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박스

경제사학자 김용섭을 아시나요… ‘조선후기농업사연구’는 해방 후 경제사 최대 업적으로 평가받는 명저

↑ 김용섭(왼쪽)과 ‘조선후기농업사연구’(전2권)

 

by 김지지

 

김용섭 연세대 명예교수의 ‘김용섭 저작집’이 한국학중앙연구원이 주관하는 제1회 한국학 저술상 수상작으로 최근 선정되었다. 저작집은 ‘조선후기농업사연구’ ‘한국근대농업사연구’, ‘한국중세농업사연구’ 등 전9권이다. 김용섭 교수는 해방 후 경제사 최대 업적으로 평가받는 명저들을 남겨 지식사회에선 영향력이 큰 경제사학자이다. 그런데도 일반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고 있다. 언론 접촉을 의식적으로 피해온 학문 태도 때문인데 선생의 연구 업적이 무엇인지를 살펴본다.

 

‘조선후기농업사연구’, 해방 이후 인문·사회과학 분야의 명저 꼽을 때 으레 첫머리 장식

해방 후 우리 지식 사회에 부여된 긴급한 과제 중 하나는 일제 강점기 36년 동안 우리의 의식을 지배해온 정신적 식민주의를 극복하는 일이었다. 그중 한 갈래가 한반도 정체성 이론으로 대표되는 식민사관의 족쇄를 극복하려는 시도였다. 이기백, 강만길, 김용섭 등이 식민사관과 고군분투했던 대표적인 역사학자들이었는데 특히 김용섭(1931~ )은 성실하고 끈기 있는 연구 자세로 식민사관의 한계와 문제점을 실증적으로 드러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의 대표적 연구 성과는 ‘조선후기농업사연구’(2권) 발간이다. 이후 이 저서는 해방 이후 인문·사회과학 분야의 명저를 꼽을 때 으레 첫머리를 장식하고 ‘내재적 발전론’의 수원지 역할을 하고 있다. 학문적 성취가 뛰어나거나 학계에 큰 영향을 끼친 학자를 거론할 때도 그의 이름이 빠지지 않는다.

김용섭은 강원도 통천에서 태어나 1951년 서울대 역사교육과에 입학했다. 졸업(1955년) 즈음 “정체성 이론을 극복하려면 실증을 통해서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농업 국가인 조선 후기의 농업사 연구를 중심으로 해야 한다”며 자신의 학문적 방향과 목표를 세웠다. 고려대에서 석사 학위를 받고 연세대에서 박사 과정에 매진하면서 서울대 사범대(1958~1966년)와 서울대 문리대(1967~1975년) 교수를 거쳐 연세대 사학과(1975~1997년)에서 제자를 가르쳤다. 2000년에는 대한민국 학술원 회원이 됐다.

김용섭 교수(왼쪽)가 개인 장서 7500여권을 학교에 기증한 것에 대해 정갑영 연세대 총장이 감사패를 증정한 후 기념촬영했다. (2012년 4월 25일)

 

학문적 방향과 목표는 정체성 이론이나 타율성 이론 극복

김용섭은 고려대 석사학위 논문을 준비하던 중 전봉준의 재판기록인 ‘공초(供草)’에 기록된 지주제의 해체와 토지 균등 경작에 주목했다. 그것을 토대로 완성한 석사 논문이 동학농민의 성격을 구명한 ‘동학난 성격고’(1957년)였다. 이후 조선 후기 농업사회의 변동에 더욱 관심을 갖게 된 그는 농민 봉기와 동학농민전쟁 등 중세사회에서 근대사회로 전환되는 사회변동의 핵심적 원인을 농업구조의 변화에서 찾았다.

전봉준의 ‘공초’ (출처 규장각)

 

그가 중세 봉건사회의 해체과정을 분석하기 위한 연구자료로 채택한 것은 조선 후기 토지대장인 ‘양안(量案)’과 호적대장이었다. 양이 엄청나고 서술할 내용이 많아 보통의 인내심으로는 엄두도 못 낼 작업이었으나 김용섭은 남다른 성실성으로 연구에 매달렸다. 섣불리 가설을 세워 주장을 펼치기보다는 치밀한 사료 분석의 축적을 통해 한발 한발 결론으로 다가가는 방법을 취했다.

