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박스

홍난파가 ‘봉선화’의 원곡(元曲)인 ‘애수’를 작곡한 지 어느덧 100년… ‘애수’ 선율에 김형준이 ‘봉선화’ 시를 붙이고 성악가 김천애가 ‘봉선화’를 부르면서 전 국민의 애창곡으로 불려

↑ 바이올린을 연주하고 있는 홍난파

 

by 김지지

 

난파 홍영후(1898~1941)가 ‘봉선화’를 작곡한 지 어느덧 100년이 되었다. 홍난파가 처음 ‘봉선화’의 원곡인 ‘애수’를 바이올린곡으로 작곡한 건 1920년 4월이다. 다만 그때는 곡만 있고 가사는 없었다. ‘애수’ 선율에 김형준의 시 ‘봉선화’가 붙어 우리 민족의 영원한 애창곡이 된 것은 그로부터 5년 후였다.

 

홍난파는 초기 한국 양악계의 팔방미인

홍난파는 작곡가, 바이올리니스트, 음악평론가, 교육자로 한국 음악사에 굵은 족적을 남긴 초기 한국 양악계의 팔방미인이었다. 소설도 여러 편을 써 문필에도 재능이 있었다. 그의 이름 앞에는 항상 ‘최초~’라는 형용어구가 따라다녔다. 한국 최초의 바이올리니스트, 최초의 기악곡을 작곡한 작곡가, 최초의 음악평론가, 최초의 실내악단 설립자, 최초의 음악잡지 발행인, 최초의 방송관현악단 지휘자 등이 그것이다.

홍난파

 

홍난파는 경기도 화성에서 태어나 2살 때 서울로 올라와 서울 정동 지금의 예원학교 터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부친 홍준은 선교사 언더우드에게 한국어를 가르친 역관으로 활동하고 언더우드를 도와 신약성서를 번역하는 일에 참여하면서 일찍부터 서양문물에 눈을 떴다. 형 홍석후는 세브란스의전(제중원의 후신) 제1회 졸업생으로 조선의 서양의학 발전의 산파 역할을 했다.

홍난파를 음악 세계로 이끈 것은 10살 무렵 집 앞의 이화학당에서 울려 나오는 피아노와 노래 소리였다. 13살 때인 1911년 그의 손에 쥐어진 바이올린과 교습서는 음악 인생의 디딤돌이었다. 홍난파는 그해 9월부터 당시 조선정악전습소 교사로 있던 김인식에게서 바이올린을 배우고 3개월 만인 12월 23일 세브란스의전 강당에서 열린 성탄 축하 음악회에서 첫 바이올린 독주를 함으로써 음악의 신동으로 유명해졌다.

1912년 YMCA 중학부와 1915년 조선정악전습소 양악부를 졸업하고 전습소 교사로 3년 동안 후진을 양성하다가 1918년 일본 도쿄음악학교(우에노음악학교)로 유학을 떠났다. 당시 도쿄음악학교에는 한국 최초 피아니스트 김영환과 최초 소프라노 윤심덕이 있었다.

YMCA 청년학관 중학과를 졸업하는 홍난파와 동료들(1914.3). 뒷줄 오른쪽 두 번째가 홍난파

 

바이올린곡 ‘애수’는 우리나라 최초의 예술가곡

홍난파의 음악 공부는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났을 때 도쿄에서 독립선언서를 만들어 뿌리는 등 독립 만세 운동에 참여했다가 일본 경찰의 추적을 피해 국내로 귀국하면서 중단되었다. 국내에서는 음악보다 문학에 심취했다. 1919년 9월부터 매일신보에 소설 ‘허영’을 60회 연재하고, 1921년 6편의 단편소설로 구성된 창작소설집 ‘처녀혼’을 출간했다.

