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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 북동부의 뉴잉글랜드 6개주를 가다 ⑪] 뉴햄프셔州, 화이트 산악지대, 캔카마구스 하이웨이, 워싱턴산의 큰바위얼굴, 브레튼우즈의 워싱턴호텔, 위니페소키 호수, 쉐이커 빌리지

↑  워싱턴호텔 전경. 화이트 산악지대의 ‘대통령 레인지’를 배경으로 화려하고 웅장하게 서있다. (출처 워싱턴호텔 홈페이지)

 

by 김정일

前 금융인·뭐라도학교 교장, 現 소나무 농사꾼

 

■뉴햄프셔주

▲화이트 산악지대(White Mountains)

 

높은 산들은 역대 대통령의 이름에서 따 ‘대통령 레인지’로 불려

그동안 했던 코네티컷, 로드아일랜드, 매사추세츠, 메인주 여행은 대서양을 낀 아름다운 바다 여행이었다. 이제부터는 내륙 지방 뉴햄프셔주와 버몬트주의 산악여행이다. 오늘은 미시시피강 동쪽에서 가장 높다는 워싱턴산(1,917m)을 비롯한 산악지역을 여행한다. 미국 동부지역을 위에서 아래로 종단하는 애팔래치아 산맥에서 대표적인 산악 관광지는 뉴햄프셔주의 화이트 산악지대(White Mountains)다. 이곳에 워싱턴산을 비롯한 여러 산들이 굽이굽이 물결치고 있다. 그 사이사이에 수많은 스키장, 골프장, 등산로, 캠핑장, 위락시설들이 들어서 있어서 미국 동부 산악 스포츠의 메카 역할을 하고 있다.

애팔래치아 산맥은 지구상의 다른 어떤 산맥이나 지형보다 오래 됐다. 단순 세포식물이 땅에 처음 서식했을 때, 그리고 원시 생물이 바다에서 육지로 처음 기어 올라왔을 때 그들을 맞아준 것이 애팔래치아 산맥이었다. 10억 년 전까지, 지구는 하나의 덩어리였는데 지구의 맨틀 안에서 일어난 소란으로 땅이 갈라져서 거대한 동강으로 떠돌아 다니다가 최소한 3번 이상 대륙들이 서서히 그러면서 어마어마한 힘으로 부딪쳐서 중심부로 솟아올라 거대한 산맥들이 생겨났다. 애팔래치아 산맥은 4억7000만 년 전에 대륙의 판이 부딪쳐 솟아 올라 형성되었다.

애팔래치아 산맥(출처 maps-for-free.com)

 

화이트 산악지대의 높은 산들은 역대 대통령의 이름에서 따 ‘대통령 레인지(Presidential Range)’라고 한다. 산 이름은 남서쪽에서 북동쪽으로 피어스산(14대 대통령) 하이젠하워산(34대) 프랭클린산(정치인·과학자) 먼로산(5대) 워싱턴산(1대) 클레이산(정치인, 뉴햄프셔주는 레이건산으로 개명했으나, 연방정부에서는 클레이산 이름 유지) 제퍼슨산(3대) 애덤스산(2대) 매디슨산(4대)이다. 이 대통령 레인지는 버몬트주의 그린 산악지대에도 있다. 링컨산(16대) 그랜트산(18대) 클리브랜드산(22대) 윌슨산(28대) 등이다. 다만 우리가 갈 길은 이런 큰 산들이 아니라 차로 통행이 가능한 주변 관광지다.

화이트 산악지대의 ‘대통령 레인지’

 

▲캔카마구스 하이웨이(Kancamagus Highway)와 워터빌

 

웅대한 산악의 서늘한 정기가 나의 폐부를 훑어

메인주 꼭대기에서 내려와 뉴햄프셔로 넘어오자마자 새코(saco) 강변에서 숙박하고 화이트 산악지대의 중심인 콘웨이(Conway)에서 여행을 시작한다. 산의 동쪽에서 출발해 남쪽, 서쪽, 북쪽을 돌아 다시 동쪽으로 돌아오는 약 150㎞의 드라이브 길이다.

캔카마구스 하이웨이(The Kancamagus Highway) 초입길에 들어서니 깊은 산에서 흘러내리는 맑은 계곡이 도로를 따라 흐르고 하늘을 찌를 듯 쭉쭉 뻗은 침엽수들이 도로 양 옆에 부동자세로 서있다. 나는 사잇길을 사열하듯 천천히 지나갔다. 여성의 가슴 모양으로 아름답게 균형이 잡힌 산 봉우리가 우리의 길을 막아선 듯 시야에 들어온다. 계속 앞으로 달리니 마치 여인의 품 속으로 들어갈 것 같은 착각이 든다.

주말인데도 본격적인 시즌이 시작되지 않아 2차선 도로는 텅 비어 마음껏 수목을 사열할 수 있었다. 활엽수들은 이제 막 손톱만큼씩 새싹을 내밀어 침엽수 사이사이로 수줍은 애기 손을 흔들며 봄 산의 색채를 풍성하게 해준다. 웅대한 산악의 서늘한 정기가 나의 폐부를 훑는다. 조금씩 산악 고도가 높아지면서 귀가 먹먹해진다. 첩첩산중 산세는 규모를 짐작할 수 없을 만큼 굽이굽이 아득하지만 산들은 둥글둥글 개성이 없다. 산 중턱의 전망대에서 굽어보니 빙하의 침식으로 죽은 고사목이 엄청나게 많다. 내 흰 머리카락 만큼이나 산등성이가 듬성듬성 하얗다.

