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속으로

영화 <남산의 부장들>에 등장하는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 실종 사건의 전말… 온갖 억측 난무했지만 결정적 물증 없어 영원한 미스터리로 남을 전망

↑ 미 프레이저 청문회 증인으로 나선 김형욱(왼쪽)과 박정희 대통령

 

by 김지지

 

영화 <남산의 부장들>은 1979년 10월 26일,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박정희 대통령을 암살하기 전 40일 동안 일어난 일들을 순차적으로 그리고 있다. 영화 속 핵심 인물은 그 시점을 기준으로 박 대통령과 김재규 그리고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과 차지철 경호실장 등 4명이다. 전두환 보안사령관도 등장하지만 양념 수준이다.

영화 <남산의 부장들>에서 김형욱 역을 맡은 영화배우 곽도원이 청문회 증인 연기를 하고 있다.

 

영화는 도입부 자막을 통해 ‘재구성한 이야기이며 상상력을 가미한 픽션’임을 선언하고 인물들의 이름도 모두 바꾸었지만 실제 있었던 40여년 전 사건을 영화화했다는 점에서 관객들이 영화 내용을 사실로 받아들일 가능성이 높다. 김형욱이 미국에서 반정부 활동을 하고 파리에서 살해되는 영화 속 장면이 실제로 사실과 얼마나 부합하는지를 살펴본다.

 

김형욱, 박정희 대통령의 하수인 역할을 하다가 팽(烹)당하자 미국으로 망명

김형욱은 1961년 5·16 쿠데타 때 육사 8기 동기인 김종필 중령과 함께 쿠데타에 참가했다. 그 공로를 인정받아 1961년 국가재건최고회의의 최고위원을 거쳐 1963년 7월 제4대 중앙정보부장으로 임명되었다. 이후 1969년 10월까지 6년 3개월 동안 중앙정보부장을 지내며 박정희 대통령의 정적을 가차없이 처리하고 3선 개헌을 주도해 박정희 대통령의 충실한 사냥개 역할을 했다. 그러나 3선 개헌 후인 1969년 10월 중앙정보부장에서 전격 해임되고 1972년 10월 유신 이후 의원직을 상실하면서 유신 정권에서 소외되자 박 대통령에게 배신감을 느끼고 1973년 4월 미국으로 망명했다.

1963년 1월 7일 김종필(왼쪽) 초대 중앙정보부장이 육군 준장 전역식 후 육사 8기 동기생인 김형욱 국가재건최고회의 최고위원과 기념사진을 찍었다.

 

미국에서 숨어 지내던 그가 공식석상에 나타난 것은 1977년 6월 22일이었다. 미 하원 ‘프레이저 소위’ 청문회 증인으로 나선 것이다. 당시는 이른바 ‘박동선 사건’으로 한미관계가 벼랑으로 내몰릴 때였다. ‘박동선 사건’은 1976년 10월 워싱턴포스트지 기사를 통해 본격적으로 세상에 알려졌다. 워싱턴포스트는 “박 대통령의 지시로 박동선과 중앙정보부 등이 90여 명의 전·현직 의원에게 50만~100만 달러의 뇌물을 뿌렸다”고 보도했다.

박동선

 

박정희 대통령은 자신에게 불리한 보도가 미국에서 연이어 터져나오자 신직수 중앙정보부장과 양두원 차장보를 해임하며 미국의 공세를 차단하려 했다. 그러나 워싱턴의 불길은 좀처럼 잡히지 않았다. 1977년 1월 인권과 도덕을 내건 카터 행정부가 출범하고, 2월엔 한미관계 전반을 조사할 권한이 부여된 미 하원 프레이저 소위가 발족하면서 미국은 박 정권의 꼬투리를 잡는 데 혈안이었다. 미 언론이 연일 한국 정부를 동네북처럼 두들기는 상황에서, 박 정권의 내밀한 내용까지 속속들이 알고 있는 김형욱이 프레이저 소위에 증인으로 출석한다는 것은 박 대통령에게 위기였고 충격이었다.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1977년 1월 김형욱에게 편지로 귀국을 종용하고 정일권 국회의장을 비롯 김종필, 한병기 당시 주유엔 대사 등이 미국에서 직접 김형욱을 만나 귀국을 권유했지만 모든 게 허사였다.

