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박스

[‘살아있는 권력’에 맞서는 세계 검찰들 下] 이탈리아 피에트로 검사가 지핀 ‘마니 풀리테’ 운동… 성과 적지 않았으나 국민의식과 제도적 시스템이 뒷받침하지 않아 베를루스코니라는 구악(舊惡) 정치인 등장시켜

↑ ‘마니 풀리테’ 운동의 주역들. 왼쪽부터 피에트로와 콜롬보 검사, 보렐리 치안판사

 

by 김지지

 

▲이탈리아 전후(戰後) 정치 상황… 정치인과 기업인들의 유착을 관행으로 치부

 

이탈리아는 독일·일본과 함께 2차대전의 패전국이어서 종전 후 미군정의 지배를 받았다. 미군정은 전 세계가 미국·소련 중심의 냉전에 휩싸이게되자 공산당 등 좌파 정치 세력은 배제하고 우파인 기독교민주당(기민당) 중심의 연립정부를 구성했다. 다행히 1950~1960년대의 경제성장은 눈부셨으나 이에 안주해 사회기강 등을 세우는 데는 둔감했다. 이는 1970년~1980년대에 정치적 후견인제도, 파벌주의, 엽관주의, 마피아 유착 등이 만연한 원인으로 작용했다.

후견인제도는 중앙의 주요 인물을 후견인으로 놓고 그 아래 수많은 직위와 끈들이 연결되어 있는 제도이고, 엽관주의는 선거로 정권을 잡은 사람이나 정당이 선거에서 공을 세운 사람을 관직에 임명하는 정치 관습을 뜻한다. 제1당인 기민당은 사회당 등의 연립 정당들과 함께 이러한 상황을 이용하고 조장했다.

집권당이 한번의 정권 교체도 없이 계속 권력을 독점하자 정치인들은 이를 기반으로 이권에 개입하고 기업과 유착하거나 불법으로 결탁하는 패거리를 양산했다. 1980년대 말까지는 여전히 냉전시대여서 기민당 등 연립 정당은 한 방향, 한 목소리로 국민을 유도하는 반공 정치를 표방하면서 속으로는 부패한 방식으로 잇속을 챙겼다. 그런데도 이 강력한 집단과 충돌하는 정당·단체의 세력이 약해 부정부패는 아무런 견제 없이 정치 사회 전반에 깊숙이 뿌리를 내렸다. 대기업들은 이런 정치인들과 유착을 강화하면서 부를 쌓았다.

권력독점의 세 주역. 왼쪽부터 베티노 크락시(전직 총리이자 사회당 당수), 줄리오 안드레오티(전직 총리이자 장관), 아르날도 포를라니(기민당 당수)

 

부정부패가 극성을 부린데는 선거제도에도 원인이 있다. 공산당의 집권을 막기 위해 비례대표제를 시행하다보니 제1당이 단독으로 집권하기 어렵고 그래서 군소정당과 함께 연립정부를 구성하는 과정에서 정치적 야합이 성행했다. 그럼에도 성장의 절정기를 달릴 때이고 반공을 우선하던 냉전기여서 정치인과 기업인들의 유착은 관행이라는 이름으로 치부되고 나라를 위한 효율성으로 인식되었다. 하지만 부패사건이 터질 때마다 미봉책의 명분과 구실을 제공해주던 냉전의 위협이 1980년대 말 사라지고 경제가 하향곡선을 그리면서 부패라는 종기를 놔두었다가는 나라가 결단날지도 모른다는 국민적 공감대가 형성되었다.

그러던 1992년 2월 이탈리아 북부 밀라노에서 조그마한 사건 하나가 터졌다. 소규모 청소용역회사 사장이 관급공사를 따기위해 사회당에 정치자금을 대오다 힘에 부쳐 이를 검찰에 알린 것이다.