이곳을 왜 화이트 산악지대(White Mountains)라고 부르는지 모르겠는데 아마도 긴 겨울 동안 산등성이 마다 흰 눈이 쌓인 모습을 보고 부른 이름일 것도 같고, 아니면 이어지는 흰 바위 봉우리들과 하얀 고사목의 경치를 보고 부른 이름일 수도 있겠다고 혼자 생각해본다. 설악산의 미시령을 넘는 기분이었으나 크고 작은 봉우리를 예리하게 갈고 닦아 오밀조밀 배치한 설악산에는 경치가 미치지 못한다고 생각됐다. 다만 9, 10월 가을 단풍길은 최고의 경치라고 한다.

캔카마구스 하이웨이

 

캔카마구스 하이웨이를 주파하고 워터빌(Watervill)로 향했다. 이동거리 26마일, 약 40분이 소요된다. 링컨에서 주간고속도로 93번 남쪽 길로 내려가다 다시 산악지대 계곡을 파고 들어가 있는 종합 산악 스포츠 시설지구다. 많은 스키장과 골프장, 실내 스케이트장, 테니스장 등이 있고 다양한 산악 트레일 코스가 있는 아름다운 전원 스포츠 도시다.

이곳도 시즌이 시작되지 않아 대부분 텅 비어 있어 평화롭고 아름다웠으나 적막감이 돌았다. 갈 길 바쁜 나그네에게는 그림의 떡이다. 왕복으로 치면 꽤 먼 길을 달려왔으나 허탕을 치고 뉴햄프셔의 상징인 ‘큰바위얼굴’이 있는 프란코니아 노치를 향해 온 길을 되집어 북쪽으로 올라갔다. 뉴햄프셔에서 노치(Notch)란 ‘산길’을 의미한다.

 

▲큰바위얼굴(Old Man of the Mountain)

 

뉴햄프셔주의 엠블렘은 큰바위얼굴

어린 시절 책에서 언뜻 읽었던 나다니엘 호손의 단편소설 ‘큰바위얼굴’의 현장이 이곳에 있다. 화이트 산악지대 서쪽에 위치한 프란코니아 노치 주립공원 안의 큰바위얼굴이다. 그런데 2003년에 산 정상 부근 바위절벽에 붙어있던 눈, 코, 입, 턱이 떨어져 나가 이제는 밋밋한 절벽만 남아 있다. 뉴햄프셔주는 1945년 큰바위얼굴을 주의 엠블렘으로 정하고, 주의 구호는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택하겠다(Live free, or Die)’로 했다. 주도를 표시하는 도로 표지판에도, 자동차 번호판에도 큰바위얼굴이 그려져 있다. 그만큼 중요한 보물이 무너져 내린 것이다. 나다니엘 호손이 큰바위 얼굴을 소설로 소개한 뒤 200년 가까이 많은 사람들의 가슴에 따듯한 감동을 심어주며 건재했던 현장이 사라진 것이다.

나다니엘 호손

 

그래도 그 바위가 보고 싶었다. 93번 주간고속도로를 따라 프란코니아 노치 지역을 향해 북쪽으로 올라가다 ‘배이신(The Basin)’이라는 표지판을 만나 차를 세웠다. 도로에서 조금 걸어 올라가니 높지는 않지만 수량이 꽤 많은 폭포가 대야 모양으로 움푹 파인 거대 바위 위로 쏟아져 내렸다. 장관이었다. 직경 9m, 깊이 4.5m의 바위 웅덩이는 약 2만 5000년 전 빙하기가 끝날 무렵부터 폭포에 패이면서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한다. 이곳 사람들은 이 대야 바위를 노인(큰바위얼굴)의 발이라고 한다.

노인(큰바위얼굴)의 발

 

현장이 훼손된 것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니 가슴 허전해

큰바위얼굴을 찾기 위해 다시 93번 고속도로를 타고 더 북진했다. 도로 오른쪽으로는 바위산들이 솟아있고 왼쪽으로는 채석장같이 거대한 돌무더기들이 산의 경사면에 걸쳐있다. 당연히 오른쪽 바위산 중에 하나가 큰바위얼굴일 거라 생각하고 오른쪽만 쳐다보며 가다 서다를 반복하며 차를 몰았는데 찾고 보니 예상과 달리 왼쪽 돌무더기 산꼭대기였다. 도로 옆에 큰바위얼굴을 뜻하는 ‘올드맨’ 표지판을 보고 따라 들어갔으나 안내 표지판이 부실해서 찾는데 애를 먹었다.

이곳은 겨울에는 스키장으로, 여름에는 플륨계곡, 에코호수, 프로필호수에서 하는 수영과 낚시, 보트타기로 유명한 관광지이다. 현장에는 스키 박물관과 큰바위얼굴 박물관이 있다. 캐넌산 정상으로 올라가는 에어리얼 트램이 운행된다. 그러나 봄은 비수기라서 모두 문을 닫고 있다.

