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박스

빌리 브란트의 주도로 분단 후 처음 성사된 동서독 정상회담 어느덧 50년… 통일은 그로부터 20년 후 갑자기 찾아왔다

↑  에어푸르트 역에서 분단 후 처음 만나 악수하는 동서독 정상. 빌리 브란트 서독 총리(오른쪽)와 빌리 슈토프 동독 총리

 

by 김지지

 

1969년 브란트의 서독 총리 취임 일성은 ‘동방정책’의 확실한 다짐

빌리 브란트(1913~1992)가 서독의 총리에 취임한 1969년은 미·소 간 ‘전략무기감축조약(START 1)’ 협상이 시작되는 등 동·서 간 냉전구조에 처음으로 변화가 일어난 해였다. 그해 10월, 사민당(사회민주당)과 자민당(자유민주당)의 연립정부 총리로 취임한 브란트는 취임 일성으로 이렇게 말했다. “독일에는 2개의 국가가 존재하며 둘은 서로 외국이 아니라 특수한 관계에 있을 뿐이다.” 이는 ‘동독과 외교관계를 맺은 나라와는 외교 단절도 불사한다’는 기존의 외교원칙 ‘할슈타인 원칙’에 정면으로 배치된 것이었고 브란트가 향후 추진할 ‘동방정책’의 확실한 다짐이었다.

빌리 브란트

 

브란트의 연설은 그전까지 브란트의 사민당과 연정을 하다 야당이 된 기민당(기독민주당) 의원들의 거센 반발을 불렀다. 기민당의 원내총무는 “동독을 국가로 인정하는 것은 분열주의적 발상”이라며 반통일노선, 분단 고착화, 매국행위라고 비난했다. 공교롭게도 당시 기민당의 원내 총무는 20년 뒤 독일의 통일을 이룬 헬무트 콜이었다.

하지만 브란트의 연설에 솔깃해하는 사람이 있었다. 동독의 국가수반인 국가평의회 의장 발터 울브리히트였다. 그는 1969년 12월 구스타프 하이네만 서독 대통령에게 서신을 보내 동·서독 간 동등한 관계 수립을 골자로 하는 국가조약안을 제안했다. 서독 정부의 수락에 따라 양측은 5차례의 실무접촉을 하면서 정상회담에서 논의할 의제의 가닥을 잡아갔다.

 

서독의 객차를 동독의 기관차가 끄는 ‘물리적 결합’ 먼저 이뤄져

문제는 회담 장소였다. 서독은 열차로 서베를린을 거쳐 동베를린으로 들어가기를 원한 반면 동독은 베를린 장벽 통과라는 상징성을 꺼려해 이를 거부했다. 결국 동독 국경의 소도시 에어푸르트가 회담 장소로 결정되었다.

에어푸르트 위치

 

브란트 일행을 태운 열차가 서독의 본을 떠나 8시간 만에 동·서독 경계에 위치한 게어스퉁겐 역에 도착한 것은 1970년 3월 19일 오전 7시 45분이었다. 특별열차의 기관차는 이곳에서 동독 기관차로 교체되었다. 서독의 객차를 동독의 기관차가 끄는 ‘물리적 결합’이 분단 25년 만에 이뤄진 것이다.

브란트를 태운 기관차는 2시간 후 동독의 에어푸르트역에 도착했다. 수천 명의 동독 국민들이 “빌리!”를 연호하며 종전 이후 25년 만에 이뤄진 역사적인 동서독의 정상회담을 열렬히 환영했다. 공교롭게도 동서독 총리 모두 이름이 ‘빌리’였다. 동독 총리는 빌리 슈토프였다. 회담장으로 가는 연도마다 그리고 회담장인 에어푸르트 호텔 밖에서도 브란트 환영 열기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취재진이 세계 51개국에서 600명이나 몰려들 정도로 취재경쟁도 뜨거웠다.

에어푸르트 호텔 앞에서 “빌리”를 연호하는 시민들. 발코니에 브란트가 서있다.

 

분단 후 첫 정상회담에서 ‘기존 입장’만 재확인

하지만 안타깝게도 회담장 밖의 뜨거운 열기는 회담장 안으로까지 이어지지는 못했다. 오전 10시에 시작된 정상회담에서 동독은 국제법상 동등한 동·서독 관계 수립, 할슈타인 원칙의 명백한 포기, 유엔 동시 가입 신청, 군비 50% 감축 등 7개항을 요구했다.

서독은 “동독과 서독은 서로 외국이 아니다”, “선린관계의 제도화를 위해 노력한다” 등의 6개항을 제시하며 양측은 하루 동안 두 차례 회담을 열었으나 두드러진 성과는 없었다. 결국 분단 25년 만에 이뤄진 첫 정상회담에서 양측은 서로의 ‘기존 입장’만을 재확인한 채 2차회담을 서독에서 개최한다는 내용의 공동성명만 발표하고 헤어졌다.