 

▲‘마니 풀리테’ 가동… 선봉은 피에트로 검사

 

용역회사 사장은 1992년 2월 어느날 밀라노 사회당 지부 위원장이자 요양원 원장인 마리오 키에자에게 사업청탁의 대가로 700만 리라를 뇌물로 건네주면서 펜형의 녹음기를 상의 안에 넣고 대화내용을 녹음했다. 또한 결정적인 증거를 남기기 위해 700만 리라 지폐에 모두 표시를 했다.

그러자 2월 17일 밀라노 검찰청의 안토니오 디 피에트로(당시 42세) 검사가 뇌물을 받은 요양원장의 집을 수색해 700만 리라의 현금을 압수했다. 수년 동안 이탈리아 사회 전체를 들쑤셔놓은 이른바 ‘마니 풀리테’(mani pulite·깨끗한 손)가 작동하는 순간이었다.

마니 풀리테의 주축은 밀라노의 젊은 검사 3명이었고 그중 선봉은 피에트로 검사였다. 피에트로는 빈농에서 태어나 경찰관으로 일하면서 밀라노 대학 법학과 야간부에 등록, 뒤늦게 사법 시험에 합격하고 1981년 치안판사로 법조계에 발을 들여놓은 인물이었다. 수사팀은 먼저 요양원장에게 뇌물을 주고 입찰공사를 따낸 다수의 사업가들을 구속했다. 뇌물사건 초기 국민과 여론은 전부터 이와 유사한 사건들이 종종 발생했기 때문에 그런 유형의 사건이라고 가볍게 생각했다. 실제로 이 정도의 뇌물수수는 윤활유 정도로 치부되는 것이 관행이었다.

그러나 피에트로 검사를 비롯한 밀라노 수사팀은 그 뇌물이 단지 원장 개인의 비리가 아니라 정당의 불법자금 조성과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집권 연립정당은 물론 주요 야당인 공산당과 다른 군소 정당들에도 뇌물이 전달된 사실이 밝혀졌다. 이는 부정부패가 정치권 전반에 걸쳐 만연되어 있고 고착화되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심증뿐이던 부패한 정치자금 구조가 물증을 통해 밝혀지자 검찰은 경찰과 세무팀을 보강해 ‘밀라노 풀’을 구성하고 고위공직자·기업인·조폭의 삼각 커넥션을 파헤치는 것으로 수사범위를 확대했다.

‘마니 풀리테’를 주도한 세명의 검사.왼쪽부터 콜롬보, 피에트로, 다비고

 

관련자들을 현행범으로 체포하고 조사를 벌이는 과정에서 정계 거물들도 하나둘 모습을 드러냈다. 당시 사회당 당수였던 베티노 크락시도 그중 한 명이었다. 크락시는 1976년부터 16년간 사회당을 이끌어오고 1983년부터 4년간 총리를 역임했던 인물로, 얼룩 많은 이탈리아 정계에서 비교적 깨끗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었다. 그러나 크락시는 정부 발주 공사 알선의 대가로 국영기업으로부터 검은 돈을 챙기고 총리 재직시에는 정부 돈을 개인 명의로 사용했다는 뇌물수수와 공공자금 유용 등의 혐의를 받았다. 검찰은 크락시가 정·재계망을 통해 2500만 달러의 정치자금을 불법조성한 것을 밝혀냈다. 총리 7차례, 장관 36차례의 경력을 지닌 전후 이탈리아 최고 거물정치인인 줄리오 안드레오티와 당시 기민당 당수 아르날도 포를라니 등도 검찰의 수사망을 벋어나지 못했다.

 

▲검찰·언론의 찰떡 공조… 부패 관리의 법망 탈출 차단하고 시민적 감시체제 조성

 

검찰은 새로운 혐의가 밝혀질 때마다 수사 상황을 빠짐없이 기자들에게 건네주는 식으로 언론과 공조했다. 언론은 검사로부터 수사 상황을 건네받으면 보충 취재 후 기사화함으로써 부패 관리의 법망 탈출을 차단하고 시민적 감시체제를 조성했다.