어린 시절 책을 읽고 가슴에 따뜻하게 남아있던 이야기의 현장이 훼손된 것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니 가슴이 허전했다. 이곳 사람들은 이 큰바위얼굴을 ‘산노인(Old Man of the Mountain)’이라고 한다. 산 밑의 프로필호수 위 370m 절벽에 길이 12m 폭 7.6m의 바위가 매달려 있는 모양이 노인의 옆얼굴 모습이었다. 얼굴이 무너지기 전에는 저녁 무렵 올드맨의 프로필이 산 밑의 아름다운 호수(프로필 호수)에 비치면 위대한 인물의 얼굴을 만나는 듯한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이 마을 사람들은 이 위대한 인물이 언젠가 이 마을에 나타날 현인이라고 생각하며 현인이 나타날 날을 고대했다. 이 전설을 1850년에 나다니엘 호손이 단편소설로 만들었고, 전 세계의 어린이들이 꿈을 키우며 즐겨 읽는 이야기가 되었다. 소설의 줄거리는 이 글의 맨 아래에서 소개한다. 자칫 지루할지 몰라서다.

큰바위얼굴이 무너지기 전(왼쪽)과 현재 모습
큰바위얼굴 붕괴 후 후속 대책 마련 중

큰바위얼굴이 있는 캐넌산은 화강암 바위가 아니고 돌이 결을 따라 떨어져 나가는 암질의 바위산이다. 도로에서 보면 캐넌산 중턱에는 산에서 떨어져 내린 돌무더기들이 채석장처럼 쌓여 있다. 큰바위얼굴에도 금이 점점 커져서 1920년 체인으로 묶어 놓고 1957년 20톤의 시멘트와 용접으로 대수선을 했다.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2003년 5월 3일 한밤중에 얼굴의 돌출부분이 무너져 내렸다. 전 세계 어린이들의 꿈과 이야기가 무너져 내린 것이다. 사실 산의 모양도 바위도 어디서나 쉽게 볼 수 있는 평범하기 짝이 없는 그렇고 그런 곳인데, 문학을 통한 의미 부여가 이토록 전 세계인의 가슴을 따뜻하게 해주었던 것이다.

그렇다. 세상은 원래 평범하다. 우리는 원래 평범하다. 그 평범에 의미를 붙이면 비범이 된다. 산다는 것은 어쩌면 평범한 나에게, 평범한 가족에게, 평범한 일상에게, 평범한 세상에 의미를 붙여가며 사랑해서 특별한 것을 만드는 작업 과정일 수 있겠다.

현재는 관계자들이 여러 대안을 마련하고 있다. 큰바위얼굴이 비쳐지던 프로필 호숫가에 상징적 디자인 공원도 조성할 예정이다. 그것은 철기둥 몇 개를 큰바위얼굴 방향으로 세워 놓고 사람들이 자기 키의 크기에 따라 지정된 곳에 서서 철기둥의 끝과 바위를 일직선으로 바라보면 바위에 얼굴부분이 나타나는 것 같은 효과를 주도록 조형되었다. 철기둥의 꼭대기에 얼굴 모양의 작은 돌출물을 붙여놓아서 이 돌출물과 산꼭대기 바위절벽과 보는 사람의 시각을 일치시키면 마치 산 정상에 큰바위얼굴이 보이는 것 같은 효과를 준다. 나머지 3가지 조형물은 충분한 토론을 거쳐 설치될 예정이다.

큰바위얼굴 방향으로 세워 놓은 철기둥의 끝과 바위를 일직선으로 바라보면 바위에 얼굴 부분이 나타나는 것 같은 효과를 주도록 조형되었다.

 

▲브레튼우즈(Bretton Woods) 협정과 워싱턴호텔

 

브레튼우즈 협정 체결한 워싱턴 호텔은 화려하고 웅장한 모습

문드러진 큰바위얼굴을 뒤로하고 이번에는 브레튼우즈(Bretton Woods)로 향했다. 화이트 산악지대의 서쪽에 있는 프란코니아 노치에서 산을 둘러서 북쪽으로 난 길을 따라 갔다. 25마일 30여분의 거리이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갈 무렵인 1944년 7월 미국의 주도로 전후 세계경제의 질서를 재편하기 위한 틀을 짜기 위해 강대국들을 중심으로 IMF와 세계은행을 창설하고, 미국의 통화를 기축통화로 정함으로써 오늘날 세계경제의 헤게모니를 미국이 쥐고 흔들게 만든 역사적 현장이 이 산골짜기라는 것을 이번에 알았다.

이 한적한 산 속에서 수 백만 명의 죽음의 댓가를 치르고 마침내 승리를 눈 앞에 둔 45개 전승국의 국고지기들이 3주간 골프를 치며 세계 경제의 헌법을 만든 것이다. ‘브레튼우즈 협정’을 수없이 언급하면서도 그곳이 어디에 있는지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 역사적 현장은 초록의 융단을 깔아놓은 듯한 화이트 산악지대의 대통령 레인지(Presidential Range)를 배경으로 거만하고 화려하고 웅장하게 서있는 워싱턴호텔이다. 건물은 하얗고 지붕은 빨갛다.

워싱턴호텔

 

파란 하늘에는 하얀 호텔 건물에서 물감이 번져 풀어져 나간 듯 흰 구름이 풍성하다. 사람들은 커피 한 잔을 들고 호텔 대형 베란다의 벤치에 앉아있다. 바로 앞에 펼쳐진 골프장을 바라보며 여유롭게 담소하거나 그리스식 흰 기둥사이로 먼 산의 파노라마와 흰 구름이 흘러가는 하늘을 바라보는 그들의 여유가 너무 부럽다.