‘처녀혼’의 첫 장에는 홍난파가 바이올린곡으로 작곡한 ‘애수’ 악보가 게재되었는데 악보 밑에 ‘1920년 4월 28일 작’이라고 적혀있어 ‘애수’의 작곡 시기를 분명하게 알려주고 있다. ‘애수’ 이전의 우리나라 음악계는 권학가, 운동가, 망국가 등 단순한 창가 시대에 머물러 있었다. 그런 점에서 ‘애수’는 우리나라 음악계에 일대 전환점을 마련해준 최초의 예술가곡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러나 ‘애수’는 가사가 없어 한민족의 한과 설움까지 담아내지는 못했다.

 

‘애수’ 선율에 ‘봉선화’ 시를 붙인 건 1925년 김형준

‘애수’ 선율에 ‘봉선화’ 시를 붙여 우리 민족의 영원한 애창곡이 되도록 한 이는 1925년 정신학교 음악 교사 김형준이었다. 노래 제목이 ‘봉선화’가 된 데는 온갖 설이 분분하지만 김형준이 자기 집 뜰에 피어 있는 봉선화를 보고 “우리 신세가 저 봉선화와 같다”며 시를 지었다는 설이 유력하다.

김형준은 평양 숭실학교 출신으로 숭실 선배 김인식에게 음악을 배우고 정신학교와 경신학교에서 음악교사를 했다. 서울 새문안교회에서는 연주와 지휘를 병행했다. 김형준과 홍난파는 사돈 간이다. 김형준의 딸이자 한국 최초의 여성 피아니스트 김원복이 홍난파의 조카인 홍성유와 부부이기 때문이다. 홍성유와 김원복도 홍난파와 같은 도쿄고등음악학원 출신으로 둘은 일본 유학시절 만났다.

홍난파(왼쪽)과 김형준(가운데)

 

홍난파는 1921년 자신의 소설 ‘최후의 악수’를 각색해 연극 무대에 올렸다. 문학과 음악, 두 분야를 무섭게 질주하던 홍난파에게 제동을 건 이는 소설가 변영로였다. 1925년 구정 때 변영로가 “음악이나 하면 했지 주제넘게 소설은 다 무엇이냐? 개천지 통만고(開天地 通萬古)해서 두 가지 예술에 대성한 천재가 누구란 말이냐?”라고 질책한 것이다.

홍난파는 이후 문학 활동을 중단하고 음악 활동에만 전념했다. 1925년 4월 음악과 문학을 아우른 우리나라 최초의 음악 전문지 ‘음악계’를 창간, 음악평론가로 활동하면서 같은 해 결성된 ‘코리아 재즈 밴드’에 피아니스트로 참여하고 1926년 종로 YMCA 강당에서 한국 최초로 재즈 공연을 열었다. ‘음악계’는 유럽과 미국의 음악계 흐름과 음악가를 주로 다루고 틈틈이 서양음악 악보를 제공해 연주자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으나 1926년 2월 제4호를 끝으로 폐간되었다.

 

홍난파 이름을 지우고는 20세기 한국 음악사 온전히 기술할 수 없어

홍난파는 1926년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고등음악학원에 다니면서 도쿄관현악단과 도쿄신교향악단(NHK교향악단의 전신)에서 제1바이올린 연주자로 활동했다. 1929년 귀국 후에는 ‘조선 동요 백곡선(百曲選)’ 상권(1929.10)을 내고 1931년 7월 꿈에 그리던 미국 유학의 장도에 올랐다. 시카고의 셔우드 음악학교에서 1년 6개월간의 과정을 마치고 1933년 2월 귀국해서도 놀라운 창작열을 보여주어 3개월 뒤 ‘조선 동요 백곡선’ 하권(1933.5)을 발간했다.

1933년 9월 15일 제1바이올린 홍난파, 제2바이올린 홍성유, 제3바이올린 이영세로 구성된 우리나라 최초의 실내악단 ‘난파트리오’의 첫 공연을 정동 모리스홀에서 펼쳤다. 홍성유는 홍난파의 큰형 석후의 셋째 아들이자 ‘봉선화’의 작사자 김형준의 사위다.

