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박스

[‘살아있는 권력’에 맞서는 세계 검찰들 上] ‘록히드 뇌물 사건’ 혐의로 다나카 가쿠에이 전 총리 구속시킨 日 검찰의 뚝심 승부

↑ ‘비밀해제 : 록히드 사건’ 책 표지(출처 암파서점)

 

by 김지지

 

日 검찰, ‘살아있는 권력’과의 외로운 싸움

윤석열 검찰총장으로 대표되는 검찰과 문재인 정부 간의 전투가 치열하다. 문재인 정부가 가용할 수 있는 모든 권력을 동원해 윤 총장의 검찰을 압박하고 있으나 법과 원칙과 국민을 내세우며 이에 맞서는 윤 총장의 기세도 대단하다.

외국의 경우 검찰이 ‘살아있는 권력’을 상대로 칼을 들이댄 사례는 1976년 일본의 ‘록히드 뇌물 사건’, 1992년 이탈리아의 피에트로 검사가 불을 붙인 부패추방운동 ‘마니 풀리테’(mani pulite·깨끗한 손)가 대표적이다. 닉슨 대통령을 물러나게 한 미국의 워터게이트 사건도 같은 사례가 아니냐는 의견이 있을 수 있으나 워터게이트 사건은 검찰이 선봉에 섰다기보다 미 의회 청문회가 주도한 것이므로 사정이 다소 다르다.

일본의 ‘록히드 뇌물 사건’에서는 일본 검찰이 비록 총리에서 물러났지만 배후에서 집권당을 좌지우지하던 ‘살아있는 권력’ 다나카 가쿠에이 전 총리를 구속해 유죄 판결을 끌어냈다. 그 과정을 복기해보면 일본 검찰이 현재 우리 검찰에 비해 훨씬 유리한 여건에서 권력 핵심에 칼을 들이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국민과 언론이 적극 지원하고 다나카와 같은 자민당 내에서도 일부 정치인이 힘을 실어주었기 때문에 외로운 싸움은 아니었다. 반면 윤석열 총장은 수족이 잘려나가는 고립무원 상태에서 사실상 홀로 집권세력과 진검 승부를 벌이고 있다. 일본의 ‘록히드 뇌물 사건’을 복기해본다.

2019년 7월 문재인 대통령이 윤석열 신임 검찰총장에게 임명장을 수여할 때 모습 (출처 청와대)
미국에서 밝혀진 ‘록히드 뇌물 사건’

1976년 2월 4일, 미 상원 외교위원회 다국적기업소위원회가 충격적인 발표를 했다. 미국 록히드사가 자사 여객기 ‘트라이스타-L1011’(이하 트라이스타)의 해외 판촉을 위해 일본, 서독, 이탈리아, 터키, 스위스, 이란, 인도네시아, 필리핀 등 12개국에 1968년부터 1975년 사이 총 1540만 달러의 뇌물을 건넸다고 발표한 것이다.

프랭크 처치 위원장은 146페이지에 달하는 록히드사 관계 서류를 공개하면서 특히 일본의 정계와 재계의 거물급 브로커에게 708만 달러를 제공하고 마루베니 상사에도 329만 달러 등 총 1256만 달러를 일본에 뿌렸다고 밝혔다. 일본 사회를 경악케 한 이른바 ‘록히드 뇌물 사건’은 이렇게 세상에 알려졌다. 사건은 1975년 미국 증권거래위원회가 리처드 닉슨 전 대통령의 부정 선거자금 의혹을 캐기 위해 주요 기업들의 해외계좌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록히드사가 조성한 거액의 비자금이 각국 정치인들의 계좌로 흘러간 사실이 포착되면서 불거졌다.

 

록히드의 로비 행태

‘트라이스타’는 록히드가 1960년대에 개발한 당시로서는 최첨단의 대형 제트 여객기였다. 문제는 당시 록히드사가 군용기 분야에서는 선두 주자였지만 민간 항공기 분야에서는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었다. 당시 민간 여객기 시장의 선두 기종은 보잉의 747이나 맥도널 더글러스의 DC-10기였다. 록히드는 후발 주자의 핸디캡을 극복하기 위해 불법과 탈법적 수단을 동원했다. 그중 대표적인 수단은 각국 정부와 정치인들을 상대로 벌인 뇌물 로비였다.