비수기라 대부분의 지역이 한가한데도 이 호텔만은 사람들이 북적였다. 1902년 위엄있는 스페인 르네상스 풍으로 지어진 이 호텔은 우아함과 부유함의 첨단이었다. 2600에이커의 대지에 235개의 객실을 갖추고 돈 보따리를 줘야 살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장식품으로 수 놓았다. 회반죽을 바르는 일에만 250명의 이탈리아 미술가들이 동원되었을 정도다.

화이트 산악지대가 관광지로 각광을 받으면서 뉴욕을 비롯한 대도시에서 사람들이 휴식을 위해 몰려와 한 때는 20여개의 대형 호텔들이 이 지역에서 번창했으나 오늘날에는 이 워싱턴 호텔만 남아 있단다. 자동차의 발달이 호텔에서 2주씩 장기간 머물던 손님들에게 변덕스런 기동성을 제공하면서 투숙객이 급감했기 때문이다. 호텔들은 차례차례 문을 닫았다. 그후 건물은 불타 무너져 땅으로 돌아갔고 땅은 숲으로 돌아갔다. 세계 대전의 승리를 장식했던 역사적 호텔만 남아 명맥을 이어가고 있는 것이다.

 

워싱턴山은 완벽한 휴양지

가까운 곳에 세계 최초의 톱니바퀴 산악열차라고 자랑하는 워싱턴산 산악열차가 있다. 찾아갔더니 비수기라 하루 한번 운행하는데 벌써 올라가 버렸다. 미리 시간을 확인해 놓지 않은 결과다. 할 수 없이 이것으로 워싱턴산 여행을 마감해야 했다. 스키장을 비롯한 모든 종합 레저시설을 빠진 것 없이 고루 갖추고 있는 완벽한 휴양지이지만 우리처럼 갈 길 바쁜 나그네는 그저 눈요기로 만족할 수밖에 없다.

워싱턴산 산악열차

 

워싱턴산은 극한적 기후로 유명한데 캐나다와 오대호에서 내려오는 한랭전선이 대서양과 미국 남부에서 불어오는 습기 차고 상대적으로 따스한 온난전선과 중첩되는 지점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이란다. 그래서 갑작스런 한파에 조난당해 목숨을 잃은 사람들도 매우 많다고 한다. 마침 산악열차를 못 탔으니 얼어 죽을 일은 면한 셈이다.

화이트 산악지대를 동남서북으로 한 바퀴 돌았으니 화이트 산악지대의 북쪽에서 동쪽으로 가로 지르는 302번 도로를 통해 다시 콘웨이로 돌아가서 다음 여정인 호수지대로 떠나야 한다. 화이트 산악지대 중 국가 명승지 길(National Scenic Byway)로 지정된 중심부만을 한바퀴 도는 데도 오늘 하룻동안 약 250㎞의 드라이브를 했다.

 

▲위니페소키(Winnipesaukee) 호수

 

호수지대도 화이트 산악 국유림의 일부

산 구경을 실컷 했으니 이번엔 바다같이 너른 호수 구경이다. 날이 어두워지기 전에 호수지대에 숙소를 잡기 위하여 길을 재촉했다. 47마일 약 80분을 남쪽으로 달려 위니페소키(Winnipesaukee) 호수 남쪽 라코니아에 이르러 이집 저집 기웃거리다 쓸 만한 숙소를 수변(水邊) 도시인 길포드에 잡았다.

날이 어둑해져 숙소 근처 호수변 공원을 찾아가서 광활한 호수의 노을을 감상했다. 호수가 너무 커서 호수 끝 수평선에 일직선으로 가느다랗게 이어진 산들의 검은 띠가 호수와 하늘을 갈랐다. 곧 검은 구름 위로 붉은 노을이 번지더니 붉은 색조는 사라지고 검은색들 끼리 명암을 나누어 어슴프레 영역을 구분했다. 이미 날이 어두워졌는데도 고교생 쯤으로 보이는 아이들이 엉성한 낚시대를 들고 나와 호수로 흘러드는 냇가에서 낚시질을 하길래 무슨 고기를 잡느냐고 물었더니 송어가 저녁에 잘 잡혀 지금 나왔다고 한다.

위니페소키 호수

 

매일매일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길을 떠나야 하는 바쁜 일정이다보니 숙박지 요금에 포함된 시설을 제대로 이용하지 못한 게 아쉬워서 오늘은 자쿠지(뜨거운 욕조) 목욕을 하고 떠나기로 했다. 아침부터 아무도 없는 욕조에 물을 틀어달라고 해서 따끈한 물로 몸을 푹 녹였다. 벌써 뉴욕을 떠난지 열흘 가까이 지났다. 하루살이로 잠을 자고 눈만 뜨면 보따리를 싸서 길을 떠나는 영락없는 낙타 유목민이다. 5월14일 월요일, 오늘도 우리는 낙타 렌트카를 몰고 길을 떠난다.