그는 양안과 호적대장에 기록된 지주와 경작자의 신분, 토지매매 기록, 토지 경작형태 등을 실증적으로 분석함으로써 중세 봉건적인 지주와 전호(소작인)의 관계가 어떤 형태로 변모되었는지를 규명했다. 그 첫 결산이 ‘조선후기농업사연구’(일조각)다. 1960년대에 발표한 논문 18편을 묶어 1970년 8월 15일 1권, 1971년 1월 30일 2권을 출간했다.

김용섭의 문제의식은 제1권 서문에서 잘 나타나 있다. “필자의 관심거리가 된 것은, 우리나라의 중세사회의 해체과정을 농업·농촌·농민에 관해서 그 내적 발전과정의 입장에서 해명할 수는 없을까 하는 문제였다.… 필자가 생각한 대로 이 시기의 농촌사회에서 주체적인 입장에서의 중세사회의 해체과정이 밝혀진다면, 정체성 이론이나 타율성 이론은 극복될 수 있을 것이다.”

토지대장인 경남 합천의 ‘양안’ (출처 토지주택박물관)

 

역사틀은 조선후기 사회에서 자생적인 자본주의가 싹을 틔우고 있었다는 ‘내재적 발전론’

‘조선후기농업사연구’를 꿰뚫고 있는 역사틀은, 김용섭 자신이 직접 사용한 말은 아니지만, ‘내재적 발전론’이다. 조선후기 사회에서 자생적인 자본주의가 싹을 틔우고 있었다는 것이다. 일제 강점기 백남운의 사회경제사 연구에 잇닿아 있는 내재적 발전론의 요지는 두 가지였다. 첫째는 조선 후기 농업생산력의 발전은 사적 소유의 성장과 지주전호제(지주와 소작인)의 성립을 가능하게 함으로써 자본주의의 맹아를 일궈냈다는 것이고, 둘째는 중세사회를 해체하고 근대사회를 열고자 했던 자생적 자본주의와 아래로부터의 농민 저항이 일본 제국주의 침략에 의해 억제되고 결국 식민지 수탈 체제가 확립됐다는 것이다.

요약하면 조선 말에 이미 부르주아 계층(자본가 계층)이 자생적으로 등장하는 등 자본주의의 싹이 텄으므로 일본이 침략하지만 않았더라면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봉건제 사회에서 자본주의 사회로의 이행이 가능했는데, 일본의 침략으로 그 이행이 저지되었다는 것이다.

김용섭은 내재적 발전의 사례로 ‘경영형 부농’을 제시했다. ‘경영형 부농’이란 봉건 지주층의 땅을 차경(借耕)한 뒤 주로 임노동을 이용해 농업생산, 농업경영에 전력해 부농이 된 이들을 말한다. 이들은 영국 자본주의의 발전에서 볼 수 있는 ‘자본가적 차지농(借地農)’에 가까운 존재였다. 16∼17세기 영국 농업에서는 지주의 땅을 빌리고 임노동을 고용해 대규모 농장을 경영하는 ‘요오맨(yeoman)’이라 불린 부농층이 성립했다. 요오맨은 영국 자본주의의 선구자였다. 김용섭이 요오맨을 치환한 것이 조선의 경영형 부농이었다.

 

식민사관 극복하고 ‘내재적 발전론’의 탄탄한 기반 세워

치밀한 농업 사료 분석을 통해 조선 후기 사회가 정체되어 있기는커녕 내부적으로 자생적인 근대화의 길을 걷고 있었다는 김용섭의 연구 성과는 한국사를 정체적이고 타율적인 역사로 보아온 일제시대의 식민사관뿐만 아니라 서구 중심의 역사관도 극복하며 한국사의 독자성과 ‘내재적 발전론’을 형성하는 탄탄한 기반이 되었다. 한국도 일본과 같은 자본주의 발전 경로를 걷고 있었으나 일본의 침략으로 실상이 왜곡됐음을 실증적이고 학문적으로 규명했으니 ‘조선후기농업사연구’는 식민사관의 독을 없애줄 해독제로 즉각 각광을 받았다. 그 이전 한국 사회에 만연했던 민족성에 대한 비하, 이른바 엽전의식도 조금씩 극복되었다.

‘조선후기농업사연구’는 ‘내재적 발전론’의 토대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그 진가를 인정받아 해방 후 한국 경제사 최대의 업적으로 평가받는 명저로 자리매김했다. 실증주의 사학, 마르크스주의 사학, 민족주의 사학 등 해방 이전 근대 역사학의 세 가지 전통을 발전적으로 계승했다는 평가도 따라다녔다.