트라이스타 L-1011 기 (출처 위키피디아)

 

록히드가 타깃으로 삼은 일본 항공사는 이미 더글러스사의 DC-10을 도입하기로 결정한 ‘전일본공수(ANA)’였다. 록히드의 은밀한 로비는 1971년 2월 운수성 장관이 “전일본공수의 대형 여객기 도입은 1974년 이후로 미루는 것이 좋겠다”라고 발언하고, 1972년 9월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열린 미일 정상회담에서 닉슨 미국 대통령이 당시 일본 총리 다나카 가쿠에이에게 트라이스타의 발주를 요청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당시 록히드사의 공장은 닉슨의 정치적 기반인 캘리포니아에 있었다.

머지않아 전일본공수(ANA)가 DC-10 도입을 취소하더니 트라이스타를 발주하기로 했고 이에 따라 1974년 1월 트라이스타가 전일본공수(ANA)에 납품되어 다음달 운항을 시작했다. 당시 트라이스타의 발주는 느닷없는 일이긴 했지만 ‘록히드 스캔들’로까지 비화하지는 않았다.

 

‘다나카 가쿠에이 연구─그 금맥과 인맥’ 제목의 장문 폭로기사

그런데 록히드 뇌물 사건과는 별개로 주간지인 ‘문예춘추’지가 1974년 10월 9일 발매한 11월호에 ‘다나카 가쿠에이 연구─그 금맥과 인맥’ 제목의 장문 기사로 다나카의 치부를 까발려 일본 사회를 충격에 빠뜨렸다. 문예춘추지는 다나카의 가족 기업이 매입한 땅에 건설성이 공사를 시작하면서 땅값이 수십 배 급등하는 등 다방면에서 부당 이익을 취한 사실을 폭로했다. 국회와 언론에서도 자금 출처를 집중 추궁하자 다나카는 사면초가에 빠져 결국 1974년 12월 9일 총리에서 사임하고 내각은 총사퇴했다.

‘다나카 가쿠에이 연구─그 금맥과 인맥’ 기사가 게재된 ‘문예춘추’지가 1974년 11월호

 

그런데 그로부터 1년 2개월이 지난 1976년 2월, 미 상원 외교위원회 다국적기업소위원회에서 ‘록히드 스캔들’이 터져나와 일본 열도는 또다시 충격에 휩싸였다. 무엇보다 뇌물 액수가 컸다. 구린 돈을 받은 12개국의 뇌물 총액 1540만 달러 가운데 일본에 간 돈이 1256만 달러였다. 여론은 1년 2개월 전, 다나카 총리가 금맥 스캔들로 퇴진한 뒤여서 다나카에게 의혹의 눈길을 보냈다. 사실 다나카는 “정치는 수(數), 수는 힘, 힘은 돈”이란 어록이 있을만큼 대놓고 부패한 정치가였다. 여론은 점차 진상 규명을 요구하는 목소리로 들끓었다.

그러나 이런 격앙된 목소리에도 사건 처리는 간단치 않아 보였다. 구조적이고 국제적인 스캔들인데다 미일 정상회담에서 닉슨 대통령의 요청을 다나카 총리가 수용한 것이 정상 간 거래라는 정치외교적 측면이 강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사건의 당사자인 다나카 전 총리가 여전히 권력의 최고 실세였다는 점이었다.

다행히 여론과 언론 그리고 일부 정치인이 검찰에 힘을 실어주었다. 정계에선 ‘클린 미키’ 이미지를 내세우고 있는 미키 다케오 총리가 여론을 등에 업고 엄정 수사를 다짐하면서 검찰의 방패막이 역할을 해주었다. 미키 총리는 미국의 포드 대통령에게도 친서로 관련 자료를 요청해 미국의 자료를 입수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집권당인 자민당의 소장파 중 일부 의원도 당의 결단을 요구하면서 당을 탈당하는 것으로 다나카를 압박했다.