1933년 여름 홍난파(오른쪽), 홍성유(왼쪽), 이영세(가운데)로 구성된 우리나라 최초의 실내악단 ‘난파트리오’

 

홍난파는 작곡가로도 가곡, 동요, 대중가요를 넘나들었다. ‘고향 생각’, ‘옛 동산에 올라’, ‘성불사의 밤’, ‘장안사’ 등 나라 잃은 민족의 설움과 애수가 짙게 배어 있는 가곡 10여 곡을 작곡하고 ‘달 마중’, ‘낮에 나온 반달’, ‘퐁당퐁당’ 같은 동요 117곡을 발표했으며 ‘나소운’이라는 예명으로 ‘백마강의 추억’, ‘순정의 꽃장사’ 같은 대중가요도 10여 편 작곡했다.

홍난파와 제자인 이대형과의 결혼(1934.12.27). 홍난파는 첫 부인과 사별했다.

 

‘봉선화’가 전 국민의 가요가 된 것은 성악가 김천애가 부른 후

1937년 6월에는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검거되었다가 늑막염이 재발해 72일 만에 풀려났다. 이 다재다능한 음악가도 일제가 던져놓은 올가미와 깔아놓은 덫을 피하지는 못했다. 1937년 4월 조선총독부 주도로 결성한 ‘조선문예회’에 가입하고 그해 11월 소설가 전영택, 성악가 현제명 등과 함께 사상 전향서를 썼으며 1938년 6월 친일 단체인 ‘대동민우회’에 가입했다. 1937년 12월 경성방송관현악단 지휘자로 취임한 것은 사상 전향을 한 그에 대한 일제의 배려였다.

그 무렵 중일전쟁을 미화한 ‘정의의 개가’와 ‘공군의 노래’, 대동아공영권을 찬양한 ‘희망의 아침’ 등 친일 노래도 몇편 작곡했다. 홍난파 같은 전천후 음악가가 지금까지 나오지 않고 홍난파의 이름을 지우고는 20세기 한국 음악사를 온전히 기술할 수 없다는 점에서 그의 친일은 아쉬운 점이 많다. 홍난파는 1939년 6월 한국 최초로 관현악곡 2곡을 발표했다. ‘관현악 조곡’과 ‘나그네의 마음’이다.

왼쪽은 홍난파의 신간 ‘조선가요작곡집’과 ‘조선동요백곡집’의 광고(동아일보 1933.6.4)이고 오른쪽은 이광수의 서평(동아일보 1933.6.6)

 

1940년 늑막염이 악화해 사실상 음악 활동을 중단한 채 병원을 전전하다가 1941년 8월 30일 “내가 죽거든 연미복을 입혀 화장해 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서울 홍파동 자택에서 눈을 감았다. 독일 선교사가 짓고 홍난파가 1935년부터 생활한 홍파동 집은 현재 대한민국 근대문화유산 90호로 지정되어 있다. 서울 종로구 서울시교육청 뒤편의 인왕산 자락 ‘성곽길’을 걷다 보면 눈에 띄는 붉은 벽돌과 뾰족한 처마로 이뤄진 양옥이 그 집이다.

서울 종로구 홍파동의 홍난파 가옥

 

‘봉선화’가 비로소 전 국민의 가요가 된 것은 홍난파 사후 일본 유학생 소프라노 김천애를 통해서였다. 1942년 도쿄 히비야공회당에서 열린 전일본 신인음악회에서 김천애가 흰색 저고리 차림으로 봉선화를 불러 동포 청중을 눈물바다로 만들고 이로 인해 김천애가 일본 경찰에 연행되었다는 사실이 조국에 알려지면서 ‘봉선화’는 암울했던 식민지 시대에 조선인의 애창곡이자 한민족의 대표곡이 되었다.

소프라노 김천애

 

일제는 김천애가 1942년 가을, 서울과 평양 등지에서 개최한 귀국 공연 때도 ‘봉선화’를 불러 조선인의 심성을 자극하자 ‘봉선화’를 금지곡으로 묶고 김천애의 음반까지 판매하지 못하도록 했다. 그러나 ‘봉선화’는 이미 조선 민족의 마음에서 마음으로 이어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