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박스

[연인과 부부 ③-1] 일제 하에서 공산 혁명을 꿈 꾼 세 남자·세 여자의 사랑과 이별, 투쟁과 고난 이야기 : 박헌영·김단야·임원근·허정숙·주세죽·고명자를 중심으로 / 6-①

 ↑ 위에서 오른쪽으로 박헌영 김단야 임원근, 아래에서 오른쪽으로 허정숙 주세죽 고명자

 

☞ [연인과 부부] 시리즈 전체가 궁금하다면 클릭!!

 

by 김지지

 

■1920년대 초반, 상해로 모여든 식민지 조선의 젊은이들

 

▲들어가며

1919년 4월 중국 상해에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그로부터 수년 사이 자의든 타의든 조국을 떠난 조선의 독립운동가들이 속속 상해로 몰려들었다. 당시 상해는 신사상과 신문화의 별천지였다. 동양이면서 서양이었고 중국이면서 유럽이었다.

상해는 풍운아·혁명가들의 집합소였다. 김구·안창호 등의 민족주의자들, 여운형·김규식 등 온건 사회주의자들, 이동휘 등 공산주의자들, 이회영·신채호 같은 아나키스트들이 즐비했다. 박헌영·김단야·임원근·허정숙·주세죽 등 20살 전후의 젊은이들도 그곳에서 자유와 해방의 공기를 만끽했다.

1920년대 상해

 

그들은 고향도 다르고 상해로 이주한 이유도 달랐지만 나이가 비슷하고 정치적 성향이 비슷했다. 해서 곧바로 단짝이 되어 우정과 애정과 이념으로 반죽되어 밤이고 낮이고 함께 어울렸다. 그중에서도 박헌영·김단야·임원근은 ‘삼인당(三人黨)’ ‘상해 트로이카’로 불리며 청년공산주의운동의 중심 역할을 했다. 박헌영과 허정숙은 국내에서 조선여자교육협회 일을 함께 해 구면이었다.

이들 청춘들은 가슴도 뜨거웠지만 몸도 뜨거워 수 년 안에 세 쌍의 부부로 탄생했다. 박헌영과 주세죽, 임원근과 허정숙, 김단야와 고명자 쌍이었다. 고명자는 당시 상해에는 없었지만 수년 후 서울에서 허정숙·주세죽과 만나 ‘여성 트로이카’로 활동했다. 공산 혁명을 꿈꾼 6명 청춘들이 역사의 수레바퀴 아래에서 어떻게 간난의 세월을 보내고, 그 과정에서 어떻게 사랑하고 이별하고 배신하고 투쟁했는지를 살펴본다. 먼저 그들이 상해로 가기 전의 삶을 알아본다.

 

▲김단야와 임원근

김단야는 1900년 경상북도 김천에서 중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 무렵 생년이라는 게 정확하지 않아 1899년, 1901년생 설도 있다. 뒤에 소개될 임원근과 박헌영의 생년도 1899년, 1900년, 1901년 등 자료마다 다르다. 그럼에도 3명의 생년이 1900년 동갑내기라는 글이 많아 이 글에서는 1900년으로 통일한다.

김단야는 1915년 대구 계성고보에 입학했으나 동맹휴학에 앞장섰다가 1916년 11월 퇴학당했다. 1917년 1월 일본 도쿄로 건너가 세이코쿠(正則) 영어학교에 다니다가 그해 9월 귀국 후 서울 배재고보에 입학했다. 1919년 3·1운동 때 고향에서 만세시위 주도로 체포되어 태형 90대를 맞고 피범벅이 되어 삼촌에게 업혀 나왔다. 이후 비밀결사인 적성단에서 활동하다가 경찰의 추적을 피해 1919년 12월 중국 상해로 망명했다.

이 대목에서 분명히 해야 할 것이 있다. 이하 글에서 세 남자 세 여자가 언제 상해에 도착하고 언제 무슨 단체에 가입했는지 시기가 명기되지만 사실 자료마다 제각각이어서 상해에서 활동한 단체나 학교의 가입 시기나 입학 시기가 정확치 않다는 점을 미리 밝혀둔다.

김단야는 중국 항주의 배정학교에 적을 두고 1921년 5월 창당한 고려공산당 이르쿠츠크파의 청년단체인 고려공산청년회(고려공청)에 가담, 집행위원과 책임비서로 활동했다. 그곳에서 만난 인물이 동갑내기 박헌영과 임원근이다. 이후 세 사람은 고려공산청년회와, 고려공산당 이르쿠츠크파에서 운영하는 사회주의연구소 등에서 함께 활동하며 동지애를 키워나갔다. 당시 상해에는 고려공산당 이름으로 이르쿠츠크파와 상해파가 대립하고 있었는데 상해파는 자생적 공산당 조직이고 이르쿠츠크파는 모스크바 코민테른(국제공산당)의 지시를 받는 조직이었다.

 

#박헌영 #김단야 #임원근 #허정숙 #주세죽 #고명자 #조선공산당 #조선공산당사건 #공산주의 #상해

 

☞ 전문(全文)을 다른 곳으로 옮겼습니다. 클릭!!

error: Content is protected !!