위니페소키 호수를 감상하려고 호수지대를 찾아갔다. 이 호수지대도 화이트 산악 국유림의 일부다. 호수 이름은 오래전 인디언들이 명명했다. ‘위대한 영혼의 미소(Smile of the Great Spirit)’라는 뜻이다. 뉴잉글랜드 지방은 긴 대서양 바닷가에 톱날처럼 들락거리는 해안선이 길게 늘어선 데다 내륙에는 강과 호수가 풍부해서 어느 마을을 가나 물과 어우러진 아름다운 풍경의 연속이다. 맑디 맑은 물이 풍부하다. 뉴햄프셔주는 내륙 지방인데도 어찌나 호수가 많은지 총 수변 길이가 300㎞나 된다. 호수가 1,300개, 섬이 300여 개라고 한다. 그중 위니페소키 호수가 가장 크다. 육안으로 호수 크기를 가늠할 수 없을 정도다.

 

위니페소키 호수에만 253개 섬과 호수 있어

위니페소키 호수는 수많은 크고 작은 별 모양으로 들쭉날쭉해서 호수 주변으로 여러 개의 아름다운 마을이 번성하고 있다. 지도를 보아도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둥근 호수가 아니라 유리판 위에 파란 물감을 뿌려서 붓으로 흩어버린 형태의 호수여서 호수 안에 섬이 있는지 섬 안에 호수가 있는지 모를 정도다. 위니페소키 호수에만 253개의 섬과 호수가 서로 물고 물린 모습으로 이어져 있다. 호수 일주 드라이브 거리가 101㎞이고, 가장 깊은 곳은 63m이다. 위니페소키 호수는 뉴햄프셔주에서는 가장 큰 호수이지만, 뉴잉글랜드 전체로는 뉴욕주의 샹플레인(Champlain) 호수와 메인주의 사슴머리 호수(Moosehead Lake)에 이어 세 번째다.

위니페소키 호수는 그 둘레에 수십 개의 새끼 호수들을 거느리고 있다. 이들 새끼 호수들 조차도 육안으로는 크기를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로 크다. 가까이 있는 큰 새끼 호수들만 꼽아보아도 북쪽의 스퀨 호수(Squam Lake), 작은 스퀨 호수, 흰 오크 연못(White Oak Pond), 서쪽으로 위니스스퀨 호수(Winnisquam Lake), 실버 호수(Silver Lake), 오피치 호수(Lake Opechee), 남쪽과 동쪽으로도 무수히 많은 새끼 호수들이 딸려있다.

이 호수들과 93번 주간고속도로 사이에 관광도시들이 이어져 있다. 메레디스(Meredith), 웨어스(Weirs), 라코니아(Laconia), 길포드(Gilford)등의 수변 도시들이다. 우리는 위키페소키 호수 남단의 앨톤(Alton)에서 서쪽 해변을 타고 북쪽으로 올라가며 경치를 감상하기 위해 앨톤으로 달렸다. 그런데 도착해보니 막상 호숫가로 나가는 것이 어려웠다. 호숫가는 개인 별장들로 이어져 있어서 가는 곳마다 들어오지 말라는 팻말의 박대만 받고 물가로 접근하지 못했다.

위니페소키 호숫가에 자리잡은 개인주택

 

그 외에 자주 보이는 것이 공화당 대통령 후보를 지지하는 팻말이다. 다른 주에서는 눈에 띄지 않던 정치 팻말이 이곳 뉴햄프셔주에서는 공공연하게 대문 앞에 달려 있다. 전통적으로 뉴햄프셔주는 매우 보수적 정치색을 견지하고 있어서 진보적 색채의 이웃 버몬트주와 매사추세츠주 사람들로 부터 경멸의 눈초리를 받기도 한다는 얘기가 있다. 뉴햄프셔주는 4년마다 대통령 후보 결정시 아이오와주의 코커스(당원대회)에 이어 최초의 프라이머리 선거를 실시해서 후보 선택의 시금석을 제시하는 정치 일번지이기도 하다.

 

아름답고 멋이 있으나 부자들의 별장에 가로막혀 접근할 수 없어

어쨌든 호숫가는 아름답고 멋이 있었으나 나그네는 그 넓은 호수에 거의 접근할 수 없었다. 그 넓은 호숫가가 철저하게 개인주택으로 둘러싸여 있어 집주인 외에는 호숫가로 접근은커녕 볼 수도 없었다. 요트 접안시설을 갖추고 있고 아름드리 나무로 울창한 숲이 둘러쳐져 있고 외부인 출입금지 팻말이 달려있어 그 너머 호숫가는 먼발치에서 드문드문 틈새로만 볼 뿐이다.

우리나라는 절경을 식당이 점령하고 있어 문제인데, 미국은 절경을 부자들의 별장이 점령하고 있어 문제다. 그나마 우리나라는 돈내고 식당으로 들어가면 절경을 구경이라도 할 수 있지만 미국은 아예 접근이 안되니 고약한 사회다. 이런 난감한 경우는 이번 여행에서 가는 곳마다 부딪치는 문제였다.

우리나라는 절경지 주변을 개인에게 개발 허가를 내주면 지저분한 음식점이나 숙박지로 변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대부분 개발 허가를 내주지 않고 썰렁하게 자연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이에 비해서 미국은 절경지의 상당 부분을 개인에게 개발하도록 하고 개인들은 그림같이 아름다운 집과 정원으로 가꾸어 놓는다. 그러다보니 그림같은 절경과 가든은 초대받지 않은 외부인에게는 그림의 떡이다.

황량한 한국의 호수변을 보면 미국의 그림같은 집과 정원이 곁들여진 경치가 그립고, 그림같이 아름다운 집과 정원으로 접근할 수 없는 미국의 절경지를 둘러볼 때는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있는 한국의 환경이 그리운 이중적 태도를 갖게 된다. 비까지 추적추적 내리는 아침이라 호수를 기웃기웃거리다 짜증이 나서 다음 목적지를 향해 떠났다.