언론사는 특종을 위해 사전정보 유출이나 보도경쟁은 자제하고 기사 소스를 공유했다. 이는 기자든 검사든 권력의 외압이나 마피아의 위협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었다. 무엇보다 권력자들의 비리를 혼자만 알고 있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었다. 자칫 저 세상까지 혼자만 알게 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수사 검사가 살해당하는 일까지 있었다. 그래서 기자들 사이에도 “아는 즉시 널리 알려야 안전하다”는 얘기가 이심전심으로 전해졌다. 검사와 판사가 함께 사법부 소속으로 집단합의체 방식을 택하는 이탈리아의 사법 시스템도 검사와 판사 간의 소통을 긴밀하고 원활하게 해주었다.

국민은 정치권력이 수사기관에 역공을 가할 때마다 대규모 항의 시위로 방어막을 쳐주었다. 연일 계속된 시민들의 자발적인 항의 집회는 수사팀에 힘을 실어주고 국민적 공감대를 확산시키는 원동력 역할을 했다.

안토니오 디 피에트로 검사

 

피에트로 검사는 국민적 영웅으로 부상했다. 이탈리아 통일의 기틀을 다진 주세페 가리발디 이후 최고 영웅이라는 칭송이 자자했다. 젊은이들은 그의 얼굴이 새겨진 티셔츠를 입고 그의 얼굴이 그려진 맥주잔에 술을 마셨다. 국민들은 뇌물 받은 자신의 비서까지 구속한 ‘서릿발 검사’에게 환호를 보냈다. 그러나 국민의 기대가 커질수록 그에 대한 정치권의 견제와 탄압이 강도를 높여나갔다. “붉은 테러리스트” “이탈리아 민주주의를 타도하려고 음모를 꾸미는 놈”이라는 흑색선전이 난무하고 가족에게는 협박이 가해졌다.

그럼에도 검찰과 언론과 국민의 합심으로 수사 2년 만에 3175명이 기소되고 1233명이 유죄 선고를 받았다. 당시 전체 국회의원의 4분의 1이 검찰 조사를 받았다. “더럽지 않은 손은 없다”던 크락시 전 총리는 거액의 불법 정치자금을 조성한 혐의를 받고 소환대상이었으나 권력을 방패막 삼아 소환에 불응하다가 법원이 징역형을 선고하자 튀니지로 망명한 후 2000년 그곳에서 숨을 거뒀다. 이탈리아 최대 석유 그룹 ENI사의 가브리엘레 칼리아리 회장과 페루자 그룹의 라울 가르디니 회장은 정치자금 제공을 자백한 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밀라노 법원

 

▲기득권 정치세력, 새 대통령 내세워 방패막 쳐보려 했으나 새 대통령은 마니 풀리테를 지지

 

마니 풀리테와 함께 중요한 정치적 사건은 1992년 4월로 예정된 총선이었다. 당시 집권 연립여당의 핵심 인물은 줄리오 안드레오티 총리, 베티노 크락시 사회당 당수, 아르날도 포를라니 기민당 당수 등이었다. 이들에 대해서는 아직 마니 풀리테의 수사망이 구체화되기 전이었으나 이들은 부패 정치자금 수뢰연루 의혹에 휩싸여 있었다. 그런데도 이들은 정국을 낙관하고 4월 총선 승리를 확신했다.

그러나 결과는 이들의 예상과 정반대로 흘렀다. 당시 연립정부를 구성하고 있는 정당은 기민당, 사회당, 민사당, 자유당 등 4개당이었다. 선거 결과 기민당은 전 선거에서 얻은 득표율보다 5% 정도 떨어진 22.27%의 지지율을 얻는데 그쳤다. 연립정부의 주요 축이던 사회당 역시 득표율이 13.57%로 떨어졌다. 그러면 야당인 좌익민주당(공산당의 후신)이 여당 표를 흡수해야 했으나 좌익민주당 역시 17.05%를 얻는데 그쳤다.

