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박스

[연인과 부부 ③-5] 일제 하에서 공산 혁명을 꿈 꾼 세 남자·세 여자의 사랑과 이별과 배신, 투쟁과 고난 이야기 : 박헌영·김단야·임원근·허정숙·주세죽·고명자를 중심으로 / 6-⑤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초기 내각 구성원들. 제1열 왼쪽부터 정준택(국가계획위원장), 김책(부수상 겸 산업상), 홍명희(부수상), 김일성(수상), 박헌영(부수상 겸 외무상), 최용건(민족보위상), 허정숙(문화선전상), 제2열 왼쪽부터 이영남(보건상), 김원봉(국가검열상), 백남운(교육상), 주녕하(교통상), 장시후(상업상), 최창익(재정상), 박일후(내무상), 제3열 왼쪽부터 박문규(농업상), 이극로(무임소상), 이용(도시행정상), 김정주(체신상), 이승엽(사법상), 최성택(노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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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지지

 

■세 남자·세 여자의 해방 후 행적 

▲박헌영

해방이 되자 박헌영은 바로 전라도 광주를 떠나 서울로 상경했다. 9월 8일 서울에서 개최된 공산당열성자대회에 처음 공개적으로 나타난 후 조선공산당 재건에 착수했다. 박헌영은 딸 비비안나가 살아있다는 소식을 전해듣고 1946년 4월 모스크바에 거주하는 딸에게 편지와 사진을 보내 안부를 물었다. 스탈린을 만나기 위해 1946년 7월 김일성과 함께 조선공산당 대표단의 일원으로 모스크바로 갔을 때는 14년 만에 딸을 만나 눈물로 정을 나누었다. 그러나 13년 전 일본 경찰에 체포되면서 상해에서 헤어진 후 소식을 알지 못하는 주세죽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박헌영이 1949년 8월 모스크바에 있던 딸 박비비안나(당시 21세, 왼쪽)를 평양으로 불러, 새 부인 윤레나(당시 25세)와 함께 찍은 사진. 박비비안나는 한달간 북한에 머물렀다.

 

박헌영은 남한에서 북한을 수시로 드나들다가 미군정이 1946년 9월 체포령을 내리자 월북길에 올라 1946년 10월 평양에 도착했다. 북한에서는 1948년 1월 황해도 해주에 강동정치학원을 창설, 자신의 정치적 보루로 삼았고 1948년 9월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가 수립되었을 때는 부수상 겸 외무상에 선임되었다. 김일성에 이어 북한의 2인자였으나 사실상 모든 권력은 이미 김일성의 손으로 넘어간 뒤였다.

박헌영은 1949년 9월, 자신의 여비서인 윤레나(한국명 윤옥)와 평양에서 재혼했다. 당시 박헌영은 49살이었고 윤옥은 25살이었다. 곧 둘 사이에 딸과 아들이 태어났다.

 

▲허정숙과 최창익

일제가 패망한 후 최창익과 허정숙이 중국 땅에서 동고동락해온 조선독립동맹 대원들과 함께 화북지방에서 귀국길에 오른 것은 1945년 9월 초였다. 연안서 압록강까지는 5000리길이었으니 도보 행군으로 두 달은 족히 걸릴 거리였다. 대열이 마을을 지날 때마다 조선인들이 끼어들어 1000명으로 출발한 행렬은 계속 늘어났다. 그들은 풍찬노숙을 하며 압록강변에까지 다다랐으나 강을 건널 수는 없었다. 이미 소련의 북한주둔군 사령관이 “소련의 붉은군대 외에는 어떤 무장 세력의 입국도 허용하지 않는다”고 공포했기 때문이다. 결국 조선독립동맹 지도부는 조국 땅을 밟으면서 무장해제 당하는 수모를 겪었다. 김구와 대한광복군이 개인 자격으로 남한에 입국한 것과 같은 상황이었다. 북한에서 ‘연안파’로 불린 그들은 화북조선독립동맹의 김두봉과 한빈 등을 중심으로 조선신민당을 결성, 정치 활동에 들어갔다. 그러나 허정숙 등 몇몇을 제외하고 김두봉, 최창익, 무정 등은 6·25 전쟁 중 혹은 6·25가 끝난 후 김일성에게 숙청을 당해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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