 

▲쉐이커 빌리지(Shakers’ village)

 

쉐이커 교도들의 농장 공동체

쉐이커 빌리지는 캔터베리(Canterbury)에 있는 쉐이커 교도들의 농장 공동체다. 200년 이상 신앙을 지키며 검소하게 생활하고 일용할 양식을 위하여 공동 작업을 하며 함께 살아온 공동 농장이다. 애석하게도 1주일 후인 5월 20일부터 문을 연단다. 5월 14일부터 이들 고유의 전통 식사를 제공하는 식당을 연다는 인터넷 기사를 보고 절묘하다며 찾아갔더니 작년 기사였다. 금년에는 농장과 마찬가지로 식당도 5월 20일부터 문을 연다고 한다. 맛있는 점심식사를 기대하고 갔다가 헛물만 켰다.

다행히 가이드투어는 안되지만 농장에 들어가서 둘러보는 것은 괜찮다고 한다. 농장 안에는 공동생활에 필요한 시설들이 200년 이상의 연륜을 자랑하며 늘어서 있다. 숙소와 교회와 각종 작업장 등이 배치되어 있고 주변에 소 방목장, 허브 재배장, 과일나무 고목, 아름다운 호수가 풍경화와 같이 어울려 있다. 밭이 곧 정원이고, 정원이 곧 밭이다. 그래서 텃밭을 ‘키친 가든’이라고 부른다. 밭의 구석구석 마다 심어놓고 가꾼 꽃과 나무가 밭일로 힘든 농부들의 마음을 향기롭게 쓰다듬어 주었을 것이다.

드넓은 초지가 가득 핀 노란 민들레와 어울려 그림의 바탕색 역할을 하고 있다. 움푹 파인 땅이 60여m의 길이로 돌담이 둘러쳐져 있어 궁금했는데 소 우사로 쓰다가 불이 난 것을 그대로 두어 돌 벽만 남아있는 것이라고 한다. 단순하고 소박한 집들이지만 구도와 색상의 다양한 변화 때문에 아름답고 깔끔한 인상을 준다. 채소 가든에는 여러 종류의 채소가 저마다 문패를 달고 싱싱하게 자라고 있다. 농장의 끝에는 꽤 넓은 연못이 자연스럽게 멋을 발하고 있다. 이 연못을 통하여 채소밭에 필요한 물을 공급한다. 연못 둘레에는 5월을 맞아 다양한 꽃들이 파란 잎새 사이로 방긋방긋 웃으며 손짓한다. 대부분의 건물이 100~250년 전에 지어졌다.

쉐이커 빌리지

 

쉐이커 교도들에게 최고 덕목은 청결과 정직과 검소

퀘이커 교도는 익히 알고 있었지만 쉐이커 교도는 처음 들어보는 말이다. 재미있는 것은 퀘이크나 쉐이크나 ‘흔들린다’ 또는 ‘진동한다’는 뜻이다. 자료를 찾아보니 ‘쉐이커’는 18세기에 영국 신교에서 분파된 신비주의 이단 교파로 재림 예수를 자처하는 마더 앤 리(Mother Ann Lee)를 중심으로 이 땅에 천국을 건설하기 위해 소박한 생활과 열정적 종교의식을 추구했던 것 같다.

쉐이커교는 18세기 중반 뉴잉글랜드 지방으로 건너와 환상, 예언, 방언, 신유와 같은 개인적 성령 체험을 중시하면서 격렬한 춤과 노래로 예배했다. 이들은 창조자 하나님은 남성도 여성도 아니며, 예수는 하나님이 남성의 몸으로 처음 나타나신 것이며, 앞으로 올 재림예수는 여성의 몸으로 나타날 것이라고 믿었다. 지도자 마더 앤 리가 여성이어서 그랬을 것이다.

쉐이커교는 당시 남성 중심의 전통적 교회와는 달리 남녀 평등을 엄격히 추구하고 실질적으로 여성이 교회의 리더십을 형성했다. 최고 집행기구는 남자 장로 2명과 여자 장로 2명으로 구성되었다. 이들은 아담과 이브의 타락을 성적인 것으로 보고 결혼을 하지 않고 처녀성과 동정의 유지를 중요시 했다. 이미 결혼한 가족도 쉐이커 교도가 되면 가족 관계가 해소되어 별도의 생활을 한다. 교회에도 남녀의 출입문이 따로 있으며 각각 남녀 구별된 자리에 앉는다. 이들의 최고 미덕은 순결, 공동체주의, 죄의 고백이다.

결혼을 하지 않기 때문에 아이들이 없다. 아이들은 입양해 키우고 교육시킨다. 고아와 부모 잃은 아이들도 모두 받아 들였다. 이곳의 학교 교육은 당시로서는 매우 선진적 시스템을 갖추어서 인근 마을 사람들이 자녀 교육을 맡기기도 했다. 이곳에서 자라고 교육받은 아이들은 21세가 되면 이 공동체에 남을 것인지 아니면 세상으로 떠날 것인지 스스로 결정할 수 있다. 당시에 평균 약 25% 미만의 젊은이는 남고 나머지는 떠났다고 하는데 이 정도면 매우 우수한 잔류율이어서 1840년경에는 공동체 정회원이 5000명이나 되었다.