2차 정상회담은 1970년 5월 21일 서독의 카셀에서 열렸다. 그 후 이견을 좁히려는 실무진 간의 노력은 계속되었고 70여 차례의 실무접촉이 있은 뒤에야 1972년 12월 21일 서로를 ‘사실상의 국가’로 인정한다는 기본조약을 체결했다. 첫 정상회담이 열린 지 2년 9개월 만이었다. 이 ‘기본조약’과 7개월 전 체결된 ‘통행 조약’을 계기로 동서독 간의 교류는 눈에 띄게 활발해졌다. 1969년 110여만 명이던 서독 주민의 동독 방문은 1970년 265여만 명, 1972년 620여만 명으로 급증했다.

1970년 8월 12일 모스크바에서 독·소조약이 조인되고, 1973년 9월 유엔 동시가입, 1974년 3월 상주대표부 개설로 이어진 양측의 거리 좁히기는 결국 1989년 베를린 장벽 붕괴와 1990년 독일 통일로 이어지는 징검다리 역할을 했다. 통일이 되기까지 양측 정상은 공식·비공식을 합쳐 9차례 만나 통일의 디딤돌을 놓았다.

 

빌리 브란트의 삶

이렇게 독일 통일의 물꼬를 튼 빌리 브란트는 사생아 어머니의 사생아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한 번도 아버지를 보지 못한 채 외할아버지를 아버지로 부르며 성장했다. 사실 외할아버지도 어머니의 계부였기 때문에 진짜 외할아버지가 아니었다. 브란트는 17살 때인 1930년 독일 사민당에 가입하고 반나치 청년운동에 가담했다. ‘빌리 브란트’란 가명은 1933년 3월 독일 드레스덴에서 열린 비밀모임 때부터 사용했다.

1933년 1월 히틀러가 권력을 장악한 후 좌파 정당들이 불법화되고 자유주의자와 사회주의자에 대한 탄압이 강화되었다. 브란트는 1933년 4월 노르웨이로 망명해 그곳에서 15년 동안 나치에 저항했다. 1936년 스페인내전 때는 좌파 진영을 지원하는 기자로 참전했다. 그는 그곳에서 소련 공산당의 허구를 통렬히 깨달았다. 그때의 경험은 사회주의가 본래의 이념과 정치적 노선을 실천하려면 자유와 민주주의의 기초 위에 서 있을 때만 가능하다는 것을 그에게 가르쳐주었다.

빌리 브란트. 왼쪽부터 1930년대, 1947년, 1959년 모습

 

2차대전 후 브란트는 1949년 연방의회 베를린 시의원으로 정계에 입문하고 1957년 베를린 시장에 취임했다. 1961년 베를린 장벽이 세워지는 것을 직접 목격하고 1964년 사민당 당수로 선출되었다. 독일인들의 사회적·제도적 개혁 요구로 보수당 연립정권이 붕괴되고 기민당과 사민당의 이른바 ‘좌우 대연정’이 수립되면서 사민당 당수 브란트는 1966년 부총리 겸 외무장관으로 입각해 ‘동방정책’을 구체화했다. 그러다가 1969년 10월 21일 단 3표 차로 사민당·자민당 연립정부 총리에 선출된 후, ‘동방정책’을 본격적으로 추진했다.

 

서독 총리로는 전후 처음 폴란드와 이스라엘 방문

브란트는 동서독 간 첫 정상회담을 성사시키고 같은 해 12월 7일 서독 총리로는 전후 25년 만에 처음 폴란드를 방문해 그 동안 외교관계가 단절되었던 폴란드와의 국교정상화를 위한 조약에 서명하고 바르샤바의 한 유대인 위령탑을 참배했다.

1970년 12월 빌리 브란트 서독 총리가 폴란드 유대인 위령탑 앞에서 무릎을 꿇고 사죄하고 있다.

 

위령탑은 1943년 4월 바르샤바 게토에 거주하고 있던 7만 명의 유대인이 그들을 학살수용소로 보내려는 나치에 맨손으로 저항하다 5만6000여 명이 현장에서 사살되거나 체포된 곳이었다. 나치의 만행에 희생된 망자들을 애도하며 머리를 조아린 브란트는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빌었다. 브란트의 사죄는 동방정책과 함께 훗날 독일 통일의 밑거름으로 평가받았다.

