호텔이 허물어진 1922년 7월 7일 프랑스 칸에서 생을 마감했다.

 

미 감리회는 정동에 남고, 장로교는 정동을 떠나

미국, 영국에 이어 세 번째로 공사관을 개설한 나라는 1885년 10월 러시아였다. 러시아공사관이 들어선 곳은 그동안 가장 높은 언덕에 있던 영국 영사관조차도 굽어볼 수 있는 자리였다. 프랑스는 박동(현 수송동)에 한옥을 구입해 공사관 건물로 사용하다가 1889년 10월 정동 28번지(현 창덕여중 정문)로 옮겨 르네상스식 2층 건물을 지어 사용하다가 1910년 10월 현재 대사관이 있는 서대문 밖 합동으로 이전했다.

러시아공사관

 

독일 영사관은 처음에는 낙동(현 충무로1가)에서 개관했다가 1886년 11월 박동(수송동) 시대를 거쳐 1891년 정동의 육영공원과 자리(지금의 서울시립미술관)를 맞바꿨다. 그러다가 1900년 경운궁에 터를 넘기고 1902년 남산 아래 회동(현 남창동)에 서양식 건물을 짓고 이전했다. 이렇게 경운궁 주변에 미국, 영국, 러시아, 독일, 프랑스 공사관들이 하나둘 자리를 잡아 정동은 자연스럽게 서양인들의 치외법권 지역이 되었다.

미국 선교사들은 유사시 신변을 보호받을 수 있는 자국 공사관 주변에 집을 마련했지만 대략 정동길을 경계선으로 장로교와 감리교로 양분되었다. 동쪽 편에는 미국 장로교, 서쪽 성벽 아래에는 미국 감리교 선교기지가 터를 잡았다.

그러다가 장로교 선교부가 정동 밖 이전을 추진했다. 길 건너편의 감리교 선교부가 더욱 확장하는 데다 낙후된 선교사 사택을 수리해야 하는 필요성이 제기되었기 때문이다. 정동에 몰려드는 학생, 환자, 신자의 수요를 감당하지 못한 것도 이유였다. 그들은 점차 정동에서의 사업을 줄이고 일반 민중 속으로 파고드는 쪽으로 궤도를 수정했다. 1902년 언더우드가 남대문 밖에 새 집을 짓고 나가는 것으로 장로교 선교사들은 정동을 모두 떠났다. 장로교가 떠난 곳은 상당부분 경운궁으로 편입되어 경운궁의 부속 건물로 채워졌다. 감리교 소속 스크랜턴의 병원도 남대문 상동 쪽으로 이전하고 병원이 있던 자리에는 정동제일교회의 새 건물이 들어섰다.

 

경운궁에 놓인 2개의 육교

덕수궁 돌담길을 걷다보면 서울시립미술관 부근에 약간 튀어나온 돌담이 있다. 요즘의 육교와 같은 기능을 하는, 구름다리를 뜻하는 운교(雲橋)의 교대(橋臺)다. 당시 운교를 만든 이유는 경운궁 밖 궐외각사(闕外各司)와의 연결 때문이었다. 전통적으로 궁궐 내에는 궐내각사가 있고 궐밖에는 궐외각사가 있다. 궐내각사란 왕과 왕실을 보좌하는 승정원, 춘추관, 예문관 등 궐내 관청을 말하고 궐외각사는 의정부, 육조, 사헌부 등의 궐외 관청을 말한다.

지금도 덕수궁 돌담길에 남아있는 운교의 교대

 

당시는 궐외각사 중 중요한 역할을 하는 의정부가 정동길(현 덕수궁 돌담길) 건너편 언덕에 위치한 전 독일공사관 터(현재의 서울시립미술관 자리)에 있었다. 이 의정부 부지는 조선 정부가 1900년 독일공사관을 매입한 뒤여서 경운궁 땅이었다. 대한제국의 틀을 잡기 위해 궁역을 확장하는 데 관심이 많은 고종은 1902년 경운궁의 범위를 그곳까지 확장할 계획을 세웠다. 그러자 주요 통로인 정동길이 사라질 것을 우려한 각국 공사들이 불편을 호소하며 반대하고 나섰다. 결국 정부가 절충안으로 내놓은 게 운교다. 언제 사라졌는지는 알 수 없고 건립 시기는 1903년 8월~1904년 4월 사이로 추정되고 있다. 현재는 운교의 교대(橋臺)만 덕수궁 돌담에 남아있다.

당시 경운궁 운교 모습

 

그런데 경운궁에는 운교 말고 또 다른 육교가 있었다. 외국 손님을 맞이할 때 관병식 등의 장소로 좁은 경운궁 대신 경희궁을 사용하기 위해 경운궁과 경희궁을 연결한 홍교(虹橋)다. 대략 현 한국씨티은행에서 경희궁 앞 흥화문까지 난 다리로 아래로는 전철이 지나갔다. 건립 시기는 1902년 8월~10월 사이다.

경운궁과 경희궁을 잇는 홍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