오래전 쉐이커 교도들의 모습

 

쉐이커 교도들은 검소한 생활과 고된 노동으로 공동체 생활을 영위했다. 청결과 정직과 검소를 최고의 생활 덕목으로 삼았다. 이들은 농장을 운영하면서 식량을 충당했다. 천과 옷을 만들고 공예품을 만들어 생활의 모든 필수품을 자급자족하면서 남는 것은 판매했다. 쉐이커 교도들의 손길로 만들어진 물건들은 디자인과 내구성과 기능성이 뛰어나 큰 인기를 얻었다. 쉐이커 교도들의 재림 예수를 자처하는 마더 앤 리의 노동에 대한 훈계가 있다.

☞ 성령은 더러운 곳에 거하시지 않는다.(Good spirits will not live where there is dirt.)

☞ 천년을 살 것 같이 일하고, 내일 죽을 것 같이 일하라.(Do your work as though you had a thousand years to live and as if you were to die tomorrow.)

☞ 손은 일에 두고, 마음은 하느님께 두어라.(Put your hands to work, and your heart to God.)

 

쉐이커교 쇠락 원인은 도시화 진전, 상품의 대량생산, 입양 제한법

이렇게 잘 나가던 쉐이커교가 19세기에 들어서 급격히 쇠퇴한다. 주요 원인은 도시화가 진전되면서 농촌 사람들이 도시로 빠져나가고, 대량생산 시스템으로 도시의 공장에서 값싼 물자가 생산되면서 품질은 좋지만 비싼 쉐이커 교도들의 수공예품이 인기를 잃었기 때문이다. 종교기관의 고아 입양을 제한하는 법까지 시행되면서 결혼을 하지 않고 고아를 입양해서 키우는 쉐이커교의 공동체 충원 방식이 작동할 수 없게 된 것도 주요 원인 중 하나다.

한창 때는 뉴잉글랜드 지방 여기저기에서 공동체가 운영되었지만 지금은 정회원 교인이 단 3명만 남아서 메인주의 안식일 호수(Sabbathday Lake)라는 마을에서 살고 있고, 그들이 살던 마을은 박물관으로 여기저기 남아서 그들의 검소하고 선량한 신앙생활의 잔상을 보여주고 있을 따름이다.

종교인들은 그들의 순수한 신앙이 구현된 지고지순한 낙원 공동체를 꿈꾼다. 임자 없는 땅으로 여겨지던 신대륙은 이러한 종교집단이 그들만의 정의롭고 순수한 공동체를 만들어 살기 딱 좋은 곳이었을 게다. 남과 다른 그들의 삶을 핍박할 현실적 권력도 존재하지 않던 곳에서 그들만의 유토피아를 형성하며 행복하게 살려는 시도가 신대륙 곳곳에서 목격되는 이유다. 최초의 이주자였던 퓨리턴이 그렇고, 퀘이커교, 쉐이커교, 몰몬교 등이 모두 죄악이 가득한 세상을 떠나 성실한 노동과 순수한 신앙으로 살아보려는 열정으로 그들만의 공동체를 만들어 보았지만 인간의 이상은 시간이 흐르면서 다시 오염되고 만다.

평화로운 마을 쉐이커 빌리지를 떠나서 론리 플래닛에 작고 아름다운 동네라고 소개된 피터보러(Peterborough)와 핸콕(Hancock)으로 향했다. 약 1시간 이상 가야하는 먼 거리임에도 지나쳐 가기에는 아쉽다. 막상 찾아가니 너무 작고 인적도 드물어 쓸쓸하기까지 하다. 너무 아름다운 마을을 많이 보고 다녔더니 이제 감동이 적다. 다리도 아파 차로 교회가 있는 다운타운부터 한 바퀴 둘러보고 다시 떠났다. 호수와 둘레에 숲이 있고 다운타운에 교회와 오래된 주막이 있는 것이 전형적인 마을 모습이다.

피터보러 마을

 

이제 뉴햄프셔주의 경계를 넘어 뉴잉글랜드의 마지막 주 버몬트주로 간다. 핸콕에서 뉴햄프셔 주도를 이리저리 거쳐서 주간 고속도로 91번을 타고 북서쪽으로 달려 우드스탁에서 하룻밤 둥지를 틀었다. 70마일 1시간 45분 거리다. 비가 점점 거세져서 내일 여정이 걱정되었다. 이번 여행에서는 줄기차게 비가 따라 다닌다.

 

☞나다니엘 호손의 큰바위얼굴 이야기

어니스트는 어려서 어머니에게서 큰바위얼굴과 관련된 얘기를 듣고 언젠가는 그 위인을 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 얘기는 이랬다.

“산 정상의 큰바위얼굴을 올려다보면 천둥같이 굵지만 인자한 목소리로 금방이라도 말을 걸어올 것 같은 고결한 얼굴 모습이다. 옛날부터 어른들은 저 큰바위얼굴의 음덕 덕분에 마을이 항상 평안하다고 말씀하셨다. 또 이 산골짜기에서 태어난 아이들 중에서 큰바위얼굴을 꼭 닮은 귀한 인물이 나타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어니스트는 시간이 날 때마다 인자한 큰바위얼굴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어느날 오래 전에 이 마을을 떠났던 개더골드(Gathergold)라는 사람이 큰 돈을 마을로 돌아왔다. 마을 사람들은 그가 큰바위얼굴과 닮았다고 소리쳤다. 그러나 어니스트에겐 그렇게 생각되지 않았다. 바위를 올려다 보니 “걱정마라. 앞으로 다른 사람이 나타날 것이다”라고 바위가 말했다.