미키 다케오 총리
다나카 가쿠에이(田中角榮)는 입지전적인 인물

다나카 가쿠에이(田中角榮·1918~1993)는 니가타현의 빈촌 출신에 중학교 과정에 해당하는 ‘고등소학교’ 졸업이 학력의 전부인데도 총리까지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그는 건설 공사장을 전전하다가 19세 때 건축사무소를 세워 독립한 후 특유의 근면함과 돈의 흐름을 잘 읽어 부를 거머쥐었다.

젊은 시절의 다나카

 

1947년 29세에 니가타에서 중의원 의원에 처음 당선되었고 전문지식을 살려 30여 개 법안을 입법했다. 그가 입법한 공영주택법과 도로법 등은 대부분 생활 인프라 정비와 국토 개발에 관한 것이었다. 이후에는 거물 정치인들과의 역학관계를 십분 활용해 자민당 본류에 진입했다. 1957년 우정성 장관으로 최연소 입각하고 대장성 장관, 통산성 장관, 자민당 간사장 등의 요직을 역임했다. 대장성 장관 취임 때는 “나는 무학이고 여러분은 수재들이니 마음껏 일해 달라. 책임은 내가 진다”는 말로 관료들을 감동시켰다. 정책을 놓고 의회에서 논쟁이 벌어질 때면 공사판에서 일하던 경험을 언급하며 “당신들은 땀을 쏟아 가며 지게차를 밀어 본 경험이 있느냐”고 논박했다.

총리가 되기 전인 1972년 6월에는 전국이 고루 잘살려면 인구 25만 명 내외인 신도시를 건설해야 한다는 이른바 ‘일본 열도 개조론’을 출간해 박수와 갈채를 받았다. 그리고 1972년 7월 5일 자민당 총재로 당선되어 다음날 제1차 다나카 내각을 발족시켜 전후 최연소 총리로 취임했다.

다나카가 집필-출간한 ‘일본 열도 개조론’

 

이후 다나카 총리는 중국과의 관계를 정상화하고 일본 열도 개조론을 구체화했다. 외교적으로는 1972년 9월 중국을 방문, 저우언라이·마오쩌둥과 회담을 갖고 일·중 간 국교를 수립하는 공동 성명을 발표했다. 일본 열도 개조론에 따라 도시와 지방 간 격차 해소를 위해서는 고속철 신칸센과 공항·도로를 확충했다. 그가 ‘70세 이상 의료비 무료’ 정책을 도입한 1973년은 오늘날 일본 사회복지의 ‘원년’으로 평가받고 있다. 다나카는 특히 ‘서민 총리’로 인기를 끌었다. ‘인간 불도저’ ‘원맨’ 등의 별명으로 불릴 만큼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해 국민들을 단결시켰다.

중국 저우언라이 총리(오른쪽)와 회담(1972년 9월 25일)

 

그러나 일본 열도 개조론은 제대로 시행이 되기도 전에 부동산 투기라는 역풍을 맞았다. 게다가 경기 진작을 위해 통화량 공급을 무제한으로 늘리고 오일 쇼크까지 겹쳐 상상을 초월한 인플레이션에 시달렸다. 결국 ‘광란 물가’로 인기는 곤두박칠쳤다. 그러던 차에 ‘문예춘추’지 1974년 11월호에 장문의 폭로기사가 실린 것이다. 다나카는 총리에서 물러난 뒤에도 집권당인 자민당을 쥐락펴락하는 살아 있는 권력으로 군림했다.

 

도쿄지검 특수부

다나카를 상대한 곳은 도쿄지검 특수부였다. 도쿄지검은 경찰청, 국세청 등과 합동 수사에 나서고 미 검찰, 연방증권거래위원회 등과는 사법공조를 통해 증거 확보에 나섰다. 검사들은 관광객으로 위장한 채 미국으로 건너가 미국이 갖고 있는 관련 서류를 넘겨받았다. 후세 다케시 검사총장(우리의 검찰총장)은 “책임은 내가 진다”며 일선 검찰에게 힘을 실어주었고 특수부 주임검사는 “인간 다나카 하나 처리하지 못하느냐”며 검사들의 의분을 자극했다. 검사총장은 퇴임 후에도 재판을 맡고 있는 후배 검사들에게 “무죄가 나온다면 내가 책임진다. 자네들은 행여라도 사표를 낼 생각일랑 하지마라”며 격려했다.