 

회고록이 일본에서 발간되면서 박 대통령과는 화해가 불가능해져

김형욱은 청문회가 있기 전인 1977년 6월 5일자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를 통해 그 동안의 침묵을 깼다. “박동선은 내가 정보부장 때 부린 사람”이라며 박동선을 활용한 공작에 대해 자세히 폭로하고, 박정희는 하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것은 예고편에 불과했다.

김형욱은 6월 22일의 프레이저 청문회에서 박 정권을 향해 거침없이 포격을 가했다. 6시간 20분간에 걸친 청문회를 통해 박동선과 통일교, 김대중 납치사건에 이르기까지 유신 정부의 약점을 헤집으며 박정희 가슴에 통한의 못질을 했다. 분노가 극에 달한 박 대통령이 오직 김형욱만을 겨냥한 위헌적인 ‘반국가행위자 재산 몰수에 관한 특별조치법’(1977년)까지 만들었지만 효력은 없었다.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이 미국 하원 프레이저 청문회에서 발언 도중 안경을 고쳐 쓰고 있다.

 

박 정권은 이미 엎질러진 청문회보다 원고가 완성된 것으로 확인된 김형욱의 회고록 발간을 중단시키는 데 총력을 기울였다. 윤일균 중정 차장보는 1978년 12월 미국으로 건너가 김형욱을 상대로 사흘 밤낮을 설득한 끝에 복사지 2000장 분량의 방대한 회고록 원고를 건네받는 데 성공했다. 그 대가로 미국돈 50만 달러를 제공하고 김형욱의 여권 문제를 해결해 주기로 했다. 회고록 출판을 중단시키기 위해 박정희가 보낸 특사 중 7~8번째에 해당한다는 윤일균이 마침내 성과를 거둔 것이다.

그러나 당시 김형욱은 또 다른 사본을 갖고 있었다. 그것으로 일본의 유명 출판사인 고단샤에서 회고록을 출간하려고 했는데 한국 정부가 고단샤에 다른 이권을 주고 출판을 저지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런데도 1979년 4월 일본의 한 출판사에서 ‘권력과 음모’라는 제목의 김형욱 회고록의 축약판이 나왔다. 유신정권이 뒤통수를 맞은 것이다. 이로서 박 대통령과는 사실상 화해가 불가능해졌다.

일본에서 발간된 김형욱 회고록 ‘권력과 음모'(1980년)

 

김형욱 실종 후, 프랑스 경찰이 철저하게 수사했지만 아무런 단서 찾지 못해

김형욱이 가족의 만류를 뿌리치고 프랑스 파리로 건너간 것은 이처럼 박 대통령의 분노가 하늘을 찌르던 1979년 10월 1일이었다. 파리행 목적에 대해선 국내 연예인과의 밀회설 등 추측이 분분하지만 정확한 이유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김형욱은 특급호텔인 리츠호텔에 묵다가 10월 7일 2류호텔인 웨스트엔드 호텔로 옮겼다. 여종업원은 오전 11시 30분쯤 ‘키 큰 동양인’과 함께 카지노에 들렀다고 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이었다. 그날 저녁 7시, 파리의 한 카지노에서 나간 이후 김형욱을 보았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실종 사실은 10월 16일자 조선일보의 특종보도를 통해 알려졌다. 당시 조선일보는 ‘김형욱씨 파리서 행방불명. 1주일째 호텔에 안 나타나’라는 제목의 3단짜리 기사로 1면에 보도했다.

김형욱의 실종 사실을 처음 보도한 조선일보 1979년 10월 16일자 1면 기사

 

프랑스 경시청은 수사본부를 차리고 4개월 동안 수사를 벌였다. 사건의 열쇠를 쥐고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이상열 주프랑스 공사도 조사했다. 이상열 공사는 김형욱이 중정부장 시절 가장 신뢰하던 오른팔이었다. 그런데 이상열은 김재규와 더 각별한 사이였다. 김재규가 3사단 부사단장을 지낼 때 부관이었고, 김재규가 보안사령관을 지낼 때 보안사에 근무했으며, 김재규의 동생 김항규와는 젊은 시절부터 오랜 친구였다. 김재규가 건설부 장관으로 중동 건설에 매진할 때는 사우디아라비아대사관의 참사관과 공사를 지냈다.