브란트는 1971년 동서독 간 첫 정상회담을 성사시킨 공로로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1973년에는 서독 총리로는 처음 이스라엘을 방문했다. 당시 독일에 대한 유대인들의 격앙된 감정으로 총리의 방문 자체가 껄끄러웠지만 브란트는 나치가 유대인들에게 가했던 만행에 대해 진심으로 사죄하고 용서를 청했다. 이스라엘 총리는 “우리는 용서한다. 그러나 잊지는 않을 것”이라는 그 유명한 말로 화답했다.

빌리 브란트가 1973년 6월 7일 이스라엘 예루살렘의 야드바셈(yad vashem)에서 과거 유대인 학살에 대해 사죄하고 용서를 청했다. 야드바셈은 히틀러 시절 대학살을 당한 유대인 600만 명을 추념하기 위해 이스라엘에 세운 유대인학살기념관이다.

 

비서가 동독 스파이라는 사실 밝혀져 사임

브란트는 총리 취임 5년 만인 1974년 5월 6일 물러났다. 그의 비서 귄터 기욤이 18년간 암약해온 슈타지(동독의 정보기관)의 스파이였던 것으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그런데 미심쩍은 몇 가지 일로 사임 배경은 명쾌하지 않았다.

사임 며칠 후부터 돌기 시작한 “궁중 음모의 제물”, “기욤은 궁중 모사꾼들에게 하늘이 때맞춰 내려준 선물”이라는 소문이 그랬고, 브란트가 여자를 좋아한다는 사실이 새삼스러운 것도 아닌데 간첩사건이라는 민감한 시기에 여자 문제가 불거져 나온 것도 그랬다. 한 작가의 말마따나 그에게 여자란 “언제나 새로이, 언제나 다시, 쉼 없이, 그리고 헛되이”로 정의되는 그런 존재였다. “브란트의 전용열차 객실에 금발의 여인이 들락거렸다”는 등 스캔들에 불을 지핀 것은 보수 신문들이었다.

기욤 사건에도 의심스러운 구석이 많았다. 1년 전부터 기욤이 스파이라는 사실이 포착되어 내사에 들어갔으나 당내 주요 인사들이 아직 구체적인 증거가 없다며 좀더 기다려 보자고 말리는 바람에 기욤의 스파이 행위가 1년 더 이어졌기 때문이다. 브란트는 자살을 생각할 정도로 자포자기 상태에 빠졌다가 결국 측근에게 “배신당했다”고 심경을 토로한 뒤 사임을 결정했다.

빌리 브란트와 개인 비서 귄터 기욤

 

브란트 물러나게 한 비서 귄터 기욤은 누구?

동독 출신의 기욤이 난민 자격을 얻어 부인과 함께 베를린 장벽을 가로질러 서독으로 넘어온 것은 1956년이었다. 그의 아버지 막스 기욤은 2차대전이 일어나기 전, 반나치 지하활동을 하던 브란트를 치료한 적이 있는 의사이자 공산주의자였다.

동독의 비밀첩보기관 슈타지는 이런 사실을 알고 그의 아들이자 열렬한 공산주의자 귄터 기욤을 스파이로 끌어들여 베를린 장벽을 넘어가도록 했다. 기욤의 아버지는 옛 친구인 브란트에게 편지를 보내 자신의 아들에게 일자리를 구해달라고 부탁했다. 브란트는 옛 친구의 아들이 난민수용소에서 나올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하고 자신의 정치조직에서 행정보좌관으로 일하도록 주선했다.

1969년 기욤이 브란트의 개인 비서에 발탁됨으로써 10여 년에 걸친 슈타지의 스파이 작전은 마침내 결실을 보게 되었다. “고등교육을 받지 않았고 신원조회도 불투명하다”는 지적이 일각에서 제기되었으나 무시되었다. 기욤은 브란트의 집에 들락날락거리고 브란트의 책상 위를 오가는 모든 기밀들을 엿볼 수 있게 되었다.

기욤의 작전은 1973년 영국 정보통신본부가 시행한 암호해독작전에 의해 발각되면서 막을 내렸다. 기욤은 체포되어 13년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서독 정부는 이미 막대한 손실을 입은 상태였다. 서독의 외교 및 군사 관련 기밀들이 4년 동안 슈타지 수중으로 고스란히 넘어간 것이다.

동방정책을 펼쳐온 브란트는 분명 동독에게 우군이었다. 1972년 4월, 브란트에 대한 불신임투표 때, 동독이 의원들을 매수해 근소한 차로 부결시킨 것도 이 때문이었다. 그런데도 동독이 결국 브란트를 낙마시키는 실책을 범했으니 결과적으로 무의미한 승리를 뜻하는 ‘피로스의 승리’가 된 셈이다.

빌리 브란트가 베를린 장벽이 붕괴된 후 브란덴부르크 문 주변에 운집한 군중 앞에 서 있다. (1989.11.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