후세 다케시 검사총장(왼쪽)과 다나카

 

권력 비리를 파헤치는데 관건은 뇌물을 건네준 록히드사 간부들의 증언이었다. 검찰은 태평양을 오가며 끈질기게 설득한 결과 뇌물수수에 관련된 록히드 부사장、일본지사장 등에게서 진술조서를 받아냄으로써 수사에 속도를 낼 수 있었다. 이렇게 검찰이 확보한 증거물에서 ‘kakuei tanaka(가쿠에이 다나카)’란 이름이 보이고 그래서 다나카에게 5억 엔의 로비 자금이 흘러들어간 사실이 확인되자 검찰 수뇌는 한편으로는 긴장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쾌재를 불렀다.

 

다나카 반발했으나 결국에는 구속돼

다나카도 가만히 있을 인물이 아니었다. 상황이 불리하게 전개되자 자민당 내 자신의 파벌을 적극 동원했다. 당시 다나카는 100여 명의 의원이 소속된 ‘다나카파’를 이끌며 ‘야미쇼군(暗將軍·막후 실력자)’ 소리를 들을 정도로 여전히 막강한 권력을 쥐고 있었다. 다나카파 의원들은 “록히드 사건 수사가 미키 정권의 표적수사”라고 주장하며 자민당 내에서 소수파인 미키 다케오 총리를 끌어내릴 궁리를 했다. 다나카는 다른 계파들까지 합쳐 1976년 5월 미키 총리의 해임안에 합의했다.

그래도 도쿄지검 특수부는 1976년 6월 마루베니사의 임원진을 구속하고 7월 27일 마침내 다나카를 체포해 당일 구속했다. 다나카가 총리로 재직 중이던 1972년 전일본공수(ANA)가 록히드 비행기를 선정·구입토록 운수장관에게 지시하고 성공 보수로 4차례에 걸쳐 현금 5억 엔을 받았다는 혐의였다. 총리 재임 시절 저지른 범죄로 구속된 것은 전·현직을 막론하고 일본 역사상 다나카가 처음이었다.

다나카 체포 사실을 보도한 신문 지면

 

도쿄지검 수사팀은 혹여라도 다나카에게 정보가 들어가는 것을 차단하기 위해 체포 전날에야 법무장관에게 보고했다. 도쿄지검 특수부장이 다나카를 기소하며 밝힌 “오직 증거를 따라 여기까지 왔을 뿐”이라는 한마디는 아직도 일본 사회에서 널리 칭송되고 있다. “설마 최고권력자를 구속할 수 있을까”라고 반신반의하던 일본 국민은 놀라움에 빠졌다.

검찰은 다나카 비서관, 전 운수성 장·차관도 차례로 구속·기소했다. 뇌물 수수를 중개한 전후 우익의 거두이자 일본 금권정치의 상징적 인물인 고다마 요시오는 물론 기업 관계자들도 위증죄와 탈세 등의 혐의로 구속했다.

다나카의 구속이 가능했던 것은 국민과 여론의 강력한 감시기능 덕이었다. 일본 국민은 정치를 썩게 하는 오직사건을 결단코 용납하지 않았고 정치인의 검찰수사 방해 행위를 용서하지 않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가지고 있었다. 그 덕분에 법무장관이든 자민당 유력의원이든 언론과 인터뷰에서 “검찰수사에 일절 관여않겠다. 수사에 대한 문의도 하지 않겠다”고 거듭거듭 약속할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재판 중 정치 압력은 일절 없었다.