이상열 공사는 실종 전날 밤 12시까지 김형욱과 함께 있었던 사실은 인정했으나 나머지 사실에 대해서는 함구했다. 더구나 본격적인 조사를 앞두고 서울로 가는 바람에 이 공사에 대한 조사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프랑스 경시청은 “4개월 동안 시신 수색 등 철저한 수사를 했지만 생존해 있든 죽었든 김형욱은 파리에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결국 수사는 아무런 단서도 찾지 못하고 종결되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김형욱 실종 19일만에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총을 맞고 황망히 세상을 떠났다.

1966년 10월 필리핀 방문 당시 박정희 대통령(오른쪽에서 두 번째)이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의 보고를 듣고 있다.

 

실종 둘러싸고 온갖 억측 난무했지만 실체 밝혀지지 않아

1980년 3월 몇몇 주 프랑스 특파원들에게 프랑스어로 된 문서가 우편으로 배달되었다. “김형욱이 한국 정보기관에 납치되어 마취된 상태에서 외교 행낭편으로 KAL기에 실려 서울로 압송되었다가 청와대 지하에서 총살되었다”는 내용의 문서였다. 10여 일 뒤 이 문서를 토대로 작성된 기사가 ‘오작교 작전. 김형욱은 박 대통령에게 사살되다’라는 제목으로 일본의 ‘주간문춘’에 실렸다. 르몽드지도 1981년 1월 같은 내용을 발췌해 보도했다.

이와는 별개로 1991년 서울 가정법원이 실종 5년 만인 1984년 10월 7일자로 김형욱의 실종 선고를 내려 김형욱은 법적으로는 사망자로 처리되었다.

이후에도 김형욱의 실종사건을 둘러싸고 청와대 지하실 사살, 차지철 경호실장의 특수공작팀이 제거, 산채로 자동차에 실려 폐차장에서 압사, 파리 근교 살해 후 양계장 분쇄기로 처리, 파리에서 살해된 후 센강 유기, 제네바에서 살해한 뒤 한국으로 시신 운반, 중정 요원이 유인한 뒤 현지 조직폭력배가 살해 등 온갖 억측이 난무했으나 결정적인 증거가 없어 실체가 밝혀지지 않자 2005년 국가정보원 진실위가 조사에 나섰다.

진실위가 1500여 건의 문건을 분석하고 김형욱 살해에 가담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중앙정보부 요원 등 관련 인물 33명을 면담 조사한 끝에 살해에 직접 참여했다고 시인한 사람은 신현진, 이만수(가명) 등 2명뿐이었다. 그러나 핵심 인물로 지목된 이상열 공사가 진술을 거부하고 이만수도 구체적 진술을 회피해 진실위는 신현진의 진술을 토대로 2005년 5월 사건 정황을 발표했다.

 

국가정보원 진실위 발표 내용

내용은 이랬다. 1979년 9월 어느 날. 서울의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이상열 공사에게 은밀히 지시를 내렸다. 김형욱이 프랑스로 갈 테니 살해하라는 내용이었다. 이 공사는 파리에 체류 중이던 중정 어학연수생 중 신현진과 이만수 2명을 살해 가담자로 추렸다. 신현진은 평소 친하게 지내던 동구권 출신의 제3국인 친구 2명을 미화 10만 달러를 미끼로 끌어들이고 파리 시내의 벼룩시장에서 칼과 노끈 등을 구입했다. 이 공사로부터는 미화 10만 달러와 권총을 건네받았다.

김재규

 

살해 당일인 10월 7일, 신현진은 이상열 공사로부터 “김형욱에게서 돈을 빌려 달라는 전화가 왔다. 샹젤리제 거리로 김형욱을 오라고 했다”라는 전화를 받았다. 이만수는 미화 10만 달러가 든 돈가방을 들고 호텔방으로 갔고, 이 공사와 신현진, 2명의 제3국인 등 4명은 리도 극장 인근에서 김형욱을 만났다. 이 공사는 제3국인들을 돈을 빌려줄 사람이라고 속이고 김형욱을 앞자리 조수석에 태워 자리를 떴다.