그래도 선거는 연립여당의 승리로 끝나 연립 정당들은 다시 연립정부를 구성하고 뇌물 사건의 정치적 해결을 도모했다. 그러나 대통령인 프란체스코 코시가가 임기를 한달 앞두고 사임하면서 상황이 예기치 않은 방향으로 흘러갔다. 결국 안드레오티, 크락시, 포를라니 등은 과거 내무부 장관을 역임하고 청렴결백한 이력으로 명성을 얻고 있는 오스카르 루이지 스칼파로를 대통령으로 추천해 5월 국회 인준을 통과시켰다. 마니 풀리테 수사 확대를 막기 위해서는 줄리아노 아마토 사회당 부총재를 새 총리로 선출했다.

그러나 사태는 또 예기치 않은 방향으로 흘러갔다. 새로 선출된 스칼파로 대통령이 연립정부의 의도와는 달리 마니 풀리테 수사팀에 지지를 표명했기 때문이다. 결국 국민의 반정부 집회, 검찰과 언론 간 공조체제, 대통령의 중립적 입장 표명 등으로 마니 풀리테 수사에 대한 정당성이 강화되었다.

오스카르 루이지 스칼파로 대통령

 

▲선거법 개정… 야당에 의한 정권교체 가능성 마련한 획기적 변화

 

이와는 별개로 전면적인 정치 개혁의 필요성이 공감대를 넓혀나갔다. 첫 요구는 선거제도의 전면적 개정과 기존 지배세력의 퇴진이었다. 결국 기민당이 해체되고 사회당이 수세적 국면에 몰리면서 모든 정당들은 기존의 선거법을 개정하기로 합의했다.

당시 선거법은 100% 중선거구제와 정당명부식 비례대표제였다. 1993년 국민투표를 통해 확정된 개정 선거법의 핵심은 국회의원의 75%는 소선거구에서 다수대표 원칙으로 선출하고 나머지 25%는 비례대표제로 선출하는 것이었다. 비례대표제에서 다수대표제로의 전환은 기존의 집권여당이던 기민당의 장기집권을 마감하고 언제든 야당에 의한 정권교체 가능성을 마련한 획기적 변화였다.

즉 비례대표제는 정치적 후견인주의와 명망가들에 의한 연정이 가능하게 한 제도인 반면 다수대표제는 후보의 당락을 지역민이 던진 표의 다수에 따라 결정하는 것이므로 후견인주의를 어느정도 무력화하면서 전국적인 인물보다는 지역의 참신하고 새로운 인물이 등장할 수 있는 가능성을 높여준 선거제도였다. 이 선거제도에 의한 첫 총선은 1994년 4월로 예정되었다.

 

베를루스코니의 등장… 기존 정치권이 영향력 유지 위해 그를 내세워

 

국민의 여망이 무엇이든 총선을 포기할 리 없는 기존의 기득권 정치 세력은 자신들의 정치적 영향력을 유지하기 위해 새로운 인물에 힘을 실어주었다. 새로운 인물은 사업가 출신의 실비오 베를루스코니였다. 적자가 아니라 양자 격인 베를루스코니를 내세운 것은 자신들의 이미지로 총선에서 승리할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1994년 총선에 출마한 베를루스코니

 

사실 베를루스코니 역시 전형적인 정경유착 기업가였다. 크락시가 총리였던 시절에는 크락시와 후견인 관계를 통해 눈부신 성장을 거두었다. 베를루스코니의 일생은 건설로 자본을 마련해 언론을 지배하고 그 힘으로 다시 정치권력을 장악하는 과정으로 요약된다. 1982년에는 민영방송국 두 곳을 사들여 이탈리아 민영TV 채널 4개 중 3개를 보유한 ‘미디어셋’이라는 민영방송 체제를 완성했다. 이후 신문, 잡지, 출판, 광고대행, 영화제작에도 뛰어들어 독일 베르텔스만에 이어 유럽 2위의 미디어 재벌로 성장했다.