 

다나카는 역시 다나카, 구속 20일만에 보석으로 석방

다나카는 역시 다나카였다. 구속된 지 20일 만에 보석금을 내고 석방되었고 자민당을 탈당해 무소속인데도 자민당 내 다나카파 보스로 총리 이상의 실권을 행사했다. 1976년 12월의 중의원 총선거에서도 전국 최다득표로 당선되어 의원직을 유지하는데 성공했다. 반면 미키 총리는 중의원 총선거에서 록히드 사건의 여파로 자민당이 8석을 잃는 등 사실상 패배하자 책임을 지고 총리직에서 물러났다.

다나카는 이후 진행된 장기간의 재판 중에도 정계를 은퇴하는 1990년까지 연거푸 5번이나 그것도 늘 전국 최고 득표율로 당선되는 놀라운 득표력을 과시했다. 다나카는 직접 전면에 나서지는 않았으나 당을 좌지우지하며 배후 실력자로 활동했다. 다나카 이후 총리를 역임한 오히라 마사요시, 스즈키 젠코, 나카소네 야스히로 전 총리도 모두 다나카의 지지에 힘입어 총리직에 오른 인물이고 조각에서도 언제나 다나카파 인물들이 최다수여서 다나카는 사실상 ‘킹 메이커’ 역할을 했다.

다나카 가쿠에이

 

최고재판소, 다나카 사후 유죄 확정

1977년 1월 시작된 재판 결과, 다나카는 1983년 10월 12일 징역 4년에 추징금 5억 엔을 선고받았다. 재판부는 판결에서 “총리의 범죄가 사회에 미친 병리는 측량할 길이 없다”고 밝혔다. 이처럼 유죄 선고를 받고 일본 국민의 원성을 샀는데도 다나카는 1983년 12월 중의원 총선에서 46,6%라는 압도적인 표를 얻어 당당히 당선되었다. 1986년 중의원 선거에서는 뇌경색으로 쓰러져 선거운동을 하지 못했는데도 또다시 전국 최다득표로 당선되었다. 이처럼 고향 니가타에서 다나카를 압도적으로 지지한 것은 다나카가 상대적으로 낙후되고 소외된 니가타에 막대한 투자를 했기 때문이다.

다나카는 1987년 7월 고등법원에서 항소가 기각되자 최고재판소(대법원)에 항소했다. 그러다가 뇌경색으로 건강이 좋지 않아 재판이 진행 중이던 1990년 1월 정계를 은퇴함으로써 43년 동안 16번이나 지역구 중의원으로 활동했던 파란만장한 정치인생을 마감했다. 다나카는 1993년 딸 다나카 마키코에게 자신의 지역구를 물려주고 당선시킨 뒤 그해 12월 16일, 75세 나이로 사망했다. 2대에 걸친 다나카 부녀의 니가타 지역구 장기 집권은 마키코가 2012년 12월 중의원 총선에서 낙선하면서 막을 내렸다. 두 부녀의 의원 재임기간을 합치면 62년이나 되었다.

딸 다나카 마키코

 

재판은 다나카 사후에도 계속 이어졌다. 1995년 2월 최고재판소(대법원)가 원심을 확정함으로써 다나카는 유죄가 확정되었고 사건은 19년 만에 종결되었다. 그동안 16명의 피고인 중 다나카를 포함 13명은 이미 저 세상 사람이어서 김빠진 맥주가 되어 버렸으나 그를 구속한 도쿄지검 특수부는 일본인이 가장 신뢰하는 기관으로 각광받았다.

 

사후 평가는 ‘일본인이 가장 좋아라는 리더’

이처럼 다나카는 총리 재임기간이 2년 5개월여에 그치고 록히드 뇌물 사건으로 유죄를 선고받고도 이후 각종 여론조사에서 일본 국민이 가장 좋아하는 리더로 꼽히고 있다. 이를 뒷받침하는 몇몇의 여론조사가 있다.

2000년 ‘가장 좋아하는 과거 1000년 동안의 정치 리더가 누구냐’는 아사히신문의 설문조사에서는 20세기 인물 중 유일하게 선정되어 전체 4위에 오르고, 2005년 요미우리신문이 종전 60년을 기념해 ‘일본 국가발전에 가장 기여한 사람을 꼽으라’는 설문에서는 놀랍게도 1위에 뽑혔다.

