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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있는 권력’에 맞섰던 검찰들 3-①] ‘록히드 뇌물 사건’ 혐의로 다나카 가쿠에이 전 총리 구속시킨 日 검찰의 뚝심 승부

↑ ‘비밀해제 : 록히드 사건’ 책 표지(출처 암파서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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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지지

 

미국에서 먼저 밝혀진 ‘록히드 뇌물 사건’

일본의 ‘록히드 뇌물 사건’이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것은 총리에서 물러난 뒤에도 배후에서 집권당을 좌지우지하던 ‘살아있는 권력’ 다나카 가쿠에이 전 총리를 일본 검찰이 구속하고 유죄 판결을 끌어냈기 때문이다. 다만 당시 일본 검찰은 국민과 언론이 전폭 지원하고 다나카 전 총리가 속해있는 자민당 내에서도 일부 정치인이 검찰에 힘을 실어주어 외로운 싸움은 아니었다.

1976년 2월 4일, 미 상원 외교위원회 다국적기업 소위원회가 충격적인 발표를 했다. 미국 록히드사가 자사 여객기 ‘트라이스타-L1011’(이하 트라이스타)의 해외 판촉을 위해 일본, 서독, 이탈리아, 터키, 스위스, 이란, 인도네시아, 필리핀 등 12개국에 1968년부터 1975년 사이 총 1,540만 달러의 뇌물을 건넸다고 발표한 것이다. 프랭크 처치 위원장은 146페이지에 달하는 록히드사 관련 서류를 공개하면서 록히드가 특히 일본의 정계와 재계의 거물급 브로커에게 708만 달러를 제공하고 마루베니 상사에도 329만 달러 등 총 1256만 달러를 일본에 뿌렸다고 밝혔다. 일본 사회를 경악게 한 이른바 ‘록히드 뇌물 사건’은 이렇게 세상에 알려졌다.

사건은 1975년 미국 증권거래위원회가 리처드 닉슨 전 대통령의 부정 선거자금 의혹을 캐기 위해 주요 기업들의 해외계좌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록히드사가 조성한 거액의 비자금이 각국 정치인들의 계좌로 흘러간 사실이 포착되면서 불거졌다. ‘트라이스타’는 록히드가 1960년대에 개발한 최첨단의 대형 제트 여객기였다. 문제는 당시 록히드사가 군용기 분야에서는 선두 주자였지만 민간 항공기 분야에서는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었다. 당시 민간 여객기 시장의 선두 기종은 보잉의 747이나 맥도널 더글러스의 DC-10기였다. 록히드는 후발 주자의 핸디캡을 극복하기 위해 불법과 탈법적 수단을 가리지 않았다. 그중 대표적인 수단이 각국 정부와 정치인들을 상대로 벌인 뇌물 로비였다.

‘트라이스타’는 록히드가 1960년대에 개발한 당시로서는 최첨단의 대형 제트 여객기였다. 문제는 당시 록히드사가 군용기 분야에서는 선두 주자였지만 민간 항공기 분야에서는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었다. 당시 민간 여객기 시장의 선두 기종은 보잉의 747이나 맥도널 더글러스의 DC-10기였다. 록히드는 후발 주자의 핸디캡을 극복하기 위해 불법과 탈법적 수단을 동원했다. 그중 대표적인 수단은 각국 정부와 정치인들을 상대로 벌인 뇌물 로비였다.

록히드가 타깃으로 삼은 일본 항공사는 이미 더글러스사의 DC-10을 도입하기로 결정한 ‘전일본공수(ANA)’였다. 록히드의 은밀한 로비는 1971년 2월 운수성 장관이 “전일본공수의 대형 여객기 도입은 1974년 이후로 미루는 것이 좋겠다”라고 발언하고, 1972년 9월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열린 미일 정상회담에서 닉슨 미국 대통령이 당시 일본 총리 다나카 가쿠에이에게 트라이스타의 발주를 요청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당시 록히드사의 공장은 닉슨의 정치적 기반인 캘리포니아에 있었다. 머지않아 전일본공수(ANA)가 DC-10 도입을 취소하더니 트라이스타를 발주하기로 했고 이에 따라 1974년 1월 트라이스타가 전일본공수(ANA)에 납품되어 다음달 운항을 시작했다. 당시 트라이스타의 발주는 느닷없는 일이긴 했지만 ‘록히드 스캔들’로까지 비화하지는 않았다.

 

‘다나카 가쿠에이 연구─그 금맥과 인맥’ 제목의 장문 폭로기사

그런데 록히드 뇌물 사건과는 별개로 주간지인 ‘문예춘추’지가 1974년 10월 9일 발매한 11월호에 ‘다나카 가쿠에이 연구─그 금맥과 인맥’ 제목의 장문 기사로 다나카의 치부를 까발려 일본 사회를 충격에 빠뜨렸다. 문예춘추지는 다나카의 가족 기업이 매입한 땅에 건설성이 공사를 시작하면서 땅값이 수십 배 급등하는 등 다방면에서 부당 이익을 취한 사실을 폭로했다. 국회와 언론에서도 자금 출처를 집중 추궁하자 다나카는 사면초가에 빠져 결국 1974년 12월 9일 총리에서 사임하고 내각은 총사퇴했다.

그런데 그로부터 1년 2개월이 지난 1976년 2월, 미 상원 외교위원회 다국적기업소위원회에서 ‘록히드 스캔들’이 터져나와 일본 열도는 또다시 충격에 휩싸였다. 무엇보다 뇌물 액수가 컸다. 구린 돈을 받은 12개국의 뇌물 총액 1540만 달러 가운데 일본에 간 돈이 1256만 달러였다. 여론은 1년 2개월 전, 다나카 총리가 금맥 스캔들로 퇴진한 뒤여서 다나카에게 의혹의 눈길을 보냈다. 사실 다나카는 “정치는 수(數), 수는 힘, 힘은 돈”이란 어록이 있을만큼 대놓고 부패한 정치가였다. 여론은 점차 진상 규명을 요구하는 목소리로 들끓었다.

그러나 이런 격앙된 목소리에도 사건 처리는 간단치 않아 보였다. 구조적이고 국제적인 스캔들인데다 미일 정상회담에서 닉슨 대통령의 요청을 다나카 총리가 수용한 것이 정상 간 거래라는 정치외교적 측면이 강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사건의 당사자인 다나카 전 총리가 여전히 권력의 최고 실세였다는 점이었다. 다행히 여론과 언론 그리고 일부 정치인이 검찰에 힘을 실어주었다. 정계에선 ‘클린 미키’ 이미지를 내세우고 있는 미키 다케오 총리가 여론을 등에 업고 엄정 수사를 다짐하면서 검찰의 방패막이 역할을 해주었다. 미키 총리는 미국의 포드 대통령에게도 친서로 관련 자료를 요청해 미국의 자료를 입수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집권당인 자민당의 소장파 중 일부 의원도 당의 결단을 요구하면서 당을 탈당하는 것으로 다나카를 압박했다.

 

#다나카가쿠에이 #검찰 #일본 #록히드뇌물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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