운전 중 뒷좌석에 앉은 제3국인 중 한 명이 주먹으로 김형욱의 머리를 가격했고 김형욱이 고꾸라졌다. 제3국인 2명은 실신한 김형욱을 파리 외곽 숲 속으로 끌고가 방아쇠를 7번 당겼다. 주검은 낙엽으로만 감추고 김형욱의 바바리코트와 여권, 지갑, 시계 등은 차에서 대기 중이던 신현진에게 건넸으며 총은 분실했다고 했다. 신현진은 돌아오는 길에 김형욱의 시계를 센강에 던지고, 바바리코트와 벨트는 가위로 잘게 썰어 쓰레기통에 버렸다.

김재규는 10월 13일쯤 서울로 귀환해 직접 범행 결과를 보고한 신현진에게 300만원과 20만원이 든 현금봉투를 격려금으로 지급했다. 김형욱 살해사건은 이렇게 막을 내렸다.

 

발표 내용이 허점투성이라 의문점 해소되지 않아

문제는 진실위 발표가 너무 허점투성이어서 좀처럼 의문점이 해소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낙엽으로 덮었다는 시신이 끝내 발견되지 않았고 범행에 사용된 총을 제3국인이 분실했는데도 신씨가 이를 챙기지 않은 점도 석연치 않았다. 또 이상열 공사의 관용차량을 살해에 사용했다고 했는데 남의 눈에 잘 띄는 외교관 번호판을 단 차량을 범행에 버젓이 이용할 만큼 살해 계획이 허술했다는 점도 의문으로 남는다. 살해 장소가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한 것도 신뢰성에 물음표를 찍게 하고 있다.

더욱이 납치 살해사건에 깊게 연루된 것으로 알려진 이상열 공사가 2006년 4월 사망함으로써 김형욱 실종사건은 사실상 영구미제로 남게 됐다. 그는 김형욱 실종사건의 전모를 알고 있는 유일한 인물이나 “정보기관 출신은 비밀을 무덤까지 갖고 가야 한다”며 마지막까지 함구로 일관하다가 사망, 결국 자신의 말대로 진실을 무덤까지 갖고 갔다.

2009년에는 과거 박사월이라는 필명으로 ‘김형욱 회고록’(1985년)을 출간한 김경재씨가 자신의 저서 ‘박정희 시대의 마지막 20일’에서 유사한 주장을 폈다. 책에 따르면 암살범은 조모씨인데 일본명은 구로이 다카기리이고 여권에는 김승이란 가명을 썼다.

국내에서 처음 발간된 김형욱 회고록(1985년). 김경재씨가 박사월이라는 필명으로 출간했다.

 

책에서 조씨가 밝힌 암살 정황에 따르면, 암살 실행조는 2명이었고 이들은 중정 요원 3명의 도움을 받았다. 납치 직전까지 파리의 카지노에서 도박 중이던 김형욱은 중정 요원들로부터 한국 여성이 밖에서 기다린다는 말을 듣고 밖으로 나왔다. 김형욱은 의심하지 않고 캐딜락에 오르자마자 조씨에게 목이 꺾여 실신했다. 조씨는 김형욱의 혁대, 지갑 등 소지품을 빼냈다. 신원을 감추기 위한 조치였다.

암살조는 파리에서 서북부 방향으로 4㎞ 떨어진 양계장에 도착한 뒤 김형욱을 닭 사료용 분쇄기에 넣어 처리했다. 현장에는 이스라엘 텔아비브에서 이스라엘 정보부 ‘모사드’에 파견되어 훈련을 받고 있던 청와대 경호실 직원이 있었다. 저자는 이로 미루어 암살은 차지철 당시 청와대 경호실장이 주도한 것으로 보인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 주장 역시 죽은 자는 말이 없는 상태에서 일방적인 주장이라 신빙성이 었다. 결국 결정적인 물증이 나오지 않는 한 김형욱의 실종사건은 영원한 미스터리로 남을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