2009년 “쇼와(1926~1989) 시대를 생각하면 누가 떠오르는가”라는 아사히신문의 질문에도 쇼와 천황에 이어 2위에 선정되고 2015년 NHK가 종전 70주년을 맞아 실시한 ‘패전 이후를 상징하는 인물’ 설문조사에서는 25%의 지지를 얻어 요시다 시게루 전 총리(13%), 쇼와 일왕(8%) 등을 멀찌감치 따돌리며 1위에 올랐다.

2016년 일본 서점에 깔려있는 다나카 관련 책들. 다나카의 인기를 반영하고 있다.

 

이런 평가에 대해, 국내외 어려운 여건 속에서 강력한 리더십과 결단력을 바탕으로 일본 사회를 안정시키고 ‘일본 열도 개조론’을 내세워 고도 성장기를 이끌었던 다나카에 대해 향수를 느끼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많다. 물론 ‘다나카=고도성장’ 이미지는 허상에 가깝다는 반론도 적지 않다. 실제로 다나카가 총리에 오른 1972년은 일본 경제가 저성장에 진입한 때였다. 그가 물러난 1974년은 석유위기까지 겹쳤다. 그래서 “인기 영합의 분배주의 정치로 나라 살림을 골병들게 한 원조”란 비판론도 적지 않다.

그럼에도 국민이 고도성장을 믿는 것은 그가 ‘일본 열도 개조’란 슬로건을 내걸고 성장의 결실을 본격적으로 분배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사람 냄새 풀풀 나고, 국민에게 꿈을 심어준 정치인이라는 분석도 있다. 국회의원직 세습이 난무하고, 선이 굵은 정치인이 줄어드는 상황에서 가난하고 학력도 별 볼일 없는데도 총리까지 오른 ‘흙수저 이력’, “책임은 내가 진다”며 도쿄대 출신 관료들을 휘어잡았던 카리스마 등이 관심을 모으고 있다는 분석도 있다.

 

도쿄지검 특수부, 명성과 권위 인정받아

록히드 뇌물 사건의 철저한 수사로 도쿄지검 특수부는 일본 국민들이 가장 신뢰하는 국가기관으로 부상했다. 세계적으로도 ‘성역을 모르는 검찰’ ‘정치적 중립을 견지하는 검찰’로 명성과 권위를 인정받았다.

‘살아있는 권력’과 싸웠는데도 뒤탈도 없었다. 당시 도쿄지검 특수부 부부장으로 다나카의 록히드 스캔들을 총지휘한 검사는 요시나가 유스케였는데 그는 좌천은커녕 1993년 12월 검사총장으로 영전했다. 요시나가 아래서 록히드 스캔들을 담당했던 검사들도 정치권의 공격을 받지 않았다.

최고검찰청, 도쿄고등검찰청, 도쿄지방검찰청이 있는 일본 검찰청 건물

 

도쿄지검은 이후에도 살아있는 현직 총리를 향해 칼을 들이대 아예 정권 자체를 붕괴시킨 적도 있다. 1980년대 후반 정보산업 회사인 리크루트가 자회사의 비상장 주식을 상장 직전에 정치권 인사들에게 양도한 사실이 드러났는데 이는 당시 일본 정치권에서는 관행 같은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도쿄지검 특수부는 사건을 파고들어 다케시타 노보루 당시 총리는 물론 나카소네 야스히로 전 총리, 아베 신타로 자민당 간사장 등 거물급 정치인이 다수 연루된 것을 밝혀내 거대한 게이트로 비화시켰다. 다케시타 총리는 사건에 대한 책임을 지고 총리직을 사임하고 나카소네 전 총리는 탈당했다. 이 때문에 “일본의 정치자금은 리크루트 사건 전과 후로 나뉜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정치자금 문화가 바뀌었다.

도쿄지검 특수부는 2010년대 들어 정치인 비위 관련 수사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고 현역 정치인을 구속하지 않아 명성이 서서히 떨어지고 신뢰가 위기에 봉착하긴 했으나 다행히 2019년 12월 현역 중의원을 체포하면서 일본 정치 스캔들의 중심부로 뛰어들어 또다시 국민의 조명과 관심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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