김용섭은 ‘조선후기농업사연구’에 그치지 않고 ‘한국근대농업사연구’(1975년), ‘한국근현대농업사연구’(1992년), ‘한국중세농업사연구’(2000년) 등을 발표해 ‘내재적 발전론’을 심화·확대시키고 조선 후기에서 현대에 이르는 한국 농업사 연구를 완성했다.

 

외부 강의나 학술이 아닌 활동은 하지 않고 학문에만 전념

김용섭은 이처럼 ‘조선후기농업사연구’라는 명저를 남기고 대학에서 오랫동안 후학을 가르쳤는데도 일반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고 있다. 언론 접촉을 의식적으로 피해온 학문 태도 때문이다. 언론은 김용섭을 어떻게든 대중에 알리고 싶어했으나 그럴 때마다 김용섭은 사양했다. 이런저런 공식석상에 얼굴 비추기를 극도로 꺼리고 학술상 받는 것도 탐탁지 않게 여겨 이렇다 할 번듯한 사진도 없다.

그는 강의나 학술이 아닌 활동은 하지 않고 학문에만 전념했다. 아침에 집을 나와 연구실로 갔다가 저녁 무렵 걸어서 다시 집으로 돌아가고, 일요일과 방학도 없이 설날과 추석만 빼고 1년 363일을 연구실에서만 보내는 그의 일과는 변함이 없었다.

그는 논문 발표 외에 다른 곳에 이름이나 얼굴을 내미는 것 자체를 매명(賣名) 행위처럼 여겼다. 칼럼·에세이 등의 ‘잡문’을 쓰지 않는 그 자신이 그러하듯 제자들에게도 학자라면 잡문을 쓰지 않아야 한다고 가르쳤다. 논문이나 책에도 엄격했다. 그러다 보니 논문은 한평생 70여편만 썼고, 저서도 그런 논문을 모아서 낸 9권의 책이 전부다. 노 학자에게 으레 있기 마련인 회갑이나 고희 논문집 같은 것도 없다. 제자들이 억지로 만들어드린 정년논문집 뿐이다.

김도형 동북아역사재단 이사장이 답사 다닐 적에 찍어둔 김용섭 모습. 김용섭이 특별히 좋아하는 사진이다. (출처 김도형)

 

2011년 펴낸 회고록 ‘역사의 오솔길을 가면서’도 “김용섭답다”는 말을 들었다. 회고록인데도 그동안 빠뜨린 부분을 보완한 논문집처럼 쓰여졌기 때문이다. 회고록 2장 ‘해방세대의 역사공부’에서는 무려 30쪽에 걸쳐 참고 문헌 목록을 늘어놓고, 회고록인데도 1인칭 ‘나는’이 아닌, 3인칭 ‘김용섭은’으로 시작하는 경우도 많다. 자신마저도 대상화시키고 객관화시켜 버린 것이다.

그런데 그가 대외활동을 기피한 데에는 연구가 바빠서이기도 하지만 다른 이유도 있다. 즉 선배 학자들의 연구에 대해 ‘일제 관학식 실증주의(식민사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비판을 적지 않게 했기 때문이다. 비판 대상에 내로라하는 한국사 대가들뿐 아니라 은사마저 포함하니 선배 세대와의 갈등을 피할 수 없었다. 그러다보니 길 가다 우연히 만난 선배 학자에게 외면도 당하고 몇몇 선배들에게서는 “당신 민족주의와 내 민족주의는 다른 것 같다”는 말을 듣기도 했다. 김용섭은 회고록에서 이에 대한 입장을 밝혔다. “대인 관계에서는 조심조심 원칙을 잘 지켰으나 강의와 주장은 그렇지 못했다. 내가 생각하기에도 괘씸하고 방자하기 그지없었을 것이다.… 결국 학문적 대의를 위해 보신의 지혜를 지키지 못했다.”고 썼다.

김용섭 회고록

 

‘내재적 발전론’, 1990년대부터 ‘식민지 근대화론’의 도전 받아

한국 자본주의의 맹아가 이미 조선시대에 싹트기 시작했다는 김용섭의 ‘내재적 발전론’은 ‘식민지 수탈론’과 연결되어 1980년대 말까지 일제 식민통치에 대한 성격 규정으로 굳건하게 자리를 지켰다. 김용섭은 ‘자본주의 맹아론’ ‘내재적 발전론’의 대부로 꼽혔다. 그러나 1990년대 들어 ‘식민지 근대화론’의 도전을 받고 있다.