베를루스코니(왼쪽)와 크락시 총리. 1985년

 

베를루스코니는 자신의 정치적 후원자인 크락시 등 다수 정치인들이 체포되거나 도주해 정경 유착의 단물을 더 이상 기대할 수 없게 되고 자신에게도 검찰 수사의 그림자가 어른거리자 자신과 자신의 기업을 방어할 목적으로 총선 출마를 결정했다. 이탈리아 국민이 축구 국가대표팀을 응원할 때 쓰는 구호 ‘포르차 이탈리아’(전진 이탈리아)와 같은 이름의 정당을 1994년 1월 창당하고, 과거 무솔리니의 이념을 계승한 국민동맹과 남북분리를 주장하는 북부동맹을 묶어 우파 연합인 ‘자유동맹’을 결성해 1994년 4월 총선을 지휘했다. 야당은 좌파민주당을 주축으로 결성한 ‘진보동맹’으로 맞섰다.

포르차 이탈리아 당 깃발

 

선거전에서 베를루스코니가 활용한 것은 언론이었다. 자기 소유의 TV방송, 신문, 잡지 등을 통해 경제적인 피폐와 부패 스캔들로 얼룩진 이탈리아를 구해낼 구원자의 이미지를 각인시켰다. 부패한 우파와 무능한 좌파에 지친 대중은 건설업으로 자수성가한 그를 개혁의 기수로 받아들였다. 덕분에 베를루스코니는 1994년 4월 실시된 이탈리아 상하원 총선에서 예상을 뒤엎고 승리를 거두었다. 자신도 로마의 한 선거구에서 47.9%의 득표율로 당선되었다.

언론은 베를루스코니의 완승 배경을 몇 가지로 분석했다. 첫째는 집권당은 물론이고 야당인 공산당까지 검은 돈을 받은 것으로 밝혀지면서 기존 정치인에 비해 상대적으로 깨끗한 인물로 비춰지고 둘째는 각종 경제 관련 선거공약이 국민의 관심을 끌고 셋째는 마피아, 마약밀매 등의 범죄에 대해 단호한 입장을 취한 게 주효했다는 것이다. 선거 막바지에 검찰이 베를루스코니의 동생을 구속하고 포르차 이탈리아당 당사를 수색한 것도 동정표를 끌어 모은 것으로 분석했다.

베를루스코니는 1994년 5월 11일 우파 연립정부의 총리로 취임했다. 무솔리니의 후예를 자처하는 국민동맹 인사들을 내각에 포함시켜 안팎으로 우려 섞인 비판을 받았다. 2차대전 후 서유럽에서 파시스트 정당 인사가 각료가 된 것은 이탈리아가 처음이었다. 베를루스코니는 총리에 취임했어도 검찰의 수사대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결국 1994년 12월 검찰 조사를 받고 1995년 1월 사임함으로써 255일의 짧은 총리 생활을 마감했다.

 

▲피에트로에게 가해진 기득권 정치세력의 역공

 

베를루스코니는 총선을 전후해 밀라노 검찰을 매수하고 회유하려는 공작을 시도했다. 총선 전에는 피에트로 등을 ‘포르차 이탈리아당’의 국회의원 후보로 공천하려고 하고 총선 후 연립정부를 조각할 때는 피에트로에게 내무장관을 제시했다. 피에트로는 제안을 거절했으나 이런 사실이 나중에 알려져 피에트로에게 “정치적인 의도가 있었던 게 아니냐”는 비판이 가해지자 결국 1994년 12월 검사직을 그만두었다.

그러자 사방의 적들이 호기를 만난 듯 피에트로를 향해 맹공을 가했다. 베를루스코니는 퇴임 후 가진 1995년 4월의 방송회견에서 “피에트로가 사임하기 전 나를 개인적으로 만난 적이 있는데 나를 수사하거나 기소할 생각이 별로 없어 보였다”고 폭로함으로써 피에트로에게 의심의 눈초리가 쏟아지도록 했다.