몇 년이 지나 어니스트가 청년이 되었을 때 개더골드는 많던 재산을 다 날리고 죽었다. 사람들은 이제야 그가 큰바위얼굴을 닮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람들의 관심은 이 마을 출신의 전쟁 영웅 올드 블럿앤썬더(Old Blood and Thunder) 장군에게 옮겨 갔다. 장군이 마을에 도착하자 사람들은 열열히 환영했으나 어니스트가 보기엔 큰바위얼굴과 닮지 않았다. 큰바위얼굴을 올려다보니 “걱정마라. 앞으로 다른 사람이 나타날 것이다”라고 바위가 말했다.

또 몇 년이 흘러갔다. 어니스트는 여전히 열심히 일을 하고 이웃에게 친절을 베푸는 좋은 사람으로 성장했다. 장군은 늘 좋은 말을 많이 했지만 마을은 전과 다를 바가 없었다. 장군이 그들이 기다리던 사람이 아니라고 깨달은 마을 사람들은 다시 유창하고 확신에 찬 연설로 유명한 이 마을 출신 정치가를 주목했다.

그의 지지자들은 그가 곧 대통령에 출마할 것이라고 말했다. 마을 사람들은 그가 큰바위얼굴을 닮았다고 생각했다. 그가 화려한 마차를 타고 고향을 찾은 날 모두들 그를 보러 몰려 나왔다. 어니스트가 보기에도 큰바위얼굴을 닮은 것 같았는데 뭔지 모르게 바위 위에 비춰지는 고결함과 위엄이 보이지 않았다. 큰바위얼굴을 올려다보니 “어니스트, 내가 너보다 더 간절히 기다리고 있다. 낙심하지 말고 기다려라. 그 사람은 꼭 올거다”라고 말했다.

세월이 점점 흘렀다. 어니스트도 머리가 하얗게 세고 이마엔 주름살이 늘어갔다. 그러는 사이 큰바위얼굴을 수시로 응시하면서 명상에 잠기던 그를 좋아하는 마을 사람들이 점점 늘어났다. 그의 말에는 공부를 많이 한 사람들의 말과는 다른 농익은 지혜가 담겨있다는 소문이 퍼졌다.

어느날 저녁, 하루 일을 마친 어니스트는 이 골짜기 출신으로 유명해진 시인의 시집을 읽다가 시의 아름다움에 취해서 바위를 올려다보며 “위대한 나의 친구여, 이만한 사람이면 당신을 닮은 사람이 아닌가요?” 라고 말하자, 바위가 빙그레 웃는 것 같았다. 그런데 그 시인이 자기 고향마을에 어니스트라는 현인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를 만나려고 찾아왔다. 시인은 자기를 알리지 않고 어니스트를 찾아가 하룻밤 재워줄 수 있느냐고 묻자 어니스트가 기꺼이 맞아주었다.

두 사람의 이야기는 고담준론이 되어 이어졌다. 마침내 어니스트가 “당신은 누구냐?”고 묻자 시인은 시집을 가리키며 자기가 그 시를 쓴 사람이라고 말했다. 깜짝 놀란 어니스트는 시인을 유심히 바라보다가 큰바위얼굴을 올려다 보았다. 닮은 얼굴이 아니어서 어니스트는 실망했다. 시인이 왜 갑자기 슬픈 얼굴을 하냐고 묻자 어니스트가 이 마을의 전설을 들려주며 자기는 그의 시를 읽고 나서 이 시인이야말로 큰바위얼굴을 닮은 사람일 거라고 생각했다고 대답했다. 시인은 자기는 그럴만한 자격이 없으며, 자기의 시만큼 자기의 삶이 아름답지는 못하다고 말했다.

해질녘에 두 사람은 어니스트가 매일 산책하면서 마을 사람들을 만나는 길을 같이 걸었다. 그런데 시인은 어니스트가 동네 공터에서 마을사람들에게 하는 이야기를 듣고, 어니스트의 존재와 성품이 자기가 쓴 어떤 뛰어난 시보다 더 위대한 시라고 느꼈다.

시인의 가슴에 커다란 감동이 일어났다. 그때 큰바위얼굴을 올려다보자 큰바위얼굴을 휘감고 있는 안개가 어니스트 이마 위의 흰머리를 닮았다. 또 어니스트의 인자한 얼굴이 큰바위얼굴의 인자함을 닮았다. 그 순간 시인은 목청을 높이며 “보세요! 보세요! 어니스트가 바로 큰바위얼굴을 닮았어요” 동네 사람들도 모두 동의하며 이 마을의 전설이 드디어 이루졌다고 외쳤다. 시인과 함께 집으로 돌아오면서 어니스트는 언젠가 자기보다 훨씬 훌륭하고 큰바위얼굴을 닮은 사람이 나타나기를 기원했다.

 

김정일

은행 지점장 퇴직 후, 뭐라도 배우고 나누자는 취지로 설립한 ‘뭐라도학교’ 초대교장으로 3년간 활동하다 지금은 강원도 원주에서 10년째 소나무와 씨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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