식민지 근대화론이란, 조선 시대가 정체된 사회여서 자체적으로 자본주의를 발전시킬 동력이 없었고, 따라서 조선이 근대사회로 바뀌는 과정은 비록 불행한 일이기는 했지만 먼저 자본주의를 경험한 일제의 타율적 견인이 불가피한 역할을 했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사관이다. 따라서 숙명적으로 ‘내재적 발전론’과 첨예하게 맞설 수밖에 없다. 더구나 ‘식민지 근대화론’이 결과적·외형적으로는 일본의 식민지 경영을 합리화하고, 한국인들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고, 실제로 일본인 학자들도 이렇게 주장하고 있어 대중에는 인기도 없다.

이영훈 전 서울대 교수를 위시해 ‘식민지 근대화론’ 논리를 펴는 학자들은 김용섭의 논리가 치밀한 실증 작업에 기초하고는 있으나 조선 후기 사회를 지나치게 도식화 혹은 과대포장했다고 비판했다.

이영훈 교수

 

이영훈은 동일 지역에서 연도를 달리해 작성된 추수기(秋收記), 도지기(賭只記) 같은 지주들의 장부 등 20여 건의 지역사례를 분석대상으로 삼아 시간의 추이와 함께 나타나는 변화를 추적했다. 그 결과 김용섭이 대한제국 시기에 실시된 ‘광무 양전(量田) 사업’을 근대적·부르주아적 개혁으로 평가하고 이것이 조선 내부에 주체적인 자본주의화·근대화의 맹아 즉 원동력이 있었음을 긍정하는 논리를 편 것에 대해서는 “김용섭의 관찰 사례는 어느 한 장소의 어느 연도에 국한된 단면에 불과하다.” “부실하게 진행된 양전사업에서 근대적·부르주아적 개혁의 역사적 의의를 찾을 수 없다”며 일제 강점 이전의 조선 내부에는 근대화의 원동력이 없었다고 반박했다.

 

‘식민지 수탈론’ ‘식민지 근대화론’은 학자들의 영역… 정치적 비판 자제해야

이영훈의 학문적 비판은 문제될 게 없으나 한 문화비평가가 “김용섭 사학이 민족주의 사학을 거쳐 1980년대 민중사학으로 가지를 쳐나갔고, 급기야 오늘날 좌편향의 친북 교과서라는 희대의 괴물을 만드는 데 결정적인 원인을 제공했다”며 “지금의 병든 국사학계를 만든 원조”라고 낙인을 찍은 것은 과하다. 백번을 양보해 그의 지적이 사실이라고 해도 이런 결과는 김용섭이 의도한 바는 아니다. 그는 순전히 학문적으로 그런 결과를 도출해냈을 뿐이다.

이 대목에서 분명히 해야 할 것은 ‘식민지 수탈론’이든 ‘식민지 근대화론’이든 그것은 학자들의 영역이라는 것이다. 김용섭의 연구 역시 학문적인 것일 뿐 정치적인 목적은 아니었다. 반대의 경우 즉 이영훈의 연구 결과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결론을 내고 연구를 그에 맞춘 것은 아니다. 결론이 그렇게 났을 뿐이다.

1980년대 중반, 학계에 발을 들여놓은 이영훈의 주요 관심 역시 김용섭 교수가 그러했듯 사료를 통한 실증이었다. 이영훈은 체계적으로 조사된 적이 한 번도 없는 조선 후기 생산과 물가 등의 경제 통계를 개인의 일기나 촌락의 계책(契冊) 등에서 뽑아낸 자료를 실증적으로 분석한 후 “조선의 위기는 1860년대부터 본격화했는데 어떤 강력한 외세의 작용에 의해서라기보다 그 모든 체력이 소진된 나머지 스스로 해체되었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심각한 것이었다”라며 일제 식민통치가 조선인에게 반드시 고통만을 준 것은 아니라는 주장을 전개했다.

학자들끼리 비판하고 검증하는 것은 자연스럽고 당연하다. 그러나 현실 정치 세력들이 학자들의 연구 성과를 정치적 혹은 아전인수식으로 해석해 학문적 성과마저 부정하려드는 건 문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