피에트로(왼쪽)와 베를루스코니(2006년)

 

이후 마니 풀리테 검사들 사이에 묘한 틈새가 벌어지기 시작했다. 급기야 피에트로는 검사 재직 시 직권남용 및 금품수수 혐의로 밀라노 지검에서 함께 일했던 검사들에 의해 1995년 7월 기소되었다. 피에트로는 1995년 한 해 동안 무려 54번이나 조사를 받았다. 이후에도 2년간 재판과 정치적 공격에 시달렸으나 무죄 판결을 받았다.

 

▲1996년 총선은 중도좌파연합의 승리… 종전 후 선거에 의한 첫 정권교체

 

개정 선거법을 통해 1994년 베를루스코니의 ‘포르차 이탈리아당’(전진 이탈리아)이 정권을 잡았지만 진정한 여야 정권 교체의 열망은 1996년 4월 총선에서 가시적으로 표출되었다. 총선에서는 좌익민주당(공산당 후신)이 여러 중도좌파 세력을 묶어 결성한 ‘올리브나무동맹’과 베를루스코니의 주도로 결성한 우파 연합의 ‘자유동맹’이 대결을 펼쳐 ‘올리브나무동맹’이 과반수 의석을 획득함으로써 로마노 프로디를 총리로 한 내각이 구성되었다. 이로써 2차대전 종전 이후 최초로 선거에 의한 정권교체가 이뤄지고 좌파 연립정권이 출범했다.

피에트로는 공공사업부장관으로 기용되어 중도좌파 내각에 참여했다. 그러나 동료 장관들과 불협화음을 보이고, 정치인에 대한 경멸적인 언행 때문에 숱하게 구설에 올랐다. 게다가 계속 검찰의 조사를 받아야 하는데다 직설적이고 다혈질 성격으로 결국 몇 달후 사직했다.

피에트로는 1997년 상원의원 보궐선거에 ‘올리브나무동맹’ 소속으로 당선된 후 1998년 ‘이탈리아 정신당’을 창당해 대권의 꿈을 키웠다. 그러나 2001년 하원 선거에서 낙마한 뒤 잊힌 존재가 되었다. 마니 풀리테 역시 부패 혐의로 검찰에 불려간 정치인 중 상당수가 무혐의로 풀려나고 부정부패도 기대했던 것만큼 근절되지 않아 서서히 국민의 기억 속에서 사라졌다.

 

▲베를루스코니 세 번째 총리 연임… 새로운 부정부패 정치인 등장

 

베를루스코니는 2001년 5월 총선에서 승리를 거둬 또다시 총리 자리를 차지했다. 선거전에서 그는 경제 불황에 찌든 유권자들에게 “당신들도 나처럼 부자가 될 수 있다”는 환상을 불어넣고 ‘강력한 이탈리아 건설’을 내세운 선거 전략을 구사했다. 유권자들은 중도좌파가 집권한 5년 동안 연평균 성장률이 유럽 전체의 평균을 훨씬 밑돈 것에 실망해 베를루스코니의 부패 의혹에도 불구하고 그의 사업 수완이 이탈리아를 경기 침체에서 구해줄 것으로 기대하며 표를 던졌다.

실비오 베를루스코니

 

베를루스코니는 취임 후 1994년과 같은 일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국영방송국까지 장악했다.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민영방송 3개까지 합치면 이탈리아 시청자의 90% 이상이 베를루스코니가 소유하거나 장악한 TV를 시청하게 되었다. 방송은 사실상 그의 홍보 수단으로 전락하고 선정적인 내용으로 채워졌다. 그 자신도 모델, 배우, 앵커, 쇼걸 등 다양한 배경의 여성들과 염문을 뿌려 각종 스캔들이 그를 따라다녔다.

법안도 자신에게 유리하게 제정했다. 공직자라도 경영에 참여하지만 않는다면 기업을 소유하거나 주식을 보유할 수 있다는 ‘이익상충법’(2002.3), 총리는 물론 대통령, 상원의장, 하원의장, 헌법재판소장 등 5대 고위 공직자의 임기 중 면책특권을 보장하는 법안(2003.6) 등을 밀어붙여 통과시켰다. 경제는 추락을 거듭했다. 정부 부채는 급증하고 실업률은 급등했다. 물가는 뛰어오르고 빈곤층의 상대적 박탈감은 심화되었다.

결국 2006년 4월 총선에서 로마노 프로디가 이끄는 중도좌파 연합에 근소한 차로 패배해 총리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다. 그러나 프로디 총리가 자신의 신임을 묻는 상원 표결에서 패배해 20개월 만에 낙마하고 2008년 4월 총선에서 우파 연합이 다시 승리해 베를루스코니는 3번째 총리 자리에 오르는 행운의 주인공이 되었다. 그러나 부정부패 정치인 이미지는 계속 그를 따라다녔다. 그가 받은 기소장만 100장이 넘고 54차례나 불신임투표에 부쳐졌다. 그런데도 그는 9년 이상 총리로 재임하는 놀라운 신통력을 보였다.

이탈리아 국회의사당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해답은 연금이었다. 베를루스코니는 정치 생명이 간당간당할 때마다 복지 제도를 크게 키웠다. “기금이 바닥났다”는 지적이 있건 말건 노령연금을 올렸다. 재정이 말라붙었다는 아우성이 들려도 세금을 깎아줬다. 유권자들은 환호했고, ‘피고인 베를루스코니’가 법정에 설 때마다 선거라는 동아줄을 내려보내 그를 다시 총리직에 불러 앉혔다. 그 사이 나라 살림은 형편없이 쪼그라들었다.

권력이 사라진 베를루스코니를 기다린 것은 각종 재판이었다. 2013년 6월 미성년자 성매매, 뇌물 등 권력 남용의 혐의로 1심에서 징역 7년을 선고받고 공직 진출이 평생 금지되었다. 2013년 8월에는 미디어셋의 세금 횡령을 주도한 혐의로 대법원에서 징역 4년에 2년간의 공직 생활을 금지한다는 판결을 받았다.

그러나 총리 재임 중 자신이 제정한 사면법에 따라 징역 4년은 1년으로 감형되고 그것조차 고령이라는 이유로 1년간 가택 연금 상태에서 사회봉사만 하면 되었다. 2013년 11월에는 동료 의원들에 의해 상원의원직을 박탈당하는 수모를 겪었다.

 

▲마니 풀리테는 성공했나… 일시적 성공 거두었지만 곧 제자리로 돌아가

 

처음 마니 폴리테가 시행될 때 사람들은 기대하고 환호했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마니 풀리테에 실망하기 시작했다. 많은 기업인과 정치인들이 줄줄이 구속되면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던 초기와 달리, 구속됐던 사람들이 대거 무죄로 석방된 데다가 무엇보다도 “부정부패가 여전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우파 거물 정치인 줄리오 안드레오티 전 총리만 해도 두 번 공판에 나서야 했지만 두 번 다 무죄로 풀려났다. 안드레오티의 무죄 선고가 알려지자, 부패 혐의로 튀니지에 피신해있던 베티노 크락시 전 총리는 “이 판결은 수년을 끌어온 비극적 광대짓에 종지부를 찍은 것”이라고 반겼다. 마니 폴리테 당시 문제됐던 당들도 이름을 바꾼 것 외엔 별로 달라진 게 없었다.

안드레오티와 크락시(왼쪽부터)

 

결국 일시적 성공을 거두긴 했으나 시일이 지나면서 흐지부지 되고 말았다. 왜 이랬을까. 이유는 부정부패 일소를 제도화하긴 했지만 이를 지속적으로 뒷받침할 수 있는 의식적이고 개혁적인 정책과 시스템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탈리아 사회의 정치적 병폐였던 후견인주의와 엽관주의도 극복하지 못했다.

이탈리아 국민의 정서와 의식 그리고 정치 시스템에 변화가 없는 한 이탈리아 정치 발전은 요원하다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그럼에도 피에트로와 마니 풀리테의 경험은 이탈리아 정치에 큰 자산으로 남아 조금씩 정치를 발전시키는데 작용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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